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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구원의 꿈
―씨알이 새 저녁에 꾸는―
信天함석헌
일대변화
인류는 지금 일대변화 중에 있다. 지금만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주는 영원한 변화의 과정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전 어느 때 보다도 그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전에 없는 변화라고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일대변화라고 한다.
동양사상의 근본인 역의 역이란 말은 달라진다는 뜻인데, 그 역의 목적은 사실은 불역 곧 달라지지 않는 것을 찾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로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는 것이 없이는 달라지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달라지는 것이 없이는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천지 만물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하고 보았을 때에 어디서 반드시 달라지지 않는 것을 찾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여 무왕불복(無徃不復)이라(주희) 부물(夫物)이 운운(芸芸)하야 각귀기근(各歸其根)이라 (老子)했다. 그것이 동양적인 것이다.
거기 대하여 서구적인 생각은 매우 동적이어서, 그 달라지는 것 달라지지 않는 것을 상대적으로 놓고 보는 데서는 같으면서도, 그들은 달라지는 편에 치중하고 보아 왔다. 그것이 서구 문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명이 달라지다 달라지다 못해, 그 어디가 닿을지를 알 수 없는 지경에를 들어가서 아찔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재다. 마치 비유한다면 회오리바람을 따라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중심에 가까이 있을 때는 그 돌아가는 원이 작기 때문에 맴을 돌기는 하면서도 미구에 제자리에 다시 돌아온다 하고 안심을 했는데 그래서 시비성패전두공 청산의구재(是非成敗轉頭空 靑山依舊在)라고 했는데,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을 도부소담중(都付笑談中)이라, 웃음으로 이야기 하고 갈수 있었는데,(三國誌) 이제는 돌다 보니 점점 가속도적으로 돼서 중심이 아주 없어진 듯한, 저 명왕성의 궤도보다도 먼 데로 나가버렸다. 그러면 돌아올 데가 없어졌다. 그것이 오늘의 인간의 마음을 휩쓸고 있는 혼란감 아닐까?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이상은, 생각하는 존재인 이상은, 어딘가 가 닿는 데가 없을 수 없다. 마음은 유성일수는 없다. 아니다, 유성도 닫는 동안 공기와의 마찰 때문에 불이 일어 타버리지만, 그 풀어졌던 물질은 또 어느 억만년 후 또 다른 새 천체가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도의 철학은 우주의 낮, 우주의 밤을 벌써 부터 말해 왔다(바가바드기타) 하여간 생명은 살아야 한다. 생명은 불사조다. 제 타버린 재속에서 새 생명으로 나오는 것이 생명이다.
일대변화란 그래서 하는 생각이다. 변도 화도 다 달라진다는 뜻인데 변은 달라짐 중에서도 갑자기 달라짐을 가르치는 말이다. 변(變)자 밑에 있는 복(攵)이 그것을 표시한다. 그것은 작대기를 들고 두들기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힘을 넣어서 급히 달라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기 대해 화(化)는 질적으로 아주 전의 모습이 없이 달라짐, 물리적이 아니다 화학적인 변화를 뜻한다. 화(化)의 한 편의 인(亻)은 사람이라는 인(人) 자인데 이쪽의 匕는 人을 뒤집어 놓아서 죽은 것을 표시하는 자다, 죽으면 아주 달라진다. 우리말로 되졌다는 말이다.
사람의 일은 따지고 보면 결국 달라진 환경에 맞추어 저도, 또 남도 의식이 달라지도록 하자는 것인데. 그러려면 그 상대가 되는 환경을 될수록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이 자리에서 살아나려면 이 자리가 죽을 자리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일대변화란 곧 “이 자리는 죽는 자리다”하는 말이다. 인간 존재는 위기적으로 파악해서만 구원 된다. 그 의미에서 숨이 넘어가는 자리에서 “혁명상미성공, 동포잉수노력(革命尙未成功, 同胞仍須努力)”이라고 한 손문(孫文)은 혁명가다운 사람이었다. 상미성공(尙未成功)이지, 아직 멀었지, 언제면 “됐다”가 있을 수 있겠나? 없다. 영원한 미완성의 혁명이다. 갈수록 태산이란 말이 있지만 인간역사야말로 갈수록 태산이다. 전에도 그것을 아노라 생각 했지만 이 시점에 와보니 그때 태산이라던 것은 개미 둥지도 못되더란 말이다. 궤도라 법칙이라 하는 말이 있지만 이제 앞을 내다보면 전에 보던 궤도란 것 법칙이란 것이 이제 적용될 것이 거의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이비 혁명가들은 말하기를 “이 앞으론 혁명은 없다”한다. 그것은 전체를 살려내는 참혁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씨을 잠 들여 놓고는 도둑질을 하려는 속임수의 말이다. 그런 구차한 평안을 탐하는 생각부터 버려야한다. 그리고 콜럼버스 모양 전에 가 본 일이 없는 폭풍의 바다에 조각배를 내는 모험을 해야 한다. 창조하는 것이 마음이다.
