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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辛亥年,출생 후 첫 돼지띠해) 3월2일에 52명(남 26명, 여 26명)의 학생이 배정되고, 그 뒤로 송제만과 김 상록이 전학을 와서 54명의 학급원으로 구성되었고, 담임선생은 당시 총각으로 집안 나이로 30세(만 29세)인 장 산득(張 山得)선생님이 전주사범학교(현재 전주교육대학)을 졸업하시고 맡게 되었다. 그 해 4월27일에는 박정희와 김 대중이 제7대 대통령 선거를 한 해이다.
48회는 1966년 3월2일에 입학하여 졸업 당시 272명의 남여 학우들로서 주로 1959년에 기해생(己亥生) 돼지띠이고 대장촌을 중심으로 22개의 자연부락 학생들이 모인 곳이고, 춘포국민학교는 1923년 6월1일에 개교했는데, 일제시대였던 당시 인근의 학생들을 편입하여 졸업생은 1925년 2월에 1회를 배출하였다.(당시 학제가 6년제이었다면 5학년까지 편입시킨 것이다)
일제시대 초기에 세워진 학교로 교사(校舍)는 콘크리트 벽돌조에 검은 코르타르를 칠한 목재로 벽을 두른 건물이었다.
선사(先史)시대부터 마한, 삼국 ,고려, 조선,일제시대와 현재까지도 사람이 살고, 현재는 새만금공사로 향후 큰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 군산인데 군산항을 통하여 일제때는 너른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기름진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고,일찍이 전라선의 기차역인 대장역(1996년 6월1일 춘포역으로 개명, 1914년 11월17일 영업개시, 현재는 완전 무인화역, 지금은 임실 군산간 아침 저녁 1회 정차 통근역,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으로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 210호로 지정)은 전주와 익산의 중간기점의 촌역으로서 많은 애환이 있는 곳이다. 춘포(春浦)는 예로부터 만경강(万頃江)을 통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인 것 같고, 일제 때부터 군산에서 배를 타고와서 게, 장어, 붕어, 가물치, 새우등을 잡아 갔고, 하지때 쯤에는 만경강변의 모래밭에서 반 나체로 모래찜질도 했었다. 당시에 요즘 2홉자리 소주병하나 주면 시원한 아이스 케키를 2개씩이나 주면 먹어 가면서----
당시의 시대 상황은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가서 해방이 된 후에 1950년6월25일에 전쟁이 일어났고,1953년 7월17일에 휴전 협정이 된 후에 몇년 있다가 이 땅에 부모의 인연을 따라 분단된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이고,당시의 자유민주당 이 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정권 말기였던 그 다음해인 1960년4월19일의 의거, 1961년5월16일에 박 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 1963년에 김 종필이 일본과 협상하여 일제치하의 배상금으로 3억 달러를 받고, 미국으로부터 밀가루 ,옥수수등의 식량 원조를 받으며, 국가에서는 국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서 단군이래로 4300여년의 빈곤으로 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할 때 당시는 의술도 시원하지 않고 밤 농사만 잘 하면 흥부의 자식 생기듯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식들이 생기는 시대에 태어나고 보니 지금에 와서 보니 무슨 베이비 붐세대(baby boom generation)라나--- 참 경쟁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이지만 뒤돌아 보면 학교,군대,결혼, 직장, 재물, 집,사상 등등 참으로 치열한 경쟁이 있었고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 세월들이었고, 요즘은 노후준비다, 명퇴다 하는 구만-
그러니 평균적으로 가정경제와 교육여건이 지금과 비교하면 대단히 열악하여 검은 고무신을 대부분 신고 다녔고, 도시락은 주로 김치에 보리쌀이 더 섞인 영양식을 먹으며 다녔고, 6학년 때에는 유난히 쪽지시험을 거의 매일 보았는데, 도배하기 전에 벽에 바르던 회색빛의 마분지라는 곳에 선생님이 등사 용지에 철필로 쓰고 로울러로 먹물을 묻혀서 인쇄하여 시험지로 사용하였다. 음악시간에는 1,800여명의 학교에 검은 그랜드 피아노 한 대와 풍금이 2대정도 있어서 남자 애들 4,5명이 날라 왔고, 학년 초에 환경정리 할 때는 각자 한 가지씩 자진해서 맡기도 하고, 강제로 담임선생이 배정하기도 하여서 꽃병, 책상보, 청소도구 등을 가져 왔다. 미국의 원조 물자 중에 쫀득쫀득하고 노오란 사각형의 정말 맛있던 옥수수빵과 타원형의 한 300g은 되는 밀가루 빵이 있었는데 당번이 양호실에 가서 대바구니에 받아오면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을 가져가기 위해 달려 나갔었다.(이 것도 경쟁)
1971년 4월29부터 5월1일까지 2박 3일의 여수와 구례화엄사 졸업 수학여행이 있었다.
