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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廻向하는 願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廻向之時에 作是念言호대
以我善根으로 願一切趣生과
一切衆生이 皆得淸淨하야
功德圓滿하며 不可沮壞하며
無有窮盡하며 常得尊重하며
正念不忘하며 獲決定慧하며 具無量智하야
身口意業의 一切功德으로 圓滿莊嚴이니라
又作是念호대 以此善根으로 令一切衆生으로
承事供養一切諸佛하야 無空過者하고
於諸佛所에 淨信不壞하야 聽聞正法하며
斷諸疑惑하야 憶持不忘하며
如說修行하야 於如來所에 起恭敬心하며
身業淸淨하야 安住無量廣大善根하며
永離貧窮하야 七財滿足하며
於諸佛所에 常隨修學하야 成就無量勝妙善根하며
平等悟解하야 住一切智하며
以無碍眼으로 等視衆生하며
衆相嚴身하야 無有玷缺하며
言音淨妙하야 功德圓滿하며
諸根調伏하야 十力成就하며
善心滿足하야 無所依住하고
令一切衆生으로 普得佛樂하며
得無量住하야 住佛所住케하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으로 회향할 때에 생각하기를
'나의 선근으로써 모든 갈래의 중생들이
모두 청정한 공덕이 원만하여서 파괴할 수 없게 되며,
다함이 없어 항상 존중하게 되며,
바르게 생각하고 잊지 아니하며,
결정한 지혜를 얻고 한량없는 지혜를 갖추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일체 공덕을 원만하게 장엄하여지이다' 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이 선근으로써 일체중생이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여 헛되게 지내지 아니하며,
모든 부처님 계신 데서 청정한 신심이 무너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듣고 의혹을 끊으며,
기억하여 잊지 아니하고 말한 대로 수행하며,
여래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몸으로 짓는 일이 청정하여
한량없이 광대한 선근에 편안히 머물며,
빈궁함을 영원히 여의고 일곱 재물이 만족하며,
부처님 계신 데서 항상 따라 배우고
한량없이 기묘한 선근을 성취하여
평등하게 깨달아 온갖 지혜에 머물며,
걸림없는 눈으로 중생을 평등하게 보며,
모든 상호로 몸을 장엄하여 흠이 없으며,
음성이 정묘하여 공덕이 원만하고,
여러 근(根)이 조복되어 열 가지 힘을 성취하며,
선한 마음이 만족하여 의지한 데 없는 데 머무르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한량없이 머무름을 얻어
부처님이 머무시는 바에 머물게 하여지이다' 하느니라."
廻向하는 願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모든 선근으로써
廻向之時에, 회향할 때에
作是念言(작시념언)호대,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말입니다.
念言이라고 하는 말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을 하는 겁니다.
以我善根으로, 나의 선근으로
願一切趣生(원일체취생)과, 원컨대
一切趣生과, 이 밑에는 一切衆生. 그랬잖아요.
一切趣生하면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도ㆍ천도ㆍ아수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포함해서 말할 때
一切趣生.이라고 하고,
그것도 다 중생에 포함되긴 되지만,
또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써 一切衆生.
원컨대 一切趣生과 一切衆生이
皆得淸淨하야, 다 청정해서,
이 淸淨이라는 말도 참 쉬운 말이면서도
뜻이 아주 무궁무진합니다.
功德이 圓滿(공덕원만)하며
不可沮壞(불가저괴)하며,
가히 무너뜨리거나 막을 수도 없으며,
無有窮盡(무유궁진)하며, 다 할 수도 없으며,
常得尊重(상득존중)하며, 항상 존중함을 얻으며,
正念不忘(정념불망)하며,
正念 ←이것이 남방불교에서 제일 좋아하고,
제일 많이 사용하는 글자지요. 正念. 마음 챙김
←이렇게도 표현하고 하는데요.
