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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過客)
― 어떤 족형 (族兄)의 전언(傳言)
이 문 열
그 사내가 찾아든 것은 오후 다섯 시쯤, 그러니까 제법 날이 저물 무렵이었다. 거실에서 방금 온 석간을 펴 들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잡상인이나 낮털이 강도가 다닐 시간은 아니라 싶었던지 쪼르르 달려나가 문을 연 딸아이가 큰 소리로 나를 찾았다.
읽던 신문을 손에 든 채 현관께로 나가는데 어느새 그 사내는 거실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루를 겨우 면한 행색의 중년 사내로, 생판 낯선 얼굴이었다.
“이상조 선생님이십니까?”
사내가 꽤 큰 여행 가방을 손에 든 채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름까지 알고 온 것이라면 틀림없이 긴한 용건도 있을 것 같아 나는 먼저 가방을 놓고 응접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맞게 찾아온 모양이군요. 저 김 갑선이라는 사람입니다. 인사드립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지나가던 길손입니다. 마침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어갈까 하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일이 바로 그랬다.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우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절 알고 오셨는지……?”
“과객(過客)이 주인을 안대야 별것 있겠습니까?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왔지요.”
사내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로 말하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물론 그 흔한 잡지 모퉁이나 신문 조각에도 성명 석 자가 오르내려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무슨 옛날얘기도 아니고 과객이라니. 나는 문득 사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여기저기서라니……, 그러지 마시고 어떻게 알고 여길 오셨는지 말해주십시오.”
“춘부장 되시는 분의 함자는 동(東) 자 훈(勳) 자 아니시던가요? 형주 이씨 대제학(大提學) 파의 사파 증손이시고.”
사내는 대답 대신 우리 집안을 들먹였다. 틀리지 않으니 우선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생께서는 안동에서 중학교까지 마치셨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이곳에서 하셨지요?”
“그것도 맞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나는 그 사내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학교 동창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나보다 너무 나이가 많아 보였다.
“지금은 저 아래 양지(養志) 중학교 서무과장으로 계시지요? 부인께서는 재작년에 계화(桂花) 여중에서 교편을 놓으셨고…….”
그렇다면 이 작자가 무슨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러나 내게 그런 사람이 찾아올 일도 없거니와 상대도 그런 일을 하기에는 걸맞은 인상이나 차림 이 아니었다.
그때 아내가 부엌 쪽에서 얼굴만 내밀고 저녁 식사를 들러 오라고 소릴 치다가 사내를 보고 흠칫했다. 식사 준비에 바빠 그가 온 것을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머, 손님이 계셨군요. 당신, 진작 말하지 않구선…….”
그러나 그 사내가 대답을 대신했다.
“괜찮습니다. 손 같지 않은 손이니까 염려마십쇼.”
“그러세요? 그럼, 여보 손님 모시고 오세요. 하지만 반찬은 나무라시면 안 돼요.”
천성이 활달한 여자답게 아내는 상대의 신분도 확인 않고 대뜸 식탁으로 그 사내를 청했다. 그 사내를 소파에 앉히고 정중한 대화를 나눈 데에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같은 아내의 태도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위 좋게 말하며 먼저 소파에서 일어나는 사내를 나는 어떻게 막아 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가 식탁에 앉기는 했지만, 까닭 없이 끓어오르는 속 때문에 음식 맛이 단지 짠지조차 구별이 안 갔다. 그러나 사내는 아이들 곁에 자리를 잡고 수저를 집어 들며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역시 범절이 있는 집안이십니다. 옛날에는 과객 상이라고 따로 있었는데. 거 왜 찬이 시원치 않으면 과객 상 같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주인과 겸상을 하게 되니 그걸로 진수성찬에 맞먹겠습니다.”
내용인즉 칭찬이었고, 따라서 주인으로서는 당연히 겸사의 말이 있어야겠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하는 꼴이나 보자. 안 되면 힘으로라도 끌어내지. ― 그게 그때까지의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 아들놈이 물었다.
“아빠, 과객이 뭐야?”
“글쎄 ― 공짜 민박? 무전여 행쯤이나 될까?”
나는 약간의 악의를 보이며 대답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에게 그런 설명이 먹혀들 리 없었다.
“그딴 게 뭐 하는 건데?”
“음……. 말하자면 고급 거지 같은 거지.”
