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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같은 바둑 AI도 이창호, 이세돌처럼 자신만의 기풍(棋風)을 가지고 있나.
9세부터 프로 바둑만 62년을 둔 ‘바둑 황제’ 조훈현(70)은 이에 뭐라고 답했을까.
지난달 조훈현 국수(國手)를 만났다. 그는 “요즘 바둑을 거의 두지 않는다”고 했다. 일반 시합은 안 나간다. 초청·이벤트 경기만 몇 판 둔다고 했다. “은퇴 아닌 은퇴,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반상(盤上) 위 전신(戰神)’으로 불렸던 조훈현은 ‘바둑의 변방’ 한국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세계 최다승(1953승)과 대회 타이틀 세계 최다 획득(160회) 기록을 보유했다. 하지만 마냥 이긴 게 아니다. 개인 기록만 보면 2812번의 대국에서 1962판을 이겼고, 841판을 졌다. 특히 바둑 세계 챔피언에 오른 다음 해인 1990년, 15세 제자 이창호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심 없이 바둑을 둔다’는 그의 좌우명 ‘무심(無心)’은 그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갖게 했을까. 정상의 자리에서 마음 건강하게 내려오는 비법이 있진 않았을까.
AI(인공지능) 시대 모두가 우왕좌왕한다. 바둑계도 그렇다. ‘인간계 바둑 황제’는 바둑 AI의 등장을 어떻게 바라볼까. 바둑 AI도 자신만의 고유성인 ‘기풍’ ‘류(流)’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 국수 조훈현은 바둑 AI 고도화가 바둑 교육과 바둑 시스템 전반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했다.
흔히 인생을 바둑에 비유한다. “세상사를 바둑판으로 생각하면 풀지 못할 문제가 없다”던 조훈현도 인생에서 한 가지 풀지 못한 난제가 있었다. 한국 정치였다. 여의도 정치판에선 ‘호수’도 ‘묘수’도 안 통했다. 20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며 정치판에 뛰어든 조훈현은 21대 총선에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의도를 홀연히 떠난 그의 선택은 묘수였을까. 정치에서 한발 물러선 그에겐 정치를 바꿀 어떤 묘수가 떠오르진 않았을까.
지난해 12월 29일 조훈현 국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프로 바둑 62년, 잃지 않고자 한 태도가 있다면.
“첫 바둑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에게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어릴 적 한 10년을 함께 살았다. 바둑 자체보다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엇이든 그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만약 최선을 다했는데 승부에서 졌다면 내 능력을 모두 발휘해 졌기에 후회해선 안 된다.”
어린 조 국수를 내제자(內弟子·스승과 함께 살며 배우는 제자)로 받아들인 세고에 겐사쿠는 어린 조훈현을 말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인성과 인품을 행동으로 보여준 게 전부였다. 조 국수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정상의 무게를 견딜 인성이 없다면 잠깐 올라서도 금방 추락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고 했다.
조훈현과 스승 세고에 겐사쿠.
‘바둑 황제’의 무심(無心)
조 국수의 좌우명은 ‘무심(無心)’이다. ‘사심 없이 바둑을 둔다’는 뜻이다. 조훈현은 “마음속에 품은 승리에 대한 갈망을 바둑판 앞에 서는 순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승부의 순간에 이겨야겠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게 진정한 무심”이라고 했다. 다만 승부를 준비할 땐, 누구보다 승리에 대한 갈망과 노력이 필요하며 그래야만 승부에서 ‘무심’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승부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되던가.
“안 된다. 절대. 단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신이 아닌 이상 완전한 무심에 닿을 수 없다. 무심에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랄까. 좌우명을 그리 지었지만, 사실 내게 단 한 번이라도 무심이 있었나 싶다.”
무심(無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일단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강자든, 약자든 결국 마음이 흔들려서 패한다. 평정심을 가져야만 판의 형세가 보인다.”