正念이 不忘하며, 바른 생각을 잊지 아니하며,
獲決定慧(획결정혜)하며,
확실한 지혜, 결정한 지혜를 얻으며,
具無量智(구무량지)하야, 한량없는 지혜를 갖추어서,
身口意業의 一切功德으로
圓滿莊嚴(원만장엄)이니라.
원만하게 장엄하게 하여 지이다.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겁니다.
←이것이 첫째 생각이고요. 그 다음에 두 번째 생각은
又作是念호대 以此善根으로
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承事供養一切諸佛(승사공양일체제불)하야,
일체제불에게 承事供養해서,
저는 一切諸佛 나올 때
보현행원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고 합니다.
대승불교 경전에는 자주 등장하는 一切諸佛
←이렇게 하는데요. ‘도대체 무슨 부처님이
그렇게 무량 아승지 숫자로 부처가 있다는 말인가?’
일체사람과 일체생명을 一切諸佛이라고 표현합니다.
一切諸佛 = 일체사람과 일체생명.
사람을 앞에다 놓는 것이 좋지요. 일체사람과 일체생명!
그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해서
無空過者(무공과자)하고, 헛되게 지나치지 않고,
於諸佛所에, 모든 부처님처소에
淨信不壞(정신불괴)하야, 철저하게 믿고,
증엄스님 이야기를 아까도 했는데요.
그 분의 3대강령이 있지요. 그 스님 약력에 들어가면
3대강령을 딱 써 놨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나는 언제 출생하고, 무슨 공부를 했고,
그런 이야기 한 마디도 없고,
普天三無(보천삼무).
온 천하에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은 없다.
나를 천번 만번 만 번 속인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믿을 것이다.
아~~! 대단하잖아요? 설사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나는 믿지 못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것 普天三無중의 하나지요.
淨信不壞. ←이것이 사람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법에 대한 淨信도 포함되겠습니다만,
여기는 諸佛所에, 했으니까요.
聽聞正法(청문정법)하며,
대승 경전에 오면 正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요.
사실은 불법이라는 간판 밑에도
邪法(사법)이 많고, 非正法도 많고요.
그러니까 이 대승불교 운동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 운동하는 사람들은
正法이라는 말을 꼭 쓰기 바랍니다.
법 중에도 바른 법! 정법을 청문하며,
斷諸疑惑(단제의혹)하야, 모든 의혹들을 다 끊어서
憶持不忘(억지불망)하며, 다 기억해서 잊지 아니하며,
如說修行하야, 설한 바대로 수행해서
於如來所에, 여래 소에서
起恭敬心(기공경심)하며,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身業이 淸淨하야
安住無量廣大善根(안주무량광대선근)하며,
한량없이 광대한 선근에 安住하며,
永離貧窮(영리빈궁)하야, 영원히 빈궁한 것을 떠나서,
빈궁한 것을 떠나려면 어떻게 하지요?
우리가 복을 많이 지어야지요.
복 짓는 것이 뭡니까? 보시하는 겁니다.
七財에 滿足(칠재만족)하며, 그랬습니다.
일곱 가지 법의 재물을 만족케 한다. 이것 십무진장품에
열 가지무진장을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처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하고 똑 같습니다.(65강~66강)
일곱 가지 법의 재물
= 1信(신) = 믿음. 2戒 = 계율.
3慚(참). 4愧(괴). 5聞(문) = 많이 듣는 것.
6捨(사) = 보시. 글자는 버릴 捨자인데 보시입니다.
7慧(혜) ←이렇게 일곱 가지가 법의 재물이다.
그렇게 했습니다. 이 또한 말하자면
법으로써 빈궁함을 떠나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물론 생활상에 경제적으로 빈궁함을 떠나는 것도
급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문제가지고
이야기하는 마당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淸福(청복)이니 濁福(탁복)이니
그런 말을 하잖아요. 이 일곱 가지 법의 재물이 만족하면
그 사람은 淸福이 넘쳐나는 사람입니다.