나는 아이의 순진한 물음에 보다 강도 높은 악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사내는 별로 탓하는 기색도 없이, 마치 학생의 잘못을 시정해 주는 선생처럼 내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아드님을 잘못 가르치고 계십니다. 과객과 선생의 비유와는 크게 달라요. 첫째로 과객과 거지 ― 비록 고급이라는 관형어(冠形語)가 있기는 하지만 ― 는 그 목적에서 다릅니다. 거지는 생계를 위해서 구걸하지만 과객은 그러지 않아요. 그다음 주인이 거지에게 베푸는 것은 동정 때문이지만 과객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뚜렷한 차이는 신분이죠. 거지는 종보다도 못한 천민 중의 천민이지만, 과객은 대개 주인과 동등 하상의 신분…… 선비여야 합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이요, 영락한 감은 있지만 엘리트의 일종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다시 몇 숟갈 먹성 좋게 밥을 뜨고 국물을 마신 후에 계속했다.
“가깝기로는 공짜 민박이나 무전여행 쪽이 훨씬 가깝지요. 그러나 남의 덕에 팔자 좋게 산수 유람이나 다니자고 하는 것이 아닌 점에서 역시 그것들과 과객은 현저하게 구분이 되지요. 어렸을 때 받은 인상이나 기억은 대개 평생을 지속하는 법입니다. 쉽다고 함부로 설명하시면 선생의 아드님은 평생 과객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하게 됩니다. 더구나 앞으로는 누가 그 그릇됨을 고쳐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럼, 결국 과객이 뭐야?”
듣고 있던 둘째 아들놈이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건 말이다, 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우물거렸다. 좀 전의 악의 대신 느끼게 된 까닭 모를 당황 때문이었는데, 나중에 기억해 보니 그것은 그의 말에서 느낀 어떤 만만찮음, 특히 나를 서서히 압도해 오는 듯한 일종의 지적(知的)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사내가 나를 대신했다.
“자기가 사는 세상과 잘 맞지 않는 사람. 그래서 고향이나 가족들과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
“참 불쌍한 사람이네요.”
“때로는 멋있을 수도 있지.”
넉살이 좋은 건지 감각이 둔한 건지 사내가 그렇게 받았다. 그런데 그 얼마 전에야 식탁 모퉁이에 끼어 앉은 아내가 그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 사람들 정말 요즈음도 있을까요?”
“바로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사내가 다시 넉살 좋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도 사내와 나 사이의 관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아내는 그게 사내의 농담인 줄만 알고 재미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게 또 한 번 내 심기를 건드렸으나, 기분은 어느새 곧바로 아내를 핀잔 줄 정도는 아니게 풀어져 있었다.
“기왕에 신세를 졌으니 반주까지 한잔 얻어 마실 순 없겠습니까?”
이윽고 나보다 배나 빨리 식사를 마친 사내는 다시 아내에게 그렇게 청했다. 내가 별로 말이 없는 데다 그가 술까지 청하니 아내는 그제야 의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말로 묻는 대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길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 정말로 우리 집에 와서 술을 청할 만큼 당신과 친한 사람이에요, 하는 듯이.
“한잔 내오구려.”
설령 그를 내보낸다 해도, 감정까지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된 나는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아내가 내온 국산 양주를 그 사내는 석 잔이나 비우고서야 일어났다.
“불청객이 단란한 가족끼리의 식탁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거실에 나가 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거실로 나가는 사내를 보고 아내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예요? 저분.”
“김 갑선이란 사람이야.”
나는 처음 아무런 경계 없이 그를 식탁으로 끌어들인 아내에게 복수라도 하듯 능청스레 대답했다.
“아니, 어떻게 되는 사이냐구요?”
“당신도 듣지 않았소? 지나가던 길손이오. 과객이란 말이오. 나는 과객 치는 집 주인장이고.”
“이 양반이……. 정말 누구예요?”
“과객이라니까. 실은 나도 조금 전에 처음 알았소.”
“아까 두 분 다정하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러구두 오늘 첨 만났어요?”
“다정하게 얘기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았소? 나는 그가 아버님과 집안 얘기를 하길래 다만 듣고 있었을 뿐이오.”
“저 사람이 아버님과 우리 집안을 알고 있단 말예요? 그럼, 누구 소개래요?”
“듣지 못했어. 묻고 있는데 당신이 불러들였으니까.”
그러자 항의 담긴 눈길과 함께 아내가 이제 막 밥숟가락을 놓는 딸아이를 다그쳤다.
“빨리 거실로 나가 봐. 그 아저씨가 이상한 짓을 하면 곧 소릴 쳐야 돼.”
아닌 게 아니라 듣고 보니 나도 근심이 되었다.
결국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만약 안방이라도 뒤져 값진 물건을 가져간다면. ㅡ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렇잖아도 신통찮던 입맛이 갑자기 떨어졌다.
“내가 가 보지.”
나는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그제야 아내가 질린 얼굴로 당부했다.
“빨리 보내세요. 누가 알아요? 좀도둑인지 사기꾼인지 강돈지…….”
“알았어.”
