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합 조약시 전권위임장.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拓)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拓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간에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이 8월 29일 순종의 자필서명없이 어새(도장)만 찍힌 칙유문 형태로 발표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아시아 강국임을 자부하며 병합조약을 체결했고 한국민의 반발을 의식해 발표를 연기하다 이날 순종으로 하여금 칙유문을 내리게 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이미 3차에 걸친 ‘한일협약’으로 재정, 외교권, 내정, 군대 등 모든 것을 일본에 빼앗겼던 한국은 이번 조약으로 영토마저 빼앗김으로써 국가로서의 생명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한국통치의 총본산으로 삼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임명됐다. /조선
[1879년]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한용운(韓龍雲) 출생
1879년 8월 29일 태어남 / 1944년 6월 29일 죽음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중에서
한용운은 승려 신분으로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굽힘 없이 혁명적 독립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다. 용운은 법명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이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했으며, 1931년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밖에도 한용운은 불교개혁사상과 민족독립사상에 바탕을 둔 시·장편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시집 <님의 침묵>은 한용운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시집 <님의 침묵>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담긴 서정시 90여 편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은 독립에 대한 끈질긴 의지를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미국 강타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플로리다 주 내소 군 동쪽 약 280 킬로미터의 열대성 저기압으로부터 발생했다. 마이애미-데이드/브라우워드 군의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1등급 허리케인으로 커졌다. 플로리다를 가로질러 남서쪽으로 움직인 후 멕시코 만으로 빠져나갔고 2005년 8월 28일 꼬박 하룻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5등급에 도달하였다. 2005년 8월 29일 시속 225킬로미터의 강풍과 함께 3등급 허리케인으로 루이지애나 버라스-트라이엄프 육지에 2차 상륙했다. 미국 동부 시간으로 8월 31일 오후 11시, 캐나다와의 국경에서 소멸하였다.
[2003년] 주5일 근무제 개정안 국회 통과, 주 44시간에서 40시간 근무로 축소
주5일 근무제 실시를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2003년 8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의원 230명이 표결을 벌여 찬성 141표, 반대 57표, 기권 32표으로 통과됐다. 이에 따라 2004년부터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주5일 근무 시대가 열리게 됐다.
지난 1989년부터 3년간 단계적으로 주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됐으며, 이후 13년 만에 다시 주 40시간으로 4시간 줄게됐다. 법 개정에 따라 2004년 7월부터 공공, 금융, 보험 및 근로자 1000면 이상의 기업에서 주 5일 근무를 시행한 후, 이어 기업 규모별로 오는 2008년 7월까지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휴가제도도 연차 월차 휴가가 통합돼 근속기간에 따라 최저 15일, 최고 25일로 조정될 것으로 전망됐다. 사용자들이 휴가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유할 경우 미사용휴가에 대해 금전보상의무가 면제돼 휴가제도의 본질적 기능도 강화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5년부터 각급 학교에 월 1회 주5일 수업을 하기로 했다.
이에따라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간 근로시간도 현재 2,474시간에서 일본(1,821시간), 캐나다(1,801시간) 등 선진국 수준에 근접하는 2,000여 시간으로 줄어들게 됐으며, 91~101일이던 휴일, 휴가일수도 134~144일로 늘어나게 됐다. 이는 당시 영국(136일), 프랑스(145일), 일본(129~139일) 등 선진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대만(근속기간에 따라 107~130일)보다 많은 것이었다./조선
[2000년] 미국의 한 부부가 유전자 검사를 통해 딸의 질병치료에 쓰일 동생을 출산하자 윤리논쟁 가열
← 몰리와 애덤
미국 콜로라도에 사는 부부가 ‘팬코니 빈혈’이라는 치명적인 유전병을 앓아 1년 밖에 살 수 없는 딸 몰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치료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동생을 골라 낳아 윤리논쟁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유전병을 피하기 위한 유전자 검사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질병 치료에 쓰일 아이를 낳기 위해 유전자 검사가 실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팬코니 빈혈’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족 중 팬코니 빈혈 유전자를 보유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의 세포를 골수에서 이식하는 것이었다. 몰리의 부모는 모두 팬코니 빈혈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어 죽어가는 딸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빈혈 유전자를 갖지 않은 건강한 아이를 낳을 방법을 강구했다.
