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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런 대 한국인이다.)
박정희의 공은 인정합니다만 박정희만이 그렇게 할수 있었다에는 동의못합니다..박정희때문에 전두환 쿠테타가 국민을 무서워하지 않고 쉽게 된것 아닙니까? 아 총칼로 군부만 장악하면 나라의 수장이 될수 있구나 하는 잘못된 선례를 남겼지요.지역감정도 박정희때 이용해 먹은것 아닙니까?
아래 제가 퍼온 글은 제 뜻과 다른 부분도 있으니 저를 상대로 한 댓글은 사양합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qkr4977/20021398108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1)
선거만 했다 하면 90% 이상의 몰표가 쏟아지는 한국의 특수한 정치상황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심각한 문제이다. 호남인들은 이런 호남 몰표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궁색한 변명과 합리화를 하면서 한편으로 책임의 전가에 급급한데 호남의 이런 주장들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이 문제에 대한 호남의 주장을 대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거시 나타나는 지역별 몰표 현상은 호남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남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전략으로 채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전략의 요체는 선거를 지역대결로 몰고 가서 호남표를 포기하는 대신에 영남의 몰표로써 이긴다는 것이고, 이 계산에는 영남의 인구가 호남보다 많기 때문에 영남의 70%로써 호남의 90%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지역감정에 기반한 선거전략의 실행으로 영남정권은 계속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호남에 대한 차별과 고립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호남은 생존적 차원에서 정당방위적인 몰표를 줄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호남의 몰표는 영남의 몰표에 대한 반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자기 지역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영남 정권의 계산된 전략에 의해 영남에서 먼저 나타난 것이고 호남의 경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약자의 저항권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에 대한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론이다. 역시 일관된 영남책임론이고 호남무죄론이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우리나라 선거에서 지역적 표의 집중 현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선거는 언제부터일까? 김대중씨가 박정희와 경쟁했던 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역별 지지도 집중현상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 때는 광주가 광역시가 되기 전이니까 호남은 단순히 전북과 전남이었다. 전남에서 박정희 47만 9천표, 김대중 87만 4천표, 전북에서 박정희 30만 8천표, 김대중 53만 5천표였다.
반면 영남은 대구가 광역시가 되기 전이어서 대구/경북, 경남, 그리고 부산의 세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득표율은 대구/경북에서 박정희 133만표, 김대중 41만표였고 부산에서 박정희가 38만표, 김대중이 30만표를 얻었다. 경남은 박정희 89만표, 김대중 31만표였다.
전체적으로 영남에서 박정희는 72%, 호남에서 김대중은 64%의 득표를 했다. 상대적으로 자기 지역 출신에 대한 지지도는 이때도 영남이 더 높았다. 그러나 실제적인 성격에 있어서 이때까지만 해도 노골적인 전라도 몰표, 경상도 몰표라는 선거 정서는 보이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가 지역간 대결 양상으로 치닫지도 않았다. 영남이 박정희의 고향, 호남이 김대중 후보의 고향임을 감안하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자기 고향 출신 후보에 대한 호감의 표현 정도를 넘지 않았던 것이다. 극히 상식적인 홈그라운드의 이점에 불과했다.
그 전인 63년도 혁명위원회 의장 박정희와 윤보선 전대통령과의 대결은 역사상 가장 미세한 표차를 보인 선거였는데 두 후보의 표차이는 겨우 15만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가 이긴 선거구는 오직 호남과 영남뿐이었고,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제주에서는 윤보선 전대통령에게 전패했다. 박정희는 겨우 15만표 차이로 이겼는데 이때 호남에서만 박정희는 35만표를 이겼다. 호남은 박정희 승리의 주역이었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텃밭으로 떠올랐다.
지금 호남 사람들은 영남정권, 특히 박정희가 72년 선거에서 김대중한테 신승하고 난 후에 김대중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출신지역이고 정치적 기반인 호남을 차별하고 고립시키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호남은 오히려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이 되어준 지역이었고 김대중과의 대결에서도 박정희한테 그런 대로 만족할만한 지지를 보여준 지역이었다. 그리고 미세한 차이로 이긴 것으로는 윤보선과의 대결이 더욱 아슬아슬했다. 때문에 선거 이후에 김대중을 두려워해서 호남을 전략적, 의도적으로 박정희가 고립시켜 나갔고 호남의 지지를 아예 포기하고 영남에만 의존하게 되었다는 호남인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도 호남을 포기하고 영남의 지지만을 자신의 정치적 토대로 삼아야 할 어떤 이유도 명분도 필요성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의 득표 결과는 농업지역인 호남에서 박정희의 지지가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이다. 윤보선과의 대결에서는 호남은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했고, 김대중과의 대결에서도 충분한 지지도를 보여준 것이다.
영남과 비교해 봤을 때 호남에서 박정희가 얻은 득표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박정희의 중농 정책이 호남인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과정이 오늘날 호남인들이 한 목소리로 비난하는 것처럼 영남우대/호남차별, 공업우선/농업홀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농업중시는 당시의 농촌사람들한테 진심으로서 전달이 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측면에서의 호남차별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심정적으로도 그렇게 다가가기 않았던 일이다. 그것은 농업인구가 대부분인 호남사람의 박정희에 대한 호감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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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2)
호남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한 타지역 사람들의 배타와 냉대를 체감하기 시작한 것은 71년의 대선이 시작되기 전부터였다. '하와이, 깽깽이'라는 속어가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것으로 유포되고 '라도 기질'이 사람들 사이에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부터라는 것이 그 무렵에 청년기를 보냈던 이 나라 노장층의 공통되는 기억이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516혁명으로 집권하고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은 무렵에, 그리고 1차 5개년 계획이 겨우 완료된 시점에서 경제개발의 실제적인 성과가 가시화 되지도 않았던 무렵에 이미 전라도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64년 선거에서 호남의 압도적인 지지에 힘입어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이 호남을 일부러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경제정책을 일부러 시행했을 리는 없고 당시의 경제 관료들의 증언이나 회고를 통해서 보더라도 권력층 내부에 그런 정서는 전혀 나타난 적이 없었다.
71년 김대중과 붙었던 대선에서도 확인된 호남에서의 만만치 않은 박정희 인기는 박정희 정권이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호남차별 정책을 시행한 바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설사 공업의 발전에 따른 도농간의 소득격차가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도시의 공장에 취업하기 위한 이농현상이 대규모로 발생하고는 있었다 해도 대표적인 농업지역인 호남에서 그것이 정권차원의 고의적인 차별정책의 산물이라고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한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국민 대중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간 전라도 기피 현상은 집권 세력의 출신지를 가지고 성격을 규정하는 훗날의 지역정권론이 태동한 것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7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당시의 박정희 정권을 '영남정권'이라고 칭한 사람은 없었고, 특정 지역인들에 의한 패권정치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정권이나 정치인에 대해서 '영남' 혹은 '호남'이라는 출신지역의 레테르를 붙이는 관행은 80년 이후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그렇다면 전라도 기피현상, 라도 기질에 대한 혐오는 누구에 의해서,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유포되기 시작했을까?
지금 호남인들은 라도 기질이라는 것이 영남정권에서 호남을 고립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유포시킨 악랄한 정치공작 내지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묘한 세뇌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호남인들은 전혀 라도 기질이라는 것과 상관이 없고, 또 라도 기질로 해서 타지역 사람들한테 척이 진 일도 없는데 소수의 특정인들이 이것을 꾸며내고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퍼뜨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범은 영남정권과 영남인들이며, 그 발원지 역시 영남지방이라는 것이다.
