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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문화의 뿌리는 대한민국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모세 5경,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문화와 性문화, 그리고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문(法條文)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法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이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거의 같다.
수메르 문명의 연구학자인 S.N 크래머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에서 서양의 문명은 뿌리는 수메르라고 한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동방에서 왔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정덕본」의 "고조선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고려 초기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記) 하下"에는 12환국桓國이 있었는데, 그 중 바이칼호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수밀이(須密爾, Sumer)와 우루(虞婁, Ur)국이라고 한다. 당시 수메르 민족이 사용하던 설형문자는 태호복희씨가 사용했던 8괘와 흡사하며, 언어도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이다.
서양 유대 문화의 뿌리 아브라함의 고향이 바로 수메르 문명이 자리잡고 있던 갈대아 우르(Ur)이다. 그가 아버지 데라를 따라 BCE 1950년경 우르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의 줄기를 타고 북쪽으로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주하는 과정에서, '강을 넘어온 사람'의 뜻으로 헤브루인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또 유대족은 몽골인과 근접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서양의 문명의 모체가 바로 환국桓國문명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수메르의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산' 혹은 '하늘 언덕'이라 불린 지구랏(Ziggurat)이라는 제천단 유적들은, 신교(神敎)의 삼신신앙과 제천문화가 환국桓國의 후예인 수메르인들의 삶과 신앙의식 속에서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수메르의 지구랏이다. 이처럼 서양의 종교도 그 원뿌리를 신교(神敎)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조술요순祖述堯舜하시고 헌장문무憲章文武하시니라.’(「중용中庸」30장)라고 하여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 법통을 근본으로 하고 문왕과 무왕의 국가통치 제도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 요순임금의 국가 경영 지침서, 그것이 바로 단군왕검의 맏아들이었던 부루 태자가 전한 『홍범구주洪範九疇』다.
공자가 표본으로 삼은 요순 역사의 진실은 9년 홍수를 다스린 법도가 전해진 『홍범구주洪範九疇』 속에 담겨 있다. 이에 공자가 밝히려 한 원형을 알려면 『서경』과 『홍범구주』를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단군왕검 시절 동방 조선(고조선,단군조선) 땅과 서방 중국 지나 땅에는 대홍수가 있었고, 이때 치수법을 가진 종통 국가는 동방조선(고조선)이었다.
이는 지나支那의 『오월춘추(吳越春秋)』와 『태백일사(太白逸史)』를 비교하면 대의를 파악할 수 있다. 공자가 살던 때에 노나라 남쪽에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기록은 9년 홍수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오월춘추(吳越春秋)』권6 「월왕무여외전(越王無余外傳」)에 禹乃東巡(우내동순)하야 登衡嶽(등형악)하고 血白馬以祭(혈백마이제)로대 不幸所求(불행소구)어늘, 禹乃登山(우내등산)하야 仰天而嘯(앙천이소)러니 因夢見赤繡衣男子(인몽현적수의남자)하야 自稱玄夷蒼水使者(자칭현이창수사자)라.
우禹는 곧 동쪽으로 순행하여 형산(형악衡嶽)에 올라가 백마를 죽여 그 피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신서(神書)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우禹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치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 꿈에 붉은색으로 수놓은 비단옷을 입은 남자(현이 창수사자)를 만났는데,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聞帝使文命於斯(문제사문명어사)하고 故來候之(고래후지)로다. 非厥歲月(비궐세월)이어늘 將告以期(장고이기)하리니 無爲戲吟(무위희음)하라 故倚歌覆釜之山(고의가복부지산)이로다 하고, 東顧謂禹曰(동고위우왈) 欲得我山神書者(욕득아산신서자)면 齋於黃帝岩嶽之下(재어황제암악지하)하고, 三月庚子(삼월경자)에 登山發石(등산발석)하면 金簡之書存矣(금간지서존의)리라 하거늘
“나는 현이 창수사자인데, 듣자 하니 황제께서 그대를 이곳으로 보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노라. 지금은 아직 볼 때가 아니니 내가 그 때를 알려주려고 하노라. 내가 농담한다고 생각하지 말지니, 나는 본디 복부산覆釜山에서 곡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 현이 창수사자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우禹에게 말하였다. “우리 산신의 책을 얻으려면 모름지기 황제암악黃帝巖嶽 아래서 재계한 뒤에 3월 경자일에 다시 산꼭대기로 올라와 돌을 들춰 보면 금간金簡으로 된 책이 있으리라.”
禹退又齋(우퇴우재)하고 三月庚子(삼월경자)에 登宛委山(등완위산)하야, 發金簡之書(발금간지서)하고 案金簡玉字(안금간옥자)하야 得通水之理(득통수지리)러라.