일리노이주의 메이스딕 의료센터는 몰리와 조직체계는 같지만 건강한 조직을 이식해 줄 수 있는 아이를 낳기 위해 수정란의 유전자 검사를 실시, 팬코니 빈혈 유전자가 없는 것을 골라 몰리의 어머니 자궁에 착상시켜 2000년 8월 29일 ‘애덤’이라는 신생아를 출산했다. 그리고 9월 26일 의료진은 애덤의 탯줄 혈액 세포를 누나 몰리의 골수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생명윤리학자들은 어떤 이유든 부모가 태어날 자식의 형질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며 강력히 비난했다./조선
[1997년] 제1회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 개막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이 1997년 8월 29일 경기 부천시 중동 시민회관에서 영화계 인사와 시민 1천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영화배우 문성근씨와 아나운서 김연주씨 사회로 열린 행사는 이장호 집행위원장과 부천영화제 대외 홍보사절 강수연씨의 개막 선언, 이해선 조직위원장과 김종민 문화체육부 차관의 축사로 이어졌다. 또 1957년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인 안양영화촬영소를 세워 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고홍찬씨에게 특별상이 수여됐다. 공식 개막식이 끝난 뒤 참석 인사와 시민들은 주최측에서 나눠 준 가면을 쓰고 부천 시청 신청사까지 시가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날 행사는 ‘부천영화제 가족’으로 선정된 ‘솔빛별 가족’의 세계 여행 환송식과 화려한 불꽃놀이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9월5일까지 부천 시내 6개 극장에서 진행될 영화제에선 로맨스-공포-스릴러-액션-모험-SF-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25개국 영화 80여편이 상영됐다. 영화제는 판타스틱이라는 표현대로 자유로운 상상력 아래 사랑, 환상, 모험을 주제로 한 젊은 영화를 표방하는 영화제이다. 일부 경쟁을 도입한 비경쟁 국제영화제로 27개국 111편이 상영됐으며 25만명이 관람했다. /조선
[1994년] 삼성, 세계최초로 256메가 D램 개발을 발표
1994년 오늘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2백56메가D램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했다고 발표한다.
2년 6개월 동안 천2백억 원을 투입해 얻은 성과다. 2백56메가 D램은 기억단위소자인 '셀' 2억7천만 개가 작동하는 것이다. 영자신문 2천페이지, 2백자 원고지로는 8만장에 해당하는 분량의 정보를 손톱 크기의 칩에 저장할 수 있는 초고집적 메모리 반도체이다.
우리 나라는 1983년 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이 64KD램의 생산에 첫 발을 내디딘 뒤 86년 1메가D램,88년 4메가D램 개발에 이르기까지 줄곧 일본을 추격하는 데 바빴다. 그러다 1990년 일본과 거의 동시에 16메가D램 개발에 성공해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는 1992년 8월 일본보다 먼저 64메가D램을 개발한 데 이어 이번 1994년 256메가D램을 세계 처음으로 선보임에 따라 이 분야 선두자리를 확실하게 다질 수 있게 됐다. /YTN
[1989년] 사자와 호랑이를 부모로 한 ‘라이거’ 국내최초로 탄생
숫사자와 암호랑이를 부모로 한 '라이거' 3마리가 1989년 8월 29일 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서 국내최초로 탄생했다. 이름은 대호, 용호 그리고 야호라 지어졌다. 이들 3남매의 출생은 13년만에 거둔 결실이다.
1976년 자연농원은 숫호랑이와 암사자를 합사, '타이건'의 탄생을 시도했으나 싸움으로 사자가 죽어 실패로 끝났다. 이에따라 1983년 갓 태어났던 숫사자 용식이와 암호랑이 호영이를 '예비신부'로 점찍고 철따라 같이 놀게 하며 서로의 얼굴과 체취에 익숙하도록 한 뒤 1988년 12월 신방을 꾸며주었다. 105일간의 임신끝에 엄마 호영이는 이날 3남매를 순산했다. 엄마 호랑이가 새끼들을 물어죽일까 염려, 태어나자마자 엄마품에서 떨어진 3남매는 맹수 사육용으로 특수 제조된 분유를 먹고 자랐다. 3남매는 엄마쪽을 많이 닮은 듯하며 몸전체에서 호랑이의 얼룩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빠쪽의 특성도 있어 얼굴의 점박이 무늬외에도 바탕색은 사자의 전형적인 황백색이었다.
