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69:13~28)
‘For they persecute those you wound and talk about
the pain of those you hurt.
Charge them with crime upon crime;
do not let them share in your salvation.’(26~27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한 자를 핍박하고 당신이 부여하신 고통에 대해서 속닥거립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그들을 징벌하소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
우리가 온전하게 창조의 원리대로 살아갔었더라면
어떤 이가
분투의 삶을 살면서도
어떤, 어떤 이유로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겪고 있다면
그를 위에 위로와 공감과 격려를 더할 것이지만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거나 정죄하는 일들이 많다.
죄 때문이다.
죄성은 다른 말로 ‘사랑이 없는 것’이다.
사랑 대신 욕망을 추구한다.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영혼의 마음에는
타자의 분투의 삶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통당하는 영혼에 대한 긍휼함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 본문(23절)에서
‘그들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 등이 영원히 굽어지게 하소서.’라는 말은
그들의 눈이 볼 것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몸이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것에 대한
보응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표방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크리스천도 이런 죄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하나님을 내세워 ‘열심’을 내는 것이
‘사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죄악’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을 앞세운
다른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내 죄를 처단한다는 명복을 우선순위에 둔 것이
사랑을 훼손시키는 일이라면
어떤 부적절한 것에 사로잡힘일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죄악 처단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내 열등감 또는 죄, 아니면 쓴 뿌리의 반대급부적 해소 등?
올해 전반기 신병훈련소의 여자 중대장이
아무것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신병을
지난밤에 떠들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40kg이라는 비상식적인 무게의 완전군장을 들게 한 채로
1.5km 구보 및 걷기, 팔굽혀펴기를 시켜서 사망하게 했다.
여자 중대장이 강한 육군을 양성하겠다는 신념으로
그렇게 했을까?
큰 죄도 없는 신병이라는 귀한 존재가
여자 중대장의 그 신념 때문에 희생된 건가?
규정도 어기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신념에 적합한 행동일까?
본인의 어그러진 어떤 기질과 양상, 습득된 스타일의
산물이 아닐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존중될 만한 사람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무리한 방법으로 행동할 때,
존재는, 사랑은 없다.
존재와 사랑만 추구하면 불안한가?
우린 어차피 불안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살 뿐이다.
그 일에만 집중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의 몫이다.
나에게 묻는다.
‘네가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존재”, “사랑”을 훼손시키지 않는가?’
회개하고 매우 매우 숙고할 일이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절망의 수렁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이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진짜 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
“하나님, 얼굴을 들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도 몸과 마음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도서관에 와서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적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주변에 너무나 귀중한 영혼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감당해 주실거죠?
영혼 하나, 하나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으로 결론 맺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너무나 위대하고 감동적인
사랑을 체험하게 해 주십시오.
마지막 4차 항암을 앞둔 정환이에게
힘에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후 회복의 시간을 갖게 해 주십시오.
더 이상의 고통은 약한 우리에게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최상의 것을 준비해 주실 줄 믿지만
그래도 저희에게는 너무나 힘들게 여겨지는 것임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도와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