우禹는 물러나서 다시 재계하고 3월 경자일에 완위산에 올라가 금간으로 된 책을 찾았는데, 금간에 쓰인 옥 글자를 살펴보고 물길을 소통시키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오월춘추(吳越春秋)』권6 「월왕무여외전(越王無余外傳」)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는 及九年洪水(급구년홍수)하야 害及萬民故(해급만민고)로 檀君王儉(단군왕검)이 遣太子扶婁(견태자부루)하사 約與虞舜(역여우순)으로 招會于塗山(초회우도산)하실새, 舜(순)이 遣司空禹(견사공우)하야 受我五行治水之法(수아오행치수지법)하고 而功乃成也(이공내성야)라
9년 동안 홍수가 일어나 그 재앙이 만민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께서 태자 부루를 보내 우나라 순임금舜과 약속하게 하시고, 도산 회의를 소집하셨다. 순임금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법五行治水之法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오월춘추(吳越春秋)』와 『태백일사(太白逸史)』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분명 중국에 대홍수가 발생했고, 붕괴 직전의 왕조를 도운 창수사자를 만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임금의 명을 받고 치수 방안을 찾아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리고도 방책을 얻지 못해 울부짖는 우禹 앞에 나타난 동방의 창수사자, 그의 도움 없이는 중원 왕조가 몰락할 위기에 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동방 천자국 단군조선(조선,고조선)의 도움을 받은 것을 꿈에서 받은 것으로 왜곡해 놓았다.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후대의 공자와 사마천을 비롯한 기록자들은 순임금이 동방 조선의 천자인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 태자의 도움을 받았음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 이는 역사 기록자의 벗을 수 없는 멍에이자 원죄라 할 것이다.
둘째,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했지만 동방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을 폄하한 잘못된 기록도 남겼다
공자와 제자들의 기록인 『논어』를 보면 우리 스승님인 공자의 말씀은 한마디로 ‘술이부작述而不作 신이호고信而好古’라고 했다. 공자는 “정리해서 기록할 따름이지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만든 것이 아니며 옛것을 믿고 좋아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공자가 믿고 좋아한 그 과거의 것, 옛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요순의 도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요순의 도를 전해 준 단군조선의 도이다. 동방 천자국, 종주국의 천도를 배워 온 요순의 옛 가르침을 갈구한 것이다. 공자의 인仁 사상도, 동방 조선(단군조선,고조선)에 내려온 환국의 인仁사상, 경당扃堂의 오상지도五常之道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논어』 11편, 「선진」을 보면 공자가 문화의 종주인 동방 조선(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한 구절을 만날 수 있다.
子曰(자왈) 先進於禮樂(선진어예악)은 野人也(야인야)요, 後進於禮樂(후진어예악)은 君子也(군자야)라 하나니
如用之(여용지)면 則吾從先進(즉오종선진)하리라
공자가 말하였다. “예악문화의 선진은 야인이요, 예악문화의 후진은 군자라 하나니, 만약 쓴다면 나는 선진(종주국)의 예와 악을 따르리라.”(『논어』 「선진」)
공자는 예악문화의 고향인 선진문화를 야인野人이라 칭하고, 후진 문화를 군자의 도라 칭했다. 그러면서도 ‘오종선진吾從先進’, 자신은 야인의 예악문화를 따르리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공자는 ‘순박한 문화를 높이고 싶다’, ‘먼저 나온 원형문화를 높인다. 나는 그 원형 예악을 따르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뿌리인 은나라 문화, 그리고 그 이전의 우禹임금의 하夏나라와 요순堯舜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해 내지 못했다. 나아가 요순문화의 핵심인 상제, 제천문화를 전해 준 배달과 단군조선의 문화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한마디로 선진先進은 야인野人이 아니라, 공자가 찾으려 한 동방 원형문화의 종주였던 단군조선 문화였다. 공자는 순임금과 우임금이 대홍수로부터 백성들을 구할 치수법을 전해 준 동방 조선의 선진문화를 야인으로 폄하한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으로 공자의 제자들과 그 문인들이 공동 편찬한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 춘추필법으로 동방 조선(단군조선)의 국호와 원 역사를 전하지 않았다
역사 기록자의 필법은 큰 문제를 낳는다.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역사는 크게 휘둘리게 된다. 그런데 공자에서 비롯된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후세의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 주장한다. 정당한 역사 기록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민족의 문화를 폄하하며 자신들만 문명국가이며, 주변 국가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 오랑캐의 역사로 규정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공자의 춘추필법에 따라 중국 사서는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부풀리면서 중국에 수치스러운 일은 감추고〔위국휘치爲國諱恥〕,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어〔상내약외詳內略外〕왔다. 그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것없는 역사로 전락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별명이나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듯이 국가 간의 정식 국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단군조선의 말엽이었다. 그런데도 요순의 역사를 찾고, 단군조선의 영향권에 있었던 하·은·주를 찾은 공자가 동방 천자국(天子國)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공자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구야丘也 은인야殷人也라’(『예기』 단궁檀弓) 공자 이름이 구丘 아닌가. 자기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은나라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면서도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우리 조상들도 그분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나쁘게 규정짓고 싶지 않다. 그러나 도성덕립道成德立이 되면 그때는 사실대로 평가가 될 것이다.
공자는 지금의 산동성 곡부 사람인데,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다. 『가례家禮』라는 공자의 일기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구丘는 은인야殷人也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丘는 은나라 사람’이란 뜻이다. 공자 이름이 구丘이고, 은나라는 바로 우리나라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면서 우리나라를 배척해 버렸다.
한마디로 공자는 천자문화의 고향, 가르침을 편 부루 태자가 9년 홍수 때 전한 경당扃堂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상·주 3왕조의 문화 고향인 단군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 전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노년에 뗏목을 타고 동방 바다 건너 ‘군자가 살았던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며, 동방 조선(단군조선)의 선진문화를 동경했던 것이다.