라이거의 탄생은 동물생태학상 야생에서는 거의 없고, 동물원에서나 가능한 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3남매는 서로 종이 다른 동물간에 태어난 간성이어서 노새처럼 2세 번식을 할 수 없다. 또한, 사자와 호랑이의 평균수명은 대략 15년이지만 라이거는 이보다 짧다. /조선
[1987년] 오대양 집단 변사사건(여사장 등 32명, 용인공장서 동반자살 시체로 발견)
1987년 8월 29일에는 집단 자살 사건이 전국을 강타했다. 사건은 당시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의 오대양(주) 공예품 공장에서 발생했다. 공장 내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48)씨와 가족, 종업원 등 추종자 32명이 집단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종말론을 내세우며 교주로 군림했던 박씨와 신도 등 관련자 전원이 사망함에 따라 경찰 수사에 한계가 있었다. 요즘처럼 과학수사가 진행됐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성 연쇄 살인사건과 함께 지금까지 미제로 남았으며 경찰은 종교 광신도들의 집단 자살극으로 마무리했다.
집단 자살로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었지만 박씨의 24세, 22세 두 아들과 공장장 이경수(45)씨가 나흘 동안의 천장 생활에서 가사상태에 있던 박씨와 종업원 28명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뒤따라 목매 자살한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팔공신문
[1982년] 잉그리드 버그만(Bergman, Ingrid, 1915.8.29~1982.8.29) 사망
← 키스신의 고전이 된 마이클 커티스 감독의 ‘카사블랑카’. 잉그리드 버그만(가운데).
1982년 8월 29일 스웨덴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기의 대 여배우 버그만은 그녀의 67회 생일을 맞은 그날밤 런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1974년 암선고를 받고 그 후 세 번에 걸쳐 수술을 했다.
1915년 8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버그만의 영화 첫 출연작품은 1934년의 뭉크브로 그레벤이었다. 그 후 44편의 영화주역을 맡은 버그만은 평생을 톱스타로 활약해왔다. 버그만은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의 사랑으로 한때 미국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었으나 곧 할리우드로 복귀했다. 뛰어난 미모를 뒷받침하는 지성과 체질적으로 타고난 에로티시즘이 어울려 매력을 자랑했다.
1944년 ‘가스등’으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1957년 ‘추상’으로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74년 ‘오리엔트 급행 살인사건’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험프리 보가트와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보여주었던 ‘카사블랑카’는 버그만의 대표작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4인의 아들’ ‘개선문’ ‘지킬박사와 하이드’ ‘백색의 공포’ ‘엘레나’ ‘가을의 소나타’ ‘빗속의 산책’ 등이 있다. /조선
[1958년] 중국 인민공사 설립
1950년대 초반까지 100만∼300만명을 처형해가며 사상개조를 끝낸 마오쩌둥은 곧 경제재건에 나섰다. 담당 조직으로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빠른 성과를 위해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1958년 8월29일, 중국 공산당의 한 회의에서 인민공사 설립이 결정됨으로써 중국 현대사에 또하나의 비극이 더해졌다. 인민공사는 농업을 기본으로 공장ㆍ상점ㆍ병원 등을 경영하고 교육기관과 자체 민병대까지 갖춘 종합조직이었다. 토지ㆍ농기구ㆍ가축은 인민공사 소유로 하고 생산은 집단으로 진행됐다. 이미 사상개조까지 마친 터라 농민들의 초반 호응은 열광적이었다. 3개월후 전국에 2만6000여개의 인민공사가 생겨나고 전 농가의 99%가 인민공사로 조직될 만큼 전국의 인민공사화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러나 15년안에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겠다던 목표는 강철 대신 고철을 양산했고, 부풀린 농업생산실적은 과중한 세금만 초래했다. 지나친 ‘균등’도 생산의욕을 감퇴시켰다. 결국 1959년부터 1962년까지 2000만명이나 굶어죽었다. 마오쩌둥은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사죄는 커녕 변명만 늘어놓았다. “레닌도 마르크스도 과오는 있었다. 따라서 우리도...”라는게 마오쩌둥의 변(辯)이었다. /조선
[1929년] 독일 비행선 '그라프 체펠린호' 세계일주 성공
← 그라프체펠린호
체펠린비행선은 부양용(浮揚用) 수소가스주머니와 공기력을 받는 선체를 분리시켜 만든 경식(硬式) 비행선. 독일의 F.A.A.H. 체펠린이 처음으로 고안하여 1900년 7월 2일 처녀비행을 하였다. 이 비행선은 알루미늄합금의 다각형 횡재(橫材)와 종통재(縱通材)로 골격을 만들고 철선을 보강한 다음 우포(羽布)로 덮어 유선형 선체를 만들고 횡재 사이에 가스주머니를 넣었다.
