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룻기: 이스라엘의 회복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1:1)라고 시작하는 룻기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사사시대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타락과 부패현상은 극에 달해있었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복된 나라가 붕궤하여질 상태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에는 기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차 레위기나 여호수아서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고 사는 성별된 삶을 유지해오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항상 기억하시고 축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사사시대의 상황이 얼마나 부패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별된 삶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하여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비와 도우심이 그 땅에서 떠나버렸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경에 따라 룻기가 시작되는데 유다지파 사람 엘리멜렉이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버리고 모압지방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아마도 짐작하실 것입니다.
유다지파란 이미 창38장과 49:8-11에서 예언되었듯이 이스라엘의 소망인 메시야 즉 진정한 왕이 약속된 가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도 태어날 것이 약속된 유다지파 사람이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것은 여간 심상치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 행위는 어쩌면 아브라함부터 약속된 언약이 여기에 와서 파기될 수 있는 위험을 담고 있는 소지가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지방에 가서 흥왕하였다면 그래도 소망이 있을 터인데, 호주인 엘리멜렉이 죽어버렸고 그 뒤를 이어 두 아들 말론과 기론마저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엘리멜렉의 가문이 끊어지게 되었으며, 비록 나오미와 두 자부 오즈바와 룻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자손을 생산할 수 없으므로 엘리멜렉의 가문은 완전히 하나님의 회중에서 사라져버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도다}(룻1:6)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모압땅에서 더 이상의 소망을 찾을 수 없게 된 나오미는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자부들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각각 너희로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기를 원하노라}(룻1:8-9)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재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룻기는 1:1과 1:6에서 대반전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룻1:1에서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지라}라고 시작하지만 6절에 와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라고 전환이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어 기근을 주셨으나 이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기근을 거두어 가셨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유다지파인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났었는데, 이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전환을 마치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땅에서 쫓겨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회복되어 귀환하는 것을 보는 듯합니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룻기는 엘리멜렉의 한 가정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된 내용으로 볼 때는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자부 룻의 충정과 헌신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라고 하는 유력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끊어질 뻔한 엘리멜렉의 가문을 룻과 보아스에 의해 계대하게 되었다는 평범한 이야기지만 룻기는 그와 같이 단순하지만은 않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살펴볼 때 비로소 룻기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를 향하신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사기에서 완전하게 부패해진 이스라엘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상태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어 왕을 세우시겠다고 하는 것을 암시한 연후에 룻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 볼 때 더욱 주의하여 룻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룻기가 다윗의 탄생을 기록하여 그 족보를 끝으로 끝마쳐지고 있음을 볼 때 룻기는 어디까지나 다윗이 어떠한 통로를 따라 출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인 점을 미루어 볼 때도 역사를 총정리하고 그 사건들에 심상치 않은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게 될 인물을 소개함으로써 그 인물을 통해 대 변혁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어 오고 있음을 볼 때 룻기는 단순한 고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특히 사사기에서 완전하게 부패해진 이스라엘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상태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어 왕을 세우시겠다고 하는 것을 암시한 연후에 룻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 볼 때 더욱 주의하여 룻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룻기가 다윗의 탄생을 기록하여 그 족보를 끝으로 끝마쳐지고 있음을 볼 때 룻기는 어디까지나 다윗이 어떠한 통로를 따라 출생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인 점을 미루어 볼 때도 역사를 총정리하고 그 사건들에 심상치 않은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게 될 인물을 소개함으로써 그 인물을 통해 대 변혁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어 오고 있음을 볼 때 룻기는 단순한 고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떠나라고 권하사 그들은 늙은 시머머니를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아프도다}(룻1:13)고 한탄하사 큰 자부인 오르바는 떠나고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 돌아가니니}(룻1:15) 라며 룻도 함께 떠나라고 권합니다. 그러자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시리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고 대답함으로 나오미는 룻을 동반하고 베들레헴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룻이 나오미를 따르는 것은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니라 나오미의 백성과 그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기업을 받을 언약의 백성이며 그들의 하나님야말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인격이시며 전능자이시며, 형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온 우주의 왕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 여인 더군다나 모압의 여인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한 은총이 아닐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원래 모압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이 심판을 받을 때 겨우 두 딸과 함께 구원함을 받고 산속에서 숨어 살다가 두 딸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후 동침하여 난 아들 곧 모압과 암몬의 후예들이었습니다(창19:36-38). 이처럼 불륜의 관계에서 출생된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었므로 모세는 {암몬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은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럼 모압 여인이 나오미와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의 과부가 베들레헴에 이르자 사람들이 놀라 달려 나왔습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그 뜻은 희락 뜻임)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이란 뜻임)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1:20-21)고 말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하여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기업에서 쫓겨날 때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저버리기만 한다면 나오미와 같이 비참하고 괴로우리만치 처벌하게 낮추신 연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서서히 회복시키시는 모습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시기는 마치 보리를 추수할 때였습니다(룻1:22).