당시 대장역에서 타면 하행선으로 전주로 가는 통학차 6시 5분 기차로서 칙칙폭폭 굉음을 내며 하얀 연기를 새벽의 허공에 휘날리며 달리던 검은 조개탄을 때던 큰 철 바퀴가 달린 왕복 크랭크 축식(crank axial type)의 증기 기관차였다.
당시 수학여행비가 280원이었고(시내버스 입석이 15원, 40여년이 지난 현재 버스비가 1,000원이라면 그 간의 한국 돈의 인플레이션를 알 수 있다) 선견지명이 있었다면 쌀 25가마를 매년 수확하는 호남평야의 논 한 필지 1,200평을 팔아서 서울이었으면 더욱 좋고, 경기도라도 지금은 개발되었지만 당시의 야산을 10:1의 비율로 사서 12,000평만 사 놓은 것이 평당 100만원씩만 간다면 지금쯤은 좋은 빌딩 하나씩 가지고 생전에 돈 걱정없이 살 수도 있었던 뻔 했던지 모른다. 요즘은 과학과 기술 통신이 상상을 초월 할 만큼 발전하고 조(兆)단위의 돈(1억이 1만개)을 가지고 있는 재벌 들도 있고(이 들도 예외 없이 하늘은 100년이 되기 전에 잡아가서 0으로 만들어 놓음,보통 사람들은 부스러기나 주어 먹으라고 하고 잘 안 내놓아), 나도 살았을 때 누리고(死去万事空 나 죽으면 세상만사 헛 것) 자식세대에도 풍요롭게 하려면 부모 세대에 길게 보는 안목이 있어야 자손도 누릴 수 있다.(조금 옆길로 갔네)
여수 오동도에서 붉은 동백꽃도 구경하고, 이 순신 장군이 망루(望樓)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왜적에게 호령하던 진남관(鎭南館)도 구경하고 미우미(이리) 여인숙에서 1박하고 난 거기서 처음 오뎅을 먹었다.
다음 날에 구례 화엄사로 왔다. 화엄사(華嚴寺)는 (544년 백제 성왕 22년, 신라 진흥왕 5년, 연기조사 창건,선교 양종 (禪敎 兩宗 )의 본산,불경 중에 화엄경에서 따옴)는 대 사찰이며, 3층 쌍사자 석등(국보 35호)과 졸업앨범 뒤 사진은 수학여행 가서 전교생이 계단에 앉아서 큰 건물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인데 큰 기와집이 각황전(覺皇殿)으로 국보 제 67호이고 부처님의 몸(丈六金身)을 모신 곳으로 원래 장육전(丈六殿)이었고 신라 문무왕 10년 670년에 의상대사가 세운 26.8m*18.3m의 대웅전보다도 큰 건물이다.
사진 맨 뒤의 선글라스를 쓰신 키 큰 분이 담임 장 산득선생님이고, 계단 맨 하단의 오른쪽 끝 검은 고무신 신고있는 애가 이 동주이고, 그 옆에 머리를 면도로 박박 밀은 애가 송 제만이고, 그 옆이 길 흥묵이고, 2열에 줄친 옷 입은 애가 서 경수 , 3열에 최 근무 ,김 상록, 4열에 최 경식, 최 정규, 서 계만, (고 최 시창), 서 승권, 김 종만 그 뒤로 여학우 들이 보인다 .여자 앞줄에 모자를 쓰고 있는 애가 째내기라고 했던 김 미정이고, 김 미옥, 박 경례의 모습도 보이고 여학우들은 몇 명 안 간 것 같다.수학 여행 갔다온 직 후에 담임선생님이 아마 위장계통이 아프셔서 수술을 받느라 수업에 공백이 생겨서 교감선생님이 보강을 했지만 너무 장기간이 되다보니 13명내지 14명씩으로 나누어 반이 4등분 되어 흩어지게 되었고, 나는 5반에 배정되었는데 그 반 애와 사소한 것으로 싸우게 되었는데 참으로 담임없는 탓에 데려온 자식 취급하듯 하여 설움이 있은 적도 있다.