子欲居九夷(자욕거구이) 或曰(혹왈) 陋(루) 如之何(여지하) 子曰(자왈) 君子居之(군자거지) 何陋之有(하루지유)
공자께서 여러 동쪽 오랑캐의 나라에 살고 싶어 하시자 어떤 사람이 “거기는 누추할 터인데 그것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살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논어』 「자한」)
공자는 역사의 큰 획을 남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인이자 철인이다. 그러나 공자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실제로 『춘추』를 지은 후 공언한 것처럼 ‘『춘추』 때문에 알아주거나 비난받을 것’이라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 때문에 기억되고 있다.
또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진나라에 있을 때 멀리서 날아와 궁정에 떨어져 죽은 송골매에 막힌 화살이 부여국 동북쪽에 있는 숙신의 화살임을 단박에 알 정도로 해박했다. 그러나 태산이 있는 산동반도에 퍼진 동방의 원형문화 역사의 맥脈,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 태자가 전한 경당과 오상지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누락시켰다. 결국 공자 때문에 천자국 동방조선(단군조선,고조선) 역사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공자 시대 이후 2,50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유교는 동방문화의 중심이 되어 한 시대를 굽이쳤다. 특히 조선 시대에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소중화를 자청했다. 단군보다는 이 땅에 오지도 않은 기자箕子를 칭송하며, 평양에 무덤까지 만들고 모셨다. 중국의 속국이 거의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근원에 사마천과 공자가 있다. 공자와 사마천의 의도적인 누락으로 동방 원형문화는 감춰졌고, 유교가 통치 이념이 된 한나라 때에 이르러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은 동이, 오랑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을 보면 중국 지나족은 자신을 제외한 주변 국가를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라 칭하며, 본격적으로 오랑캐로 매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중화사관을 충실히 따라서 작금에도 동이를 ‘동방의 야만인(the Eastern Barbarians)’이라 번역한 역사서가 미국 학계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는 세계인들은 동방의 한민족을 중국보다 열등한 민족, 천자 나라 중국으로부터 문물을 수입한 제후 국가로 착각하게 된다. 잘못된 역사 왜곡의 실핏줄이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온 세상으로 퍼지고 있다.
동이東夷는 ‘동東’과 ‘이夷’가 합쳐진 말로 ‘동방의 뿌리 되는 민족, 동방의 어진 민족’을 뜻한다. 공자도 『논어』 「자한 편」에서 ‘어진 군자가 사는 나라’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동이東夷는 동방의 오랑캐로 얕잡아 불릴 호칭이 아니었다. 춘추사관으로 중앙의 중국이 바라본 동방의 오랑캐 문화가 아니었다. 『설문해자』를 보면 동이는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종대종궁從大從弓’이라 했다. 즉, 동방의 사람들은 큰 대大 자, 활 궁弓 자로 상징될 정도로 큰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또 큰 대인, 깊고 단단한 뿌리, 근본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알고 보면 구한말까지 우리 조상들이 중국을 부른 ‘지나支那’라는 호칭 그대로 그들의 뿌리인 황제헌원을 비롯하여 오제五帝로 꼽히는 소호, 전욱, 제곡, 요, 순과 그 뒤를 이은 하상주 3왕조의 개국조인 하나라 우, 상나라 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까지 모두 동이족 혈통이었다. 황제헌원은 환웅천황의 가르침을 받은 웅족의 후예였다. 이렇듯 지나족은 동방배달의 가지가 되는 혈통이었다. 한 형제였던 것이다.
舜生於諸風(순생어제풍) 移於負荷(이어부하) 卒於鳴條(졸어명조) 諸風負荷鳴條(제풍부하명조)
東夷之地(동이지지) 舜東夷之人也(순동이지인야)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돌아가셨는데, 제풍, 부하, 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 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
특히 상(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제도와 풍습이 당시 그들의 상국上國이던 단군조선의 것과 아주 유사했다. 따라서 공자가 추구한 원형 예법, 은나라의 뿌리 문화는 결국 동이족의 예법이었다. 그 실례로 공자가 칭송한 소련과 대련의 3년 상을 보면 알 수 있다.
孔子曰(공자왈) 少連大連善居喪(소련대련선거상) 三日不怠(삼일불태) 三月不解(삼월불해)
期悲哀(기비애) 三年憂(삼년우) 東夷之子也(동이지자야)
공자는 “소련과 대련은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 (『예기禮記』 「잡기하雜記下)
동방문화의 심장이자 천명문화의 출처는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 문화권이었다. 또 천자사상의 상징은 용봉, 중국인들이 높이 칭송하는 중화제일용과 중화제일봉이 모두 중국 문화의 담장 밖 동이족의 중심지였던 홍산유적에서 나왔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도 공자가 말한 예악의 고향은 동이東夷인 것이 자명하다.
지나支那의 선조들은 우리나라를 ‘태평지인太平之人’(중국 고대 백과사전 『이아』)이 사는 나라, 불사지국不死之國, 동방의 큰 활 쏘는 사람의 나라, 신선이 사는 나라,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仁方〕등으로 불렀다. 또 후한 시대에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서 동방 천자제도의 근원이 동이족에서 왔음을 전하였다.
天子(천자) 夷狄之所稱(이적지소칭) 父天母地故(부천모지고) 稱天子(칭천자)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 (채옹蔡邕 『독단獨斷』)
한마디로 동방에는 하늘과 땅을 부모로 모신 천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봐도 동방 조선 문화는 매우 뛰어났다는 것이다. 『용봉문화원류』의 저자, 왕대유王大有는 배달 동이족의 제왕인 태호 복희와 염제 신농이 용봉龍鳳문화의 뿌리라 말한다. 한마디로 중국이 자랑하는 용봉문화의 원형은 동이족, 동방 조선의 문화라는 것이다. 용봉은 천지와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신 상제님의 영물이자, 동방 제왕의 상징이었다.