하나님은 모든 소망이 끊어진 나오미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방법으로 축복해 주실 계획을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룻2:1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라고 기록하고있지 않습니까? 누가 보아스라는 사람을 알았고, 그가 나오미에게 소망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까?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으며, 나오미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요. 보아스 역시 그런 일이 있으리라는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이미 도는 일들을 계획하셨고, 때마침 추수시기에 나오미가 그곳에 도착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는 우리가 전혀 예기치 않았던 때와 장소와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풍성케 하실 계획을 예비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마치 룻은 이스라엘의 관례대로 보리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나갔다가 정말 하나님의 계획하신 예정대로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보아스를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보아스는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룻2:11)고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충정을 다한 것을 칭찬하면서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사 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2)고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식사자리에 룻을 초청하여 함께 떡을 나무며 볶은 곡식을 줌으로 롯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환들에게 곡식을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이 마음껏 곡식을 줍도록 배려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원래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끼니를 해결하자는 정도의 의도가 아닙니다. 적어도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집안의 상속을 받을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증표요, 한 식구나 다름이 없다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보아스를 룻이 가련하여 무의식중에 초대하였지만 머지않아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영원한 한 식구가 됨을 볼 때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아스가 룻에게 축복하기를 {여호와의 날개} 아래서 영원한 보호를 얻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보아스의 옷자락 밑에서 곧 보아스의 날개 밑에서 룻이 영원한 보호를 받으며 보아스의 기업을 받도록 하십니다. 이것 역시 보아스가 무의식 가운데서 한 축복이었으나 하나님은 영원한 예정아래 룻을 보아스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나오미 보다는 마라가 어울릴만 했던 나오미가 똑같이 보아스로 인하여 보호를 받으며 위로를 받고 마침내 자손까지 얻게 됨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권념하실 때에는 언제나 이처럼 놀라운 계획과 인도하심아래 불러 모으심을 우리는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오미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나오미 뿐만 아니라 보아스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권념하사 하나님의 계획대로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과 권능을 우리가 지금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를 한 에바쯤 가져오고 보아스로부터 받은 음식을 나오미에게 주자 비로소 나오미는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모압에서 돌아왔으나 나오미에게는 아무런 소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룻이 곡식과 음식을 가져오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접하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룻이 보아스를 만난 사실과 보아스로부터 예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룻에게서 듣고 난 후 나오미는 참으로 깜짝 놀랄 만큼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 무를 자중 하나이니라}(룻2:20)고 좋아하는 모습은 참으로 나오미의 전생애를 바꾸어 놓을만한 기쁨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무엇보다도 기뻐했던 것은 보아스가 은혜를 베푼 것도 베푼 것이려니와 그것보다는 곧 자기 남편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기업무르는 제도가 있는데, 하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 대신 빚을 갚아 줌으로써 팔았던 기업의 땅을 되찾아 주는 제도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약간 다르나 성격은 같은 것으로서 수혼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곧 형제 중에 아들을 얻지 못해서 기업을 이을 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동생이 대신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후 그 첫 아들은 형제의 가문을 이어서 기업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기업은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있는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 어떤 경우에서라도 그 기업은 잃어버리거나 타인에게 양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희년이 되면 모든 기업을 원주인에게로 돌려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혼법이 있어야 했던 것은 그 기업의 땅을 타인에게 넘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약속의 왕이 곧 그들의 혈통을 통해 주어질 것을 확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다의 가문에서 태어날 것이지만 후손이 끊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제도가 법적으로 공고히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에게는 기업의 땅도 현재로서는 찾을 방도가 없었고, 그 기업을 이을 후손도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왔으나 아무런 기업도 소유할 수 없는 아주 비참한 처지에 빠져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처지에서 구원할 자가 곧 기업 무를 자인데, 그 사람이 능력이 없어서 기업을 되찾아 주지 못한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땅을 이어받을 후손이 없다면 당연히 잃어버리게 되고 말기 때문에 나오미로서는 두 가지의 필요사항을 충족시킬만한 기업 무를 자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나오미가 룻에게 주지 시켜줄 때 룻은 가까이 시어머니를 위해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룻3:2-5).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밤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으라. 그가 너의 한 일을 네게 고하리라}(룻3:2-5)고 나오미가 말하자 룻은 그 말대로 준행을 합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놀라 {네가 누구뇨}라고 묻자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3:9)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하는 말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기 때문에 기업을 받아야만 하고 그 기업을 이을 후손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룻이 자기 개인적인 욕구 충족을 위하거나 보아스의 재산을 보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말라 내가 네 말대로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너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3:10-11)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보아스보다 먼저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이 사실을 통고하고 그가 그 권리를 포기할 경우 자신이 기업을 무르겟다고 약속을 해줍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보리 여섯 되를 주었습니다. 