고민하는 국가
오늘이 이 일대변화의 위기를 몰고 온 것은 무엇인가? 제2차 세계 대전이다. 모든 전쟁이 다 그런 것이, 전쟁만 아니라 모든 사건이 다 그런 것 같이, 제2차 세계 대전도 지나간 모든 역사의 결과인 동시에 또 앞으로 올 역사의 출발점이다. 그 쓰던 말을 잠깐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전쟁이 일어나려 할 때 이편 저편을 구별할 것 없이 다 같이 한 소리가“가진 나라” “못가진 나라”였는데 그래 서로 싸웠는데, 오늘날은 가지고 못가지고가 문제 아니다. 천연자원 그 자체가 문제 된다. 그때만 해도 모든 나라가 제 인구의 많은 것을 힘으로 자랑했는데, 지금 많으냐 적으냐가 문제 아니라 인구 폭발을 걱정하고 있다. 그때에는 유일의 대적이 파쇼였는데, 오늘날 경찰국가 정보국가 아닌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1차 대전만 해도 민족 자결이니 어쩌니 하며 지도를 놓고 그 국경선을 고쳐 그리는 것으로 종국을 지을 수가 있었는데, 오늘날 국경선이 어디 있는가? 사실상 없어졌다. 오늘의 표어는 inter다. 사실 네 국민 내국민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이 오늘의 국가다. 공산 나라에서는 계급투쟁을 내세워왔는데 지금은 계급도 알 수 없이 됐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의 國家들은 모두 그 일체감을 잃어버렸다. 제 나라 국민을 전적으로 믿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남의 나라를 무조건 적국으로 아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국제적 협력을 하는 반면, 국제적 폭력단이 문자 그대로 횡행천하(橫行天下) 하고 있다. 오늘의 국가는 다 고민하는 국가다, 나라에 도둑이 많다면 결국 나라 자체가 도둑이 됐단 말 아닐까? 폭력단이 많다면 결국 국가 자체가 폭력단이 됐단 말 아닐까? 지난날의 모든 국가의 멸망한 역사를 보아서 그것은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인 이상 도둑을 막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국가의 시작은 커다랗게 정치 철학으로 설명할 것 없이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도둑막자는 것이었다. 국(國)자의 구조가 그것을 말해준다. 口는 사람이고 그 밑의 一은 땅인데 거기다 무기인 과(戈)를 더해서 무기를 가지고 일정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 도둑이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 나라였다. 그래서 본래는 혹(或)자로 나라라는 의미를 가졌었다. 그런데 무기를 가지고 지키면 안전한 듯하지만 아무래도 안심은 할 수 없어서 “혹시라도”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혹(或)자로, 나라 뜻도 되지만, 또 혹시라도 하는 뜻으로도 쓰게 됐다. 그러나 그러면 혼돈이 생기기 때문에 혹시라도 할 때는 그대로 或으로 쓰고 나라를 말할 때는 거기다 큰 테두리 곧 口를 더해서 國으로 됐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천자니 왕이니 하는 소리, 정치니 교화니 하는 수식은 후에 그 밑에서 얻어먹는 학자들이 부친 것이고 본래는 아주 간단 분명하게, 실제 필요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그 후 국가로 돼버린 것은 손에 무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나쳐 써서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국가가 충실히 그 본래의 의무에 충실했으면 문제가 없는데, 그 도둑 막아주는 것을 기화로 삼아서 자체가 국민의 것을 도둑질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사평안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웬만치 손해를 보면서도 참을 수 있는데 까지는 참지만, 그 한계선을 넘게 되면 그때는 너만 도둑질해 먹겠느냐하는 생각에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오늘 국제 강도가 대낮에 횡행하는 것은 모든 나라가 다 도둑 성격을 띠게 된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역시 국가기 때문에 도둑을 막지 않으면 아니 됨으로 부득이 자기 하는 일은 교묘히 캄풀라지 하며 오로지 힘과 법을 써서 막으려 하게 된다. 그러니 도둑질로 도둑을 막으려니 어찌 잘 될 수 있겠는가. 학자들의 천만언(千萬言)이 소용없고 이것이 현단계의 세계의 국가들의 형편인데 그 의미에서 자체 모순이다. 오늘 모든 나라는 다 고민하는 국가다, 국가가 이미 나라가 아닌데 나라노릇을 해보려니 고민이 없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치가들이 반드시 보통 옅은 의미로의 부도덕에 빠져서 그렇다는 말 아니다,제도적으로 그렇게 타락됐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타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인간이 자랐기 때문이다. 옷이 아기를 해하는 가시가 됐다. 옷에 가시가 반드시 돋아서가 아니다. 아기는 자랐는데 웃은 커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낡은 옷을 베끼고 새로 큰 것을 입혀야 하겠는데 그러려 하지 않는데 가시 아닌 가시가 있다. 가시보다 더 악독한 가시다. 거기 대한 반항이 곧 폭력범의 유행이다. 물론 그 반항이 정당하단 말은 아니다. 그 방법은 잘못 됐다. 그렇지만 그 반항 이유를 인정하지 않고는 나라를 건질 길은 없을 것이다. 