공자의 아버지는 춘추시대 송나라 숙량흘叔梁紇이다. 숙량흘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예다. 『논어』에서 미자는 기자箕子, 비간比干과 더불어 은나라의 세 현인으로 칭송받았다고 전한다.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작모여몽좌전양주지간) 予始殷人也(여시은인야)
어젯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내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는 자신이 두 기둥 사이에 놓여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자신의 뿌리를 자각하게 된다. 또 다른 기록인 『예기禮記』 「단궁檀弓」에서도 ‘구야은인야丘也殷人也’라고 했다. 즉 공자의 혈통은 은인殷人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죽기 전에 자신의 뿌리를 찾은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새로운 학설을 지은 것이 아니라 ‘옛 것(배달과 단군조선의 동이족 예악문화)을 믿고 좋아해서 정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공자는 신교문화의 풍토 속에서 동방 배달 조선의 동이문화를 수집, 정리하여 유교의 사상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예기禮記』를 보면 ‘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공자는 본래 은나라의 제후국이던 송나라의 왕 미자의 후손으로 미자의 조상은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다. 또 공자의 손자 자사는 ‘대동大同 세계를 궁극의 이상으로 삼은 유교 도덕의 원 시조’를 ‘요, 순과 문왕, 무왕’이라고 하였다. 요堯는 동이족 유웅씨 후손인 황제헌원의 5세 손(『사기史記』)이고, 순임금 또한 동이 사람(『맹자孟子』)이다.
유교의 주요 경전인 『주역』, 『시경』, 『서경』 등을 보면 모두 천天, 천명天命 사상의 근원인 ‘상제님의 가르침’을 노래하고 있다. 한 예로 『시경』에 ‘상제님께서 네게 임하시니, 마음을 둘로 하지 말라(上帝臨汝, 無貳爾心).”는 가르침이 있다.
공자가 이상 사회의 모델로 삼은 3천 년 전, 주周나라의 왕들은 하늘을 인격적인 상제천上帝天으로 인식하였다. 공자또한 『주역』 「설괘전」에서 “상제님이 동방에서 출세하신다(帝出乎震).”라고 하여 상제님을 인간에게 천명(天命)을 내리고 인간이 덕을 잃으면 천명天命을 거두고 재앙을 내리는 존재로 여겼다. 임진왜란 때 유학자인 서애 류성룡은 이순신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전했다.
● 깊은 밤 어둠 속에 상제님께서 내게 임하시네. 방안 깊숙이 홀로 있는 곳에도 천지신명이 살피고 계신다. …삼가하고 두려워하여 ‘상제님의 법칙’대로 따를지어다.
또한 유교 경전 『서경』에는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에 요임금과 순임금이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論語)』에서는 하늘을 인격적인 상제천보다는 자연천自然天과 도덕천道德天의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상제님을 잃어버리면서 유교는 송대宋代의 성리학으로 흘렀으며, 삼신상제님을 받드는 제천문화를 상실하고 고답적인 이기론理氣論으로 빠져 버렸다. 이후 유교에서는 신교인 상제 신앙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양문명의 뿌리는 동양이라고 말하는 서양의 학자들
서구 유럽의 역사왜곡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블랙아테나』이다.
유럽에서는 원래 유럽문명의 기원은 이집트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이 19세기 후반 같은 아리안인종의 고대 그리스를 적극 발굴하여 유럽과의 연계성은 강화하고 이집트와의 연계성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문명과는 별도로 성장해온 독창적인 문명으로 그리스를 부각시켜 그 때부터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블랙 아테나』를 읽고서 그리스의 역사와 서양사, 그리고 세계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반성을 했다.
그리스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2000~2500년 늦게 시작돤 문명이었으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나 페니키아 문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시켜왔으리라는 것이 순리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약소국인 아테나의 왕자 테세우스가 제물이 될 사람들과 함께 크레타로 간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축적되어 그리스신화는 이집트신화와 터키지역의 히타이트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솔론, 유클리드, 플라톤 등 그리스의 유명학자들이 이집트를 갔다. 피타고라스 정리는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서 찾아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의 기원은 이집트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수학의 기원도 이집트라고 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많은 그리스신들이 이집트에서 왔다고 말했다.<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볼프강 작스가 『반자본 발전사전』12쪽에서 이야기한대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도 세계사, 사상, 학문은 서구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학자들이 수많은 역사왜곡으로 서구에 편향된 세계관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지금도 따르고 있다. “서구중심의 탈식민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는 일찍부터 서구가 앞섰다는 주장을 모두 부정한다.
영국이 벵골을 식민지화하면서 인도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팔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유럽은 중남미의 은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고 인구와 자원이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투자가 증가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야 겨우 아시아을 앞섰다는 것이다. 아시아를 추월한 것이 1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유럽이 동양을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곳으로 낙인을 찍고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문명적인 곳으로 서양은 긍정적인 것으로 동양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동양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자신들이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시키려고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현실 자체를 유럽학자들이 왜곡하여 거짓말을 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1820년대까지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서구가 세계사를 가장 발전시켜왔다고 배워왔고 따라서 근대를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중세는 동양의 중세보다 뒤쳐진 암흑중세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런데 칼 맑스나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들은 서양이 우월하다는 관점에서 자료들을 해석하고 이론화 했기 때문이다. <출처: 전북대 이정덕교수님 글 요약>
서양사는 아시아 문명이 모태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출처: 세계일보 2011년7월15일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가짜다.