청정한 복이 넘쳐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 것도, 개인적으로 설사 아무리 빈곤하게
산다하더라도, 또 사회적인 아무런 지위가 없어서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화엄경을 의지하고,
화엄경과 마주하고 있고 당당하게 ‘나는 화엄행자다.’
잘하든 못하든 ‘나는 화엄경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런 신념 가지고 사니까
그 사람은 淸福이 아주 넘쳐나는 사람입니다.
아주 깨끗한 복!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아주 훌륭한 청정한 복을
잔뜩 가진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부자입니다.
淸福으로써의 부자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 자부심.
그런 신념ㆍ긍지가 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 대한 믿음. 현수품에 보면 10信!
믿음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잖아요.
믿는 마음같이 큰 재산은 없다.
믿음은 불법에 대한 큰 재산이다. 그랬습니다.
사실은 정말 믿는 마음만치 중요한 재산은 없습니다.
有形. 눈에 보이는 재산, 그것이 얼마 되겠습니까? 또
상당히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 크게 믿을 것이 못됩니다.
유형한 재산은 크게 믿을 것은 못됩니다.
그런데 불법에 대한 신심의 재산은
이것은 누가 뺏어갈 수도 없고,
무슨 태풍이 불어도 바람에 날려갈 일 없고,
폭우가 쳐도 물에 떠내려갈 일도 없고,
불에 탈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於諸佛所에 常隨修學(상수수학)하야,
모든 부처님처소에서 항상 따라서 修學해서, 배워서
成就無量勝妙善根(성취무량승묘선근)하며,
한량없는 수승하고 미묘한 선근을 성취하며,
平等悟解(평등오해)하야, 평등하게 깨달아 알아서,
住一切智하며, 일체지혜에 머물며,
모든 것을 아는 평등과 차별을 공히 아는 그런 지혜.
一切智에 머물며,
以無碍眼(이무애안)으로, 걸림 없는 눈으로
等視衆生(등시중생)하며, 중생들을 평등하게 보며,
그렇습니다. 중생들을 평등하게 보려니까
평등해야 평등하게 보지요.
그런데 단 부처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다 같이 평등한
그런 부분이 또 있습니다. 대단한 부분이 있다고요.
외형만 보면 전부가 차별하지요. 그래서 임제스님은
차별 없는 참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짖은 겁니다.
차별 없는 참사람.
그것은 부처나 보살이나 중생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그것은 정말 평등한 겁니다.
차별 없는 참사람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 입장으로 等視衆生해야 됩니다.
중생을 똑같이 평등하게 봐야 됩니다.
衆相으로 嚴身(중상엄신)하야,
여러 가지 모습으로써 몸을 장엄해서,
無有玷缺(무유점결)하며, 결점이 하나도 없으며,
言音淨妙하야, 말이 아주 청정하고 미묘해서,
功德이 圓滿하며, 말도 참 잘해야 됩니다.
특히 남 앞에서 법문한다든지,
아주 짧은 스피치도 사람에게 정말 감동을 줄 수 있도록
그렇게 준비하고 다듬어서 해야 됩니다.
제가 남 훈수 안 들기로 스스로 약속을 아주 많이 하고,
남 잘, 잘못, 눈에 거슬리고 하는 그런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기로 항상 다짐하면서도 또 합니다.
업이 되어서요. 불교 TV를 보면, 차라리 판서 안하든지
직직직직 개미 기어가는 것 같이, 자기도 못 알아보게
그냥 아주 무성의하게 직직직직 쓰고,
글씨 잘 쓰고 못쓰고는 절대 문제 아닙니다.
성의 있게 써야 됩니다. 한 획ㆍ한 획을 성의를 있게 쓰면 그것이 잘 쓰는 글씨입니다.
그런데 전혀 성의 없이 직직직직 직직,
그런데 제가 반대로 칭찬도 해야지요.
저~ 기 논산에 안심정사에 있는 태고종 법안스님.
불교 TV에 나와서 판서하는 사람 중에 제일 잘 써요.