작은 옷을 마다고 몸부림치는 아기의 울음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은 국가주의가 그 모순을 드러내는 시대다. 이것을 말할 때는 편이상 나라와 국가를 구별해서 말한다. 나라는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공동체이고, 거기 대해 국가는 어떤 권력구조가 법적으로 그 나라를 대표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은 그 둘이 일치하는 것이지만, 실지에 있어 정말 나라노릇을 하는 국가는 없다. 이름은 나라지만 그것은 어느 집단이 힘으로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심이 끼어있다 그런데 자라나는 아이가 어릴 때는 그 의지가 완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시기 까지는 어른이 후견하는 것이 필요한 모양으로 인간사회도 그렇다. 이날까지 국가는 나라의 소학선생이요 후견인이었다. 그것 없이는 인간은 야만의 지경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인간이 성인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거기 까지 오는데 국가의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부모라도 자식이 성인이 되면 물러서서 자식에게 자유를 허해야만 사랑인 모양으로 정치도 그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自由, 인권의 부르짖음의 나오는 까닭이다.
인간의 성인화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고 하나는 문명의 결과다. 개인이 자라는 모양으로 역사도 자란다. 그것은 생리적으로 태아에 조상반복(祖上反復)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단연 인정해야 한다. 오늘 인간은 이미 제자 저를 알아 자립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씨알의 時代다. 그런데 더구나 그것을 촉성(促成)시킨 것이 과학기술 발달에 의한 매스컴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가 급속히 달라진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가 거기 따라 오지 못하는 데서 일어난다. 더구나 그것은 권력관계기 때문에 한번 잡은 후에는 놓으려 하지 않고, 또 거기 전통적인 감정이 겹쳐서 순순한 자연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모든 진보를 쓰라린 자기 경험에 의해서 쟁취한 선진국에서도 그렇지만 남의 것을 따라서 모방하는 후진국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일대변화의 위기는 이러한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데서 온다. 선진, 후진할 것 없이 문명에 급격한 변화가 왔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은 벌써 국가를 넘어서 인격, 종교, 지난날의 역사적 모든 차별을 넘어서, 하나로 세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이 됐는데, 그래서 벌써 사실로는 많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정치만은 지배집단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비교적 후진적인 감정에 호소해 가면서 옛날의 국가 기구를 그냥 지켜 가려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거기에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고등기술의 발달이다. 인간 생활로는 세계 공통적인 운명을 자진해 져야하는 성인에 도달했는데, 개인적인 이기적 감정은 아직 뿌리 깊이 가슴속에 있다. 그래서 그 고등기술을 악용하여 자기 욕망을 채우자는 야심이 발동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그러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거기다가 더욱 나쁜 것이 종래의 좁은 애국심을 악용하는 옆에 나라가 있는 일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 토론이 많았으나 걱정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요 케케묵은 지배주의의 국가사상이다. 그리해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있고 보면 정치가에게는 안녕, 질서를 위한다는 이유 아래 옛날보다 더한 지배주의의 정치를 정당화하기가 아주 좋아진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과 에너지가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론으로 명약관화(明若觀火)인데, 이 자원문제 공해문제, 인구문제, 핵무기문제 등 치명적인 문제 앞에서 인류가 살아남아 발달을 계속 하려면 국가간의 경쟁 전쟁을 즉시 그만두고 협력하는 길 밖에 없는데, 그것을 다 알면서도 실현을 못하는 것은 낡아빠진, 좁아서 입을 수없는 옷 같은,이 국가주의 때문이다. 어느 국가가, 더구나 선진대국이, 인류구원의 모험적 의협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행하기 시작하면 뜻밖에 쉽게 될 수 있는 것인데, 대국일수록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밑지지 않으려는데 안타까운 고민이 있다. 그 때문에 물질도 정신도 쓸데없이 소모되고 있다. 각국의 여권(旅券)계나 공항에 가보면 그것을 곧 피부로 느끼게 된다. 동아세아의 도전 소리도 사실은 보다 못해 이 생각에서 나오는 안타까운 부르짖음이다.