자, 과연 이런 주장이 사실일 수 있는지 살펴보자. 60년대 중반이면 우리가 월남에 파병할 무렵이다. 겨우 경공업이 가동되기 시작해서 생필품의 국산화가 이루어 진 시기이다. 농촌의 난방이나 취사용 연료는 대부분 산에서 채취한 나무나 솔잎이었고, 도시는 연탄의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전기 사정은 열악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예고 없는 정전이 되던 시절이었다.
흑백 티비의 국산화가 꿈이던 시절이었고 수입 브라운관을 사용한 티비의 조립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식의 자급은 요원했고 농촌의 소출량은 국제 수준을 훨씬 밑돌았으며 봄의 춘궁기에는 악명높은 보리고개가 상존하고 있었다. 매년 여름마다 코레라, 이질, 뇌염 등의 전염병이 농촌 지역을 휩쓸었고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비참한 농촌생활을 피해서 이농현상이 일어난 것은 60년대 초반부터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 고향을 크게 벗어날 일이 없는 농경사회의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러 고장 사람들이 뒤섞이면서 서로 부대끼는 경험을 하게된 것이 육이오 동란이었다.
이때 타지로 흘러 들어온 것은 대개 이북 사람들이었고, 이남 사람들 중에 피난을 내려 온 사람들은 유엔군의 영토 수복에 맞추어서 거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다수 지역 사람들의 단기간 혼입은 여러 가지 갈등과 마찰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거기서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텃세'이다.
즉 원래부터 그 곳에서 살던 토박이들의 위세와 유입자들의 위축이다. 그리고 생활 터전이 이미 있는 토박이들과 생존책을 새로이 강구해야 하는 유입자들의 입지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지역 기질의 왜곡이 나타나게 된다. 즉 토박이들과 유입자들은 각자의 기질 중에서 특수상황에 필요한 부분만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북 사람들인 경우에 이 기질이 거칠고 사납고 전투적인 면에서 두드러졌다. 평안도 기질, 함경도 기질이 남한의 터줏대감들과 심각한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육이오가 가져온 지역혼합은 전쟁이라는 절박하고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에 따른 타의적인 강제 이주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외지인이면서도 토박이들한테 사양이나 양보 없는 도전이 용인될 수가 있는 분위기였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외지인 신세라 해도 죽기살기식의 생존투쟁이 한편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토박이들을 치받아도 '그럴 수도 있는 일' 또는 '오죽했으면'하는 동정적 용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은 이런 혼합을 쉽게 융화되게 만들었고, 이북사람들은 재빨리 타지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반면에 호남은 육이오때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었다. 인민군의 남침시 호남을 경유한 것은 6사단 뿐이었다. 오직 1개 사단의 인민군만이 무인지대를 소풍가듯이 호남을 통과해서 진주, 마산 방면으로 진격했다. 호남에 잔류해서 호남을 행정적으로 통치한 병력이나 후방 행정요원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육이오때 호남은 인민군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인민군이 한번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속성상 농촌 사람들은 피난에 소극적이다. 후방으로(가봐야 부산뿐이지만) 피난을 간다해서 뾰족한 수가 없고, 최소한 농촌에서는 굶지는 않는다는 보장이 있기 때문에 호남인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육이오 전쟁 동안 대구, 부산을 낀 좁은 낙동강 지역에 전국 사람들이 몰려들어 뒤섞인 가운데 서로 치열하게 부대끼던 그 시기를 호남은 홀로 조용하게 넘긴 셈이었고, 이때 타지방 사람과의 혼합 체험을 가질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북사람들을 포함해서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 사람들은 피난생활을 통해 서로를 접촉하고 부대낀 소중한 체험을 이미 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성질과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부산넘 뱃놈성질은 어떻고, 평안도 아바이는 어떻고, 강원도 감자바우는 어떠하다가 대충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하와이 깽깽이의 정체는 이때까지는 베일에 쌓여 있었다. 호남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초창기에 이번에는 모든 지방이 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데 유독 호남만 대규모로 보따리를 싸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의 주무대가 호남이 된 것이다. 육이오때는 영남만 빼고 전국민이 움직여 다녔지만 60년대에는 전국이 제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는데 호남만 집에 불난 사람들처럼 쫓아다니게 된 것이다.
이건 필연적으로 소수의 외지인으로서 가는 곳마다 토박이들의 텃세를 각오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육이오때 처럼 전국이 한꺼번에 움직인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으로 피난내려 온 이북사람들이 타지에서 누릴 수 있었던 땡깡과 곤조, 개기기, 앵겨들기가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소수자, 무산자, 하층계급으로서 하나 둘씩 밤열차의 삼등칸에서 낯설은 타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타지에 온 유입자로서는 처음으로 어떤 특권도 갖지 못한, 소수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라도 기질이 과거의 이북넘들 기질보다 심각하고 끈질긴 만성질환으로 착근하게 된 것은 이런 사정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타국에 떠돌면서 받았던 질시와 냉대의 원인이 된 유대인기질이나 유럽 각국에서 천대받았던 집시들의 집시근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전라도 기질의 본질이 무엇이던지 간에 그것은 타지에 흘러 들어온 외지인이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받게 마련인 소수 근성인 것이다. 다수의 성질과는 이질적인 소수 그룹의 속성은 주류인 다수로부터 배척받게 마련이고 그것에는 '비정상, 불량, 열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전라도 기질의 실체는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특정 지역 사람, 특정 정치 세력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조작의 산물이라고 왜곡하여 주장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 땅에 새로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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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3)
육이오 동란의 피난생활이라는 대규모 인구 혼합의 체험을 통하여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현지인과 외지인이 어느 정도 뒤섞인 채 안정을 이룬 상태가 되었다. 즉 순수한 증류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불순물이 뒤섞인 상태의 안정이었다. 유독 호남만이 클린한 상태의 순수한 호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육이오 이후 한국은 어느 지방 사람이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외지 또는 타향이라는 이질감을 크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 왜냐 하면 이미 한번 크게 섞인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남은 타지인이 들어가면 당장 표가 났다. 호남은 혼혈되지 않은 호남인의 순수한 호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이유에서 제주도도 그렇다. 제주도는 내지인이 발붙이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타지인의 착근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대단히 배타적이고 텃세가 강하다. 그 다음 텃세가 강한 곳이 호남이다. 당연히 이 두 지방은 외지인들과 대량으로 뒤섞여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타지인이 호남에 들어왔을 때 그런 것처럼 호남인이 타지에 가도 금새 표가 났다. 뭔가 이질적인 요소로 겉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부대껴본 적이 없는 낯선 속성이기 때문이다. 면역체계에 입력되지 아니한 새로운 병원체인 것이다.
여기에 시너지효과를 가져온 것이 내가 다른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 군대에서의 '전라도 고참'이다. 호남 사람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군에서의 '전라도 고참'의 악랄함은 그 시대에 군대를 갔다 온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공통된 체험이고 기억이다.