리 오리엔트 = 다시 동방으로 !!
저자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의 잘못된 시각을 수정하고 세계사에 관한 사고의 틀을 완전히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 미국 사회학회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 된 바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발전과 세계체제의 기원에 관하여 근본적인 재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혁신적이고 흥미진진한 프랑크의 역작이다.
" 오리엔트" "빛은 동양에서".
세계 문명의 근원은 동양이었고 동양 역사의 시작이 곧 세계 역사의 시작이었다.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을 강조하며 유럽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역사관과 세계사를 수정 하기를 요구한다. 우선 프랑크는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남짓이다. 그 이전, 그러니까 1800년 이전까지는 아시아가 세계를 주도 하고 있었다.
1800년 이전 변변한 자원도, 풍부한 자본도 없었던 유럽은... 자원과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 역시 1800년 이전 유럽은 아시아의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계기는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때문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2003년 3월 07일
서구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저 / 정경옥 역 / 에코리브르 / 2005년 1월/ 18,000원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라 동도동기(東道東器)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특징을 축약해 흔히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 책을 보고 나면 이 말은 동도동기(東道東器)로 바꾸어야만 할 것 같다. 정신문명은 물론이고 기계문명마저도 그 발원지는 동양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양이 서양과의 문명발달 경쟁에서 근소한 시간적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역사의 전 과정을 통틀어 ‘숙련된’ 동양에서 ‘미숙한’ 서양으로 ‘모든’ 인문적 지식이 ‘전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 전수목록에는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거의 완제품 수준까지 아우르고 있다. 저자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사료와 자료들은 충분히 치밀하고 방대하다. 따라서 구태여 저자가 존 M.홉슨이라는 전형적인 서양인 혈통이란 걸 내세우지 않아도 된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문명발달의 원조 논쟁에 있지 않고, 인류문명에 있어서 동양의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던 문명사적 역할이 얼마나 축소되고 은폐되어 왔는지를 밝히려는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서양이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부터임도 알게 된다.
동양은 ‘창조’ 서양은 ‘모방’
“서양 사람들은 독일의 발명가 구텐베르크가 문명에 혁신을 가져온 인쇄기를 최초로 세상에 소개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자 뒤에 숨은 진실은 이동형 인쇄기에 사용하는 최초의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적어도 50년은 먼저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서문 중)
흔히 인류의 3대 발명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라고 한다. 이 발명품들은 모조리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서양으로 전수되었다. 앞서 저자의 서문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는 인쇄기술을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입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고정관념의 먼지를 털어 내어야 한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은 훨씬 오래 전부터, 아니 역사의 전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교류는 일방통행이었다는 점이다. 즉 서양은 늘 문명의 수혜자였다.
동양은 ‘창조’하고 서양은 ‘모방’했다. 사실상 근대까지도 유럽인들의 기술수준은 모든 분야에서 동양에 비해 아주 조악했다.
한 유럽 지식인은 그의 저서 『위대한 우(禹)임금과 공자(Yu le Grand et Confucius)』에서 ‘유럽이 17세기에 이르러 마치 ‘유전자 대혁명’을 겪는 것처럼 일대 변신을 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뉴턴 등을 비롯한 대과학자들의 세기가 열린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양은 더 이상의 ‘창조적 지식’의 출현이 없는 까닭 모를 정체기로 빠져들게 된다
서양인들의 모방과 착취
문제는 서양인들이 주도권을 쥐자마자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약적인 발흥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지적인 부채에만 기인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은 식민지화를 통해서 무상의 노동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독점에 가까운 시장확보라는 이중 삼중의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영국의 산업혁명 또한 동양으로부터 이러한 경제적인 이득뿐 아니라 기술적인 모방까지 동원되었다고 말한다.
현대문명을 말함에 있어서 수학(數學)의 중요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아라비아 숫자로 알려진 오늘날의 십진법 수 체계 그 외에도 항해술, 조선술, 천문학, 도로망 등 세계를 이미 하나로 만들었던 교통수단은 그 어느 것도 동양인들의 지적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이라고 착각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작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을 비롯한 소위 제3세계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녔다.(이하 생략)
대만출신으로 일본 도카이대학 교수로 있는 사세이키가 쓴 『유럽 중심사관에 도전한다』에 따르면 “유럽중심 사관이 대두된 것은 17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서구가 직선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을 확실하게 확립시켰고 이러한 발전의 최첨단에 서구가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정립되던 시기이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중심사관이 유럽을 우월한 모습으로 역사를 과장하고 왜곡하였다. 유럽에서 만든 세계사는 서구편향적으로 쓰여졌다며 비판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유럽학자들이 주도하여 세계사를 유럽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왜곡하여 썼고 이러한 해석과 왜곡에 의존한 세계사가 현재도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불교문화의 뿌리는 대한민국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이미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사실도 여러 곳에서 밝혀졌다.
[화엄경]에서 “해중(海中)에 금강산이 있는데 옛적부터 모든 보살이 그 산중에 살고 있다. 현재도 법기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 상주하며 불법을 강설하고 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종주국이 바다 건너 금강산에 있는 나라’ 라는 말이다.
[삼국유사] [아도기라] 등 여러 서적에 전불(前佛)시대 절터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3000여 년 전에 이미 한국에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말이다.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인간과 신명이 소통하였고, 수행을 통해 인간을 완성시키는 가르침을 역사상 처음 열었던 것이다. 제사는 유교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이 행해왔던 신교 문화의 예식인 것이다.