새 宗敎改革
나는 이차대전이 일어날 때부터 종교는 다시 개혁된다는 생각을 해 온다. 왜 그런가? 인류를 이 문명의 위기에서 건지려면 종교의 힘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 있는 기성종교가 도저히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왜 못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정치와 너무 깊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당시의 내 기분으로는 “야합”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본래 우주의 근본이신 지극히 높은 영(靈)을 섬김으로 사회를 영화(靈化)시키잔 것이지 정치를 섬기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워에서 나는 국가주의라고 했지만 더 분명히 말한다면 대국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그보다도 더 분명하게 하려면 정치주의 혹은 정부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운명공동체로서의 나라는 자연적으로 있는 것, 더 깊이 말한다면 지극히 높은 우주적인 의지의 발로에 의해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적인 데까지 발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에서 말할 때 나면서 본능적으로 하던 것을 의식적으로 깨달아서 하는데 인격 의 성장이 있는 모양으로, 나라로도 그렇다, 사회적인 민중일 뿐 아니라 국민에까지 가야 한다. 그 의미에서 국가는 잘못일 것 없다. 잘못은 그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다. 정부가 스스로 겸손히 자기의 온전치 못함을 인정하면, 불완전하면서도 나라를 대표할 자격이 있지만, “내가 곧 국가다”하면 모든 능한 것이 악이 돼버린다. 그런데 이날껏 내가 곧 국가다 하지 않은 정부는 없다. 정부주의란 자기가 곧 국가요 모든 것은 곧 자기를 위해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부다. 즉 정부의 우상화다. 종교는 그런 정부를 섬겨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거기 대해 싸워 씨알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책임이다.
그런데 지금 있는 종교치고 정부 섬기지 않는 종교가 있을까? 이름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그 실지를 보면 다 권력 밑에 엎디어 있다. 일제말년 모양으로 일단 일이 있어서 하나님이냐 정부냐 하고 그 어느 것에 전적인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강요할 때 과연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의 종교가 능히 그것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절대 단언은 못하지만 현재의 모양으로 보아서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제라도 하나님이냐 가이사냐 진지하게 생각해서 깨끗이 하나님한테 돌아가면 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깊숙이 관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조직체로서의 종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세는 또 몰라도 근세 인간 살림은 종교 비종교를 말할 것 없이 너무 정치적이 돼 버렸다. 그것은 근세 이래의 문명이 과학과 기술 위주의 힘 숭배의 문명이요. 물질주의를 토대로 하는 행복 추구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확실히 큰 착각이 문명을 덮어 놓고 진보다 하는 생각이다. 이제 그 잘못된 철학의 결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에 올라 갈수록 태고의 성대(聖代)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는 것은, 현대주의에 병든 생각이 하는 모양으로 반드시 미개해서 만이 아니요, 또 그렇지 않으면 낡은 기와집마냥 역사의 고색창연한데 향수를 느껴서만도 아니다. 까닭이 있는 말이다. 당초에 사람은 스스로의 속에 있는 영성에 지금 보다도 더 깊은 생각을 기우렸다. 그것은 모든 고전을 고쳐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반드시 강제해 야만 듣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동물에서 스스로 자기를 구별해 낸 것 은 힘만은 아닌 인간적인 것을 개발 해냄으로써 된 것이다. 즉 강약 없이 사랑과 도리로 살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고대의 소박한 국가에 지나친 권력관계를 넣어서 법과 무기로써 지켜나가는 나라를 만든 것은 그 소박한 마음은 팔아먹은 지(知)와 력(力)의 추구자들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 지교(知巧)는 발달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온 것이 유사이래의 일이요, 더구나 근세 이래의 일이므로, 정치적인 것이 인간관계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그에 따라 종교는 기복(起伏)은 있으나 대체로 그 밑에 굴복해 왔다. 그리고 소수의 순교정신에 의해서만 그 본래의 정신을 살려왔고, 그것으로 세상을 건져왔다. 그러한 내림이 지금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모든 종교와 거의 습성이 됐으므로,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의 사는 길, 문명의 구원되는 길은 다시 개혁되는 것 밖에 없다. 이론보다도 사실로 1차대전 때에도 각 나라 종교들이 그 인간대량 학살하는 자기네 나라를 위해 각각 축복했고 2차대전 때에도 하필 독일 교회만 아니라 다 그 정치에 복종했다. 그리고 그 참혹한 것을 지나고 나서야 회개했다. 그 후 또 냉전도 멈추지 못했고 그 후에 오는 산업전 자원(資源)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시 종교 아니고는 길이 없기 때문에 종교는 개혁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낡은 깍지를 벗지 못하기 때문에 이 위기인데, 그것을 멸망에서 건지려면 종교자체가 먼저 깍지를 벗어야 할 것이다. 