조 국수의 바둑은 날카롭고 재빠르다. 과거 별명도 ‘조제비’였다. 상대의 흔들리는 몸짓과 눈빛이 대국의 리듬을 깨는 엇박자 포석으로 드러나면 그는 승부수를 던진다고 했다. 이런 바둑이 빛을 발한 건, 1989년 9월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린 제1회 응씨배 대회였다. 처음 열린 세계 대회 결승에서 조훈현의 상대는 중국의 녜웨이핑(聶衛平)이었다. 전체 5국 중 2승2패 상황에서 펼쳐진 마지막 경기에서 조훈현은 초읽기에 몰리며 패배 직전까지 갔다.
1989년 중국에서 열린 제1회 응씨배 결승에서 조훈현 9단은 중국의 녜웨이핑을 상대로 우승했다.
(5국) 중반까진 대국이 잘 이어졌지만,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40만 달러의 상금을 어디에 써야 하나. 세계 대회에 우승했으니 어떡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고 나서 생각할 것들이 아른거렸다. 그런 틈을 타고 상대방이 찔러 들어오니 흔들렸다. 어느 순간 정신을 퍼뜩 차리고 바둑판을 쳐다봤다. 반격하다 보니 이기는 수가 보였다.
그는 “이기고자 하는 욕망까지 사라져 ‘바둑’과 ‘나’, 단둘만 남은 절대적 고요의 순간이 되니 모든 게 선명해졌다”고 했다. 무심(無心)의 순간이었을까. 묘수(妙手)를 생각해낸 이유를 묻는 과거 여러 인터뷰에서도 그는 “알 수 없다. 그냥 ‘생각’ 속으로 들어갔다”고 답했다.
이런 그의 ‘무심(無心)’은 제자 이창호에겐 안 통한 걸까. 세계 챔피언으로 금의환향한 조훈현의 도심 카 퍼레이드가 펼쳐진 지 불과 5개월 뒤인 1990년,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조훈현은 7년째 집에 같이 살던 내제자 이창호에게 패했다. 경기를 마친 둘은 같은 차를 타고 함께 살던 집에 돌아왔다. 15세 신동 소년의 등장에 세상은 발칵 뒤집혔지만, 그날 조훈현 집에선 두 사제를 위한 축하도, 위로도 없었다고 한다. 둘 다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다. 1991년 이창호는 조훈현의 집을 떠났다.
1990년 2월 2일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조훈현 9단과 이창호 4단이 맞붙었다. 이 대회에서 조훈현 9단은 15세의 이창호에게 패했다.
제자 이창호의 ‘청출어람’을 대하는 법
제자 이창호가 이겼을 때 좋은 감정만 들진 않았을 텐데.
“그때만 해도 한국 바둑계는 거의 나 혼자였다. 속으로는 외롭고 힘들었다. 내가 지면 세계 대회 우승은 없었다. 기특했다. 그럼에도 사람인 이상 (타이틀을) 하나씩 뺏기는 게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늙으면 후배가 앞서가는 게 너무 당연한데, 너무 빨리 성장하니 나로선 좀 충격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뺏기고, 마지막 타이틀을 뺏기고 나니 ‘무(無)’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발 한발 걷자. 어차피 ‘무(無)’니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창호에게 지면 어떡하나’라는 정신적인 부담이 있었는데, 반대 입장이 됐다. ‘이창호는 조훈현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겠지. 내 입장에선 내려놓으니 그게 좋았다.”
