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 2주마다 열리는 소회의에서 점점 이세리아 공작의 사형을 반대하는 세력이 밀리고 있어.
조만간 이세리아 공작의 처벌이 결정될 것 같더군. 아마도 나쁜 쪽으로.."
에르시안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라하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새삼 그 놀라운 자기제어능력에 감탄하며 에르시안은 말을 이었다.
어느새 그는 라하스의 정체가 평민 따위가 아닐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다음 열리는 회의에서는 그걸 저지하실 테지만 반 이세리아 파가
너무 세력이 커서 얼마 가지 못할 것 같아. 그 전에 빨리 그들의 약점을 잡
거나 일의 진상을 밝혀야 해. 도대체 누가 공작에게 그런 누명을 뒤집어 씌
운 건지..."
"일단 표면에 나선 대표적 반 이세리아 파는 카논 백작, 루비안 백작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제르피아스 공작이 서 있지요. 이 들이 그 일을 꾸민 장
본인으로 생각됩니다."
라하스가 아무리 공작의 업무를 대행한다 하더라도 작위도 없이 회의에 참석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어떻게 반 이세리아 파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 회의에서의 일은 극비에 붙여지는 법이고, 그들이
'나 이세리아 공작 죽이려고 해요.'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도 않는데 말이다.
자신도 아버지께 며칠간의 아부와 엄청난 노력으로 알아낸 사실을
그는 동네 누가 오늘 뭘 먹는가라는 사소한 걸 말하는 듯 가볍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확실한 정보통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에르시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걸 말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대로 입을 닫아버린 걸 보면...
그런데 그런 것만 생각하던 에르시안은 여기서 중요한 뭔가를 놓쳐버린 느낌이
들었다. 제르피아스? 그건...
"물론 제르피아스 공작이 표면상 중립을 자처하고 있지만 반 이세리아 파의
실질적 지도자는 그입니다. 이건 확실한 정보이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외
에도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분은 이번 일을 떨떠름하게 여기고
계셨거든요. 그런 분이 모함 따위를 하셨을 리는 없죠. 하지만 그런데도 그분
은 이번 일을 주도하고 계시죠."
"잠깐, 제르피아스 공작은 중립파잖아. 그가 만약 반 이세리아 파로 갑자기
돌아선다면..."
"끝장이죠."
라하스와 에르시안의 말이 오가는 도중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간의 싸움이었고, 메니아르 건국 이후
현재까지 최고 권력가의 위치를 지켜온 이세리아 가를 멸문까지 몰고 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합니다. 페르시온이 아무리 막으려 한다고 해도 제르피아스
가는 그보다 더 큰 세력가니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테니까요. 하지만 또
제르피아스 공작의 뒤에 있는 자를 생각해야 하죠."
"그가 꾸민 일일 수도 있잖아. 어째서 그 뒤에 누가 있다고 여기는 거지?
그가 떨떠름하게 여긴다고? 그러면서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권력이라는 거다."
"그분이 모든 걸 꾸몄다고 하기엔 너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거기다
그 분은 이세리아 공작가와 많은 친분이 오간 집안의 분입니다. 어찌 이세리아
가를 모함하려 들 생각을 했겠습니까."
"정치 판에서 누구도 완벽한 아군일 수 없는 거야. 자기 집안을 위해선
오늘의 친구도 내일의 적이 될 수 있지. 그걸 모르는 거야? 왜 이래?"
"제르피아스 공작은... 하아... 아버지의 장인이시니까요."
침묵.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에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 세력가
두 집안이 사돈을 맺었는데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세리아 공작 부인.. 즉 헤리네스님은 먼 지방 귀족이라 알려졌지만 사실
제르피아스 공작의 숨겨진 아이셨습니다. 비록 숨겨져 자라셨긴 하지만 그분은
제르피아스 공작의 사랑 받는 따님이셨고, 제르피아스 공작은 그런 자신의 딸이
더이상의 비참한 삶을 살길 바라지 않으셨죠. 그렇게 아버지와 헤리네스님이
만나게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에 다시 혼인하지 않으셨고 저를 양아들로 받아들이신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헤리네스님을 배반하지 않으셨 듯 제르피아스 가도 언제나 이세리아
가를 양으로 음으로 도와 온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반 이세리아 파에 돌아
섰다는 것은... 무언가 있다는 거죠. 죽은 딸이 사랑한 사람보다 중요한..."
에르시안은 더이상 정치 판은 어떻고 따위의 소리를 라하스에게 하지 않았다.
하려면 더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만난 제르피아스 공작이 그 정도로 막
나가는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그에게 무슨 일이 닥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누가 더 빨리 비장의 카드를 내보이느냐..
저희는 그런 것이 없으니 빨리 만들어야하지요. 그들에게는 제르피아스란 최강의
카드가 있으니 그에 못지 않은.. 아니 그 이상 가는 카드를 쥐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에론, 무슨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잠행이란 소릴 하신 저의가 뭡니까?"
"만약 이세리아 공작의 반역이 그들이 씌운 누명이라면... 아직 증거는 그들
손에 있을 겁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어디
에 숨길까요?"
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답이 저절로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라하스는 이
사실에 대해 에르시안에게 적지 않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자신 혼자였다면
잠행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고, 아버지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기에...
"난 땅 밑에 파묻는데?"
역시 인간의 사고로는 따라갈 수 없는 놈이었다. 미리아넨은....
모두 그 이야기는 못 들은 듯 그를 외면해 버렸다. 그러자 미리아넨은 쭈그
려 앉아 손으로 땅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재미있겠
다면서 요시엘라도 옆에 달라붙어서 열심히 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인간을 그리는 듯 했으나 그것은 결코 인간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리고 그런 요시엘라도 그들에게는 외면의 대상이었다.
"자신에게 가까운 곳이겠죠. 너무 먼 곳은 불안 하니까. 아마도.. 집인가요?"
"누군가에게 가장 들키기 쉽지만 자신이 안심이 되는 곳이죠. 집은...
빈틈없이 지켜지는 세력가의 저택.. 아마도 그곳에 우리가 찾는 게 있을 겁니다.
그리고 굳이 증거를 찾지 않아도 되죠. 반 이세리아 파의 정확한 명단...
그것이 있다면 그들 모르게 명단에 있는 자들의 약점을 잡고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죠.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겁니다. 어쨌건 두 개중 하나는 꼭 있을 테죠."
이들의 대화를 누군가 들었다면 그들은 사형 감이었다. 메니아르 최고 권력가에
가택침입, 절도, 협박..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다니... 실로 무서운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들만의 비밀이었고, 이 일로 인해 자신들이 사형
당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란 걸 알고 있는 그들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 큰놈들의 무서운 음모는 대낮에 당당하게 짜여지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고수하며 날짜와 그 외 자질구레한 일을 정하는 그들은
로스카린 최고의 인재라 일컬어지는 장차 이 나라를 짊어질 젊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한 순간 귀족들을 떨게 만들 정도로 완벽한 카리스마를 지닌 자도
있었다. 비록 저기 쭈그려 앉은 몇몇 떨거지들도 같은 패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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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기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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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2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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