정교분리는 이래야 되고 의미도 있다. 이날까지 몇 천 년을 동서를 물을 것 없이 인류는 너무 정치적이었다. 물론 사람은 정치적만 아니요, 크게 긴 역사를 굽어 볼 때는 정치가 그 가장 중심적인 것도 아닌데, 지금 인간의 내적 외적 생활의 갈피갈피에 정치가 먹어 들어가 있다. 이 의미에서 문명은 병이요, 타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을 고치고 일대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한 인류는, 석 탄기의 파충류가 제 몸의 비대무기화 때문에 멸망했던 것같이, 정치 때문에 거기서 필연적으로 오는 전쟁 때문에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것을 우리 같이 정치 문제가 몽마(夢魔)처럼 가슴을 눌러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 정신의 안정을 가다듬어 가지고 보면 곧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구원은 자아에서 부터다, 스스로 믿으면 살고 또 남을 살릴 수 있지만 믿지 않으면 망하는 수밖에 없다. 믿음은 의지요 결정이다. 도전하는 것이 믿음이다. 신은 감상주의자는 아니요, 자기가 감상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감상주의 안에는 구원이 없다. 마음은 작은 것이지만, 혼은 마음보다도 더 작은 것이지만, 작다 못해 이(夷)요, 희(希)요, 미(微)라 할 수밖에 없고 현(玄)이라 묘(妙)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감히 우주악(宇宙惡)에 대해 “아니” 할 수 있는 것은 혼이요 믿음이다.
그저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 적어도 부정하려고 노력해야 믿음이다. 자기가 죽어야, 완전히 죽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죽을 수 있기 위해 진지한 기도를 올려야, 믿음이다. 만일 개인에 있어서 죽음에 의해 사는 것이 진리라면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덕에 두 가지가 있을 리(理)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어느 종교가 과연 감히 진리 앞에 국가가 자기부정을 할 수 있어야 참 국가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결국 현실주의 아닐까? 그들은 하나님과 집단을 겸해 섬기려는 것 아닐까? 네가 능히 진리를 위해서는 나라도 버릴 용기가 있으면 그 진리가 너와 네 나라를 구원해 줄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고 나라 있고서야 종교 아니냐 운운하는 그런 따위라면 네가 갈 곳은 안개 속 밖에 없을 것이다.
나라는 쳐들어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이끌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나라 밖에 또 누가 있는 것 아니다. 그러 한 말이 다 협잡꾼의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참으로 구원하는 정성과 사랑이 있는 이는 “나보다” 전에 온 놈은 다 도둑이요 강도라고 했다.
앉은뱅이를 업고 다니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하물며 자동차를 사 주는 것이겠나? 소경을 위해 대신 보아주는 것이 구원 아니다. 하물며 사람을 사서 대주는 것이겠나? 전신 마비자를 여럿이 메고 다니는 것이 구원 아니다. 하물며 국립병원에 수용하는 것이겠나? 구원은 스스로 일어서고, 보고, 뛰고, 일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일이다. 주는 것 아니라 가지고 있으면서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다. 죽은 제가 살아나서 스스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무공(成人無功)이다. 스스로 나라 구원의 공이 제게 있노라는 것은 도둑만이 하는 소리다. 누구의 힘으로 사는 것 아니라 제가 제힘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생명이다. 그런 것을 제 스스로가 먼저 죽음을 이기지 않고 어찌할 수 있을까? 죽음을 스스로 즐거워서 우선 죽지 않고 어찌 이길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해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건질 수 있겠나? 하물며 개인이 아니고 나라일까? 무슨 방법으로 한다면 우리는 영 절망일 것이다. 여기서 무슨 방법이 나오겠나? 방법이 아니다 “목경이도존(目擎而道存)”이라, 턱 보기만하면 되는 것이 구원자 아니겠나? 볼 것이니 있느냐? “가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하면 죽었던 아이가 사는 것이다. 만일 하는 어떤 일이 있다면 스스로 높여 매달려 모든 사람이 다 보고 믿을 수 있게 하는 일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이 따로 있을까? 없다. 스스로 제 말씀을 받는 것뿐이다. 새 말이 따로 있는 것 아니라 내가 “이제 받은 것”이 새 말씀이다. 모든 시대가 제 말씀을 가진다. 죽음에 절박한 시대일수록 제 말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먼저 받는 사람이 시대를 건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죽음의 잔을 완전히 들이키지 않고 시대의 죽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6천년 문명이 죽는다. 5백 만년 인간이 죽는다. 그 정치와 종교와 혼이 다 죽어버리는 오늘이다. 그것이 정말 살았다면 역사가 이렇게 숨이 가프겠는가? 죽은 자를 선선히 죽은 자들로 장사케하는 잔혹한 아들만 생명의 주를 따를 수 있다. 네가 이 하나님의 아름을 부르기 시작한 이 석기시대 이래의 역사가 운명하는 것을 능히 옆에서 볼 용기가 있느냐? 능히 평온한 마음으로 그 조사(弔辭)를 쓸 여유가 있느냐, 그렇지 않고는 시대 구원의 이야기를 하지 마라. 그래야 온전히 산 새문명이 일어난다, 나사로처럼 썩은 냄새가 나다가도 일어서 나올 것이다. 이제 지구와 그 과학은 다 절망 아니냐? 그러면 네가 절망하지 않고는 그 살길을 모를 것이다.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없이는 “다 이루었다”가 있을 수 없다. 너는 네 과학을 최후까지 정직하게 지켜라. 그러야 말씀이 올 거다.
