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회林懷, 린화이 ! 중국 광주廣州 여인세계 국제미용사업그룹 동사장(오너 사장). 얼마 전 호남성 장사長沙시 대만기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만의 강원도 산골격인 대동台東현 녹야鹿野향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 가난했기 때문에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용감하게 중국에 들어가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선택이 노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람의 생명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든 정력을 사업에 쏟아 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는 16세가 되는 해, 타이뻬이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때 "有錢人, 돈많은 사람" 의 의미를 처음 깨달았다. 그는 고향 집에서 가지고 온 쌀로 방세를 냈지만, 학교 친구들은 운전기사가 딸린 차로 등하교했다. 점심도 친구가 하나 더 가져오는 도시락으로 굶주림을 면했다. 그는 빈곤을 탈출하려면,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기술에 대한 욕망으로 마음이 요동치자, 대학을 포기하고 입대했다. 대만의 중부도시인 대중台中시 청천강清泉崗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때 저녁마다 몰래 부대 바깥으로 나와 미용을 배웠다. 머리를 감고, 자르고, 염색하고, 파마하는 것을 연습했다. 3개월 뒤에 스스로 미용사가 되어, 동료 여직원들의 머리를 대상으로 실습을 했다. 비록 남의 머리를 망쳐 버리는 실수도 했지만, 여기서 그의 창업 인생은 싹트기 시작했다. 군 복무를 성실하게 이행한 덕분에 제대할 때에, 친구로부터 10만元 (한화 300만원 상당) 정도의 돈을 빌려, 1982년 대북台北과 대동台東에 미용실을 열었다. 15일 동안 전혀 목욕을 하지 못하며 일을 하는 때도 있었다. 대만은 덥고 땀이 많이 나는 기후여서 15일간 목욕을 못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는 한달에 20여만元 (한화 600만원 상당)의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대만 미용실 업계는 단체로 외국 출장을 다니며 배우곤 했다. 돈의 여유가 생긴 그는 단체를 따라 동남아로 여행했다. 화교들이 동남아 경제의 75%를 차지하는 현실을 보고, "선도선득先到先得" 의 도리를 깨달았다. 먼저 가는 사람이 먼저 얻는, 즉, 선착순의 파워를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1987년 중국이 개방되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선착순의 도리가 그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최대한 일찍 중국에 들어가,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1990년대초 대만의 사업을 정리하고, 중국 남부도시 광주廣州로 가서 1993년 엘리자伊莉莎 화장품 공장을 설립했다. 그리고 고무, 플라스틱, 부동산 등의 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미용은 본업이었지만 그때는 중국정부가 서비스업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렴한 인건비, 토지비용, 중국의 수출지원 정책 등을 활용해 다른 분야의 사업에서도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고무 공장을 할 때는, 국제 석유시장의 가격 변동과 환율 변화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기 전이었는데,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면, 홍콩의 자유무역과 경제력이 광동성을 급속하게 발전시킬 것으로 판단, 광주에 많은 점포들을 미리 매입해 두었다. 또 그는 중국 여성들의 대단한 활동성을 보고 감탄했다. 미용, 미체美體, 건강養生 등 여성을 위한 사업이 유망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미용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1997년 중국이 외국자본의 서비스업 투자를 허용하자, 광주에 "여인세계女人世界" 미용관을 열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덕분에 사업은 열자마자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대만기업들은 광동성에서 생존하기가 어려워져서, 중국을 떠나거나, 아니면 업종을 고급화시켜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모두 다 어려운 진퇴양난의 선택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1차, 2차, 3차 산업을 모두 경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이 금융, 서비스등 3차 산업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의 흐름을 감지했다. 