세상사에는 부모없는 자식이 외롭다는 말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을 맞이하게 되었고, 2학기 개학하는 9월1일에 당시 신축하여 처음으로 사용하게된 2층 건물로 체격은 그리 크지는 않으시지만 이마가 시원하게 벗어지신 당시 33(만 32세)의 선생님이 오셨으니 그 분이 신 현복(申 鉉卜)선생님이시고,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하나 있었다. 나무나 종이로 불을 붙여서 조개탄을 때던 무쇠(주철, 鑄鐵)로 만든 여인네의 잘룩한 허리 같은 난로위에 도시락에 물을 부은 후에 구어서 중식을 선생님들은 5명이 모여서 드시고, 학생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먹었었다. 그 뒤로 선생님은 초등학교 교장도 하신 것 같고, 전라북도 교육위원회 초등학교 수석 장학사로 계시다가 2001년에 퇴직하시고, 현재 전주에서 교회 장로님으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신 것 같고, 2010년말에 통화를 직접 한적이 있는데, 장산득 선생님도 인근에 사셔서 가끔 만나서 전주에서 막걸리도 한 잔씩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도 수도 서울에는 남산의 타워도 보고 아파트도 있고 자동차도 제법 있었겠지만 우리 자연의 혜택을 흠씬 받으며 자란 촌놈들은 열악한 교육여건 속에서 유치원 다닌 애는 참으로 드물었고, 책가방 대신 책보자기가 있었다.
책과 필통을 둘둘 말아서 싼 후에 오삔으로 고정하고, 남자는 왼쪽이나 오른쪽 어깨에 매거나 등에 대각선으로 매고, 여자애들은 허리춤에 질끈 동여매고 다녔는데, 뛰어서 집에 가다 보면 필통 속의 연필들이 딸가닥 딸가닥 하는 박자 안 맞는 소리를 내었다. 이리로 가던 비포장 도로 양 변에 코스모스를 심으러 다니기도 했고, 무슨 국민학생 들에게 퇴비를 가져오라 하여 목표량을 못채우면 수업시간에도 만경강 양 변의 제방에서 생풀도 뜯어다 반끼리 목표량을 채우려 경쟁했고, 졸업 직전엔 서리에 얼어서 지상에서 뜬 보리밭 밟기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춘포국민학교는 당시 이리시 시청각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사회과목에 대해서는 특별히 연세대학교에서 발간한 교재로 교실의 칸막이를 터서 2개의 교실에 합반으로 학생들을 모아 놓고 (아마 2개반,3개반)커텐으로 창을 가리고 슬라이드(slide) 사진을 보며 미리 녹음된 성우의 목소리의 설명을 들으며 공부했는데 두어 번 정도 성우의 녹음이 고장이 나서 선생님께서 읽으라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많은 학생들에게 마이크를 잡고 읽어 줄 때촌 놈이 성우가 된 듯하여 기분이 좋았던 적도 있었다.
졸업은 1972년 2월8일에 하였고, 신 선생님은 겨울방학 끝나고 며칠 있지 않아 졸업하게 되었다고 시간이 더 있었으면 교훈되는 이야기를 해 줄텐데 하셨다.회자정리(會者定離)가 세상사라 . 만나면 시간이 조금 길고 짧을 따름이지 언제가는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미워했던 사람들과도 헤어지게 되어 있는 것 . 이 것이 이별의 아픔이고 유행가 가락 중엔 "있을 때 잘 해", "과거를 묻지 마세요"하는 것인지. 졸업 직전에 숙제로 장차 커서 무엇이 되겠는가 하는 "희망장"이라는 것을 써오라고 하셨고, 잘 간직하고 계시다가 수 십년 후에 돌려 준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가지고 계신지 언제 만나면 물어볼까 한다. 나는 정치가, 사업가,농부라고 썼는데, 세상 조류에 휩쓸려 살다보니 꼭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닌 것이 세상 이치이고, 출세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뒤돌아 보면 세상은 경쟁도 치열하여 열심히 노력해도 내 마음대로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고, 세월 지나보니 조금 만 더 경제적 이익이 있을 것 같아 자꾸 이것 저것 주물럭 거리다 보면 세월은 가고 우리 베이비 붐세대들이 여전히 세상 문제가 풀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있다.
