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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가시(호2:5-7) 2024.08.11. 대민(주일낮) 이석민 목사
[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마치 탈선한 아내가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밤새도록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남편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이미 버린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보통 남편들이라면 그냥 몰래 뒤따라가서 현장을 목격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당장 이혼해 버릴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하나님이 그냥 내어버려두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아쉬운 것이 없이 풍족하게 살아가게도 하십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상에서의 풍족함을 복이라고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음란과 음행 가운데 있는 아내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책망하시고 경고하시고 그리고 의지하는 것을 빼앗아 벌거벗은 자처럼 되게 하시고, 가고자 하는 길을 가시로 막으시고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못하게 하셔서 답답한 상황에 빠지게도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랑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말씀 앞에 나옵니다.
사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은 것이 아닙니다. 흠이 많고 티가 있으나 사랑의 대상으로 지목하시고 영광스런 존재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교회는 교회다워집니다. 성도는 교회를 떠나서는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교회를 등지면 결국 하나님 사랑과 멀어집니다. 교회는 유일 독특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죄짓고 범죄한 것으로 말하면 금방 벌 받고 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오래 참아 주십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우리를 아내로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향락과 물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것들을 따라가면 그것이 바알신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가시로 백성 된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아침마다 정책 하시고 분초마다 시험하시며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지 아니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1.주는 사랑(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궁무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연애하고, 아스다롯을 사모하면서 눈이 멀었습니다.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떡도 물도 기름도 모든 것을 다 바알과 아스다롯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는 바알에게 절하고, 인생의 쾌락을 위해서는 아스다롯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선지자의 말은 전혀 귀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연애를 하고 있을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떻든가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지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런 경험들을 가진 분들은 지금 이 말씀이 훨씬 실감나게 마음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 바로 그 심정일거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감정, 아무리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바른 말씀을 주어도 마음에 새기지 않으려는 모습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이야기에만 푹 빠져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문제는 바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즉 삶의 모든 식물들이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들인데 그것을 바알이 주며 아스다롯이 준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오늘 성도 된 우리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잘못된 의식으로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즉 그들은 우상들이 자기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고 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을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같은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가나안땅에 특산물로 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신7:13;11:14;12:17)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에게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그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qa 성경주석]
시편67편6절에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성한 결실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다는 고백입니다. 씨를 내가 뿌렸습니다. 땅이 소산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힘, 땅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더욱 큰 복이 있을 것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는 말씀은 장래에 베풀어 주실 복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왜 이런 기대감을 가집니까?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지금부터 영원히 풍성한 소산을 얻게 하시며, 풍년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상에는 땅이 소산을 내지 않고,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고, 아무리 애써도 일감이 없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고, 우리의 동족인 북한이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손으로 수고해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것도 불쌍한 일인데 하루 벌어 하루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에 따라 채워 주시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십니다. 또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여 주시고, 꼭 필요할 때 적절히 주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시편105편7절에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만유의 주재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은 엄청난 복입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신다면 비록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가장 부요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천하의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롬11:36)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런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참 사랑이라 합니다. 조건이 붙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실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든지, 어떠한 조건에 있든지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사랑은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불구하고‘ 식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불구하고‘ 식의 사랑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날마다 변덕을 부린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도 주시지만, 화도 또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2.길을 찾지 못하게 하심(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기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부유함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오는 복이 아닌 이방 나라들과의 연합으로 오는 이익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방 나라들과 연합을 할 때에는 자연스레 이방신들이 함께 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그의 모든 부와 권세와 영화는 이방 신들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는 그 영광을 이방 신들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사치와 향락과 방종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그 징계가 있은 후에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과거의 잘못들을 자책하며 뉘우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욕망의 길을 달려가고 있는 자들의 길을 가시로 막으며 담을 쌓아 갈 길을 찾지 못하게 만드시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애를 쓴다고 해도 얻을 수 없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대로 되어 지지 않는 인생을 겪으면서 인생의 주관자가 누구신가를 바로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 하나님이 결코 하나님이 아님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자신의 욕망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았으나 결국 원하는 것을 전혀 얻지도 찾지도 못하는 인생에서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완악함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도를 막으셨습니다. 여기서 가시로 그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그들이 바알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힘들게 하고 더 궁핍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잘되는 것은 바알의 탓이라고 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모두 하나님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바알이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이 모든 일이 힘든 이유는 내 모든 불신앙때문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해. 좋아, 지금은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이러고 있지만 기회가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달아나고 말거야.'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이 바알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그래 잘 가라. 그리고 또 다시 생각이 나면 내게로 돌아와.' 이런 식으로 신사적으로 대하셨다면 그들이 덜 기를 쓰고 도망을 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으시니까 그들은 더 기를 쓰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길을 막아서고 담을 쌓아 그들이 길을 찾지 못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그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안겨줄 것입니다.