제일 깨끗하게 잘 써요. 태고종 스님입니다.
안심정사 법안스님. 자주 나오지요.
얼마나 정갈하게 쓰는지 몰라요. 신심 나게 씁니다.
쳐다만 봐도 신심 나게 써요.
도대체 조계종 중은 그렇게 하는 중이 하나도 없어요.
야~~ 참 신기하지요. 그런데 글씨라고 씁니다.
아주 무성의하게 직직직직 직직.
명필로 쓰라는 뜻은 아닙니다. 한 자ㆍ한 자를 써도
성의를 담아서 마음 다해서 쓰라는 것이지요.
조계종 스님으로서 괜찮게 쓰는 스님은
지안스님 글씨가 괜찮아요. 아주 얌전하게,
많이는 안 쓰는데 아주 얌전하게 통도사 계시는
지안스님이 깨끗하게 잘 써요.
법안스님이 그렇게(전부 眼자 들어간 스님이네요.)
그 스님이 그렇게 아주 참 정갈하게,
질서정연하게 쓰더라고요.
보는 사람이 그것만 봐도 신심 나잖아요.
글씨도 글씨지만, 말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言音淨妙라고 했잖아요. 말이 淨妙해야 됩니다.
功德이 圓滿하며, 그래 그런 것, 말하는 것 보고,
또 글씨 쓰는 것 보고 사람들이 신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면 그 사람은
저절로 공덕이 불어나는 겁니다. 功德이 圓滿하며,
諸根이 調伏(제근조복)하야,
모든, 안이비설신의 6근이 전부 조복되어서
十力成就(십력성취)하며, 열 가지 힘을 성취하며,
부처님이나 보살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이 十力입니다.
善心滿足하야, 선심이 만족해서,
無所依住(무소의주)하고, 의지하는 바가 없고,
저는 다 못 외우는데 十力중에 處非處智力(처비처지력).
옳은 것과 옳지 아니한 것.
←이것이 十力중에 제 1조입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가려서 아는 지혜의 힘.
←이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잘 가려서하라. 그것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그 인품 괜찮은 겁니다. 그것은 남의 일에
훈수 안 두는 것하고도 연관이 있습니다.
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普得佛樂(보득불락)하며,
부처님의 즐거움을 널리 얻는다.
得無量住(득무량주)하야, 한량없이 머물 곳을 얻으며,
住佛所住케하나니라.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머물게 하여지이다.
令一切衆生으로부터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이 ‘무엇을 즐기는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중생들도 좋아하게 한다니까요. 또 得無量住하야,
우리는 머물 곳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취사선택을 잘합니까?
취사선택 참 잘합니다. 사람도 취사선택 잘하고요.
어디 뭐하는 데 있다면 ‘거기 누가 나오나?’
이름 한번 열거해보라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이름나오면
“아이 나, 바빠서 못나간다.” 그래 버리지요.
가려고 했다가도 ‘에이구 그거 보기 싫어서 못나간다.’
그런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장소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때가 그렇고요.
부처님 경우는 그렇지가 않지요.
住佛所住. 부처님이 머무는 바에 머문다.
부처님이 어디 머물겠습니까?
극락세계에 머물겠습니까? 아니지요.
부처님은 중생이 어려운 곳에 머물고,
재난이 있는 곳에 머물고,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머물고,
그곳이 부처님이 머무는 곳인데요.
우리는 반대로 아주 근사하게 왕궁을 꾸며서
높은 자리에다 부처님을 모셔놨습니다.
사실은 부처님은 그런 데에 머무는 분이 아니거든요.
평생을 힘든 사람들과 함께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려고 했고 그렇게 살았지,
뭐 어디 근사한데 그렇게 살았겠습니까?
*
회향(廻向)하는 원(願) : 회향하는 원(願)
*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써
회향지시(廻向之時)에 : 회향할 때에
작시념언(作是念言)호대 :
염언이라고 하는 말은 속으로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다.