그 뒤로도 제자에게 계속 졌다. 1990년 최고위전 패배 이후 1991년 대왕전, 왕위전, 명인전 세 타이틀을 제자 이창호에게 내리 내줬다. 1995년 2월, 마지막 남은 대왕 타이틀마저 뺏겼다. “승리는 곧 자부심이자 정체성”이라던 바둑 황제 조훈현은 1974년 최고위전 우승 이후 20년 만에 ‘무관(無冠)’으로 내려왔다. 그는 이 상황을 ‘승리’라는 고문에서 해방된 거로 받아들였다. 1998년 조훈현은 국수전에서 이창호에게 승리하며 패배를 설욕했다. 그는 “창호에게 이기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스승을 이긴 이창호도 2011년 자신의 후배 이세돌에게 모든 타이틀을 뺏겼다. 당시 이창호는 한 인터뷰에서 “막상 지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조훈현은 그 얘길 듣고 씽긋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정답’을 만들어버린 AI 바둑
바둑은 고요한 적막 속에 펼쳐지는 피 튀기는 ‘생각’의 싸움이다. 바둑은 예측 불가능한 인간만의 ‘수 싸움’을 통해 발전했다. 이런 ‘예측 불가능성’이 AI 시대에도 유효할까. 바둑 고수는 AI 바둑을 어떻게 바라볼까.
과거 이세돌 9단과 알파고 대결 당시, 이세돌 승리를 단정했다. 그 이유는.
“컴퓨터 바둑이 등장한 게 30~40년 됐다. 그땐 9점을 접고 경기해도 인간이 이겼다. 그래서 뭐랄까…무시했다. ‘이세돌 9단은 (상금) 10억 벌었구나. 거저먹었구나. 내가 둘 걸…’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첫판 둬 보니 AI한테 안 되더라.”
당시 이세돌의 결정적인 한 수로 알파고에 한 판을 이겼다.
“그 수 전까지는 AI가 우세했다. 최고수의 행마(行馬·바둑돌의 움직임)를 했다. 그런데 이세돌이 78수를 둔 다음부터 AI가 하수의 행마를 보였다. 그게 이해가 안 됐다. ‘AI가 세 판을 전부 이기면 재미가 없으니 승부를 조작했다’거나 기계 고장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었지만, 그때부터 AI가 망가진 건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바둑 기사들은 자신만의 ‘류(流)’가 있다. 이른바 ‘기풍(棋風·바둑 두는 개성·방식)’이다. 류의 발전이 곧 바둑의 진화였다. 조 국수는 “자신과 전혀 다른 류의 이창호가 자신을 이겼고, 그런 이창호는 전혀 다른 류의 이세돌에게, 이세돌은 박정환에게, 박정환은 신진서에게 밀려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연구하고 분석해 그 빈틈을 파고들어 키워내는 ‘류’는 인간만의 것일까.
AI 바둑에도 ‘류(流)’나 ‘기풍(棋風)’이 있던가.
“약간 있다. (AI 끼리) 비슷한 바둑이 많다. 비슷한 정석도 많고. 그걸 어찌 보면 하나의 ‘류’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엔 (상대방의) ‘화점(花點)’에 삼삼(3X3)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기시 했지만, 지금은 그걸 좋은 수로 평가한다. AI가 그런 수를 좋아하니, 사람들이 AI를 조금씩 따라 둔다.”
만약 류가 있다면, 특정 기풍의 학습인가, AI만의 독자적 기풍일까.
“뭐랄까. ‘최선의 수’를 찾는 것이다. AI는 변화를 읽고 끝까지 계산해서 바둑을 둔다. 사람이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10년 전, 조훈현은 바둑계의 주입식 교육을 두고 “새로운 류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상상의 자유보다 공식을 외우게 하고, 생각을 겨루는 바둑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은 기보를 머릿속에 채웠나를 겨루는 일종의 시험이 됐다”고 했다. 이제 그런 주입식 교육은 AI를 통해 더 나빠지진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단 하나의 수를 두기 위해 제한 시간을 거의 다 소진하던 ‘장고(長考) 바둑’ 같은 건 무의미해 질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게 바둑이고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게 바둑”이라던 조 국수 스승 세고에의 가르침은 AI의 등장으로 결국 틀린 말이 된 걸까.
바둑 공부 방식도 AI 등장으로 변할 듯하다.