이러한 구조로 가스주머니를 선체로 하는 그때까지의 연식(軟式) 비행선에 비해 선체 변형 없이 고속비행이 가능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중에는 119대가 만들어져 정찰·폭격 등에 이용되었다. 28년 체펠린비행선사가 건조한 그라프체펠린호는 1929년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힌덴부르크호(길이 245m, 1100마력의 디젤엔진 4개, 시속 135.15㎞)는 1937년 대서양횡단 후 착륙하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1920년]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곡가 파커(Charles "Bird" Parker, Jr.) 출생
1920. 8. 29, – 1955. 3. 12, 뉴욕
캔자스시티 출생. 15세 때 고교를 중퇴하고 1941년 뉴욕으로 진출, D. 길레스피 등과 함께 비밥을 창시하였다. 그가 개척한 하모니 ·조성(調性) ·리듬 ·멜로디 등은 모던재즈의 기반이 되었으나, 자신은 마약과 병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주요작품에 《나우 더 타임》《빌리즈 바운스》 등이 있다.
[1897년] 제1회 시오니스트 대회 개최
← 제1회 시오니스트 대회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
1897년 8월 29일 1백96명의 유태인 지도자가 스위스 바젤에 모여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세계 시오니스트기구 (WZO) 결성과 유대국가 건설을 결의했다. 2천년동안 나라없이 세계각지를 전전하면서도 언젠가 돌아갈 시온을 꿈꾸던 유태인들의 꿈이 현실화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유태인들의 정신적 고향 시온은 성서의 다윗왕이 도읍하고 그 아들인 솔로몬이 그곳에 야훼의 성전과 커다란 궁전을 세워, 유대 민족의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가 된 예루살렘의 ‘시온 언덕’을 가리킨다.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유태 민족주의 운동을 뜻한다.
유태인들의 꿈이 시오니스트 회의를 통해 강력한 정치운동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테오도르 헤르츨에 의해서였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자라난 헤르츨은 변호사이자 극작가, 그리고 언론인이었다. 헤르츨은 처음에는 "유태인은 현지사회에 동화(同化) 해야만 반유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동화주의자였으나, 그가 동화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유태인들의 단결과 국가건설을 새롭게 결심한 것은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서였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장교 드레퓌스 대위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군부의 음모에 의해 독일군 스파이로 몰려 곤혹을 치렀던 사건이다.
헤르츨이 그의 생각을 유토피아적 정치소설 ‘유대국가’에 정리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정치조직을 만든 것이 이날 개최된 시오니스트 회의였다.
1901년의 제5차 시오니스트 회의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시오니즘 운동이 다시 활발해진 것은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자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면서였다. 시오니스트 회의는 1947년 제22차 회의를 끝으로 중단됐고 그 성과로 1948년 마침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됐다.
[1881년] 이재선 역모사건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득세한 후, 개방과 개화가 어느덧 조선의 대세로 자리잡자 대원군을 실각시켰던 양반 사대부들은 예기치 않은 사태 전개에 크게 당황했다. 조·일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바른 것은 지키고(衛正) 옳지 않은 것은 물리친다(斥邪)”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다시 전국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민씨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위정척사파와 탄압으로 맞서는 고종·민씨정권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즈음, 그동안 은둔하고 있던 대원군파가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선(李載先)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逆謀)를 꾸민 것이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라는 이유로 나이 40에도 별군직이라는 하위직 벼슬에 머물러 늘 불만을 품어온 고종의 이복형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대원군은 실패를 예상하고 역모세력의 입막음을 시도했다. 다른 죄명을 씌워 형조에 넘긴 것이다. 그러나 비밀은 곧 들통나 1881년 8월 29일, 이재선을 비롯한 관련자 30여명이 체포됐다. 모두 능지처참됐고, 이재선은 유배 2개월 뒤 사사됐다. 민씨정권에는 위정척사파와 대원군파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조선
[1862년] 벨기에의 상징파 시인, 극작가, 수필가 메테를링크(Maeterlinck, Maurice, 1862~1949) 출생
