인터넷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역사를 자학사관이라고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보입니다. 그런 분들은 역사 교과서도 자학사관에 매몰되어 있기에 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지요. 이에 대한 제 견해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입니다. 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연구에 임해왔고 이런 연구는 교과서에 빠르게 반영되어 왔지요. 오래 전에 사대에 대한 포스팅을 한 일이 있으나 그때의 내용이 저 혼자만의 견해가 아니란 것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교과서가 딱히 자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게 아니란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 <술술 한국사>의 내용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이 책 저자 분은 현재도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계시고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대와 함께 꼭 알아야 하는 교린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사대교린 한반도에 조선이 세월질 무렵, 북쪽에는 명나라와 여진이, 바다 건너 남쪽에는 일본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건국 이후 조선은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국제 질서에 따라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한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추진했어요. ‘사대’란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으로, 작은 나라인 조선과 큰 나라인 명나라 사이에 맺어진 외교 방침이에요. 조선이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예물을 바치며 조공의 예를 갖추면, 명나라는 책봉(중국 왕조가 주변국과 이민족의 장을 임명해 그 지위와 정통성을 인정하는 일)으로서 조선 국왕의 지위를 인정하는 방식이었지요. 이는 본래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 제후들이 황제에게 행하던 예법이었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질서가 중국을 중심으로 확립되면서 중국의 예법이 자연스럽게 국제적으로 확대된 거예요. 이에 태조는 즉위 직후 명나라에 새로운 왕조를 승인해 줄 것과 조선, 화령 중 국호를 택일해 줄 것을 요청했어요. 이후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며 사대의 예를 행했어요. 연호란 임금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서는 주로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표방할 때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답니다. 조선은 해마다 동지, 새해, 그리고 명나라 황제와 황태자의 생일 이렇게 네 번에 걸쳐 정기적으로 사신과 선물을 보냈어요. 이 선물을 조공품이라고 하는데 소나 말, 비단, 종이, 과실 등 그 종류가 다양하고 수량도 적지 않아 조선에 큰 부담이 되었지요.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 외교가 굴욕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대 외교에서의 상하 관계는 어디까지나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답니다. 조선은 명나라가 요구하는 사대의 명분을 제공하는 대신 국내 정치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어요. 실제로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구체적으로 간섭하는 일은 없어서 조선은 독립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확고하게 지킬 수 있었지요. 또한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며 가져오는 답례품과 신진 문물은 상당히 귀중한 것들이었어요. 서적을 통해 들어온 중국 문물은 조선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지요. 이러한 실리를 챙기기 위해 조선은 적극적으로 사대 외교를 활용했어요. 사신을 줄이라는 명나라의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비정기 사신의 숫자를 늘리기도 했지요. 결국 사대 외교는 실리를 얻으면서 평화를 유지하고자 한 조선의 능동적인 외교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어요. ‘교린’은 이웃과 사귄다는 뜻으로, 여진과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외교 방침이었어요. 조선은 명나라를 대할 때와는 달리 여진이나 일본과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군사적으로 상대방을 압박하는 강격책과 평화적 교류 대상으로 상대를 인정하는 회유책을 함께 사용했지요. 여진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때는 강경책을, 평화가 유지될 때는 회유책을 취하는 식이었어요. 조선 초기 일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왜구, 즉 일본의 해적이었어요. 일본이 여러 나라로 쪼개져 혼란스럽던 시기에 생겨난 왜구는 고려 말부터 본격적으로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침략했어요. 왜구의 노략질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어 왜구로 인한 피해가 명나라 해안 지역까지 미칠 정도였지요. 왜구의 횡포로 해안 지역 농민들의 생활이 엉망이 되자, 마침내 조선은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로 했어요. 쓰시마 섬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규슈 사이에 있는 섬으로, 왜구의 근거지였지요. 조선의 강경한 군사 대응으로 더 이상 노략질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은 교역을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이에 조선은 진해의 제포와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등 세 곳의 항구를 개항했어요. 일본에 대한 회유책을 펼친 거예요. 하지만 삼포를 개항한 이후 우리나라를 왕래하는 일본인들로 인한 폐단이 발생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의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1517년에는 국방의 사무를 담당하는 관아인 비변사가 설치되었어요. 국경 지대의 국방 문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었지요. 이 시기 일본에 대한 조선의 외교 정책은 강경책인 엄격한 통제와 회유책인 교역 재개를 반복하는 양상을 띠었답니다. 여진은 조선과 동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어, 북방 영토를 개척하려는 조선과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어요. 농경과 목축을 겸하는 여진족이 식량과 농기구 등 부족한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을 빈번히 침범하면서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도 잦았지요.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히 사용하는 교린 정책을 취했어요. 회유책의 일환으로 국경 지대에 무역소를 설치하고 여진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교역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여진의 사신을 위해 한양에 북평관이라는 숙박 시설도 지었지요. 여진의 유력자에게는 귀화를 권유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귀화한 이들에게는 토지와 집 등을 제공했답니다. 하지만 이들의 약탈 행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틈틈이 반란도 일어났어요. 조선은 여진의 반란을 진압하고 북방을 개척하기 위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어요. 세종 때 설치된 군사 시설인 4군 6진이 그 대표적인 사례랍니다. 4군은 최윤덕 장군이 압록강 상류 지역에, 6진은 김종서 장군이 두만강 유역에 개척한 것으로 조선은 이들 지역을 완전한 조선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펼쳤어요. 이때 경상도 주민들이 많이 이주해 지금도 함경도와 경상도 지방은 사투리가 유사하답니다.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현재의 국경선은 당시 조선이 추진한 북방 개척과 사민 정책으로 얻은 결실이지요. <술술 한국사> 46~50p 중에서 *이후에 단락 내용이 좀 더 남아있으나 글자수 제한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빼버렸으니 양해부탁드립니다. ----------------------------------------------------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학문이고 과거에는 과거 나름대로 현실적인 외교를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한국사 통사를 다루는 이 책에서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각 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현실적인 역사를 전해줄 때 나름 유효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事大交隣(사대교린)은 조선시대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이었다. 사대교린은 글자 그대로 큰 나라인 중국은 섬기고 그밖에 일본, 여진, 유구 등 조선의 주변 국가들과는 우호하고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溫故知新(온고지신),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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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와 교린이라......
事大交隣(사대교린)은 조선시대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침이었다.
사대교린은 글자 그대로 큰 나라인 중국은 섬기고 그밖에 일본, 여진, 유구 등
조선의 주변 국가들과는 우호하고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溫故知新(온고지신),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