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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동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남시학
-류중영 선생님-
류중영 선생님은 내가 졸업하던 해에
6학년3반 담임을 맡으셨는데 한들에서
출퇴근 하셨고 올해 임동초등학교
총동창체육대회때도 오셨는데
옛날 모습 그대로 많이 늙으시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 글은 고향 임동출신으로
임동초등학교에서도 교편을
오래동안 잡으신 류중영 선생님께서
어린 나이에 6.25전쟁 한해 전부터
6.25 한국전쟁을 치루는 동안
고향 임동 주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6.25전쟁을 직접
격어보지 못한 세대로서는 무척 감동적이기에
향우방에 소개합니다.
특히 인민군이 들어와
인민군 치하에서의 생활모습을 적은 부분은
오늘날 북한의 현실과 오버랩되어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합니다.
내가 겪은 6.25 한국전쟁
-류 중 영-
1. 공비를 잡아서 총살하는 장면 목격
내가 4학년 때다.
학교는 군인들이 주둔해서 낮에는 학생이 쓰고
밤에는 군인들의 숙소로 쓰는 형편이었다.
낮에도 작은 칠판을 들고 나무 밑이나 다리 밑으로
희릉 골의 바위 밑으로 다니면서 공부할 때도 많았다.
하루는 오후시간인데 군인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탈영병을 잡았는데 총살을 시킨다는 것이다.
군인들은 탈영을 했지만 총살은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술렁대는 것이다.
그 사건은 총살을 시키는 현장을 만들고 탈영병을 데리고
현장에까지 가는 과정까지만 연출을 하고
현장에서 사형을 면하는 과정을 취하고
군기확립을 강조하는 연극을 하고 끝을 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공비를 잡아서 사형을 집행하는데 중평동 뒷산의 바위산 절벽 아래에다.
(옮긴이 주: 여기서 공비는 6.25발발전 남한내에서
활약한 좌익분자 빨갱이를 말함
그 무렵의 상황을 들은 예기로는 요즘같은 통신시설의 전화가 없어서
임동 지서를 기점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초소를 파서
사람이 상주하고 마을에 공비가 나타나면 수신호와 목소리로
공비 출현을 임동지서까지 알려 상주하는 군인들이 타격할 정도로
온통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는 시기였다. 인민군 공비가 아님)
군인들이 여러 명이 가서 몇 명은 구덩이를 파고
공비에게는 붕대로 눈을 가리고 구덩이 위에 세우고
담배 한 개비를 불을 달아 입에 물리고
조금 후에 담배연기가 보이더니 총소리가 연발로 들렸다.
공비는 구덩이로 떨어지고 군인 몇 명이 구덩이 둘레에서 확인 사격을 하고 흙을 덮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약 400m 떨어진 학교 동쪽 언덕에서 건너다보았다.
2. 류남걸씨께서 변을 당한 사건
1949년 음력 3월 3일 이날은 다호아재(류동채씨) 막내딸의 혼례식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도 하고 음식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아랫마을에서 곡소리가 진동을 했다.
아버님께서 밖으로 나가셔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남걸이가 죽었니더--- 남걸이가 죽었니더---”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냐?”
남걸씨는 그때 28세였다.
아버님께서 아랫마을로 달려가셨고 ---
사건은 간밤에 영감댁 사랑방에서 남걸씨, 병렬씨, 설영씨 셋이서 자고 있었는데
공비들이 와서 당시 임동면 대한청년단장인 류남걸씨를 칼로 목을 잘라 죽였다는 것이다.
(옮긴이 주: 류남걸씨는 임동초등학교에서도
근무하신 류정희 선생님의 배다른 동생되시고
병렬,설영씨는 집안 친척됨)
방안은 피 철갑이 되고 병렬씨는 기절해서 핏속에 쓰러져 있었고
설영씨는 방에서 빠져나갔다고 한다.
마을 앞의 전봇대 4주가 베어지고 전화선이 절단되었다.
(옮긴이 주:옛날의 전봇대는 오늘날의 콘크리트 전봇대가 아니고
나무에 검은 기름을 발라서 사용했으므로 베었다고 함)
임동 지서에서 경찰관이 내려와서 현장 검증을 하고
전주를 벤 사람을 찾아내어 경위를 조사하고 마을이 온통 뒤집히는 모습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학교에 갔다.
내가 4학년이었다. 오후가 되자 국군아저씨들이 학교에 나타났다.