겐트 출생으로 프랑스어(語)로 작품을 썼다. 겐트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나, 가업인 변호사를 이어받지 않고, 일찍 파리로 나와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최초로 죽음과 운명을 노래한 시집 《온실》(1889)을 발표하였으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진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새로운 셰익스피어의 등장"이라고 절찬을 받은 희극 《발렌 왕녀 La Princesse Waleine》(1889)를 비롯하여 몇 편의 상징극, 특히 드뷔시의 음악이 붙어 더욱 유명해진 《펠레아스와 멜리상드 Pell as et M lisande》(1892) 등이 발표되고서부터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등장인물의 의지와 정열의 갈등보다도 운명이나 죽음의 불가항력에 조종되는 영혼의 전율을 표현하였으며, 이 신비주의적 경향은 《몬나 바나 Monna Vanna》(1902), 《파랑새 L’Oiseau Bleu》(1908) 등과 후에 나온 작품의 성격에도 이어져 갔다. 그는 뤼즈부르크, 에머슨, 노발리스 등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아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것을 직관하는 영지(英智)의 소유자로서, 《빈자(貧者)의 보물 Le Tr sor des Humbles》(1896), 《영지(英智)와 운명 La Sagesse et la Destin e》(1898) 등의 에세이도 썼다. 독자적인 자연관찰인 《꿀벌의 생활 La Vie des Abeilles》(1907), 《꽃의 지혜 L’Intelligence des Fleurs》(1907), 《개미의 생활》(1930) 등의 저서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생애의 태반은 프랑스에서 보냈다. 191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842년] 중국과 영국, 난징 조약 체결
← 1842년 8월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는 난징(南京)조약 조인식 광경
1842년 8월 29일 청나라와 영국 정부는 난징[南京]에서 조약을 맺음으로써 제1차 아편전쟁을 끝냈다. 난징 조약은 중국 근대사에서 최초로 맺어진 불평등조약으로서, 장닝 조약[江寧條約]이라고도 한다. 제1차 아편전쟁은 영국이 청에 수출한 아편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이 밀수출하는 아편에 중국인들이 빠르게 중독되었으며, 많은 양의 은이 유출되는 등 중국의 농촌경제는 물론 국가 전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 정부는 아편수입을 강경하게 저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39~42년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청의 패배로 끝나 청나라 정부는 콘월리스호 선상에서 영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난징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의 요지는 홍콩을 할양할 것, 광저우[廣州]·푸저우[福州]·샤먼[厦門]·닝보[寧波]·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통상항(通商港)으로 개항할 것, 중국은 영국에게 은화 2,100만 원(元)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 영국의 수출입 화물 관세율은 중국과 영국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결정할 것 등이었다. 난징 조약을 계기로 청은 1844년 미국과 왕샤 조약[望厦條約], 프랑스와 황푸 조약[黃捕條約]을 잇따라 맺었으며, 이로써 외국열강들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었다.
[1792년] 미국 목사 피니 (Finney, Charles Grandison) 출생
미국의 변호사, 오벌린대학 학장
1792. 8. 29 미국 코네티컷 워린~1875. 8. 16 오하이오 오벌린.
19세기초 신앙부흥운동을 이끈 중심 인물이다. 최초의 전문 부흥사로 불리기도 한다. 잠시 교사생활을 한 뒤 독학으로 법학을 공부하고 뉴욕 주 애덤스에 있는 벤저민 라이트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 모세의 법전을 참조하다가 성서를 공부하게 되었고, 1821년 그리스도교도가 된 뒤 변호사 생활을 포기하고 장로교의 승인을 받아 부흥사가 되었다. 법정에서 배심원들 앞에서 진술하던 방법을 사용하여 회중들에게 설교함으로써 뉴욕 주 북부지방의 여러 마을에 영적인 부흥을 일으켰다. 그의 방법들은 대도시의 회중교회들과 장로교회들에도 흘러들어가 곧 ‘새로운 방법’으로 유행했으나, 엄격한 전통을 지닌 동부 학교들에서 공부한 라이먼 비처 같은 사람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피니의 방법이 더욱 유연해짐에 따라 이러한 반대는 줄어들었다.
그가 이끈 부흥운동은 대도시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1832년 뉴욕 시에서 '제2자유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어 끊임없이 부흥회를 가졌다. 그러나 장로교 신학과 규율에 불만을 느껴 1834년 지지자들과 '브로드웨이 장막교회'를 세웠다. 다음해 오하이오 주 오벌린에 새로 세운 신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어 목회와 교수생활을 동시에 했다. 1837년 뉴욕을 떠나 오벌린대학과 밀접히 연관된 ‘오벌린 제1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1851~66년 오벌린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자아를 개혁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 능력과 상식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부흥으로서의 그의 신학관은 〈부흥운동에 관한 강의 Lectures on Revivals〉(1835)·〈조직신학 강의 Lectures on Systematic Theology〉(1847)에 담겨 있다.
[1780년] 프랑스의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출생
← 자화상. 1804 (revised ca. 1850), oil on canvas, 78 x 61cm, Musée Condé.
