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계친구들 원문보기 글쓴이: 김윤상
오늘은 수원 시내에 위치한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찾아 역사탐방을 하였다.
'수원화성'은 조선시대의 개혁 군주 정조대왕의 꿈이 담긴 성곽으로 우리나라 성곽 건축 사상 가장 독보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축조 상황을 기록한 세계기록유산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1975년부터 보수·복원하였으며, 1997년에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화성 안에 위치한 '화성행궁'은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현재의 융릉)으로 옮기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수원화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화성행궁은 화성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 행궁 중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평상 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다가 정조대왕 행차 시에는 화성행궁에서 머무르며, 진찬연 및 과거시험 등 여러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96년 1단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현재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한류의 중심지로 '대장금', '이산', '왕의 남자', '구르미 그린 달빛'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화성행궁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어떻게 둘러보면 좋을까? 수원화성은 수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약 5.7km로 성곽을 따라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수원화성의 멋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효심과 애민정신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의 숨결을 따라 성곽을 천천히 걸어보거나, 토목건축의 백미를 보여준 정약용의 빼어난 과학성을 집중해 봐도 좋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예술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더라도 하나로 이어진 길위에서 색다른 멋을 즐겨볼 수 있다. 수원화성을 일주하다가 화성행궁이 가까운 코스에서 화성행궁을 찾아 둘러본 다음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수원화성의 나머지 구간을 탐방하면 된다.
오늘의 탐방 코스는 연무대주차장 - 연무대 활쏘기(국궁) 체험 - 시계방향으로 성곽길을 걷다가 - 팔달문 부근에서 점심 - 이어서 성곽길 계속 걷기 - 화성행궁 구경 - 성곽길 이어 걷기를 하여 일주한 후, 출발지인 연무대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표지석
수원화성 축조 상황을 기록한 세계기록유산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1975년부터 보수·복원하였으며, 1997.12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았기에, 현대에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 수원화성 명칭 유래 ***
정식 명칭은 '수원화성(水原華城)'이며, 약칭으로 '수원성(水原城)' 또는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수원화성)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華城)이 화성시에 있지 않고, 수원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겠지만,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인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옛 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현 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서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즉 화성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화성'이라는 이름만 따서 '수원화성'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동장대(연무대)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던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행사를 자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8.19,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대한민국의 성인 모두가 알고 있는 '논산훈련소'(논산에 위치하기에 쉽게 부르는 명칭)라고 불리우는 '육군훈련소'(정식명칭)를 '연무대'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 동장대인 연무대 이름을 본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동장대(연무대) 건물 부근 잔디 위에 녹색의 활쏘기 체험장 표적(3개)이 보인다.
수원화성 플라잉수원
'플라잉수원'은 일반적인 열기구처럼 불을 이용해서 올라가는 원리가 아니라 헬륨풍선이 떠오르는 원리로 기상조건에 따라 60~150m 고도로 비행하며, 1회 비행시간은 평균 13분이 소요된다. 탑승인원은 최대 30명까지이나 기상조건에 따라 탑승인원을 축소 통제한다. 요금은 성인기준 2만원이다. 탑승 팁(Tip}은 기구가 오르고 내리면서 회전하지 않기에 처음부터 수원화성 전경이 잘 보이는 쪽에 위치하는 것이 조망권을 확보하는 최상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동북공심돈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이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6.25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이 무너졌는데, 1976년에 복원해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수원화성에는 '동북공심돈'과 '서북공심돈'이 있다.
동1포루(사진 상)
동1포루는 창룡문 남쪽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동1포루는 지형이 평탄하고 조망이 트인 곳에 있어서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치성을 길게 내밀었으며, 다른 포루와 달리 기둥 사이에 벽을 치지 않고 사방을 개방했다.
동남각루(사진 하)
'동남각루'는 화성 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에서 동쪽으로 솟아오른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있다. 건물의 아래층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윗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사면에 짐승 얼굴과 태극무늬를 그린 널빤지 문을 달고 활 쏘는 구멍을 냈다.
동남각루에서 경사진 계단을 내려와 팔달문에 이르는 구간에 '수원영동시장'과 '팔달문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전통시장을 구경하는 재미를 더할 수 있다.
팔달문(남문)
'팔달문'은 수원화성의 남문이다. 정조는 '팔달'의 의미를 '산 이름이 팔달이어서 문도 팔달이며, 사방팔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인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장안문과 마찬가지로 문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팔달문은 축성 당시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공사 감독과 석공의 이름을 새긴 실명판, 현판까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2013년 처음으로 문루 전체를 수리했는데, 훼손된 목재는 최대한 재사용하였다. 부재에 남겨진 전통 기술의 흔적까지 보존한 사례로 손꼽힌다. 팔달문은 비록 좌우의 성벽이 단절되어 도로 한복판에 우뚝 서 있지만 창건 당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평가된다.
