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뿔이 흩어진 양들을 하나로 모아 화해하고, 일치하고, 공존하는 사회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새해 벽두,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서품을 받게 된 염수정 추기경이 ‘착한 목자’로서 자신이 할 첫 직무라고 밝힌 일성이었습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모든 인간이 연대감을 갖고 한 가족,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고 강조한 염 추기경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용이 새롭고 삽상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병소(病巢)를 적확하게 진단하고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진정성이 밴 그분의 자세가 돋보였습니다.
양- 성질이 온순하며 무리지어 사는 초식동물. 사람에게 가장 잘 순치되어 수천 년 전부터 가축으로 길러 온 양은 인간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따뜻한 털, 맛있는 고기와 젖, 그리고 부드러운 가죽을 제공해 왔습니다. 언젠가부터 양은 성질이 온유한 사람 또는 보살핌이 필요한 약한 존재라는 뜻의 신자(천주교, 기독교)를 비유하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어린 양’으로.
그 양이 오래전부터 사람의 죗값을 대신하여 희생당하는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속죄양’ 혹은 ‘희생양’이라는 이름으로. 속죄양은 유대의 속죄일(贖罪日: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에 많은 사람의 죄를 씌워 양을 황야로 내쫓던 의식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물용 동물의 뜻보다 사회 문화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뜻이 더 강합니다.
유대인 학살- 나치스의 희생양 한반도 분단-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희생양 노동자- 자본주의의 희생양 이익 추구, 기득권 강화, 우월성 확보 등의 목적 때문에 강자에게 희생되거나 이용당하는 사회적 약자를 빗대 일컬은 표현들입니다.
무리지어 살면서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끊임없이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며 가학(苛虐)하는 역사를 되풀이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선 도편추방(陶片追放: ostracism)이라는 제도로 정적들을 국외로 추방했습니다. 중국에서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읍참마속(泣斬馬謖) 같은 성어로, 죽임을 당한 한신((韓信)과 마속의 고사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통치의 제물’로.
오늘날 우리사회도 수많은 희생양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힘이 있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 대기업, 이익집단들이 다수 다중의 분열과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국회의 파행, 공권력의 실종, 정부의 규제, 공직자의 복지부동, 대기업의 갑(甲)질, 강성 노조의 아전인수식 파업, 신용정보 도둑질 등으로 국민들은 불안 불편 불이익을 감내하거나 불평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안녕하지 못하다고 아우성입니다. 속죄양은 보이지 않고.
“자기가 수범하지 않고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선동자는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프랑스 작가 로망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신성한 희생자의 모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다.” 죄 없는 양을 자기 속죄의 제물로 삼기보다,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하는 밀알처럼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더 값지다는 말입니다.
같은 시대를 산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프랑스 철학자, 음악가, 의사)는 ‘나의 생활과 사상’에서 처음 아프리카로 갈 때 세 가지 희생을 각오했다고 밝혔습니다. 오르간 예술을 체념하는 것, 애착 깊은 대학교수직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 독립을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파리의 바흐협회가 선물한 오르간, 대학 강단의 특강, 저술활동에 따른 수입으로 희생을 모두 만회한 것이 생에 가장 큰 감동이었다고 했습니다.
‘착한 목자’ 새 추기경의 말씀이 흩어진 양들을 모아, 한 울타리 안에서 화목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는 희망의 처방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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