혼자서 중얼거리기를
이아선근(以我善根)으로 : 나의 선근으로
원일체취생(願一切趣生)과 : 원컨대 일체 취생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포함해서 말할 때를 일체취생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다 중생에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일체중생이다. 원컨대 일체취생과 일체중생이
개득청정(皆得淸淨)하야 : 다 청정해서.
청정이라는 말도 참 쉬운 말이면서 뜻이 무궁무진하다.
공덕원만(功德圓滿)하며 : 공덕이 원만하며
불가저괴(不可沮壞)하며 : 가히 무너뜨리거나 막을 수도 없으며
무유궁진(無有窮盡)하며 : 다할 수도 없으며
상득존중(常得尊重)하며 : 항상 존중함을 얻으며
정념불망(正念不忘)하며 : 바른 생각을 잊지 아니 하며.
정념은 남방불교에서 제일 좋아하고 제일 많이 사용하는 글자다.
정념을 마음챙김이라고도 표현한다.
획결정혜(獲決定慧)하며 : 확실한 지혜, 결정한 지혜를 얻으며
구무량지(具無量智)하야 : 그 한량없는 지혜를 갖추어서
신구의업(身口意業)의 : 신구의업의
일체공덕(一切功德)으로 : 일체 공덕으로
원만장엄(圓滿莊嚴)이니라 :
원만하게 장엄하게 하여지이다.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 생각이고 다음으로 두 번째 생각이 나온다.
*
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 또 작시념하되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 이 선근으로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승사공양일체제불(承事供養一切諸佛)하야 :
일체제불에게 승사공양해서.
‘일체제불’이라는 말은 보현행원품에도 많이 나오는 말이고
대승불교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나는 ‘도대체 무슨 부처님이 그렇게 무량아승지 숫자로 있단 말인가?’하고 궁금했었다. 일체제불은 일체 사람과 일체 생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체사람과 일체 생명 그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해서
무공과자(無空過者)하고 : 헛되게 지나치지 않고
어제불소(於諸佛所)에 : 모든 부처님 처소에
정신불괴(淨信不壞)하야 : 철저하게 믿는다.
증엄스님의 삼대 강령이 있다. 그 스님 약력에 들어가면
‘나는 언제 출생하고 무슨 공부를 했고’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고
삼대강령이 나온다. 보천삼무(普天三無)라고 하는데
‘천하에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普天之下 沒有我不愛的人],
천하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普天之下 沒有我不信任的人].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普天之下 沒有我不原諒的人]’
하는 말들이다.
‘천하에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은 없다.
나를 천 번 만 번 속인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믿을 것이다’
라는 말은 참 대단하다. 설사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 는 말은
여기나온 정신불괴(淨信不壞) 와 같다.
이 말에는 불법에 대한 정신도 포함되지만
역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정신불괴 앞에 ‘제불소(諸佛所)’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청문정법(聽聞正法)하며 : 정법을 청문하며.
대승경전에 오면 정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불법이라는 간판 밑에도 사법이 많고 비정법도 많기 때문에
대승불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법이라는 말을 꼭 쓴다.
법중에서도 바른 법을 청문하며
단제의혹(斷諸疑惑)하야 : 모든 의혹들을 다 끊어서
억지불망(憶持不忘)하며 : 다 기억해서 잊지 아니하며
여설수행(如說修行)하야 : 설하는 바대로 수행해서
어여래소(於如來所)에 : 여래의 소에서
기공경심(起恭敬心)하며 :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신업청정(身業淸淨)하야 : 신업이 청정하야
안주무량광대선근(安住無量廣大善根)하며 :
한량없이 광대한 선근에 안주하며
영리빈궁(永離貧窮)하야 :
영원히 빈궁한 것을 떠나서, 빈궁한 것을 떠나려면
우리가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 복 짓는 것이 뭔가? 보시하는 것이다.
칠재만족(七財滿足)하며 :
칠재에 만족한다. 일곱가지 법의 재물을 만족케 한다.