1780년 8월 29일 몽토방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16세 때 파리로 나와 당시 화단의 중진으로 명성을 떨치던 J.L.다비드에게 사사하였다. 1801년 《아가멤논의 사절들》로 로마대상을 받고 1806~1824년에는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고전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였다. 로마 체재 중의 대표작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목욕하는 여자》 《유피테르와 테티스》 《라파엘과 포르나리나》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초상화가로서도 천재적인 소묘력과 고전풍의 세련미를 발휘,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824년 파리로 돌아와 살롱에 출품한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서약》으로 이름을 떨치면서부터는,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신흥낭만주의운동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834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관장으로 다시 이탈리아에 갔다가, 1841년 파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는 《나폴레옹 1세 예찬》 《잔다르크》 《샘》 《터키 목욕탕》 《박사들과 함께 있는 예수》 등을 비롯하여 《앵그르 부인》 등 많은 초상화가 있다.
← 〈La Grande Odalisque〉(1814), 파리에 있는 Musee du Louvre 소장
그의 작품은 초상화·역사화, 특히 그리스조각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나체화에서 묘기를 발휘하였으며, 현재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달리스크》 《샘》 《발팽송의 욕녀》 《호메로스 예찬》 《리비에르 부인상》 《베르탱씨의 초상》 《자화상》 등은 19세기 고전주의의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앵그르의 영향은 후대에까지 미쳐, 드가, 르누아르, 피카소 등도 한때 그의 감화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1755년] 폰란드의 민족영웅 돔브로프스키(Jan henryk Dombrowski) 출생
← Jan Henryk General Dąbrowski
1755. 8. 29 ∼ 1818. 6. 6.
폴란드 페르소비치 출생의 돔브로프스키는 기병 사관으로 1794년 코시우스코의 독립 반란에 참가하였다. 바르샤바 함락 후 밀라노로 피하여,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고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작전에 협력하였다. 나폴레옹이 폴란드 왕국 부활의 뜻을 표명하자, 폴란드 국민에게 나폴레옹군에 대한 협력을 호소하고, 1806년 폴란드군을 이끌고 바르샤바에 입성하여, 그 뒤 그단스크 ·포즈난 ·크라쿠프 등의 전투에서 활약하고, 나폴레옹군의 러시아 패배 때에는 베레지나 도하작전을 도왔다. 나폴레옹 퇴위 후 러시아로 돌아가,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폴란드 왕국군의 대장 지위와 원로원 의원의 직위를 부여받아 폴란드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709년] 프랑스 작가 그레세(Gresset, Jean-Baptist-Louis) 출생
1709. 8. 29 프랑스 아미앵~1777. 6. 16 아미앵.
불순한 희극적 산문시 〈수녀원 앵무새 Ver-Vert〉(1734)로 즉시 격찬을 받았으며 이러한 호평은 계속되었다. 〈수녀원 앵무새〉는 다른 수녀원을 방문하는 동안 자기가 있던 수녀원의 품위있는 배경을 지키려고 하는 한 앵무새의 모험을 심술궂은 재치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회 교단에서 교육받는 동안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었으며, 1726년 예수회에 들어간 후 파리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아미앵과 투르로 돌아갔다. 작가의 인가없이 인쇄되어 사람들 사이에 돌려 읽혀지던 시집 〈수녀원 앵무새〉로 그레세는 단시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파리의 문단에서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그토록 세련된 재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몇몇 상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레세는 꾸준히 특별한 경우를 위한 가벼운 시를 써서, 1년이 채 못가 〈사순절 즉흥시 La Carême impromptu〉·〈살아 있는 설교대 Le Lutrin vivant〉를 발표했다. 1735년 1년간 신학연구를 위해 파리에 돌아왔을 때에는 〈샤르트뢰즈 수도원 La Chartreuse〉과 〈그림자들 Les Ombres〉을 썼다. 예수회 학교의 삶을 정확하고도 자세히 묘사한 이러한 작품들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지방으로 추방되고 그 다음에는 성직에서 제명되었다. 부조리에 대한 그의 예리한 안목과 타고난 경박함은 반교회적이고도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공공보조금을 지원받으면서 희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무대에서는 처음으로 이루어진 살인연기가 포함된 비극 〈에두아르 3세 Édouard Ⅲ〉(공연 1740)를 비롯한 초기 작품들과 〈시드니 Sidney〉(1745)와 같은 운문희극들은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류생활을 재치있게 폭로한 〈심술쟁이 Le Méchant〉(1747)라는 작품은 세련되고 함축적인 대화로 호평을 받았다. 174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고 1754년 임지에 거주하지 않는 주교들을 비난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759년 〈희극론 Lettre sur la comédie〉에서는 자기가 쓴 모든 시와 희곡 작품들을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부인하였다.