이것이 가져온 효과와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호남 배척의 가장 큰 이유로 나는 이것을 꼽는다. 물론 군에서 '전라도 고참'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고 군대 문화의 한가지 특성으로 자리잡은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별도로 설명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농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 유입에 호남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 그리고 호남인들은 전쟁 중에 타지역 사람들이 겪은 혼합의 체험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타지로의 유입이 개별적이고 소규모적이고 분산된 것으로 진행되어 하나의 집단으로서 힘을 갖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의 군에서 형성된 '전라도 고참 공포증'이 전국적으로 호남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고착시켰다는 점등이 '전라도 기피 현상'의 주원인이다.
그리고 라도 기질에 대한 공감과 확산은 그야말로 국민대중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퍼져 나갔고, 여기에는 어떤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배경이나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영남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어떤 증거나 정황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전라도 기피현상과 라도 기질에 대한 배타는 영남에서 먼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영남에서만 있었던 현상도 아니다. 그것이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은 증거를 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시기적 순서로 제일 빠르기는 서울이고, 강도로써 제일 강하기는 충청도였다고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영남은 전라도 기피 현상이 그리 심하지 않은 지역이다. 그리고 호남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봐도 타지 생활에서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겪은 차별이나 설움이 영남이 제일 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영남인이고 40년 이상을 영남에서 살아왔지만 전라도 차별 의식을 별로 대면하는 경우가 없다. 물론 완전히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우려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표면적인 전라도 혐오는 없다는 것이다. 영남 사람 마음 속에 그런 정서는 별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구름은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지역 감정 바로 보기'나 '영호남 갈등 문제' 또는 '동서 화합 문제'라고 붙이지 않고 '호남 문제'라고 결정한 것은 결코 영남과 호남 사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고, 영남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일도 아니기 때문이고, 이건 호남과 호남을 제외한 전 대한민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호남 문제'라는 것이 가장 본질에가깝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전라도 차별이나 호남 기피는 영남이 주도한 것이 아니며, 영남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것도 아니고, 영남에서 제일 극심했던 것도 아니고, 영남 정권이나 영남출신 대통령과도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라는 것. 이것을 우선 밝혀 놓고 다음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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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4)
대통령 선거가 아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지역 몰표 현상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87년 김대중이 미국에서 돌아와 평민당을 창당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에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민당이란 지역 정당이 출현하기 전인 87년까지 있었던 일곱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호남에서 여당이 진 적이 없었다.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호남에서도 집권당은 항상 과반수 이상을 당선시켰다. 호남에서의 여당 당선율은 전국의 평균율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김대중의 평민당 출현 이전에는 선거에서의 지역감정에 의한 몰표라는 것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에 지역감정을 이용한다거나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에만 매달린 맹목적이고 무조건이고 감정적인 투표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과거 선거에서의 투표 형태나 정당별, 지역별 득표율로 볼 때에 한국의 정치역학 관계에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바로 김대중의 평민당 창당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평민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등장한 지역 정당이었다. 왜 평민당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역정당이며 순전한 호남정당에 지나지 않았느냐 하면 창당의 목적이 김대중의 출마를 위한 것이었고 그 토대는 바로 호남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김대중은 호남의 무조건적 맹목적 지지라는 특수 조건 한가지를 보고 대통령 출마를 결심했고, 평민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평민당에 끌어올 수 있었던 대부분의 지지세력이 오직 호남인들 뿐이었다. 김대중이 새로 만든 평민당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거나 김대중의 출마에 반대하는 호남 출신의 정치인은 그것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호남출신의 국회의원 또는 정치 지망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대중이 호남출신 정치인들의 생사여탈지권을 가질만큼 원래 카리스마가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87년의 김대중에게는 호남출신의 국회의원들을 죽이고 살릴 정도의 힘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7년전에 있었던 광주사태였다. 광주사태를 통해 응축된 호남의 한이 김대중에게 기대와 희망으로 집중된 탓이고 이것은 거의 신앙적인 염원이 되어 있었다. 이런 한의 상징으로서의 김대중의 행보에 방해가 되거나 협조하지 않는 인물은 호남에서 용납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러한 정서가 전국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오직 호남인들에게만 통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을 통한 염원의 실현 - 호남 차별과 전라도 기피의 설움을 해소하는 것 - 은 전라도인만의 비원이었지 타 지방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정서적 합일이나 공감대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호남 외에는 김대중의 출마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분위기였다. 후보단일화가 전국민적 요구요 염원이었고, 그 단일화의 주류는 김대중의 사퇴와 김영삼으로의 단일화였다. 이 후보단일화와 김대중 출마의 염원은 바로 대한민국 전체와 호남의 염원이 서로 대립하여 충돌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대중은 629 선언 이전의 출마포기 선언을 뒤집고 평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에 출마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나라의 나머지 전체와 대립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처절한 호남대 대한민국간 전쟁의 시발이었다. 아직도 그 내전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그 모든 책임이 김대중 한사람에게 있다고 본다.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거의 불가피하게) 확산된 전라도 혐오증과 광주사태로 응축된 호남인의 한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자산으로 확보하여 철저하게 이용한 끝에 결국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 김대중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가 했던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호남의 한을 풀어주지도 않았고, 당선만 되면 1년 안에 해결하겠다고 큰소리 쳤던 지역감정 문제, 동서갈등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않았다.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이 악화시키고 심화시켜서 이제는 해결이 불가능한 망국적 병폐로 만들어놓고야 말았다.
김대중은 호남을 철저하고 이용하고 잔인하게 배신했다. 김대중은 호남의 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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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5)
그 길고도 잔인했던 6월이 하루 남았던 날, 군부 독재권력의 항복 소식이 전 국민의 귀를 때렸다. 노태우의 629선언, 직선제 수용. 국민들은 믿기지 않아서 테레비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고, 길거리의 라디오 스피커 앞에까지 행인들이 모여들었다.
노태우는 승산이라고는 1프로도 없는 모험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직선제를 해서 광주사태를 일으키고 집권했던 전두환이 지명한 후계자 노태우가 이긴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어림없는 일로 보였다.
그만큼 당시에 직선제 선거의 부활과 국민의 선택에 의한 정부의 정통성 회복, 그리고 군부 정권의 종식은 전국민의 염원이고 소망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암흑의 세월 동안 수많은 민주 투사들이 희생되었고, 국민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 6월의 항쟁은 얼마나 가열차고 고난스러운 것이었냐 말이다.
민주주의 실현과 군부정권의 종식, 평화적 정권교체는 대한민국 4천만 국민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혐오증과 호남 기피증에 의해 축적된 설움과 광주사태를 통해 응축된 호남의 한, 그리고 그것을 해소해야 한다는 호남의 염원은 그것이 비록 강렬하고 생존적인 것이고, 절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민주화의 열망에 비하면 지역적인 염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전체의 염원보다 전라도의 염원이 우선될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4천만 한국인의 한보다 호남의 한이 중요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양자가 부딪힐 때는 후자가 양보를 해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순리였다.
그러나 87년 대선에서의 김대중 출마와 평민당 창당은 호남의 염원을 대한민국 전체의 염원과 정면으로 충돌시켰다. 호남을 나머지 전체 한국과 대립되는 반대편 축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김대중이 한국과 호남에 저지른 죄악의 으뜸이다.
87년 이후로 호남은 정치적으로 나머지 한국의 적이 되어버렸다. 호남의 죄는 87년에 김대중을 지지한 죄였다. 그래서 노태우 6년의 쓰라린 세월을 더 참아야 하게 만든 죄였다. 그에 대한 분노가, 그 허탈함이, 그 허망함이, 그 좌절감이 이후 한국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비틀고 왜곡시키고 말았다.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 세력과의 혼혈을 가져와서 나중에 누가 편이고 누가 적인지 이삭과 쭉정을 가려낼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87년 선거에서의 민주화 세력의 패배가 불러 온 것이 와이에스의 3당 합당이고, 그것의 역풍으로 보게 된 것이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정책공조, 연합정권의 탄생이다.