이것은 십무진장품 처음에 열 가지 무진장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서
처음 나온 일곱 가지와 똑같다.
일곱가지 법의 재물은 믿음(信) 계율[戒] 참(慙) 괴(愧) 많이 듣는 것[聞]
사(捨)와 혜(慧) 이렇게 신계참괴문사혜(信戒慙愧聞捨慧)
일곱가지 법의 재물이다. 그중에 사는 버릴 사(捨)자를 써서 보시를 말한다.
이러한 법으로써 빈궁함을 떠나야 된다는 뜻이다.
물론 생활상 경제적으로 빈궁함을 떠나는 것도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문제로 이야기할 마당은 아니다.
그래서 청복이니 탁복이니 하는 말을 한다.
이 일곱 가지 법의 재물이 만족하면
그 사람은 청정한 복, 청복이 넘쳐나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러한 화엄경 공부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설사 개인적으로 아무리 빈곤하게 살고
또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서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화엄경을 의지하고 화엄경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나는 화엄행자다’
‘잘하든 못하든 나는 화엄경 공부하는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기에 우리는 아주 깨끗한 복,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아주 훌륭하고 청정한 복을 잔뜩 가진 사람이고
누구보다 청복으로써 부자다.
화엄행자는 그런 것에 대한 신념, 믿음, 자부심, 긍지가 있어야 한다.
현수품에 십신(十信), 믿음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믿는 마음 같이 큰 재산은 없다. 믿음은 불법에 대한 큰 재산이다.
눈에 보이는 재산은 얼마나 되겠는가.
상당히 있다손 치더라도 크게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런데 불법에 대한 신심의 재산은 누가 빼앗아 갈 수가 없고
태풍이 불어도 바람에 날려갈 일이 없고
폭우가 쳐도 물에 떠내려갈 리가 없고 불에 탈 리도 없다.
*
어제불소(於諸佛所)에 :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상수수학(常隨修學)하야 : 항상 따라서 배워서
성취무량승묘선근(成就無量勝妙善根)하며 :
한량없는 수승하고 미묘한 선근을 성취하며
평등오해(平等悟解)하야 : 평등하게 깨달아 알아서
주일체지(住一切智)하며 : 일체 지혜에 머물며.
모든 것을 아는, 평등과 차별을 공히 아는 지혜 인 일체 지혜에 머물며
이무애안(以無碍眼)으로 : 걸림 없는 눈으로
등시중생(等視衆生)하며 : 중생들을 평등하게 본다.
외형만 보면 전부가 차별을 한다. 평등해야 평등하게 본다고도 한다.
그런데 부처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다같이 평등한 부분이 또 있다.
대단한 부분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차별없는 참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짖은 것이다.
차별없는 참사람. 부처나 보살이나 중생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차별없는 참사람이기 때문에 정말 평등한 것이다.
그런 입장으로 똑같이 중생을 평등하게 봐야 되며
*
중상엄신(衆相嚴身)하야 : 여러 가지 모습으로써 몸을 장엄해서
무유점결(無有玷缺)하며 : 결점이 하나도 없으며
언음정묘(言音淨妙)하야 :
말이 아주 청정하고 미묘해서 공덕이 원만하다. 말도 참 잘해야 된다.
특히 남 앞에서 법문한다든지 아주 짧은 스피치를 하더라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다듬어서 해야 된다.
나는 남 훈수 안들기로 스스로 약속을 많이 하고
눈에 거슬리는 잘잘못을 지적하지 않기로 항상 다짐을 하는데
업이 되어서 또 하게 된다.
불교TV를 보면 판서를 할 때 찍찍찍찍 개미 기어가는 것 같이
자기도 못알아보게 쓰는 스님들이 많다.
글씨를 잘 쓰고 못쓰고는 절대 문제가 아니다. 글씨는 성의있게 써야 된다.
한획 한획을 성의를 다해서 쓰면 그것이 잘 쓰는 글씨다.