[1632년] 영국 철학자 존 로크 출생
← 로크, 작자 미상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
영국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미국 헌법에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 당시 '새로운 과학' 곧 근대과학을 포함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저자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로크의 집안은 청교도적 경향을 가진 국교도였다. 시골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청교도혁명 당시 의회파에 가담하여 싸웠는데 이러한 경력은 로크가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곳의 교육은 철저했지만 뒷날 로크는 규율이 너무 엄격했다고 불평했다. 1652년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청교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학교에는 수사학·문법·도덕철학·기하학·그리스어 등 전통 스콜라식 교과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로크는 교과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낡은 교과과정에서 벗어난 실험과학이나 약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656년에 학사학위, 2년 뒤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1년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를 상속해 어느 정도 안정된 수입을 얻었다. 로크는 가르치는 것을 평생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을 가르친 것은 4년뿐이었다. 1665년 브란덴부르크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의 서기로 일했고 돌아오자마자 또다른 외교직책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이 시기 그의 논문·편지·비망록 등을 살펴보면 주요관심은 당시의 자연과학과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삶의 근본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의 편협성을 절감한 로크는 당대의 철학, 특히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실험과학이었다. 그는 근대화학의 선구자로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로버트 보일과, 얼마 뒤에는 역시 친구인 저명한 의학자 토머스 시드넘과 공동작업을 했다.
애슐리와의 제휴
로크가 처음으로 정치가 애슐리 경(나중에 샤프츠버리 백작이 됨)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의사로서였다. 1666년 여름 옥스퍼드를 방문했을 때 애슐리 경은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였고 친지의 소개로 로크와 만나 곧 친구가 되었다. 다음해 로크는 의학학위도 없었고 의료활동을 하려는 뜻도 없었지만 애슐리가(家)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는 단지 의료문제 뿐아니라 일반문제에 관해서도 애슐리의 개인상담자가 되었다.
애슐리는 정력적이고 과감한 정치가였으나 정적이 많았다. 그러나 애슐리에 대한 로크의 존경심을 감안할 때 애슐리가 과연 정적들이 주장하듯 사악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애슐리는 입헌군주제, 시민의 자유, 종교적 관용, 의회의 통치, 영국의 경제적 성장등을 단호히 옹호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목표는 로크도 이미 적극 지지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두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로크의 사교모임 대부분은 사실상 친구와 더불어 철학·과학의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1668년에 이미 그는 새로 설립된(1663)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또 로크의 집에서는 여러 친구들(애슐리 경, 의사인 존 메이플토프트, 토머스 시드넘, 신학자이기도 했던 제임스 티럴 등)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로크는 〈인간 오성론〉의 서문에서 어느 날에 있었던 모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참석자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당황해 다음 모임에서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검토하고 우리의 지성이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을 가려보기 위해" 정신의 능력에 대해 논의하기로 결심했다. 로크는 직접 이 토론회를 열었고 모임이 끝난 뒤 인간의 인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직도 남아있는 2개의 초고(1671)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19년 뒤 〈인간 오성론〉에서 전개할 사상의 싹이 나타나 있다. 또 이즈음에 로크는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케임브리지 플라톤 학파의 대표자들과 사귀었다. 이들은 경험과학에 공감하면서도 인간 삶의 이성적 요소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유물론을 반대했다. 또 이들은 정치와 종교에 대해 자유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로크는 이들이 본유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주의를 주장하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관용, 종교적 삶의 일부로서 실천행위를 강조하는 것, 유물론을 거부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큰 매력을 느꼈다. 이 학파의 정신은 당시 로크에게 영향을 준 광교회파(廣敎會派)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광교회파는 누구나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 그밖의 비본질적인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1672년 애슐리는 샤프츠버리 백작 1세로 귀족이 되었고 그해 말 영국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샤프츠버리 백작은 곧 왕의 총애를 잃고 해임되었으나 재임기간 중에 무역 및 식민지 평의회를 설립하였다. 로크는 여기서 2년간 간사로 일했다. 그러나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면서 런던의 공기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가 1675년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6개월 후 로크는 프랑스로 가서 4년 동안(1675~79) 머물렀다. 프랑스에서는 가생디 학파 특히 그 지도자 프랑수아 베르니에와 만났는데, 이 만남은 로크의 형이상학·인식론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피에르 가생디는 데카르트 철학의 지나친 사변적 요소를 거부하고 에피쿠로스의 3가지 학설 곧 경험론·쾌락주의·원자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경험적 증거에서 이성적 추론을 통해 더 나아간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외적 세계의 인식은 어디까지나 감관에 의존한다는 것이 가생디의 견해였다.