과거의 청산도, 학살자에 대한 처벌도, 독재정권의 청산도, 역사 바로세우기도, 지랄이나 나발이나 꼴갑이나 육갑이나 모든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 짬뽕 국물에 말은 비빔밥이 되 버렸다.
바야흐로 개판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학살의 주범, 독재 정권의 수괴가 민주화 대통령을 가리켜 주막강아지라 하고, 문민대통령이 이 수괴를 지칭하여 왈 골목강아지라 하는 목불인견의 참상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은 87년 평민당의 창당부터이며, 모든 책임은 출마를 강행한 김대중에게 있다. 그러함에도 오늘날 호남인들은 그 책임이 영남인에게 있다고 한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6)
2002년 12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부산 사나이 노무현을 95%라는 나와서는 안 되는 지지율로 당선을 시켰다. 이회창은 1%에서 2% 사이를 밑돌았다.
노무현과 이회창이란 두 후보의 인물 차이가 과연 95 : 1이나 되는 것이 정상이냐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호남인들 대답이(물론 네티즌들의 글에 의한 거지만) 이회창이 문제가 아니라 한나라당이란 정당에 모여있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광주의 주범들, 학살자들, 그리고 과거의 부정부패 정권의 인물들이 그대로 모여있는 정당이 한나라당인데 단 한표인들 지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오히려 1%라도 이회창 찍은 넘들이 나왔다는 사실에 분개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은 신한국당이다. 신한국당의 전신은 민자당이고 민자당은 알다시피 민정당과의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다. 그러니까 한나라당은 과거 박정희 세력부터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에 김영삼의 민주화 세력이 혼혈된 짬뽕국물당이다.
그런데 이 짬뽕국물당 소속의 박계동의원이 1995년에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했다. 물론 이런 폭로가 김영삼의 내락이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박의원의 비자금 폭로는 광주사태의 두 수괴에 대한 김영삼의 처벌의지가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18특별법을 제정한 문민정부는 96년 2월에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광주사태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혐의로 기소해서 28차례의 공판을 거듭한 끝에 1심 재판부는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이어진 항소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의 확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감방에 들어갔다.
광주사태의 희생자들과 호남인의 복수는 영남정권의 영남대통령이라고 호남인들이 그토록 욕을 해댄 김영삼과 단 1%의 지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정당이 주도하여 이루어낸 것이다.
누구도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끌어내서 사형,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게 하고, 무기징역, 17년 징역의 확정판결을 끌어내서 진짜로 감방에 처넣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과 민자당은 해냈다. 성공한 쿠테타를 처벌한 세계 정치사 초유의 일을 해낸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해서, 성에 안차서 그 정도로는 1%의 지지도 아직 보낼 수 없다고 하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95%의 지지를 보낸 정당, 새천년민주당이 무엇을 했는가 보자. 그 정당의 창설자이고 오너이고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대통령에 출마하자마자 전노 사면을 떠들고 나왔다. 97년 5월이다. 이것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층을 흔들기 위한 김대중의 선수였다.
할 수 없이 표를 지키기 위한 교육지책으로 이회창도 9월에는 전노 사면 쪽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회창의 사면제의를 한마디로 거부했다. 이회창으로서는 쓴잔이었다.
도대체 광주 사태의 한을 풀어야 하는 사람이 누군 지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영남출신 대통령 김영삼이 독한 마음을 묵고, 숱하게 정적들을 만들면서, 온갖 역풍을 뒤집어쓰면서 집어넣은 두 학살범을 김대중은 단순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무위로 돌리려고 들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에 대해 호남인들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당선되자마자 당선자 신분으로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노 사면을 정식으로 요구했고 김영삼은 두 사람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766일, 노태우는 783일 동안 콩밥을 먹다가 나왔다. 두사람이 전직대통령 신분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장에 당당하게 참석한 것은 물론이다.
호남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피를 토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전노가 전직대통령으로 폼을 잡고 단상을 장식한 그 취임식에 박수치기 바빴다. 피를 토하기는커녕 기뻐 춤을 추었다. 나는 그것으로써 호남인들이 전노를 용서한 줄 알았다. 김대중의 전노 용서와 학살 세력에 대한 화해를 추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왠걸, 다시 5년이나 지난 200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광주사태의 관련자들이 있는 정당이어서 한나라당은 1%의 지지도 해줄 수 없노라 한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만약에 그런 이유로 한나라당은 1%도 지지할 수 없다면 김대중은 호남사람들한테 맞아죽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단 한표도 얻으면 안 된다.
한나라당이 까막소에 집어넣은 전노를 풀어주고 대접해 주고, 법원이 선고한 벌금도 안 받으면서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보호해주고 돌봐준 정당이 새천년민주당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정치와 호남인들을 보면 내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나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호남인들은 영남인들을 원망한다. 광주사태의 가해자라고 영남을 손가락질한다. 호남차별의 주범이라고 영남인들을 욕한다. 나는 영남인으로서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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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7)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대미가 부러지고,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왜곡되게 만들었으며, 선거가 지역감정에 기반한 지역간 전쟁으로 변질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87년의 평민당 창당과 김대중의 출마 강행이다.
그 이전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 정당이라는 것이 없었다. 여당에도 영호남 의원들이 골고루 있었고,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를 해도 인물 위주의 선택이었지 정당 위주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그런 공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물론 여야 정당의 공천은 무소속이나 군소정당의 공천으로 출마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했다는 것이지 여야 중의 어느 정당 공천이 곧 당선보장이라는 성격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양당정치인 한국에서 여당이나 야당의 공천은 같은 조건하에서의 싸움을 의미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중 특정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소속되어 있던 정당을 탈당하고 새로 창당되는 정당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된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평민당이다. 여야 막론하고 호남의원들은 전부 김대중이 흔드는 깃발 밑에 줄을 섰다. 자기의 출신지역인 호남의 여론, 지역유권자들인 호남인들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평민당이 만들어지면서 호남출신 국회의원들이 한 곳으로 쏵 몰려버리고 나니까 김영삼의 민주당과 노태우의 민자당은 호남 의원이 전혀 없는 기형적인 모습이 되고 말았다.
호남인들은 말하기를 영남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한 전략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호남을 배제하고 아예 호남의 지지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영남의 몰표에의존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호남의 지지를 기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87년에 김대중이 호남을 싹 쓸어가 버린 탓에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 맞다. 87년 이후에 김대중의 호남 정당 외에 다른 정당이 공천을 해서 호남에서 당선시킬 가능성은 제로였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정당에는 호남 출마 희망자를 아예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가 당선 가능성도 없는데 그 고생을 하려 들겠나 말이다. 영남정권이라서 일부러 호남을 버렸다, 포기했다 하는 건 완전한 호남인들의 억지요 뒤집어 씌우기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정치와 선거에서의 지역간 헤게모니 쟁탈전은 평민당이란 지역정당의 출현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지역별 몰표 현상도 마찬가지로 87년의 대선 때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 전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지역감정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정당들이 지역별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 아니다. 사실은 지역 정당이 출현함으로써 정치가 지역별로 나뉘게 되었고, 선거가 지역간 전쟁으로 변질되게 된 것이다.