그런데 전혀 성의 없이 글씨를 쓰는데 그러려면 차라리 안쓰는 게 낫다.
반대로 칭찬도 한다면 논산의 안심정사에 있는 태고종 스님인 법안스님은 글씨가 얼마나 정갈한지 모른다.
불교TV에 나와서 판서하는 사람 중에 글씨를 제일 깨끗하게 잘 쓴다.
그 글씨가 얼마나 정갈한지 글씨만 봐도 신심이 난다.
명필로 쓰라는 뜻은 아니다.
한 글자를 쓰더라도 성의를 담아서 마음을 다해서 쓰라는 것이다.
조계종 스님으로 또 판서를 괜찮게 하는 스님은 통도사의 지안스님이다.
지안스님은 많이는 안쓰는데
글씨가 괜찮고 아주 얌전하게 깨끗하게 잘 쓴다.
법안스님이나 지안스님이니
전부 눈 안(眼)자가 이름 중에 들어가는 스님이다.
스님들이 그렇게 정갈하게 질서정연하게 글씨를 쓰면
보는 사람이 신심이 난다.
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글씨도 글씨지만 언음이 정묘라고 했다. 말이 정묘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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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원만(功德圓滿)하며 : 공덕이 원만하며.
그런 말하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신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면 그 사람은 저절로 공덕이 불어나는 것이다.
공덕이 원만하며
제근조복(諸根調伏)하야 :
제근이 조복되고 모든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전부 조복되어서
십력성취(十力成就)하며 : 열 가지 힘이 성취하며
열 가지 힘이 참 부처님이나 보살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이 십력이다.
선심만족(善心滿足)하야 : 선심이 만족해서
무소의주(無所依住)하고 : 의지하는 바가 없고.
십력(十力) 중에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 있다.
처비처지력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가려서 아는 지혜의 힘인데
십력 중에 제 1조다. 앉을 자리 설자리 잘 가려서 하라는 말과 같다.
그것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인품이 괜찮은 것이다.
사실 이 힘은 남의 일에 훈수 안두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보득불락(普得佛樂)하며 : 부처님의 즐거움을 널리 얻는다.
득무량주(得無量住)하야 : 또 한량없이 머물 곳을 얻으며
주불소주(住佛所住)케하나니라 :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머물게 한다.
거기에 내가 줄을 그었다.
영일체중생으로 보득불락하며 득무량주하야 주불소주케 한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이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서 중생들도 그것을 좋아하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 곳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취사선택을 잘 하는가?
참 취사선택을 잘한다. 사람도 취사선택 잘하고 어디 모임이 있다면
‘거기에 누가 나오나 이름 한 번 열거 해보라’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아 나 바빠서 못나간다’고 해버리고 만다.
가려고 했다가도 ‘그거 보기 싫어서 안나간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장소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때가 그렇다.
부처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생도 부처님이 머물 바에 머물게 한다.
부처님이 어디에 머물겠는가? 극락세계에 머물겠는가? 아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어려운 곳에 머물고 재난이 있는 곳에 머물고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머문다.
그런 곳이 부처님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데 또 우리는 반대로 아주 근사하게 왕궁을 꾸며서 높은 자리에다가
부처님을 모셔놓는다. 사실 부처님은 그런 데 머무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은 평생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려고 하면서 살았지,
어디 그들과 동떨어진 근사한 데에 살았겠는가?
첫댓글 회향(廻向)하는 원(願) : 회향하는 원(願)
우리가 이러한 화엄경 공부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설사 개인적으로 아무리 빈곤하게 살고
또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서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화엄경을 의지하고 화엄경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나는 화엄행자다’
‘잘하든 못하든 나는 화엄경 공부하는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기에 우리는 아주 깨끗한 복,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아주 훌륭하고 청정한 복을 잔뜩 가진 사람이고
누구보다 청복으로써 부자다.
화엄행자는 그런 것에 대한 신념, 믿음, 자부심, 긍지가 있어야 한다.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