한민족의 시원 역사의 핵심은 제천문화다. 하느님을 받드는 문화다. 이문화의 일반적 정의는 하늘 땅, 천지부모와 인간이 하나되는 의식이다. 제천문화는 동서양의 종교와 하나님 문화의 원형, 원조가 한민족의 제천행사다.
제천문화의 유적지가 마리산에 있다. 고대 한민족은 1년에 두 번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3월 16일 대영절은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 삼신상제님을 맞이하는 천제를 올린 민족 대축제의 날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 잃어 버렸다. 문화의 근원이 말살되었다.
사마천의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고대(古代)에 태산(泰山)과 양보산(梁父山)에서 하늘에 제사지낸 왕은 72명이었다. 제왕이 창업을 하고 상제님께 신고식을 올리는 것이 인생 일대에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했다. 소위 봉선제(封禪祭)이다.
배달국의 건국일인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올렸다. 그런데 지금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개천절로 왜곡이 되었다. 해마다 대영절이 되면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제물을 바쳐 경배하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천제를 올렸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이것이 왜곡되고 뿌리 문화가 단절되어 전혀 모르는 것이다.
도교문화의 뿌리 대한민국
일반적으로 중국 도교의 시조를 황제헌원과 노자[黃老]라 한다. 중국 한漢족의 시조인 4,700년 전 황제헌원은 신농씨의 아버지인 소전少典에서 갈라져 나온 유웅씨(웅족) 계열의 동방족이다.[삼한관경본기]
번한(番韓)의 역대 부단군 이름과 통치 기간이 기록되어 있는 [번한세가番韓世家] 하편을 보면 노자에 관한 놀랄 만한 내용이 한 구절 보인다.
■ (번한의 60대 왕인) 도을(道乙)이 즉위하였다. 계미癸未(BCE 518)년에 노나라 사람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버지는 성이 한韓이고 이름이 건乾인데, 선조는 풍이족 사람(風人, 태호복희씨와 같은 풍이족)이다. (道乙立. 癸未, 魯人孔丘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 名乾, 其先風人)
노자는 단군조선 말기의 인물로 본래 성은 한韓씨이고, 동이(東夷) 구족(九族) 중 풍이족(風夷族)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노자의 사상적 근원은 배달의 동방사상(신교神敎 삼신문화)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노자는 왜 자신의 성과 이름을 이이李耳로 바꾸었을까?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이은 자하선인紫霞仙人은 [신교총화(神敎叢話)]에서, 노자는 비록 서쪽 땅에 살고 있지만 자신은 본래 동방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후세에 남기려고 성을 '동방[木]의 아들[子]' 이라는 뜻으로 이李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황제 헌원과 노자는 배달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동방족 출신이며 동방의 신교神敎를 서방에 전파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와 춘추시대 중국 고전인 [관자管子]에는 황제헌원이 배달국에서 선도仙道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 때 서적인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서는 "황제가 홀로 동북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아래에서 도를 닦아 날이 오랜 뒤에 성공했다” 라고 하였다.
고대부터 신선 사상의 중심지로 숭앙되었던 삼신산三神山은 바로 동방의 백두산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인들조차 신교神敎 삼신 사상에 따라 이름 붙여진 삼신산(三神山,삼신상제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신선 사상이나 신선의 성지로 인식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보면 제齊의 위왕威王·선왕宣王과 연燕의 소왕昭王을 비롯하여 진시황, 한 무제 등이 모두 장생불사를 갈망하여 동방[海東]에 사람을 보내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중국에서 신선 사상이 만주 ·한반도와 근접한 연燕·제齊나라 지역(하북 · 산동성)에서 비롯되고 널리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시선을 끈다. 이들 지역은 배달 · 조선에 속한 강역이고, 중국 내에서도 신교의 삼신 사상이 가장 먼저 보급되고 뿌리 내린 곳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도교문화는 동방 한민족 신교神敎의 삼신상제) 사상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으며, 신교神敎가 점점 쇠퇴하면서 다른 3대 종교와 더불어 역수입된 것이라 해도 결코 빈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4대 종교를 탄생시킨 뿌리가 바로 인류 문화의 시원인 신교神敎이며, 이 4대 종교는 모두 환국과 환국의 정통 장자족인 한민족의 신교에서 흘러 갔다가 다시 한민족의 현 근거지인 이땅으로 흘러들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1만 년 전부터 꽃핀 동방 문화는 5천여 년 전에 서방으로 전파되었다. 송호수 교수의 다음 지적과 같이, 지구를 두루두루 돌고 돌아 제 뿌리를 향해 찾아든 모습은 다양하다.
■ 불교는 삭발 · 장삼에 불경을 끼고 되돌아 왔고, 유교는 유건儒巾·도포道袍에 사서삼경을 싸서 되돌아 왔다. 도교는 오두미五斗米를 갖고 무위자연하면서 구름을 타고 들어 왔고, 기독교는 노란 곱슬머리와 파란 눈에 붉은 신·구약을 끼고 들어왔다.
이러한 모습을 과연 과거급제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위풍威風으로 보아 주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이 가문家門[조국]에 대한 공과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최인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다음 유훈遺訓을 깊이깊이 새겨 보아야 하리라.