그날 한들의 사건을 저지른 공비들이 내앞 아래 경포대 앞에서 진을 치고
(옮긴이 주: 경포대는 천전 임하댐의 보조댐이 있는 부분에
숲으로 둘려 싸인 개호송 섬 서녁을 말함)
경찰이 긴급출동하면 기습공격하려고 대기하고 있다가
사건처리를 위하여 비상 출동한 경찰에게 길 밑에서 타이어에 총을 쏴서 트럭을 세우고
좌우 산에서 사격을 퍼부어 경찰 2트럭 60명이 몰살을 당하는 변이 있었다.
그 후에 국군이 2차 출동을 하여 올라오는데 공비들이 또 공격을 가하였으나
국군은 대비를 충분히 하고 출동했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교전이 있었고
군인들은 피해가 적었다고는 하지만 공비들을 하나도 잡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때 무실 출신 류한번씨가 군의 작전에 참가했는데
공격을 받아 길 아래로 피신하여 화를 간신히 면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직접 들었다.
경포대 앞길은 도로가 극히 좁아서 운전을 잘 해야
자동차 바퀴가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고 S자로 급커브인데다
그 지점을 공격하기에 알맞은 낮은 산이 세 군데나 있어서
기습공격에 아주 좋은 자연조건을 갖춘 지형이다.
지금 임하 보조 댐에서 내앞 쪽으로 30m 지점이다.
전주를 벤 사람들은 지서로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으나
경포대 사건이 너무나 컸고 공비들의 계획적인 작전임이 명백했기 때문에 그분들은 풀려났다.
3.임동 장터에 처음 폭격 하던 날
6.25 남침이 있은 몇 주일 후에 안동역 폭격이 있었다. 유엔군의 폭격이었다.
아직 적군이 안동에 오지는 않았는데 안동역을 단양역으로 오판했다는 말도 있고 ----
하여튼 폭격이 있은 후에 그동안 공비의 등살을 피하여
안동읍에서 살았던 큰집과 작은집 그리고 기포종숙이 가족을 데리고 한들로 오셨다.
당시에 우리 마을에는 대곡과 지리실 오잠 숲당 등지의 산골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았다.
공비(빨치산)의 공격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안전지역으로 소개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옮긴이 주:소개령은 빨갱이(공비)들이 마을에 나타날 징조가 보이면
지서에서 마을을 비우고 안전한곳으로 피신을 가라고 하는데
마을을 비우는 것을 소개당했다고 하고 그 령을 소개령이라고 한다.
내고향 오잠은 어렸을때 할머니의 말을 들은 것을 기억하면
6.25 발발 한해 전 1949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져
한들로 마을 사람 전체가 피신갔다고 들었다.
여기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남한의 상황을 이해 해야한다.
1948년 제주사태를 빌미로 야기된 여.순반란사건은
남한내 좌익세력이 연루된사건이고 그와 동시에 전국은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죄익의 빨갱이들을 공비라고 하는데
일부는 북한에서 비밀지령을 받고 빨치산 할동을 하였다.
6.25전쟁이 터지기 한해 전에는 남한은 온통
빨갱이들 때문에 사회가 어수선하기 짝이없었다.
위의 류남걸씨 죽임당하는 것도 6.25전쟁 한해 전
임동내의 빨갱이들이 저지른 것이다.
내고향 오잠에도 6.25가 터지기 전에
빨갱이들이 밤만되면 나타나 곡식등 먹을 것을 압수해 가고
할머니는 좋은 삼배옷도 모두 빼았겄다고 한 말을 어렸을적에 들었다.)
큰집에는 4세대가 들어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큰집과 삼촌네 가족이 모두 우리 집에서 기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대추나무에 올라가서 정찰기(L-19)가 하늘을
여러 바퀴 돌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돈영이와 같이
비행기가 몇 대인지 몇 바퀴나 도는지를 세어보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비행기가 한들 뒷산에서 각도를 잡아 내리꽂으면서
임동 장터에 기총사격을 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강가로 몰려나온다.
어떤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보도랑에 들어가고
나무 밑으로 들어가서 웅크리고 앉아서 폭격을 피하겠다고 야단이다.
사실 폭격을 할 때는 방공호나 동굴에 들어가는 것이 좋고
한들처럼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는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강변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안전하지만 그런 지식도 없는 형편에서
무작정 공습을 피하자는 생각에서 했던 모습이다.
폭격은 소이탄 2발과 기총사격 2회로 끝이 나고 비행기는 사라졌다.
폭격에 대한 기본적인 대피요령도 모르니
무조건 남이 하는 대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 이었다.
그 후에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고 가족의 대피시설을 만들었다.
4. 박실로 피난 갔던 일
6,25가 터지고 7월 하순이라 생각된다.