지금 호남인들은 초원 복국집 사건처럼 영남정당이 선거전략으로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이용해 왔다고 주장하는데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선거에서 지역적 단결을 호소하게 된 이유는 정당들의 지지 지역이 확연하게 갈라져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정당에 영남 의원과 호남의원들이 다 있다면 그 정당의 운동원들이나 후보가 어느 지역에 가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소리를 할 수가 있겠나 말이다. 정당이 영남의원만 모인 당, 호남 의원만 모인 당으로 딱 갈라져 있으니까 '우리가 남이가?' 소리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당이 지역별로 갈라지게 만든 사람은 바로 김대중이다. 그의 권력욕이 특정지역 사람들로만 채워진 기형적인 정당을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정당이라는 괴물이 이후 한국정치를 엉망진창의 진흙탕 속으로 끌고 다니게 되었다.
김대중은 지역 정당을 만들어서 한국정치를 지역간 전쟁으로 변질시킨 범죄적 과오에 대한 책임을 역사 앞에 져야만 할 것이다.
계속...
[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8)
(펌)
저는 두가지를 말하기 위해서 이 글을 퍼왔습니다.
첫째, 호남에게 과연 민주화의 정통성이 있는가?
둘째, 호남에게 과연 95% 지지의 명분이 있는가?
만약 그러한 호남의 지역감정이
정통성이 없고 명분도 없는 것이었다면
저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들은 대한민국을 망친 죄인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
김대중은 광주사태로 구속되어 형무소에 있던 중에 전두환한테 속죄의 반성문을 써서 바쳤다. 두 번 다시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미국에 보내주면 한국 정부에 대해 어떤 비방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은둔해서 살겠다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사면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물론 미국에 도착하자 말자 전두환한테 서면으로 했던 약속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날부터 망명정치인으로 행동했다.
김영삼을 비롯한 국내의 민주화 세력은 전두환 치하에서 박통때 보다 더한 탄압과 압제 속에서 독재정권과 싸워 나갔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명언이 나온 것도 이때다. 김영삼은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20일을 넘기는 초인적인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언론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했고, 그 기간 중에 가장 신문지면을 크게 장식했던 뉴스는 지리산 반달곰이었다. 야당 지도자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보다 반달곰의 생사가 훨씬 중요한 나라가 당시의 대한민국이었다. 김영삼의 단식은 '현안문제'라는 이상한 단어로 표현되어 한 두 줄씩 기사화 될 뿐이었다.
당시의 민주화 투쟁은 김영삼의 민주산악회와 김상현이 지도하던 민추협이 두 개의 기둥이었다. 김상현은 김대중이 미국으로 떠나고 없던 시기에 호남의 민주화 세력을 돌보고 있었다. 김영삼의 단식투쟁과 가열찬 6월 항쟁에 밀린 전두환이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하게 하고 곧바로 김영삼, 김대중의 정치활동을 허용했다.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의 삼파전만이 전노의 유일한 활로였다. 당시에 전노측에서 김대중한테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도 무성하게 돌았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없는 동안에 모진 고생을 하면서 동지들을 돌봐왔던 민추협의 김상현 의원을 숙청해 버린다. 고생한 대가는 찬밥이었다. 그리고 629 이전에 '집권세력이 직선제를 받아들이면 자신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던 불출마선언을 번복하고 평민당을 창당하게 된다.
온 나라의 민주세력과 국민들이 후보단일화를 열망했지만 김대중은 그것을 외면하고 결국 노태우 정권이 등장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당시는 누가 보더라도 김대중이 양보를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그의 불출마선언 번복은 군부독재 세력에게 기사회생의 활로가 될 것임이 너무도 뻔했다.
전노가 믿는 오직 한가지가 그것이었다. 87년에 후보단일화를 위해 양보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훗날 김대중이 과오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과로 끝나기에는 너무도 심각한 상처와 후유증을 한국 정치에 남긴 행위였다.
4천만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고 오로지 호남의 한에 기대어 출마했던 결과 김대중은 계산대로 호남에서 90%가 넘는 광적인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전북의 경우 948,995표를 얻었고, 김영삼은 겨우 17,130표를 얻었다. 2002년 선거에서 노무현과 이회창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노태우는 김영삼보다 10배나 많은 16만표를 얻었다.
전남의 경우, 김대중은 1,317,990표를 얻었고 김영삼은 고작 16,826표였다. 노태우는 그래도 10만표를 넘어 12만표를 획득했다. 광주는 김대중 45만표, 노태우 2만3천표에 김영삼은 고작 2천5백표였다.
반면에 경남을 보면 김영삼이 987,042표, 노태우가 792,757표이고, 김대중이 86,804표를 얻었다. 경북은 김영삼이 47만표를 얻은 반면에 노태우가 170만표를 얻었다. 김대중은 4만표 정도였다. 부산은 김영삼이 110만표를 얻었지만 노태우도 64만표였고 김대중도 18만표나 얻었다.
그 외 지역은 대부분 김영삼이 김대중을 앞섰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87년 선거에서 광주, 호남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지역 후보에게 맹목적이고 비정상적인 몰표를 던지고 나왔다.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현상은 노태우에 대한 지지가 상당히 나왔다는 점과 김영삼에 대한 가혹한 대접이었다. 부산, 영남의 경우 김영삼에 대한 몰표 현상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고 김대중에게도 꽤 많은 표가 나왔다. 결과는 2위인 김영삼과 근소한 차이로 노태우 당선이었고, 김대중은 차이가 좀 지는 3등이었다.
이 선거 결과에 분노한 것이 부산/영남, 그리고 전국의 민주화 열망 세력이었다. 노태우가 미운 만큼 김대중이 미웠다. 민주화 세력의 승리가 눈앞에서 날라 가 버렸다. 김대중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부산, 영남이 호남에 섭섭했던 것이 김영삼에 대한 무자비한 배척이었다. 부산, 영남은 김대중을 그리 박대하지 않았다. 상황에 비추어 볼 때는 예상보다도 김대중 표가 많이 나왔다.
이런 호남의 맹목적 몰표는 그 후의 선거에 계속되는 반작용과 역풍을 불러오게 된다. 지역감정에 의한 선거가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 지는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남인들은 입만 열면 '영남인들이...'하고 말한다. 영남정권이 시작했다고 우긴다.
영남사람들은 입이 없고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 동안 차별받고, 기피되면서 따돌려져 온 것이 사실이고, 광주사태의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니까 참고 봐준 것이다. 과부 동서의 푸념이니까 '오죽하면'하는 심정으로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호남도 해묵을 만큼 해묵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또다시 95% 라는 황당한 짓거리로 택도 없는 인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소외 받는 약자도 아니고, 차별되는 아웃사이더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진골이고, 로얄퓨플이고, 실세들이니까 더 이상 봐주고 양보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는 대놓고 할말을 다해도 좋은 그런 상황이다 이 말이다. 과부 동서가 부자 홀애비한테 재가를 잘해서 호강하고 사는데 그런 동서 푸념을 계속 들어주고 있어야 될 필요가 있겠나? 인자는 택도 없는 소리로 징징거리면 뺨이 석대다.