나 늙으면 그때까지 쓸 돈,이제는 눈이나 걸음걸이도 그전 같지 않고, 이제는 참으로 늙으신 부모님들, 아직도 새끼들에 대한 책임감, 조금 범위를 넓히면 내가 속한 사회나 교회에 국가에 +의 역할을 생각하노라면-----
중학교 평준화 2기로서 나무로 만든 뺑뺑이 통에 주사위를 5개 넣어 놓은 것을 좌로 2번 우로 1번 돌리면 주사위에 번호가 나오면 학교가 배정되었는데 2번이 이리 중학교이었고 춘포학교에서 23명이 배정 받았었다.대분분의 학생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이리에 가서 추첨을 한 후에 짜장이나 짬뽕 한 그릇씩 먹었을 때 맛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때 참 학교에서 우체국에 예금을 들으라고 해서 반강제적으로 실적을 올리려고 독촉도 했었는데, 졸업때 기념으로 타원형의 목도장을 30원씩 주고 단체로 파서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리에는 남자 중학교가 5개 여자 중학교가 4개였는데, 입학 전에 배치고사를 보았다. 우리 춘포학생 들은 6학년 교과서를 외울 정도로 열심히 해서 실력을 올린 것은 있지만 나중에 보니 이리라는 시내만 나가보아도 기출문제도 있었고, 완전 정복이라는 책이 있어 점수따기가 쉬웠다는 것이니. 현재도 자녀 교육에선 기본 자질만 있다면 질 좋은 고급 정보를 돈이 들더라도 입수하여 자녀에게 적시에 공급해주어야 한다.지금은 개천에서 용난다는 것도 옛말이라네, 고등학생 기숙학원도 200만원씩이나 주어야 한다하고, 사실 앞일을 몰라서 그렇지 우리네 인생도 3번 큰 운이 있다지만 하루에도 많은 운이 지나 가는 것이니 만사는 부지런하고(勤) 참는(忍) 마음이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잘 잡아서 하늘이 준 시간을 잘 채우면 되는 것이다.
일본의 잔재가 남아있는 군복 같은 검은 색의 교복과 모자, 목에는 플라스틱의 칼라가 있고 호크를 잠그고 , 노오란 빛나는 5개의 둥근 금속 단추가 달렸었다. 여학생들은 흰브라우스에 남색이나 검정치마를 입고 다녔는데, 당시의 대장역은 인근의 선후배의 춘포국민학교 출신 들과 직장에 다니던 사람들로 강건너 , 판문, 용강리 , 덕실리, 대장촌등에서 꾸역꾸역 모여들던 사람들로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통학시간엔 여학생들은 하얀 배꽃이 춤추는 것 같았었다.
세월 지나면 안 변하는 것은 없다지만 세상사는 발전만하는 것이 아니고, 실컨 쌓아 놓았다가 한 순간에 부서졌던 바벨탑 모양 사정 없이 퇴보도 하는 것이니--- 지금은 중(中)늙은이들은 되었다고 해야 하는데, 지난날의 일기등을 보면 30세에 더 좋은 생각도 했었구나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 뒤로 중학교,고등학교, 대학교, 병역, 취업, 사업, 결혼, 자녀출산, 집장만 등등 하면서 바쁘게 졸업 후에 수류탄이 폭발하여 각자 제갈 길로 흩어지듯이 헤어진 후에 하늘이 준 그릇의 크기대로 내 욕심대로 노력대로 살다보니 세월은 흘러 흘러서 20,30,40,50도 지나고 올해 54세씩 잡수시면서 졸업 한지는 40주년이 된다.