그는 자기의 판단을 믿고, 여성을 위한 미용 서비스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의 장기적인 안목 덕분에 여인세계 미용사업은 커다란 그룹으로 성장했다. 여인세계 스파미용 양생관 체인사업, 잭슨爵森 국제투자공사, 미려등媚麗登 미용미체美容美體 교육학교, 화웨이華威 플라스틱 회사, 엘리자伊麗莎 화장품 회사 등으로 사업 영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스파 사업은 4개 직영점과 600 여개 가맹점을 가지고 있다. 짝퉁들도 70여개다. 중국 최대 미용그룹의 하나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미용 사업에서 투자, 건강의료센타, 유기농 농장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서비스업은 제조공장 운영보다 매우 복잡하다고 말한다. 여인세계도 개점 초기에는 매일같이 기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노동국, 세무국, 공상국, 환경보호국, 품질검사국, 약품검사국 등이 순서를 정한 것처럼 끊임없이 찾아왔다. 지금도 모자를 쓴 사람만 보면 겁이 난다고 말한다. 오픈한 다음 날부터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다. 회사내 믿었던 여직원이 내부자료를 외부로 팔았고, 청소 아줌마가 충전하던 핸드폰을 훔쳐갔다. 외지의 중국인과 합자로 매장을 오픈했는데, 돈을 잘라 먹고 사라졌다. 그는 서비스업, 특히 식당이나 미용처럼 고객들의 신체와 직접 접촉하는 업종은 큰일이나 작은 일을 불문하고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잘못 대처하면 작은 일이 크게 되어,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정부의 정책 방향을 잘 살피고 정책에서 사업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중국에서 20여년 살면서 매일 TV뉴스와 인민일보 등 주요 신문뉴스들을 보고, 중국의 정책들을 관찰했다. 정부의 홍보뉴스는 사업 기회를 찾는 아주 중요한 창구였다. 중국에서는 정부의 정책을 따라가야만 기업이 살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광동성에서 대형 병원들을 찾는 환자수가 매일 10만명을 넘지만, 작은 병원들은 문을 닫는 현상을 보고, 정부의 자원이 모두 큰 병원으로만 투입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서민들조차도 작은 병원을 외면했다. 중국인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병원에 갈 때는 모두 뒷문으로 돌아가, 꽌시로 아는 사람을 찾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렇게 불합리한 관행을 본 그는 광주에 석안건강의료센타錫安健康醫療中心을 개설했다. 돈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검진의 편리를 제공한 것이다. 중국의 큰 병원들이 진료만 할 뿐, 예방은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예방, 음식 등 의료와 생활을 동시에 결합시켰다. 중국내 대만인들을 회원으로 받아 신뢰를 쌓았고, 대만의 10여개 대형 병원들과도 계약해서, 대만인들에게 건강검진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현지 중국인들도 회원제에 참여했다. 그는 의료사업 이외에 금융투자, 유기농 농장 사업에 투자했다. 공해가 심한 중국에 무공해 농장을 만들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채소, 과일, 양어, 돼지, 닭 등을 구경하게 했다. 또 농학박사와 영양사들이 양생 건강법에 대해 지도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비타민 B가 부족한 회원은 스스로 무를 심어 비타민 B를 먹도록 한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사업하려면 반드시 정부 정책을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이상 전통 제조업에 미련을 가지지 말고, 정부 정책에 따라 투자하라고 당부한다. 예를 들면, 중국의 국공립 병원은 너무 크다. 반면 작은 병원들은 계속 쓰러지고 있다. 석안錫安 의료센타에 대형 병원들이나 설치할 수 있는 첨단 장비와 기술들을 갖추었다. 작은 병원이었지만 정부의 정책을 따라간 덕분에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성공했다. 또 중국정부가 대만인들의 농업투자를 장려하면서, 농지를 상업용지로 바꾸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농지를 사들여 건강 휴양센타와 유기농 관광단지로 탈바꿈 시켰다. 이 역시 정부의 정책을 잘 활용한 덕분에 소위 대박나게 성공한 사례로 손꼽을 수 있다. 그는 대만업체들 중에서도 중국에 가장 먼저 들어간 편에 속한다. 그는 웃으며 자기를 "구명괴묘九命怪貓” 라고 표현한다. 구명괴묘는 공포영화의 제목으로 끈질긴 운명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그는 오늘의 성공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 과 "중국의 개방정책에 편승" 한 덕분이라고 한다. 시대의 흐름이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마무리 지었다.
- 손자병법 연구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