빛은 東方에서
역사에 되풀이란 것은 없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은 스케일이 너무 작아서 그런 것이었다. 자전하는 지구를 타고 해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컸으니 좀 더 크게 봐야 할 것이다. 태양의 궤도만 해도 아니 뵈는데 은하의 궤도, 더구나 대우주의 궤도가 뵈겠는가? 영에 이르면 궤도 아닌 궤도지.
그러니 되풀이는 아닌 되풀이의 자리에서 옛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말이 있어 이르되 “빛은 동방에서”라 그랬지, 그것이 무슨 소리 일까? 눈이 열린 사람은 뵈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요 귀가 열린 사람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법이다.
빛은 동방에서라! 잠깐 두고 이런 것부터 생각해 보자. 일찍이 지금 숨 걷우려는 이 근대가 푸른 옷을 입고 오려할 때 어쨌던가? 문예부흥이란 것이 있었고, 과학의 발명, 지리상 발견이란 것이 있었고, 그리고 종교개혁, 산업혁명, 그런 것들이 있었지, 그러면 지금은 수레바퀴 같이 도는 것이 아니라 부챗살 같이 번져 나가는, 역사에 되풀이란 것이 있을 리 없지만, 제 버릇을 못 놓고 개미 체 바퀴 돌듯 제 마음의 바퀴를 도는 우리 마음에서 한다면, 물론 이것이 참 마음이 못 되고 가짜인 줄을 아는 이상 가짜인 자리에서 그대로 말을 해본다면, 그래서 그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뱀처럼 허울을 벗는 일이 있다면, 역시 고전연구라는 머리, 그다음에 발견 발명이라는 목구멍이 있고, 또 그다음 종교개혁이라는 가슴통, 그런 후에 산업혁명의 대장 소장이 오지 않을까? 그런 다음에야 으앙하고 우는 울음소리로 새 시대의 아들이, 또 나오는 산문(産門)이 있지 않을까? 만일 그런다면 우선 이번의 고전연구, 문예부흥이란 어떤 것일까? 나오지 않은 태아의 얼굴을 알 수 있는 예언자는 없지만, 그래도 모르고도 알 것은 새로 날 아기 얼굴 아닌가? 왜냐 하면 사실은 그 새 몸은 무한번 다시 하는 새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 속에 조상 반복(反復)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온고지신 아닌가?
그러면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새것을 붙잡는다 해도 이 해 아래서는 땅위에 것을 들추는 것 밖에 없는데, 아무리 잘 들춘다 해도 다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 그것은, 그때에 벌써 들출 대로 다 들추고 써 먹을 대로 다 써 먹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고전이라야,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에 찾을 것은 없으니, 있는 것은 자연 동양고전 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은 서양문명 바람에 잘 써 먹지도 못하고 남들이 동양엔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다는 바람에 우리도 엉겁결에 정말 그렇거니 하고, 천연자원을 두고도 깔고 앉아 모르고 있었던 중국 인도같이, 내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그 제 숨에 구역질이 난 서양서 어떤 특별한 정신 가진 마음들이 더러 그것을 캐서 아주 산삼으로 팔아먹는 형편 아닌가? 그러니 그것을 한번 이제 먼지를 털고 다시 읽어 보면 어떤가? 그래도 이 동양의 티끌로 된 우리니만큼, 우리가 보면 역시 그들보다는 좀 깊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이 둔한 나의, 기독교는 믿는다면서도 이단자 소리를 들어가며, 30년 동안 해온 생각이었다.