■ 오늘의 한국은 새 역사를 창조할 때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면 새 역사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재발견은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이다. ([한국의 재발견])
‘신시(神市)배달’과 ‘청구(靑丘)배달’을 기록한 문헌들
‘신시(神市)’배달을 기록한 문헌
◆<삼국유사> 일연 1206~ 1289 <권1 기이1 고조선(왕검조선)>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 유희령 1480~ 1552 <권1 전조선>檀君 姓桓氏 名 王儉 .. 有神人桓因之子 桓雄 .. 謂之神市 在世理化
◆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홍언필 1530 <권54 평안도4 영변대도호부 고적 태백산)太佰山(古記 昔有天神桓因 名庶子雄 .. 謂之神市 主人間三百六十餘事)
◆ <기언記言> 허목 1595~1682 <권32 외편동사1 단군세가>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神市 生檀君..
◆ <약천집藥泉集> 남구만 1629~1711 <제29잡저 동사변증 단군> 云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受天符印三箇..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 且其五行治水之法과 皇帝中經之書가 又出於太子扶婁오 而又傳之於虞司空하고 後에 復爲箕子之陳洪範於紂王者가 亦則皇帝中經과 五行治水之說이니 則蓋其學이 本神市邱井均田之遺法也니라.
오행치수법과 <황제중경皇帝中經>이 부루태자에게서 나와 우사공虞司空에게 전해졌는데, 후에 기자箕子가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진술한 홍범구주 또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이다. 본래 그 학문은 배달국 신시시대의 구정법邱井法과 균전법均田法에서 전해 내려온 법이다. ([태백일사]<태백일사>)
‘청구(靑丘)’배달을 기록한 문헌
◆ <규원사화> 북애자 1675 <태시기단군기>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 曰靑丘國 宅樂浪忽'
◆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환웅께서 천하를 안정시키고 정하신 나라의 이름이다. 수도는 신시요, 후에 청구국으로 옮겼다. 18세를 전하니, 역년은 1,565년이다. <삼성기(三聖紀 下)>
◆ ‘神時之季에 有蚩尤天王이 恢拓靑邱하시고. 배달국 신시 시대 말기에 치우천황이 계시어 청구(靑邱)를 널리 개척하셨다.’ <「삼성기三聖紀 上」>
◆ 蚩尤起靑邱하시니 萬古振武聲이로다. 淮岱皆歸王하니 天下莫能侵이로다
치우천황 청구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용을 떨치셔서 회수태산 모두 천황께 귀순하니 천하의 누구도 침범할수 없었사옵니다. <단군세기(檀君世紀)>
환국 시대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천부경(天符經)』,여기에는 우주론을 바탕에 깔고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일체관계에 대한 인성론의 문제가 담겨있고, 환국 다음에 배달국의 개창자 배달환웅이 열어주신 우리 한민족의 신관, 신학의 원전 『삼일신고(三一神誥)』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 재상 을파소를 통해 내려온 366가지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덕목을 기록한 『참전계경(參佺戒經 )』 이것이 우리민족의 3대 소의경전이다.
『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 88쪽을 보면 ‘『천부경(天符經)』’ 의 유래가 나와 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구전지서야(天帝桓國口傳之書也)”라. 천부경은 환국(桓國)에서 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한 글이라는 것이다.
환웅천왕의 배달국 때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해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신지(神誌)가 남긴 전고비문(篆古碑文)을 보고 작첩(作帖)을 복원해서 전어세자야(傳於世者也)라.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음양오행 문화는 역사성으로 보면 2, 3천 년이나 4, 5천 년 전에 나온 것이 아니다. 흔히 음양론의 원 뿌리, 연원을 하도河圖, 낙서洛書로 말하는데, 그 근원을 추적해서 들어가 보면, 최소 1만 년 전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음양론이 정리된 첫 작품이 『천부경天符經』이다.
선사시대 때의 유물이나 사람들이 살던 주거 터, 동굴 벽화를 분석해 놓은 자료들을 보면, 태고시대의 사람들이 음양적 사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천부경』이 음양론의 출발점이며, 실제 그것을 문명화한 진리의 원본이 5,600년 전, 태호 복희씨가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받아 내린 하도河圖다. 그 하도河圖에서 팔괘 문화, 주역 문화가 나온 것이다.
천부경을 보면 1, 2, 3이 나오고, 운삼사運三四(3, 4) 나오고, 성환오칠(成環五七)에서 5, 7이 나오고, 生七八九 생 7, 8, 9가 나오고,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10까지 해서, 수의 원리가 1에서 10까지 다 드러난 것이다.
1만 년 전에 1에서 10의 수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다. 이 지구촌 인류문화사상 처음으로 1에서 10수의 자연수를 발명을 한 것아다. 이게 무슨 아라비아인들 또는 중동 인도 유럽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지금의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24절후와 해시계 규표를 태호복희(BCE 3528 ~ BCE 3413)씨가 처음 발명한 것이다. 이것을 시간 공간의 구성 원리로 다시 한 번 계시를 해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서관(圖書館)이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다. 시간과 공간의 원리에 의해서, 1에서 10수의 구성 원리를 보는 것이다.
『낙서(洛書)』에는 1에서 9까지 수가 배열되어 있는데 2 7 6, 9 5 1, 4 3 8, 이것을 서양에서는 마방진魔方陣magic square이라 하며 교과서에도 나온다.