영국에 돌아왔을 때 나라사정은 뒤숭숭했다.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는 로마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샤프츠버리가 이끄는 청교도 다수파는 그의 왕위계승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샤프츠버리는 1년 동안 투옥되었고 로크가 귀국할 즈음에는 다시 신임을 얻어 추밀원 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과 의회 사이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지 못하자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샤프츠버리는 1년 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여 1683년 죽었다.
말년
로크는 1683년 9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네덜란드에 체류하는 동안 새 친구를 많이 사귀었고 그동안 생각해왔던 문제들을 정리할 여유를 가졌다. 1684년 찰스 2세는 크라이스트처치가 로크에게 주던 장학금을 중단했다. 다음해 로크의 이름은 영국정부가 유럽에 지명수배한 84명의 반역자 명단에 올랐다.
로크는 1685년에 왕이 된 제임스 2세가 쫓겨날 때까지 5년 이상 외국에 머물렀다. 1688년 가을 제임스 2세의 반대자들이 네덜란드 오라녜의 빌렘을 왕으로 추대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로크는 외교관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했고 탄원위원회에만 참여했다. 그러나 런던의 공기가 또 건강을 악화시켰기 때문에 1691년부터는 친구 프랜시스 경과 매섬 부인의 집인 '오츠'에 은거하면서 이따금 런던에 들르곤 했다. 로크는 은둔하면서도 휘그당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록 토리당의 압력으로 그 폭이 제한되었지만 로크와 샤프츠버리가 추구하던 개혁은 '무혈의 명예혁명'으로 달성되었다.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고 시민의 자유, 종교적 관용, 사상과 표현의 자유 등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1695년에는 출판의 자유도 보장되었다.
말년에 로크는 주로 자신의 저작을 출판하는 데 힘썼다. 또 이자·이자율·조폐·무역 등에 관한 소책자를 쓰고 출판했다. 1695년에는 〈그리스도교의 합리성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을 출판하여 덜 독단적인 그리스도교를 옹호했다.
로크는 1704년 죽은 뒤 하이레이버 교구 교회에 묻혔다. 매섬 부인은 "그의 죽음은 그의 삶처럼 경건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고요했다"고 전했다./브리태니커
[70년] 로마 군대, 예루살렘 함락
← 티투스 개선문(81)의 부조, 말 4필이 이끄는 이륜 전차에 오른 티투스
70년 8월 29일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인 반란을 진압했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산발적으로 저항운동을 폈으나 계속 잔혹하게 진압당한 끝에 제1차 유대인 반란을 일으켰다. 66년에 유대인들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냈으며, 그해 가을 시리아의 속주 부총독 갈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을 베트호론 고갯길에서 격파한 뒤 혁명정부를 세워 유대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로마 황제 네로가 파견한 진압군 지휘관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와 합세해 갈릴리로 진군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바로 이 갈릴리에서 유대군을 지휘했다. 요세푸스의 군대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도망쳤으며 야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자 요세푸스는 항복했고 로마 군대는 유대 전역을 유린했다. 70년 아브(Av) 월의 9번째 날(8. 29)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솔로몬 성전이 불탔으며 유대국은 멸망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충돌은 그후로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 지역에 로마 식민지를 세우고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와 관습을 규제하려 한데다가 총독 틴니우스 루푸스의 실정(失政)으로 132년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모두가 반란을 일으켰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바르 코크바는 2번째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가 이끄는 군대는 로마 장군 율리우스 세베루스의 교묘하고 잔혹한 전술을 당해낼 수 없었다. 예루살렘과 카이사레아 남쪽 해안의 요새 베타르가 함락됨으로써 반란은 135년에 진압되었다. 그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제를 받았다.
그 밖에
2002년 헌법재판소, 부부자산 소득 합산과세 위헌결정
2000년 가수 서태지 4년 7개월 만에 미국에서 귀국
1999년 북한 정성옥, 세계육상여자마라톤에서 금메달 획득 (남북한 사상 첫 메달)
1998년 조인주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5년 중앙고속도로 1단계 구간 개통
1993년 싱가포르 대통령에 옹텅칭 인민행동 당수 당선
1972년 한국적십자사 대표단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차 평양 도착
1963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인도차이나 중립화 구상을 발표
1961년 한국노총 결성
1959년 인도. 중국 국경분쟁 격화
1958년 가수 마이클 잭슨 출생
1950년 마잘리 요르단 수상 피살
1949년 룩셈부르그 대한민국 정식승인
1949년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1945년 인민신문 창간
1941년 일제 금속류회수령 공포
1931년 조선어학회, 이날을 한글날로 변경
1916년 미국, 필리핀의 자치승인
1871년 프랑스 제3공화정의 마지막 대통령(1932~40) 르브룅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