각설하면 지역감정에 의한 투표가 87년에 호남에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그 선거는 평민당이란 호남정당의 출현으로 해서 지역 대결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졌던 선거였다. 특정 지역 출신의 의원들이 전부 한군데에 모인 정당이 있게 되면 자연히 정치 구도가 지역 대결로 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지역감정이 지역정당과 지역간 대결을 만든 것이 아니라 역으로 김대중이란 한 개인의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 지역정당이 출현함으로써 이후의 모든 정치역학이 지역간 대결과 지역감정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이 평민당이란 지역 정당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호남의 차별과 광주사태라는 지역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한 개인이 개인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서슴없이 망설임없이 주저하지 않고 호남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아버렸다. 87년의 평민당 창당과 김대중 출마는 호남 문제와는 관계없는 일이었고, 호남 문제의 해결이나 전라도의 한을 풀기 위한 정치 행위도 아니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돌아와 불출마선언을 했던 김대중이 629 이후에 대권 도전의 욕망과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결과이고, 호남인들이 김대중의 당선을 호남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착각했던 우매함이었다.
김대중의 출마는 호남 문제와는 전혀 무관한 개인적 야망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의 열망도 김대중에게는 하나의 수단이고 제스추어일 따름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 김대중이 보여준 통치행태는 그가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김대중의 생애는 그가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로 호남의 한을 풀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민주주의자로써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정치행로는 박정희라는 군부지도자에 대한 투쟁으로 드러난 반사적인 모습뿐이다. 그의 사회주의적이고 좌파적인 성향이 반독재 투쟁의 모습에 가려서 잘 안 보였을 뿐이다.
김대중은 호남인의 아픔을 같이 하려한 적이 별로 없었고, 호남인으로서 호남 문제에 그리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없다. 그런데 왜 호남인들은 그런 김대중을 자신의 메시아로 구세주로 삼았는지 그것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단지 고향이 목포 사람이라서? 전라도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통령 자리에 접근한 인물이라서?
저는 호남인의 바람이 진정한 한의 해결이나 차별의 해소나 전라도 기피현상의 불식이 아니라 전라도가 특권층으로 특별한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남인들에게는 그런 패권의식이 없다. 영남 출신 대통령들이 장기간 집권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해서 영남인들이 어떤 우월의식을 갖게 됐거나, 특권의식이 있거나, 패권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차별받고 설움받은 소외계층이었다는 전라도 사람들은 대단히 강고하고 끈질긴 패권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대통령 자리를 자기네들의 특권유지의 방패로 여기고 있다. 죽어도 그 자리는 다른 지역에 내줄 수 없다는 광적인 집착과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이런 지역적 패권주의나 대통령에 연결된 특권의식은 망국의 원인이 된다. 싹을 잘라야 한다.
수십년 집권하면서 조국을 근대화시키고 세계 10위권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주역인 영남인들도 갖지 않는 특권의식, 패권의식을 호남이 갖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걸 방조하고 내비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나라 결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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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시리즈] 호남문제 바로보기 (9)
김대중이 호남의 상징, 호남의 메시아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데는 젊은 층, 특히 대학생들의 지지와 김대중 우상화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호남의 대학생들이 김대중을 특히 지지했던 이유는 이념적으로 좌파이며 특히 북한에 호의적이었으며 종북적 통일관에서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 시대에 대학의 반독재투쟁, 유신철폐 운동은 부마사태가 보여주듯이 영남이 더 강렬했다. 각 대학 학생회는 민주화 운동의 본부였다. 다만 호남의 대학이 타지방과 달랐던 점은 학생회 지도부가 주사파, NL등 북한과 연계된 좌익 일색이었다는 점이고 학생운동의 좌경화가 전국에서 가장 빠르고 또 광범위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반인 사회에도 파급되어 호남의 좌경화는 호남의 대표 정치인 김대중의 모호한 색깔과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의 중요한 포인트인 '해방구 확보'가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공산주의의 침투는 민주 사회 내의 가장 소외받고 설움받는 계급에 대한 선동에서 시작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이념적으로 취약한 지방이 바로 호남이었다. 그래서 호남을 집중적인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감동받기 쉽고, 순진하며, 열정적인 세대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이루어졌고 상당한 효과를 보게 되었다.
호남이 쉽고 빠르게 좌경화되어 간 데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첫 번째는 호남 차별, 전국적인 전라도 혐오증, 그리고 경제적 낙후 등이 요인이 되어 호남전체가 소외계층, 피압박계층으로 하나의 하층계급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공산주의는 계급적 투쟁이 그 철학적 토대이고 운동의 모티브이다. 호남이라는 거대한 하층 계급은 공산주의자들이 공략하기에 너무나 알맞은 대상이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에서 호남이 가장 반공의식이 약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유가 있다. 호남을 제외한 타지방의 반공의식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 보면 된다. 타지방에는 있는 반공의 당위성이 호남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이 뭐냐믄 바로 공산주의에 의한 직접적이고 격심한 피해의 체험을 호남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철없는 대학생들이나 호남인들은 한국인의 반공주의가 군부독재정권의 교육의 결과라고 말한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우익꼴통들이 오랫동안 국민을 세뇌시켜 온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건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인의 반공은 육이오 동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에서 겪은 직접적인 체험에 기반한 것이다. 육이오 때 인민군의 직접적인 공격 루트가 되었던 서울 부산 축선의 모든 지역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치하라는 공산통치를 맛보았고 대부분의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이것은 반공교육에서 날조한 일들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민간인들에 대한 잔인하고 대규모적인 학살과 대량납북은 훗날 킬링필드의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남침 전에 북한의 김일성이 작성했던 통일 후의 학살 계획서도 이미 공개된 자료이다. 밝혀진 중국측 자료에 의해서도 전쟁 중에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모택동이 남한에서 저지른 양민학살을 질책하는 대목이 있다. 인민을 그렇게 살해하고 어떻게 통일과업에서 인민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모택동이 말한 김-모 면담 자료가 최근에 중국에서 공개되었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던 인민군이 북으로 패주하면서 그 패주경로상에 있던 대부분의 지역에 혹심한 피해를 입혔고, 북으로 탈출하지 못한 병력은 지리산일대에 빨치산으로 숨어들면서 또한 극심한 보투민폐를 입혔다. 강원도는 중공군 개입 후에 격전지가 되고 역시 유격전의 무대가 되면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땅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호남만은 이 처참했던 육이오에서 무풍지대였다. 김일성은 단기전, 속전속결을 가정했기 때문에 장기전에 대비한 곡창지대의 확보라는 전통적인 전략을 도외시하여 호남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관심은 경부 축선 뿐이었다. 그래서 호남은 단 1개 사단만이 경유하여 진주/마산 방면으로 전진시켰을 뿐이고, 후방 관리요원과 행정조직의 투입도 호남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패주로에서도 호남은 벗어나 있었다. 그 후의 전쟁 기간 동안에도 호남은 직접적인 전투와는 거의 무관한 태평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유독 호남인들은 육이오 때 일가친척이 빨갱이들한테 학살당했다던가 친지들이 북으로 끌려갔다던가 또는 인민군들한테 재산을 강탈당했다던가 하는 직접적인 피해나 수난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전후에 호남의 대공 경각심과 빨갱이 혐오증이 타지방에 비해 유난히 희미했던 이유이다.
거기다가 여순 반란 사건의 후유증으로 해서 오히려 남쪽의 경찰에 의해 일가친척이 죽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과 지리산의 호남쪽 일대인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에는 빨치산 토벌작전시 남한의 군경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원한이 북의 공산주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내의 정권 쪽을 향하는 심리적 경향이 강하다.