다른 반들도 반창회를 여러 번하고 거창하게 한 것은 좋은 일이고, 우리반도 나름대로 선생님을 모시고 한 적도 있고, 그 뒤로도 몇 번 한 적이 있고, 그런대로 자연스럽게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었고, 작년에는 서 경수가 무창포 횟집에 예약도 하고 대대적으로 추진하다가 홍보는 열심히 했지만 끝내는 실행되지 못했어도 인간사 그럴 수 있다고 자위도 해보며, 이제는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4번이나 변한 만큼 형편과 처지들을 이해하고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 같이 조금마한 오해 들도 없었겠지만 매끄럽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면 이해하고 또 중지(衆智)를 모아 서로 덕이되는 일들이 있으면 너무 개인프레이 보다는 옛 정도 생각하여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도 허구 헌날 중 하루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닌데 ----그러나 거자익일소(去者益日疎,out of sight, out of mind.안보면 잊어짐)가 인간사이지, 그런데 전생의 인연이 있었던지 이승에서 사제관계로 춘포 48회 중에도 3반으로 모인 것도 수학적인 확률로 본다면 어려워서 중(重)하고 중하다 할 수 있는데 이제는 장 산득 선생님은 71세이시고, 신 현복선생님은 73세이시니 이승의 연이 다하기 전에 두 분 모시고 식사 한 번 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는데, 그 것도 의미있는 일인지,이 바쁘고 급변하는 세상에 너무 과거로 회귀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제는 성인들이니 다 생각이 있고 10인 10색이니---
여학우들도 이제는 할머니들도 계시는데, 세상사는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지 뭐.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럴 수 있는 것.
지금은 지구에 땅을 밟고 있어도 어찌나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여기저기서 깨우쳐주는지(특히 인터넷,TV, 신문, 책, 사람, 종교) 멍텅구리가 없는 세상이며 이해(利害)관계에는 촉새들이고 인정(人情)은 그 전만 못 하다고들 하니--- 그러나 세월은 네 의지와 상관 없이 흘러가고 시간이 지나면 만물은 변하고 돌고 도는 것이니 순경(順境)에도 자만 말고 역경(逆境)에도 소침하지 말고 이 추운 겨울이 지나면 올 봄에도 한반도의 들과 산에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텐데 ---90일의 춘광(春光)에 단 하루의 즐거운 시간들이 이 지상에서 펼쳐질수 있을지---?
인생을 한바탕 꿈(夢)이고 이슬(露)이고 지나가는 나그네 허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及時
當勉勵). 아무쪼록 6의3반 반우들 뿐 이니라 48회 동창 모두들이 건강하고 좋은 소식 들을 전하고 , 남은여생 (길어도 이제는 50년 남짓)에 복많이 받길 바라며 만나면 부담 없는 이야기와 맛있는 것도 한 번씩 먹으면서 이야기도 나누는 것은 괜찮은 것은 아닌지.(48회 동창들이 6학년때의 일 들을 잠깐 뒤돌아 볼수 있을 것 같음,아마도 지금까지 글 중 제일 장문 같네)
2012.2.5
이 동주
첫댓글 절절히 공감가는 글이네. 까마득한 기억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앞으로 당겨주니 추억 여행의 기쁨이 크다네. 그래 우정도 '오솔길'과 같아서 서로 오가지 않으면 그 길의 흔적이 없어진다지? 40주년 앞두고 3반 친구들 소식 활발히 나누기를...
허허..동주 정말 대단허이! 어찌 그리 오래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글을 보는 내내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본다네. 50일후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볼수 있도록 동주친구의 할약을 기대해보네, 좋은글 써 주어서 감사드리네.
그려!그려! 동주 동창 및 반원에 대한 애정은 이마음 깊이 사무치네......역시 대단한 중늙은이 문학가 답네!? 결론은 두분
은사님 모시고 정겨운 식사와 대화의 장을 펼치자는것 아닌가 ? 수고스럽겠지만 동주가 한번 추진하게나 ! 꼭 말이야..오케이?
ㅎㅎㅎ 동주 끝내준다^^
동주야! 고맙구나 나 두 번이나 읽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