인민군이 내려오는데 이번 난리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한다면서
마을 어른들이 형편대로 피난준비를 한 듯하다.
우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박실로 가서
도연 용계 길안을 거쳐 의성으로 가는 산길이 있었다.
당시로는 걸어가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 준비는 됐으나 어떻게 가면 좋을지 뚜렷한 계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웃의 눈치를 보다가 인민군이 안동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점심을 일찍 먹고 떠났다.
며칠이나 있다가 돌아올는지 기약도 없는데다
식량준비나 옷이며 침구도 있어야 살 수 있지 않는가?
우리 집에는 여름에 쌀을 먹을 정도의 경제력도 없고
그래도 먹어야 살 것이니 있는 대로 쌀과 보리쌀을
자루에 담아서 지게에 지고 옷 보따리를 이고 지고 떠났다.
부모님과 형님과 누님이 짐을 조금씩 분담을 했으나
그 준비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박실에 가서 화동댁 마루에 둘러앉아서 큰집에서 준비한 미수가루를
물엿에 버무린 것을 얻어먹으니 그 맛이 달고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마당에다 작은 냄비를 걸고 저녁밥을 지어서 간단한 반찬으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시끄럽고 복잡하고 모기의 공격을 받는 등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침이 되었다. 종조부께서 말씀하셨다.
“인민군이 간밤에 돌고개를 넘어서 한들에 들어왔단다.
자, 지금 피난을 가다가 그들에게 잡히면 곤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국군은 벌써 의성 군위까지 후퇴를 했다고 하니 우리가 딸아 잡을 수 있겠는가?
이제 집으로 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여기서 기다려라. 좀 알아보고 올 것이다.”
하시고 나가셔서 한나절이 되어 오셨는데
“인민군이 그다지 무섭게 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피난을 가지 말고 돌아오라고 한다면서 모두 집으로 돌아가자.”하셨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민군을 만나지도 않았으며, 무난하게 집에 돌아왔다.
마을에서 중학생 형들이 말하기를 나개골에 인민군 말이 많이 있는데
마을 어른들에게 말먹이를 해오라고 해서 꼴을 베어다 준다고 했다.
나는 형들을 따라 나개골에 가 보았다.
정말 큼직한 말이 부상이 있는지 붕대를 감은 것이 보이고
붉은 약을 발라놓은 것이 많다. 누가 공급을 했는지 꼴을 먹고 있다.
그들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활동을 한다.
나개골의 말도 그 다음날엔 없었다.
5. 우리 마을 한들에 폭탄이 터지던 날
인민군은 낮에는 휴식을 취하고 밤에 활동을 한다.
유엔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다.
해가 빠지면 움직이는데 뒷밭에서 야간의 도로를 관찰해 보면 착, 착, 소리가 채찍소리다.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데 말발굽 소리만 들린다.
주로 무기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가끔씩 탱크가 지나갈 때도 있다.
군량미는 지역에 있는 창고를 떨어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지게에 지고 옮기는 것이다.
아버님께서도 월곡면 창고에서 쌀을 지고 청송군 부남면을 거쳐서
영일군 접경 까지 가신 적이 있었다.
그날도 밤중에 자동차가 안개 등을 켜고 야간주행을 했는데
마을 앞에서 누군가가 차를 세우고 불을 끄게 한 것이다.
비행기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이 자동차가 비행기의 표적이 된 것이다.
꽝 !!!! 하는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고,
방문이 와장창 열렸다가 꽈당탕 닫기는 엄청난 폭풍이 생겼다.
문에 발린 종이가 몽땅 찢어졌다.
마을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밤중이라 긴장은 되었지만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폭탄은 한 번의 폭음만 있었다.
아침에 확인한 결과 마을에 대형폭탄 4발이 50m 간격으로 떨어졌는데, 동시에 폭발한 것 같다.
그 파편이 건너 마을에까지 날아갔다.
폭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패었다.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에 임동 장터를 폭격했다.
중폭격기라 불리는 큰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그대로 대형폭탄을 주르륵 뿌리듯 투하한 것이 동시에 터진 것이다.
대야정 뒤의 은행나무 큰 가지가 떨어졌으며,
동암댁 안채의 대마루 기와가 파손 되고,
영감댁 앞 담장이 4m 정도가 무너졌고,
안흥댁 사랑방의 벽이 좀 부서졌다.
사람의 피해는 없었다.
마을 가운데 150m 거리에 4발이나 터졌는데도
집이나 사람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어른들은 조상의 돌보심이 없이는 생각도 못할 일이라 하셨다.