이런 반공의식에서의 갭이 호남을 타지방들에서 고립시키는 이유로 작용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이념적으로 호남은 한국 내의 섬이었던 것이다. 이런 호남이 광주사태를 기폭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해방구로 변신해가는 것을 모든 한국인들은 불안하고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특히 학생들의 좌경적인 운동은 육이오의 직접적 체험을 가진 타지역 국민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이념에 의한 호남의 고립에 대한 이야기는 기니까 천천히 계속하기로 하자.
첫댓글 ㅎㅎㅎ..많이 한쪽으로 치우친 글인 것 같습니다. 지역감정의 발단은 71년 대통령선거때 세불리를 느낀 국회의장도 하였던 이효상이란 사람이 대구의 달성공원인가에서의 유세도중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발언을 최초로 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사와 모든 국민들 생활에 지역정서를 배어 들도록 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후 박정권, 전정권을 지나면서 정치에 많이 이용을 해 먹은 것도 거짓은 아닌듯 합니다. 다만, 이 글처럼 87년 선거때 호남지역에서 상상을 초월한 몰표가 나오고 그 이후 선거에서도 이제는 개인이 아닌 정당별로 기반이 되는 곳에서 상식이하의 몰표가 나오는 것이 우려할 만한 일이기는 하나
이 역시 87년 선거때 민정당 정권이 야권후보를 분열케하려고(DJ가 표가 많아야 양보하지 않을 것이므로..) 더욱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처럼 호남사람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들은 얘기이긴 합니다만 625때도 서울 사람들이 피난을 갔을 때도 부산, 대구등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그 지역사람들로 부터 설움을 많이 받았고 호남지방으로 간사람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서울로 돌아와서는 오히려 호남사람들을 깔보고 멸시하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호남이라는 지방이 어쩌면 한국 현대사의 발전속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 아닌가하고 생각도 합니다. 최근의 선거등에서 호남기반의 정당에 부산 대구
등지에서 꽤 많은 수의 표가 나오는 것은 부산 대구사람들의 정서라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발전해 있는 곳에 호남인들이 많이 이주해 있는 결과일 것입니다. 그 간 받았다고 여겨지는 호남인들의 피해는 DJ가 대통령이 됨으로서 어느정도 해소가 되었다고 보여지고 정당적인 측면에서 정권을 이어가고자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된 영남출신 노무현대통령을 후보로 옹립함으로써 또 선거에 이기게 되었지 않습니까? 물론 이후에 킹메이커로써 영향력을 원하는 사람들과의 다툼으로 노대통령도 어려워지기는 하지만요....이 모든 것이 현명한 국민들이 선택하여 지역감정을 없애려한 노력이 아닐 까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 글은 상당히 첨예한 글입니다. 사상논쟁을 초월하여 엄청난 분열을 향한 분쟁을 만들 수 있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여기서 이것에 대한 논의를 하여 우리끼리의 감정적 투쟁을 이끌어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찾아서 밝혀서 반성하여 좋을 것도 있고 다 알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냥 묻어두고 가는 것이 좋은 내용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주절이주절이 생각을 썼지만 더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까오슝님 이러한 글을 퍼오는 저의가 상당히 궁금하군요. 이글이 과연 정상적인 글로 보여집니까? 댓글논쟁할 가치도 없는 글이라 댓글 논쟁은 사양하겠지만 이러한 문제의 글을 퍼올려다 놓고(자 한번 붙어보자라는 글이지요) 자신의 뜻과 다르니 자신에 대한 댓글은 사양하겠다라는 말이 얼마나 비겁하고 옹졸한 말인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글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기사도 아니고 아주 우파적인 사람의 그것도 극도로 첨예한 대립을 낳을수 있는 글을 가져오셔서 나는 모른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런글 퍼올줄 몰라서 안퍼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님이 하신 가장 큰 실수일것 같습니다.
너무 오버하시는군요.. 그냥 읽어보자고 했고, 이럴까봐 제 뜻과 다름이 있다고 먼저 밝혔습니다. 저의 까지는 아니고 이 글을 퍼온건 박정희가 대한민국에 지역감정을 부추긴 장본인처럼 말씀 하시는 분이 계서서 그건 아닌것 같다는 뜻에서 입니다. 확대 해석까지 제가 어쩔수야 없구요. 저를 향한 댓글을 사양한다고 밝힌것은 괜히 이 글로 인한 논쟁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버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지역감정에 대한 이런류의 해석도 있다고 생각하시면 그만 입니다. 제가 이 글의 뜻에 전적으로 동감하기에 퍼온 듯 오해 하실까봐 미리 밝혔잖습니까? 그게 전부 입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그대로 여기다 올려드립니까?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제 뜻과 틀리니 그냥 읽어만 보세요라고 말입니까? 여기 시토방의 운여의 원칙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런글이 운영의 원칙이었습니까? 법치법치 하시더니 편리하실대는 자신의 잣대로 모든것을 해석하시는 교조주의 경향이 다분하신 것 같습니다. 기사 퍼오는 것 까지 머라고 하시던 분이 자신의 행동에는 너무나 관대하시는 군요. 일간지 신문기사 마저 편파적이라고 비판하시던 분의 행동치고는 제가 볼떄는 너무나 잘못된 행동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논리와는 전혀 상반되는 행동이라는 생각을 저는 지울수가 없네요
글만 퍼다 나르는 분들을 향해 분명히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을 적으라고.. 그리고 어느 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퍼온 글은 적어도 본인의 생각과 배치되지는 않기에 퍼왔을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인정 합니다. 그래서 서두에 썼듯이 제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고 했습니다. 단,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이용하기 시작 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셔서 참고하시라고 펀 글 올렸습니다. 님과 비슷한 사고를 하시는 분들이 퍼다 날르는데는 한 마디 말도 없으셨는데 이 글은 님의 생각과 다르니까 매우 흥분 하시는군요. 자신의 논리와 상반된 행동이란 말씀 전에 님을 먼저 돌아보세요.
얼마전만 봐도 여기 시토방엔 저 외엔 90% 이상이 님과 생각이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제 글에 열심히 저와 반대된 생각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님들의 생각을 수 없이 퍼다 날르고(물론 님께서 퍼왔다는건 아닙니다) 그걸로 열심히 자기들 생각 합리화 하는 동안 누가 그 퍼달 나른 글에 반론이나 다른 생각을 퍼오던가요? 님들이 퍼올 때는 아무 문제 아니고 우리편이 퍼오는건 못 본척하고 제가 퍼오는건 문젭니까? 너무나 잘못됬다구요? 어떻게 님들의 치부는 그냥 뭉게고 생각이 다른 제가 하는 행동은 손톱만큼도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이럴줄 알고 미리 서두에 제 생각과 다르다고 밝혔는데도 말입니다. 아닙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 정도의 파장을 가지고 오는 글을 올라왔던 적이 있을까요? 그리고 퍼오는 글에 대해서는 항상 저또한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래서 운영의 룰을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 뒤로 과연 이러한 식의 퍼오기 글이 있었는지요? 그리고 글에 문제가 있음녀 저 또한 성향을 떠나서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신문고님의 글 제목같은 경우에도 말입니다. 상기의 글은 운영의 원칙을 벗어난 글이고 글의 파장또한 못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충분히 판단하실주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에 치우쳐 이러한 일을 하시니 못내 안타깝고 모든걸 2분법의 논리로 보시니 다시금 안타깝네요
님의 중대한 오류는, 지역감정에 대한 부분은 마치 엄청난 파장이 일고 여기 절대로 올라올 수 없는 글 처럼 몰아 가면서, 정작 본인은 손톱만큼도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는 국제양아치 김일성 김정일과 박정희를 동격으로 놓고 같은 독재자 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님들이 퍼다 나르던 오마이뉴스는 괜찮고 제가 퍼온 어떤 분의 글은 파장이 큽니까? 대통령을 동네 개새끼 취급을 하는 님들의 글은 써대고 퍼날라도 문제가 없고 파장이 적습니까? 김일성 김정일에겐 피해 본 적이 없는데, 지역감정으로는 피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버하시는군요..