불교는 깊이 배우지 못해 모르지만 기독교는 어려서부터 알거나 모르거나 간 그 속에서 자랐는데, 기독교를 믿는다면서 동양 것은 미신이요 잘못된 것으로 일언하에 잘라 버리는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기독적인 것이 좀 더 넓게 좀 더 깊게 좀 더 내 것으로 가깝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동양 것을, 지극히 작고 옅은 정도에서지만, 스스로 좀 읽어 보는데서 부터 시작됐다. 동양에 대한 눈이 넓어지면 질수록 내 기독교 이해는 뿌리가 조금씩 더 깊어가고 가지가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갔다. 그래서 마침내는 범위는 좁지만 그래도 앞을 내다보는 뚫린 눈들을 가진 몇몇 서양 선배들의 생각에 접하게 됐다. 부버요, 테이하요, 앨도우스 헉슬리요, 제랄드 허드요, 다 그러한 사람들이다. 타골, 간디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내 생각으로는 아마 인류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생각을 한다면 이들을 모르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의미로는 기독교는 서구로 가서 오해됐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라기보다는 모두 다 제날을 가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제 동양적인 것에 접함으로 정말 자기를 더 깊게 폭넓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해서 선이 된다. 가령 성경에서 말한다면, 물론 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지만 바울을 써먹을 때가 있었고 요한을 써먹을 때가있다. 바울은 이 이상 더 될 여지가 없는지 몰라도 요한은 이제부터 더욱 말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이 오직 요한이다. 그 모양으로 당초에 소아시아로 가려는 바울을 마케도냐로 가라고 할 때에 세계 역사의 방향은 결정이 됐다. 그러나 가는 때 있으면 또 오는 때가 있다. 이제 부터 기독교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은 동양에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제 날을 가진다는 의미다. 나는 불교는 모르나 거기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진리의 올바른 체득은 인생의 입장에 서는 동시에 또 역사의 입장에 서야 된다. 하늘나라를 수정으로 아로새긴 나라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천만 뜻 밖에 “외 벌 암흑한 데로, 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다된 하나님이 아니요 영원히 자라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인간을 구원하려 인간 속에 내려와서 같이 짐을 지는 하나님이 자라는 하나님 아니고 될 수 있을까? 이 생각이 정통적인지 이 단적인지 그것은 상관 아니 하지만 이것이 종교를 역사적인 자리 더구나 동양적인 자리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서 얻어진 것만은 사실이요, 그럼으로써 문제를 풀어가는데 좀 더 힘을 얻었다고 자신하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도 이 위기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 보아서만 새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昨今)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는 매우 의미 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번 UN에서 당하는 문제, 세계적으로 한국이 문제의 초점이 돼가는 문제, 그런 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종교가 본래 세계 구원을 위해 일어난 것인데 언젠지 복리주의로 떨어져 버린 것은 참 한심한 일이다. 더구나 세속인은 현실에 섰으니 복을 추구하는 일이 당연하지만 종교는 영계(靈界)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서 말로는 아닌 척 정신적인 용어를 빌어서 하면서, 세속적 복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 위선주의를 잘 들어내는 일이다. 종교인이라고 현세 살림 아니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되 영적생명의 실현으로 하는데 다름이 있다. 내 빵 생각을 하면 물질적이지만, 남의 빵 생각을 하면 정신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는 내 빵이란 건 있을 수 없어졌다. 이제는 인간이 성인되어 전체인(全體人)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인격이란 것을 끝내 개체적인 견지를 떠나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은 말은 아무리 영원한 생명이라 해도 사실은 순 물질적인 사심(私心)이다. 현대의 고민이 바로 여기 있다. 성인 지경에 갔는데 아직 어린이 시대의 치기(稚氣)를 못 면하고 있다. 그러면 잘하노란 모든 열심이 죄가 될 뿐이다.
왜 세계에 많은 나라 중에 하필 이 나라만이 고난이 심하며 기독인만이 고난을 겪어야 하나, 맹자의 말대로 그 져야하는 특별한 사명 때문일 것이다. 전체가 다 몸이로되 잘못되는 것이 있으면 고통당하는 것은 심장이다. 기독인이 고통당하는 것도 이 시대 이 나라의 심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보다 전에 있었던 사람들도 자기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자기네를 통해 전에 믿고 환란만 당하다가 간 사람들이 완성됨을 얻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 하면서(히브리 11) 목 위에 내리는 칼을, 기쁨으로 받으며 견디었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는 건짐을 입었다. 이제 정말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에 어떤 시대도 이런 전세계적인 위기를 당해본 일은 없었다. 이제 지구를 건지란 말이 나돌지 않나? 동양의지혜가 오래 티끌 속에 버림을 당했던 것도 이 때문이요 가장 연약한 우리가 뽑힌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가난, 우리의 연약이 우리의 자격이다. 왜냐 하면 우리의 가난, 주림 목마름은 곧 다른 것 아니요 지금까지 세계에 판을 쳤고 그 물러가라는 역사적 경고가 왔는데도 오히려 물러갈 생각을 아니하는 정치만능주의, 국가지상주의의 희생이 된 값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니고는 그 악을 완전히 들어낼 자가 없기 때문이다.