6. 공산주의 정치의 모습
인민군이 들어와서 주민에게 한 말은 부산까지 점령하는 데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 보다는 쉽지가 않다면서
승리는 확실하다는 자신감을 보였고 주민을 소집하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소년단 부인회 청년회 등을 조직하여 그들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마을의 동무들이 나에게 와서 소년단에 가입하여
인민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님께 말씀 드렸더니 안 나가면 무슨 공격을 당할 것이니 나가 보라 하셨다.
그날 저녁에 근암정 주사 마당에 갔는데 많은 소년 소녀들이 모여서 인민군 노래를 불렀다.
김일성장군 노래를 비롯하여 적기가, 강철대우가 등을 힘차게 불렀다.
노래 말고도 연극도 연습하고 인민교육을 시킨 것 같은데 별로 기억된 것은 없다.
아버님은 수곡동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어쩔 수 없이 맡으신 것이다.
그 후에 아버님께서는 다리를 다치셨다면서 헝겊으로 다리를 감고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겨우 걷는 모습을 보이셨다.
뒤에 안 일인데 아버님께서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라
할미꽃 뿌리를 짓이겨서 다리에 붙여서 그 자리를 헐게 하여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면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아버님의 연세가 그때 39세였는데 수염을 기르셨다.
의용군이나 보국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세가 많아 보이게 하신 것이다.
무실의 기양서당에서 예술제를 연다면서 마을에서 연습한 소년단과 청년회 부인회에서
노래와 무용 연극 웅변 등의 발표가 있고 임동면 인민위원회에서 출연한 종목도 있었다.
세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9월이 되면서 곡식이 여물어 가는데 인민위원회에서는
실태조사를 한다면서 논과 밭을 일일이 답사하여
벼의 이삭 수와 한 이삭에 달린 알갱이 수를 세어서
평당 수확량을 산출하며, 콩이나 고추 호박 등의 작황
감나무의 감도 세어서 예상 수확량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공산주의가 무서운 것이라는 말이 입에서 입을 통하여 파다하게 퍼졌다.
수확을 해서 모두 이민위원회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보다 더하다는 말도 나왔다.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수확된 것을
모두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할 노릇이 아닌가?
7. 인민군이 퇴각하던 날
음력 팔월이 되면서 도로에는 부상병 행렬이 줄을 잇는 모습을 보였다.
들것에 담겨서 가는 사람,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음을 겨우 옮기는 사람 ,
들것에 담겨서 죽여 달라고 소리치는 사람,
머리나 팔에 붕대를 감은사람 등 모두가 포항이나 안강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안동으로 후송되는 부상병이다.
추석 전날 아침에 종조부님께서 세수를 하시고 우리 집에 오셨다.
문 앞에 오시면서
“야들아 일간에 조심해라.
내가 세수를 하는데 인민군 장교가 지도를 내놓으면서
북으로 가는 소로(산길)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라.
아마도 인민군이 후퇴를 하는 것 같다.
후퇴할 때 사람을 해치고 달아나는 수가 있으니 조심을 하는 것이 좋다.” 하셨다.
참으로 적절한 말씀이었다.
그날은 조부님의 제사였는데
날만 잊지 않는 정도로 제사를 마쳤다.
추석날 아침에는 마을이 조용했다.
인민군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모두 퇴각한 것이다.
그날 오후에는 국군이 곧 수복을 할 것이니 환영을 해야 한다면서
태극기를 만들 준비를 하고 창호지나 광목에다 태극기를 그리고
깃대를 만들고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8. 패잔병이 일으킨 교전
몇 달 동안의 난리를 겪었으나 직접 교전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패잔병과의 교전이었다.
인민군이 후퇴를 못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새로이 부대를 편성한 패잔병의 수가 몇 천 명이 되고
그들이 항복하지 않고 무리지어 북으로 가면서 국군과 교전을 했다.
임동에도 1950년 12월 22일 아기산과 금댕이재를 마주보면서 교전을 벌였다.
밤중에 총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했고
빨갛게 달은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실로 여러 시간에 걸쳐 교전이 진행되었고
그날 밤에 임동 지서가 불탔다.
날씨는 고추같이 추운데 교전을 하는 군인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다음날 아침에 우리 집 앞의 도랑둑 밑으로 이동하던 군인들이
아침밥 준비를 하시는 우리 어머니께 와서 물을 얻어 마시면서
아이 따스해 아이 따스해 하면서 맛있게 마시고 나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임동 교전에서 전사자가 4명 정도 있었다.
날씨가 추운데다 밤중에 산에서 생긴 전사자를 미처 수습을 못하고
산에서 월동을 하고 이른 봄이 되자 개들이 시체를 물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참으로 처참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