그런 후 룻은 돌아가 나오미에게 그간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모든 대화에서 여호와가 주체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개인이 이 일을 주도 한다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도해 나가고 계시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서 그와 같은 축복을 주실 것을 소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적 배경이 사사시대임을 놓고 볼 때 그처럼 철저하게 패역해지고 부패해진 상태에서 이처럼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볼 때 아무리 시대가 어둡고 잔악해질 때라도 어느 한 곳 이름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와 같이 현저하게 나타나 시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보아스는 성문에서 그 기업 무를 자를 만나고 장로 십인을 청하여 증인으로 세운 뒤에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로서의 권리 시행여부를 확인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할 능력과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자기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주며 권리를 포기합니다(룻4:1-8) 그러자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내가 엘리멜렉과 기론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일에 너희가 오늘날 내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끓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룻4:9-10)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 같게 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4:11-12)고 축복을 합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굉장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통해 12아들을 낳고 그 아들들을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룻이 라헬과 레아 같다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시조였던 것과 같이 룻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기를 바란다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집과 같다는 것은 곧 유다를 통해 영원한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창49:8-11을 염두에 두고 있음인데, 그렇다면 룻을 통하여 새 이스라엘을 이루고 바라던 왕이 태어날 것을 축복한 것입니다. 과연 이 축복은 성취되었습니다. 곧 베들레헴 땅에서 다윗이 등장한 것이 그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축복은 다윗에게서 현실로 나타났지만 먼 훗날 과연 룻의 후손 중에서 진정한 메시야가 탄생하였고, 그 메시야야말로 영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셨습니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룻기는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베레스는 유다의 아들입니다) ---.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4:18-22)고 기록하며 끝마칩니다. 그리고 먼 훗날 이 모든 사건을 포함하여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마1:3-6).
과연 그 옛날 베들레헴 성중에서 백성들의 축복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고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보아스와 룻과 결혼하여 아들 오벳을 낳자 베들레헴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나아와 찬송을 합니다. {찬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룻4:14-15).
이 찬송에서 노래하듯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 이는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생명의 회복자입니다. 나오미는 가슴에 이 아이를 안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마침내 이루시고야 마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의 회복자를 벌써 우리 품에 안기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성취는 최종적으로 우리 주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세우실 한 왕 곧 다윗 왕에 의하여 완성될 것을 룻기는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모든 예언의 성취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룻이 이방여인으로서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회중에 결단코 들어올 수 없는 모압 족속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인 가나안에 들어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후 모압 족속은 다윗 왕에 의하여 강제로 이스라엘에 예속되고 맙니다. 물론 그렇다하더라도 모압 족속은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회중에 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오셨을 때는 칼에 정복되어 들여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새 계명이 새겨짐으로 우리 이방인들도 모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기업에 참예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어찌 보잘 것 없다고 단정 지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엄청나고 광대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계획에 그저 감탄을 금할 수 없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엄위하시고 존귀하신 모습이 룻기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깨닫는 다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사역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의 관심과 정열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바로 이러한 재미와 맛이 성경이 주는 생명의 맛인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이제 룻기의 의미를 종합해 보겠습니다. 룻기는 단순한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사기가 왕이 필요함을 말하면서 끝이 나고 사무엘서는 다윗 왕이 세워지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나오는 룻기가 어떻게 다윗이 태어나는가를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룻기는 다윗 왕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룻기는 장차 왕으로 세움을 받을 다윗 왕이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몰락해져가는 가문이 회생되고 보아스에 의해 대속(기업 무를)이 됨을 볼 때 다윗 왕은 몰락해 가는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야 하며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할 구속주 곧 왕이어만 하며 그러한 다윗 왕국을 통하여 이방나라도 하나님의 왕국으로 곧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다윗 왕의 모든 사역을 축소해서 보여준 책이 곧 룻기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은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됨을 볼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마1:1)는 마태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 역시 영적인 새 이스라엘의 건설을 곧 새로운 성격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것임을 계시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