나도 거의 아내에게 동조하는 기분이 되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를 내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먼저 내게 원인 모를 안도감을 준 것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그지없이 평온한 자세였다. 거기다가 머뭇머뭇 다가오는 나를 보며 미소와 함께 묻는 그의 물음은 거의 기습에 가까웠다.
“나올 때 보니 아직 식사를 반도 못 하셨던데…… 제가 불안해서 나오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는 황급히 부인했다. 그러나 사내는 우리 집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이 되며 말했다.
“옛날의 사랑방이 사무실 또는 직장이란 이름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면서부터 가정은 그 어느 때보다 사적(私的)이고 폐쇄적인 곳이 됐습니다. 서구의 근대 형법(刑法)들이 한결같이 중요하게 보호하고 있는 ‘사생활의 평온’이란 바로 그 같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일 겁니다. 그 평온을 깨뜨린 점에서 선생께 몹시 미안하군요'
“괜찮습니 다, 별말씀을.”
나는 다시 부인했다. 그러고 나니 문득 그에게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거의 거리낌 없이 물었다.
“성함은 들었습니 다만……, 전력(前歷)을 물어도 좋겠습니까?”
“과객이 무슨 대단한 전력이 있겠습니까? 그저 이 시대에서 소외된…… 아니, 영락한 선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희 집안 내력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학(譜學)과 토호(土豪)들의 신상에 관한 것은 과객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지식이자 기본장비가 되는 정보지요. 물론 옛날의 토호에 해당되는 층은 지금의 지방 재벌쯤 되겠지만, 그들은 자신의 기업체에 일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사적(私的)인 과객은 받지 않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대개 사적으로 과객을 받아들일 만한 정신적인 유산이나 소양도 없고……. 따라서 저 같은 과객이 의지할 수 있는 계층은 선생 같은 분들이죠. 가문으로 전해 오는 정신적인 바탕과 일정한 수준의 지적(知的) 연마와, 그리고 한두 사람의 군식구를 먹여도 부담이 안 될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 그런 분들에 대해서 정보를 얻기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으스스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왠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이며 부엌문께에 서서 나를 건너보는 아내의 눈길을 무시한 채 다시 물었다.
“좀 전에 거지나 무전여행자와 과객을 구별하면서 떠도는 목적을 들었습니다만, 과객에 대해서는 말하시지 않았습니다. 정말 옛날의 과객에게 어떤 특수한, 그리고 공통된 목적이 있었을까요?”
“목적이라는 말이 가진 적극성이 약간 마음에 걸리긴 해도 그런 게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자신을 그 구조의 핵심 밖으로 밀어낸 사회체제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거나 나름의 자기 성취 같은 것들 말입니다. 앞의 것은 김삿갓 같은 이에게서 한 전형(典型)을 보는데, 특히 조선 후기의 격심한 당쟁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뒤의 것은 그런 형태로밖에 자기의 재능을 실현할 길이 없는, 가인(歌人), 묵객(墨客)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넓게 보면 김선달, 정만서, 방학죽 정수동 같은 해학가들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완전히 다른 쪽의 특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김삿갓의 시에서도 예술적인 성취에 대한 동경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름 없이 떠돌다 간 가인의 노래에서도 기득권 세력이나 지배 계층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야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옛날얘기에 곁다리로나 등장하는 것으로 알아 온 과객에 대한 사내의 그 같은 해석이 약간 허황되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차츰 그의 얘기에 빨려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왜 그 같은 과객들이 없습니까?”
“숫자야 줄었겠지만 없기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회에도 그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숫자가 준 것은?”
“자기 성취의 방편으로 과객을 택한 쪽입니다. 현대로 이행되면서 촉진된 사회 기능의 분화 덕분이죠. 성악(聲樂)이다, 미술이다, 연극이다 해서 크게 천대받지 않고도 그들이 몸 둘 곳이 생겼고, 보다 대중적으로는 가수다, 코미디언이다, 개그맨이다 해서 그런대로 참을 만한 대우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중인(中人)이었던 역관(譯官)이나 의원이 오늘날 외교관이다, 의사다 해서 신분 상승을 이룩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죠.”
“그럼, 남은 사람들은?”
“능력은 있으나 그 어떤 이유에선지 사회의 핵심부에서 소외된 부류가 대개 그렇습니다. 특히 지나간 유신 시절에 자주 눈에 띄었죠. 분명 지식층에 속하지만 취직할 의사도 크게 없고 직장이 잘 받아 주려고도 않는 그런 사람들……. 하지만 그들을 알아줄 만한 사람이면 누구를 찾아가도 큰 굴욕감 없이 그날그날 필요한 것을 얻어 쓸 수는 있었죠. 이제는 다들 어디엔가 자리를 잡았겠지만, 그때는 일종의 과객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해석이었다. 나는 다시 그의 전력이 궁금했으나 한번 알리기를 거부한 걸 기억해 내고, 화제를 돌렸다.