수난의 여왕의 꿈
나는 우리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 역사의 행길에 앉은 늙은 갈보라 하는데, 그러한 수난자 수욕자의 심정으로서 생각할 때 하나의 꿈이 있다. 그것은 이차대전을 겪고 난 직후에 꾼 것이다. 아직도 그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지 않았으니 그 꿈은 아직 품고 있을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동남아의 연방을 한번 제창해 봤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를 알지도 못하고 좋아도 아니하는 나이니, 이것을 하나의 정치적 기도(企圖)로 하는 말은 아니요,
다만 하나의 환상처럼 생각해 보는 일이다.
앞을 내다볼 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다. 지금 중국은 공산 국가요 아직 세계는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긴장 속에 있지만 나는 공산주의는 그리 두렵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사상은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멀지 않아 변하는 날이 올 것이다. 두려운 것은 민족감정 혹 국가주의적 횡포다 그것은 좀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세계 여러 약소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국가주의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민중을 완전히 그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려는 생각이다. 그 점에서는 두 진영이 일반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제 강력한 폭력 밑에 통이 됐고 남들은 거의 바닥이 난 천연자원을 풍부히 가지고 있고 그동안 오래 서구세력에 눌렸던 반감(反感)은 불길같이 솟으려 하기 때문에, 그것이 큰 나라로 강해질 때 주위에 대한 그 교만과 횡포가 얼마나 할까? 지나간 긴 역사에 비추어 보아 거의 확실한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 턱 밑에 있는 우리 운명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그것을 일찍이 곤륜산에서 내리 구르는 바위 앞에 놓인 달걀로 비유했던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남북이 이렇게 갈라져 싸우는 이 민족은 참 어리석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생각 있는 선인들이 우리의 소량(少量)과 천식(淺識)을 걱정해 지적해 오지만, 참말 새삼 걱정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세력을 힘과 꾀로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살길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탈민족주의 탈국가주의의 앞장을 서야한다는 것이다. 신강, 서장, 귀주, 운남, 만주가 다 중국 지배하에 있고 세계평화는 있을 수 없다. 소련도 미국도 인도도 일본도 다 걱정 아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중국이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것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이상대로 한다면 세계가 한 나라 되고 그 다음 각 지역별로 자치하는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우선 그 중간과정으로 몇 개의 연방이 있어서 마치 미합중국 모양으로 대소에 관계없이 한 표의 권을 가지고 연합해 나가야 할 것인데, 그 중에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은 동남아의 군소국이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중국을 해방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앞날을 생각하면, 일대변화의 날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국일수록 해방이 필요한 노예 나라요, 약소국일수록 유리한 자리에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중국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짐을 베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인도주의요 또 우리의 살길이다. 그런데 그것을 앞장서는 데는 우리를 내놓고 더 적격자가 없을 것이다. 왜냐? 우리의 역사적 희생자로서의 경력이 그 자격을 준다. 돌아온 탕자처럼 영예자가 어디 있나?
창세기에 의하면 천지 만물 창조가 있으려 할 때 하나님의 영이 깊은 혼돈 위에 운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깊고 캄캄한 혼돈이 지상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역사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수난의 여왕의 가슴 아닐까? 어둠과 슬픔의 심연이지만 영광과 기쁨과 사랑의 창조는 거기서만 쏟아져 나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동할 필요가 있다. 그 운동이란 암탉이 그 알을 품듯 도둑이 큰일을 저지르려 골똘히 생각하고 있듯 예술가가 영감을 얻으려 할 때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듯 앉아있는 태도다. 그 보다도 바가바드기타의 그림은 더 좋다. 거기는 자연은 자궁이요 우주의 영은 아버지어서 그 자궁 속에 수정을 할 때에 만물은 창조되어 나온다고 했다. 참 아름다운 그림 아닌가? 가장 미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낳고 가장 더러운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의 자궁이 된다. 그럼 이 역사의 행길에 앉은 노창녀는 새 시대의 아들을 배기 위해 앉은 것 아닌가? 다만 그 가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주적인 압력을 가지고 충만(充滿)시키도록 그 속을 진공으로 비워야 한다.
그것이 곧 일대변화, 역사적 “우로 돌아 앞으로 가”이다. 세계 구원의 첫 발걸음이다.
동정녀 아닌 동정녀, 거러지 갈보야 일어나 모든 권력주의, 물질주의의 욕뵘에서 네 자신을 씻고 준비하라. “너를 죄주는 자가 다 어디 갔느냐? 나도 너를 죄주지 않는다.”
씨알의 소리 1976. 1,2 50호
저작집; 20- 281
전집; 9- 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