“지금까진 잘 두는 사람의 기풍과 정석을 따라 하며 내 생각을 가미했는데, 이제는 AI가 가르쳐준다. 그래서 바둑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다. 옛날엔 사람마다 기풍이 달라서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바둑을 두든 똑같다. 단지 사람은 AI가 아니라서 그 판단이 틀릴 때가 있을 뿐이다. AI가 ‘최선의 수’라고 가르치니 따라 해도 뭐라 할 말도 없다. 정답을 찾아주고 (확률을) 숫자로도 표시해 준다. 그걸 정답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AI의 주입식 교육 시대가 왔다고 보면 될까.
“그렇게 됐다. 그걸 얼마만큼 사람이 이해하느냐 문제다. AI가 가르쳐줘도 그렇게 못 둔다. 이해는 하지만 AI의 계산을 따라갈 순 없다. 그 이후의 ‘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기까지 수읽기가 안 된다. 한두 수는 따라 해도 끝까지 따라 하긴 힘들다. 말하자면, 결국 AI에 가까운 사람이 강자다.”
정치라는 바둑판 위, ‘한 알’의 바둑알도 아니었다
복잡한 수 싸움으로는 AI도 혀를 내두르는 게 여의도 정치판이다. 4년 전, ‘바둑 황제’ 조훈현은 그 속에 뛰어들었다. ‘묘수를 잘 두는 것보다 악수를 두지 않아야 이긴다’는 바둑의 격언만 놓고 보면, 그의 자평처럼 정치 도전은 그에게 악수였고, 여의도 정치판을 떠나기로 한 건 묘수였는지 모른다. ‘반외팔목(盤外八目)’이란 말처럼, 정치판에서 꽤 오래 멀어졌으니 예전에 안 보였던 정치판의 수가 이젠 보이지 않을까.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조훈현은 4년의 정치판을 어떻게 복기할까.
20대 총선 당시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원유철 대표(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께서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해 잠깐 바람 쐬러 딴 길에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의도에 안 갔다. 자녀들도 정치는 말렸다.”
2016년 10월 조훈현 9단은 새누리당에 입당해 제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국회를 나오며 “정치판은 승부다운 승부가 아니었다”고 했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상대 정당이) 100개 안건을 내면 그중엔 한두 개는 좋은 게 있을 텐데. 일단 무조건 반대한다.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생각해도 당론으로 안 되면 무조건 반대였다. 내 의견은 없었다. 정치가 의견을 나누고, 합의를 이뤄가야 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게 사라졌다.”
바둑에선 경기가 끝나면 늘 상대방과 승부를 복기한다. 토론하며 상대에게 아이디어를 얻고 적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배울 건 배운다. 조훈현은 이런 바둑 기사의 자세로 정치판에 뛰어든 걸까. 경쟁·증오·모략으로 점철된 여의도 정치판엔 애초에 그가 둘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늘 자신을 정치의 하수를 자청했다. “유일한 소임”이라고 자부했던 ‘바둑진흥법’도 내년 예산이 전부 깎이면서 빛이 바랬다.
‘정치’라는 바둑을 두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바둑알 ‘한 알’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한 알’이라도 됐으면 이해가 가겠는데, ‘한 알’도 안 된 것 같고…. 역시 정치하는 사람은 따로 있구나 싶었다.”
바둑 외 문화예술과 관련해 폭넓은 입법 활동은 없었다는 아쉬운 평가도 있었다.
“바둑진흥법 하나도 쉽지 않았다. 특히 문화예술 부문은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힘이 잘 안 실린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내년 바둑 지원 예산도 다 깎였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정부가 돈이 없어서 그거라도 깎아야 되겠다는 건데…. 문화예술 지원이 전부 없어졌다고 하면 이해하지만 유독 바둑만 깎였다.”
당시 위성 정당인 미래한국당에 참여했다.
“(임기가) 몇 달 안 남은 상황이었다. 갈 사람이 없었다. 난 두 당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당에 도움이 된다 생각해서 갔지만 그게 아니더라. 정치는 너무 어려웠다.”
지금 여의도는 어떻게 보나.
“20대도 그렇지만, 21대도 점수는 별로 못 줄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합격점은 줄 수가 없다.”
그래픽=최수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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