“과객들이 거지와 다른 것은 베푸는 주인이 단순한 동정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무엇 때문에 그들이 과객들에게 베풀었다고 보십니까?”
“대개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일종의 대리 보상(代理補償)이죠. 그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되는 과객에게 그 사회에서 혜택받고 있는 계층인 토호나 부자들이 소박한 보상 의무를 느낀 것이겠죠. 그다음은 재능에 대한 보수입니다. 과객들이 만족시켜 준 예술적 갈증 그들이 쳐 준 묵화나 들려준 판소리 적벽가(赤壁歌)에 대한 대가로 숙식과 약간의 노자를 제공하기도 했죠. 셋째로는 질질적인 불리(不利)를 두려워해서였습니다. 그 무렵의 지역사회는 서로 고립되어 있어 오늘날처럼 교통이 빈번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과객들은 다른 지역의 정보 전달자 및 지역 간의 장벽을 뛰어넘는 여론 조성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평판은 바로 정보요, 여론의 원천이 되었죠. 그리하여 만약 그들에게 나쁜 평판을얻는 경우 그 평판의 임자가 입어야 하는 불리(不利)는 상당했습니다. 다른 지역 양반들에게 우스갯거리나 비난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 혼인길이 막히고 때로는 출세에 치명적인 장애가 되기도 했지요.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고 지혜가 넘쳐도, 과객에게 인색하고 무례하다는 평판만 있으면 대접 않던 세상도 있었으니까요. 나쁜 뜻으로이긴 하지만 자린고비가 당대의 정승보다 더 유명해지고 그의 일거일동이 천 리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웃음거리가 된 것도 모두 과객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이 세 번째 이유가 모든 토호들이 과객을 함부로 대접하지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는지도 모릅니 다. 마치 한때 미국 사회가 묵크래커스[醜聞暴露者]를 겁냈던 것이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저명인사가 신문, 방송은 물론 이름 없는 잡지사의 기자에게까지도 공연히 주눅 들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렀을 때쯤 나도 돌연히 술 생각이 났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내를 불러 간단한 술상을 부탁했다. 그때껏 내 주위를 맴돌며 어서 빨리 그를 보내도록 말없이 압력을 계속 넣고 있던 아내는 그 때아닌 주문에 금세 터질 듯한 얼굴로 거실을 나갔다.
그 밤 나는 그 사내와 늦도록 마셨다. 그리고 깨끗한 이부자리와 방 한 칸을 그 사내에게 비워 준 뒤에야 아내가 안달을 부리고 있는 안방으로 돌아갔다. 아이 셋을 다 안방으로 불러들이고 문이란 문은 있는 대로 다 잠근 채 나를 기다리던 아내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다그쳤다.
“당신 미쳤수? 무얼 믿고 저런 사람을 함부로 집 안에 재워요?”
하지만 나는 까닭 없이 흡족하고 평안한 기분으로 뒤이은 아내의 비난을 무시한 채 이부자리에 쓰러졌다.
글쎄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 낯선 사내를 기분 좋게 내 집에 재우게 하였을까? 그는 나에 대해 뜻밖으로 많이 알고 있었지만, 알려고만 들면 그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그에게서 풍기는 지적(知的) 분위기라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도 사생활의 평온이 침해당하는 것을 참을 만큼은 아니었다. 과연 그에게는 꽤 깊은 예술적인 소양이 있었고, 나 또한 그것들을 어느 정도 즐기는 바이지만 ―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간밤의 내 기분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그가 그릇된 사회구조로부터 박해받는 사람도 아니고, 나 또한 무슨 대단한 혜택을 받는 계층이어서 그에게 어떤 대리 보상의 의무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가 설령 그의 나쁜 평판이 나에 대한 나쁜 여론을 조성한다 해도 그것이 철저한 사인(私人)인 내게 어떤 실질적인 불리를 가져올 위험은 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 이튿날 날이 새고, 해장국까지 확실히 대접받은 그 사내가 전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 집을 떠난 뒤에야 나는 문득 그런 의문에 빠져들었다.
답은 좀체 얻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간신히 그 답에 비슷한 암시를 얻게 된 것은 그 사내가 떠나고도 닷새가 지난 뒤였다. 그것은 그날 그 사내가 집을 나가자마자 기를 펴는 듯한 아이들과 안도로 환해 오던 아내의 얼굴을 다시 떠올림으로써였다.
그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폐쇄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본능적인 반발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기꺼이 그 사내를 맞아들이게 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1982년)
2016년 12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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