미국의 수학자 프랭크 슐츠F.Swetz는 『낙서洛書의 유산Legacy of the Luoshu』에서 ‘낙서洛書는 비단길을 통해 동서양을 왕래한 아랍인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인도, 동남아, 중동, 유럽 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추적해 봤더니 이슬람 문화권에도 낙서洛書가 전달됐고 유대문화에도 낙서가 들어 있더라는 얘기다. 2,500년 전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이것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가 자연수의 체계에 눈을 뜬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오늘의 서양 과학문명은 끊임없이 피타고라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왔다고 했다.
서양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수(數)에 의해 규정된다(All things are ruled by numbers).”는 유명한 얘기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동서양 문명의 뿌리가 바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라는 얘기다.
낙서洛書의 수를 그대로 옮기면 3차 마방진이 되는데, 가로·세로·대각선의 합계가 모두 15가 된다. 마방진은 한마디로 숫자 속에 숨겨진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의미한다.
낙서(洛書)는 4,300년 전, 중국에서 9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 임금이 치수공사를 하던 중에 물 속에서 나온 거북이 등에 있는 무늬를 보고 낙서洛書를 그리게 되었다. 당시 단군 성조의 맏아들 부루(扶婁) 태자가 아버지 단군 성조의 명을 받고 우(禹)에게 치수 비법을 전해주었다. 그 사실이 중국 역사책 『오월춘추』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책을 보면 ‘창수사자(蒼水使者)’가 나옵니다. 창수(蒼水)는 지금의 황해 바다 북쪽에 있는 대진국,발해(渤海)다. 그런데 꿈에 받았다고 왜곡시킨 것이다.
사자使者가 대진국,발해를 건너가서 금간옥첩(金簡玉牒), 금옥과 같이 아주 잘 만들어진 함에다가 치수비법을 넣어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행원리로 되어 있어서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우(禹)가 9년 홍수를 다스리고 요순시대를 이어 하(夏)나라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호복희씨가 받아 내린 하도(河圖)와 우(禹)임금이 받아 내린 낙서(洛書)가 중동과 그리스 지역에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서양에서 2,500년 전에 수(數)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근대 과학 문명과 오늘날 컴퓨터 문명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周易)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다. 그는 1697년 ‘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논문의 부제가 ‘고대 동양의 태호복희의 괘상에 나타난 이진법 산술이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에 관한 고찰’ 이라는 것이다.
그는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다.” 라고 말한다.
결론은, 음양론은 인류 문화의 원형인 신교(神敎, 以神說敎)의 우주론이다. 다시 말하면 음양오행법칙은 신교神敎의 우주관이다.
신선 자하(紫霞)선생의 『신교총화(神敎叢話)』
『신교총화 (神敎叢話) 』란, 책이름 그대로 인류 문명의 모체인 신교(神敎)에 얽혀있는 여러 가지 중요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자하선인과 팔공진인 이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 나와 있다. 스승인 자하는 이름이 이고(李고), 자는 덕화(德和)이며 자하(紫霞)는 그의 호로서 광동(廣東)인이다. 태백산 구화동(九花洞)에서 살았고 『신교총화』 저작 당시인 계사(1893)이다.
神敎之爲衆敎之爲祖, 爲母之理… 人情多私 忘本源 … 不究神市敎之本源如何也, 亦自失其源
신교는 뭇 종교의 조상이며 모체가 되는 뿌리진리이다. 말세가 되면 인정이 사욕으로 들끓어 본원을 망각하리라. 장차 신시(배달) 시대의 가르침(神市敎)인 신교의 본원을 연구하지도 않으리니 어쩌리요. 제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상실하리라.
從今以後, 世路尤險, 千私萬魔, 以亂天理矣
종금 이후로 세로(世路)가 험난하여 천사만마(千私萬魔)가 천리를 어지럽히리라.
人皆滔滔, 自欺欺人, 天地光明失矣
사람이 모두 도도해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며 하늘과 땅이 광명을 상실하리라.
人不知其祖先之道, 而只從他, 便是風麻漢
사람들이 자기 선조의 도를 알지 못한 채 다만 다른 것에 매달려 있으리라.
後世人心多邪曲, 故逕入邪道, 不知眞爲, 奈何! 三鮮九壬後, 人多鬼魔所使而如狂也
사람의 마음이 삿(邪)된 것에 구부러져서(曲) 사도(邪道)에 잘 빠져들고 진실과 허위를구분하지 못하리니 어찌하리요! 또 귀신과 마귀에 홀려서 미친 것 같으리라.
[神市]眞理將明於天下, 長男運更壯, 而小女從之理 自然的?
동방신시(배달)의 신교 진리가 장차 천하에 밝혀지리라. 동방 장남[震長男]의 운이 다시 용솟음치게 되며, 미국[兌小女]이 이를 순종하게 되는 이치는 우주 자연의 변화원리이다.
後天井有萬二千道, 有萬二千人 人能日行萬里, 飛揚天地如鳶飛, 處處生不夜城, 然後眞正大敎主出矣.
후천 벽두에 1만 2천 명의 도인이 출세한다. 이 때에는 사람마다 하루에 만리를 가는데 천지를 날아다니는 것이 솔개가 하늘을 나는 모양 같다. 곳곳에 사람 사는 모습은 밤이 없는 성[不夜城]과 같다. 이러한 대문명이 열린 후에 참되고 올바른[眞正] 세계통일의 대교주(大敎主)가 출세하리라. (신교총화』 44쪽)
첫댓글 귀한 글로 주역의 의미를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기를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ipL7DHS_X4
요하문명 (KBS_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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