서남암문의 전면(사진 상)과 후면(사진 하) 모습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이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문이다. 이곳 서남암문은 용도(담을 양쪽으로 쌓아 만든 길)의 출입문이기도 하다. 수원화성의 5개 암문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신호를 전달하였다.
효원(孝園)의 종
이 종은 유서깊은 효원의 성곽도시이자 날로 발전해 가는 수원시의 드높은 기상을 나타내는 효의 상징으로 그간 주요 행사에서 타종 해왔던 기존의 '팔달동종'이 노후화되어 1992년에 새로이 제작하였는데, 종에는 수원의 시목(은행), 시화(철쭉), 시조(비둘기)와 수원화성 등을 전면에 새기고 시민들의 뜻을 수렴하여 '효원의 종'으로 명명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구경 2.15m, 높이 3.54m, 총중량 3,300관(약 12.5톤)의 대형 종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수원의 기존 시목은 은행나무, 시화는 철쭉, 시조는 비둘기였으나, 1999.12.29 시목은 소나무, 시화는 진달래, 시조는 백로로 변경하였다.
*** 타종안내 ***
'효원의 종'은 모든 이에게 효성심을 심어줌은 물론 가족의 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수원 시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종으로서, 누구나 '종을 칠 때에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성심을 되새겨 보는 값진 시간이 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제1타종 :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효도를 다짐하며
제2타종 :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바라고
제3타종 : 자신의 발전과 소원 성취를 기원
서장대(화성장대)와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 시내 전경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현륭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화서문은 장안문(북문으로 정문임)과 팔달문(남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꺽기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정면)와 뒷쪽 모습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신풍이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의미이다. 1795년에는 정조대왕이 참석한 가운데 신풍루 앞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있었던 곳이다.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이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과 삼도
'봉수당'은 임금 행차 시 정전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하였다. 원래는 '장남헌'으로 불렀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회갑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라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면서부터 이 건물이 '봉수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봉수당 앞에서 동행한 길벗들을 위해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봉수당에 이르는 '삼도'는 세번째 문인 중양문을 지나 봉수당으로 들어가는 길이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넓고 약간 높은 가운데 길은 왕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는 '어도'이다. 양 옆의 길은 신하들이 다니는 길로 오른쪽은 '문관', 왼쪽은 '무관'이 통행했다. 궁궐에서 어도는 국왕 이외에는 함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뒤주
'뒤주'는 곡식(쌀, 콩, 팥) 등을 담아 보관하는 생활 용기이다. 쌀벌레가 생기지 않는 '회화나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으며, 두꺼운 통판으로 궤짝처럼 짜고 네 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려있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크기는 보통 쌀 1~2가마가 들어가는 크기이며, 잡곡 뒤주는 이보다 작다.
1762년(영조 38) 윤5월에는 정조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뒤주와 관련한 속담으로는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가 있는데, 무엇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애석하게 여겨지고. 더 간절히 생각난다는 말일 것이다.
600년 이상된 느티나무
화성 성역 이전부터 있던 600년 이상 된 노거수이다. 높이는 30m, 둘레는 6m이다. 화재로 인해 훼손되었으나 2003년부터 나무 살리기 작업을 통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화성행궁 앞 광장 한켠에 고목이 멋있게 서 있다.
장안문(수원화성의 북문)
수원화성 탐방 도중 중간에 화성행궁을 구경하고 다시 수원화성 탐방은 계속된다.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 라고 풀이했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게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
북수문(화홍문)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칸의 홍예문(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옹관창'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 보물 제1709호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용두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군사 시설이지만 '용연'이라는 아름다운 연못(아래에 있는 사진)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인데,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뜻이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에는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두고 창문을 설치했다. 지금은 온돌방과 창문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동북각루(방화수류정) 바로 앞에 있는 연못 '용연'을 보며, 수원화성과 화성행궁 탐방을 모두 마치고 출발지였던 동장대(연무대)에 도착했다. 이미 여러 차례 탐방을 했던 곳이지만, 올 때마다 화성 축조물들의 아름다움과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정신이 가슴으로 느껴져 늘 가슴 벅찬 감동을 안고 다음에 또 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무리하는 곳이다. 아직 이곳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못 보셨다면 발걸음을 재촉해 보시기 바란다. 가능하면 무더운 여름철은 피하고, 따뜻한 봄철이나 시원한 가을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