즉 그들은 비옥한 농토 대신, 가뭄으로 인해 갈라진 농토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풍성한 수확 대신, 열매 없이 메마른 줄기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열매를 따기 전에 병충해와 가뭄으로 기한 전에 떨어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이 날이 갈수록 메마를 것이며, 그들은 바알을 의지함으로 소망했던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몸소 느끼고 눈으로 목도할 것입니다.
그들은 탈출구가 없이 사방이 가로막혀 있는 현실 가운데서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그 이면에서 일하시며, 자신들을 바른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면모를 확인하고 목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며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저들은 이러한 호세아의 외침 이후 불과 얼마 가지 못해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185년 동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B.C. 537년 남유다의 제1차 포로귀환 때 지극히 적은 소수만이 귀환 대열에 동참했을 뿐이었습니다. 돌아왔다는 말 자체가 부끄러울 만큼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앞길을 가시로 막으시고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십니다.
심각하게 성찰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를 섬기며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사람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길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기다리십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 와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시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범죄하는 길을 징계의 가시 울타리로 담을 쌓아서 막으십니다.
하나님이 죄인 길을 막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버린 자식입니다.
고멜처럼 영원보다 현세를 더 좋아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떡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고 가장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는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불은 마음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부르심에 대한 무응답으로 나타납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의 길을 고집할 때 그로 하여금 죄의 쓰디쓴 맛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장애물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다시 인도 해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3.본 남편에 돌아가게 하심(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북이스라엘은 복을 얻기 위해 바알을 좇아 온갖 희생과 헌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우상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본절은 ‘그제야’ 과거 여호와를 섬기던 때가 바알을 섬기는 현재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본 남편’ 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는 장면입니다.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게 된 자들은 그제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하겠구나.’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시 탈선하여 세상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던 ‘그 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던’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 번 택하신 자녀가 딴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그를 따끔하게 징계하고 눈물 쏙 빠지도록 고통을 주어서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쪽에서는 변심하더라도 하나님 쪽에서는 한 번 주신 사랑을 중단시키거나 거두시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고멜은 자신이 섬기는 신 바알이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멜이 뭇 남성을 따라 갈 때에 처음에는 기쁨이 오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공허와 흑암 뿐이었습니다. 좌절과 낙담 뿐이었습니다. 그제야 저가 말합니다.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2: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멜도 자신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여겼던 길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남편에게로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배반 당하여 넘어져 있을 떄,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성도 된 우리들은 늘 한결 같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변화에 혼란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한 모습만 보인다고 하여 그것만을 보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흔들린다고 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에 마음이 늘 고요하다면 그 모습 뒤에는 분명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거짓이 있습니다. 가끔은 흔들려 보며 때로는 모든 것들을 놓아 봅니다. 그러한 과정 뒤에 오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희망을 품은 시간들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들 안에는 새로운 비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이방인들과 어울려 번성하면 그곳에서 타락하고 죽을 것으로 보아서 역경에 몰아넣으시면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 세계에서 잘 되는 것도 하나님의 복이지만, 다시금 어려운 역경의 바람에 밀려 다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더욱 큰 은총입니다.
우리 눈에는 장애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 인격적이시면서 끈질기게 추적하시는 사랑. 그래야만 양과 같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의 어두운 밤에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밤에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어두운 밤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밤은 우리 개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의 밤이라고도 합니다. 잠언서를 기록한 지혜자는 그러한 역사의 밤이 길거리, 시장, 성문 어귀에서 외치는 "지혜의 회개의 초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때에는 광풍처럼, 폭풍처럼 온다고 했습니다. 역사의 밤이 다가올 때 우리는 권모술수, 거짓, 불의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깨달음과 뉘우침,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결심은 눅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경우와 거의 흡사합니다.
부유한 아버지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다가 그 삶에 싫증이 난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아 먼 나라에 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다 채우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굶어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북이스라엘의 깨달음과 탕자의 깨달음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물든 모든 인류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밖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누리고자 애쓰지만 하나님과 연합할 때 누리게 되는 참 행복을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참 행복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1.주는 사랑(5)
2.길을 찾지 못하게 하심(6)
3.본 남편에 돌아가게 하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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