저는 기사를 퍼옴에 있어서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썼으며 그것이 제 입장하고 틀릴 경우 그러한 적이 업습니다. 또한 그 글에 파장을 우려하여 댓글은 사양한다라는든지의 행위는 한적이 없습니다. 글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님처럼 의견없는 글을 퍼와가지고서는 댓글 사양한다라고 하는 무책임한 자세를 가질 경우 넘쳐날 글들을 어떻게 감당하고 이전에 운영의 원칙은 무엇이 됩니까? 생각이 다른 것과 운영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님께서 글을 퍼왔다고 한게 아니라 퍼날르기 선수들 있었잖습니까? 잊으셨나요? 그런분들이 퍼날르는 님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는 왜 그런 이야기 안했습니까? 님의 뜻과 같아서요? 대통령 알기를 옆집 강아지 처럼 하는 그런 글이 저한테는 님이 지금 느끼는 감정만큼 흥분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게다가 박정희를 김일성 부자와 같이 보는 님의 시각에도 백배 천배 흥분이 되네요.
그리고 박정희의 친일 행적 올리세요.. 저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보지 않지만 그런 시각도 있고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올리세요. 친일했으면 김일성과 김정일 개쓰레기 새끼들과 동격으로 보는게 대한민국 국민이 할 생각입니까? 님이 사범대 출신이라고 하셨죠? 저는 그래서 전교조며 그런 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선생하는거 너무나 싫습니다. 학생들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을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인 박정희를 동격 또는 그 아래로 놓고 가르치겠군요. 아닙니까? 교단에선 좀 순화된 표현으로 하십니까? 명동 한 복판에서 물어보세요. 박정희가 일제 앞잡이라고 해도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국제적 개쓰레기와 비교할 그런 대상인지..
여기는 이제 그만 하시지요...더 얘기하기에는 위험한 내용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좁혀질 것 같지도 않구요...말해서 서로 앙금만 남을 것이라면 그냥 가슴에 묻어두고 지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ㅎㅎㅎ..잘읽었습니다. 처음 보는 글들이라 유심히 읽었는데,,객관성과는 거리가 멀군요..특히 작자가 영남사람이고, 출처가 좃선닷컴이라 패스..ㅋㅋㅋ..바로 이겁니다.. 있는 진실을 호도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수작..엄연한 사실도 인정안하고 아니라고 하는 작자들하고 어떻게 말이되고, 토론이 되겠습니까? 제가 이완용이가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는 새로운 주장을 한번 지끌여 볼까요? 여기저기 자료와 약간 억측을 덧붙이고,추정을 가하면 위와 같은 한편의 글을 완성할수 있습니다..외환위기도 정부탓이 아니라는 글도 그럴싸하게 글을 쓰면 만들수 있습니다.임진왜란도 일본탓이 아니라고 그럴싸하게 만들수 있습니다.
저를 향한 댓글은 사양한다고 서두에 이미 밝혔습니다. 제 뜻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밝혔구요. 다른건 몰라도 박정희가 님들이 말씀 하시는 김일성 김정일 개쓰레기 찟어죽일 똥양아치 놈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인물을 아니니 그만 하셨으면 합니다.
이런 글은 서로 자제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 됩니다. 분란/분파 만 조장되는 글 인 것 같아요.
제가 좀 흥분했나 봅니다.이해 부탁 드립니다.
포장 된 정일이의 동조 내지는 아류들이 정리 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 할 것으로 봅니다.외형은 한국인과 거의 흡사 하다고 보셔야 합니다.
박정희와 김일성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위법한 쿠테타는 위법한 것을 이야기한 것이며 법치를 주장하실려며 이 또한 강력한 법적인 잣대로 보아야함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또한 박정희를 떠나서 대한민국이 위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적었습니다. 국민들의 노력으로 이만큼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부를 갖게된 것은 북한과 비교할수없는 우리의 자랑이며 우리의 자부심이라는 것입니다. 일견 오해하실 부분이 있었던 것은 인정합니다. 독재에 대한 부분을 서술하느라 비교의 대상으로 인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강수님의 말슴은 도저히 받아들일수가 없네요. 박정희가 독재자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답답하군요. 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과거에 박정희의 쿠데타도 법적인 잣대로 봐야 한다고 하고, 그럼 세상이 바뀌어도 모든 기준을 현재의 잣대로 소급해서 적용합니까? 비교의 대상으로 언급한 것은 생각이 그렇다는거고, 저는 그런 부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확신컨데, 님과 가족 주변에 이산가족도 없고 휴전후 북한으로 부터 직접적인 피해 손톱만큼도 보신적 없으시죠? 용산에서 죽은 사람만 님이 목청터지게 억울하다 정부가 잘 못 했다고 할게 아니라, 죄없이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국지전이겠죠. 쉽게 확전이 되진 않겠지만
연일 쏟아내는 북한의 개소리가 님께는 젼혀 들리지 않습니까? 아님 듣기 좋은 소립니까? 그런 집단의 대가리와 박정희를 비교 하다는게 있을 수 있는 일 입니까? 박정희 독재했지요. 독재를 참 잘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박정희 외엔 대안이 없었다고 봅니다. 나라는 아직 제대로 틀이 잡히지 않았고 지금처럼 나 잘났다고 혼란만 가중되던 시기였으니 당연히 군이 들고 일어서서 대한민국 바로 세웠다고 봅니다. 대안세력 조차 없던 시절이죠. 강한 정부, 힘있는 정부가 나서서 바닥부터 깡그리 바꾸고 반공을 국시로 삼아 대한민국을 키웠습니다. 독재과정에서 잘못된 점 있습니다만, 그건 그가 이룩한 조국 근대화에 비함 암껏도 아닙니다.
나라가 먼접니까 내가 먼접니까? 저는 나라가 먼저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나라보단 내가 먼저죠. 나라야 개차반이 되던 말던 내 돈, 내 몫 먼저 챙겨야 하고, 나한테 우리 가족한테 칼을 들이댄거 아니면 북한 북한 동포 민족 어쩌구 저쩌구 웃기지도 않습니다. 북한가서 무고한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등에 총 맞아 죽고 서해에서 북괴 도발로 수 많은 사상자 났던거 잊으셨죠? 북한이랑 인터넷에서 전쟁게임 하는걸로 생각하십니까? 그런 통째로 묻어 버려야 할 집단의 수괴를 박정희와 비교하다니요..북괴가 도발하면 북한 사랑하는 사람들 최전방에 자원 입대하세요. 뭔 일 있겠습니까? 그렇게 북한 사랑하시는데 개들이 알아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