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회] 초대 농림장관 발탁해놓고
독재자 이승만 평전/[13장] 정치보복의 극치 조봉암 처형의 내력 2012/05/12 08:00 김삼웅좌로부터 정태영, 이동화, 김병휘, 김기철, 신창균, 조규희, 조규택, 권대복(뒤), 윤길중, 박준길(뒤), 김달호, 안경득(뒤), 박기출, 최희규(뒤), 조봉암(이명하, 전세룡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 친애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란 공개장을 통해 좌익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조봉암은 헌법제정 과정에서 국민생활의 기본적 수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 토지개혁 등 경제조항을 포함시키고 통과되도록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경제조항 뿐만 아니라 인권조항에서 모든 국민이 영장없이 체포되지 않을 권리 등을 포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특히 이 당시 제헌의원에 진출한 조봉암 의원은 헌법기초위원회 멤버로 나와 같이 헌법기초작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제2차 대전 후 진보적인 각국 헌법의 추세를 도입하려는 나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예를 들어 기본권, 특히 인권조항에서 영장없이 체포되지 않을 권리 등을 포함시키고자 했는데, 많은 의원들이 그건 형사소송법 사항이라고 반대했다. 이때 조봉암 의원이 다른 의원들을 설득시켜 통과시켰던 것이다. (주석 3)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민의 인권조항과 권력분립, 토지개혁, 경제조항 신설 등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이승만이 추구하는 대통령 권한의 비대화에도 제동을 걸었다. 무소속구락부 의원들의 지원으로 헌법조항 심의 과정에서 이를 반영할 수 있었고, 이와 같은 활약으로 무소속구락부의 리더가 되었다.
조봉암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때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소극성과 해방 뒤에 보인 독선적인 언행과 노선에서 신생국가의 대통령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서재필이나 김규식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조봉암은 이승만의 초대 내각의 농림부장관에 발탁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설과 배경이 따른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독립투사로서의 투쟁경력과 바른 자세에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을 때 조봉암을 불러 농림부장관을 맡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던 것이다. 조봉암은 농정을 그르치면 중국에서처럼 이 나라가 공산화될 것이 필지인데 한민당이 모든 개혁을 반대해서 그를 물리치고 대대적인 개혁을 지지해준다면 맡아보겠다고 했고, 이승만은 조봉암의 그와 같은 제안에 동의했다.(농림부장관 당시 비서실장 이영근 증언)
이승만이 조봉암을 택한 것은 한민당 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이 소유한 토지를 환수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했던 것 같다. 또한 이승만의 조각이 친일파 우익 쪽에 편향되고 있어서 미군정 측이 죽산을 독립운동과 좌익 진영의 몫으로 추천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밖에 이승만 대통령이 총리인준 과정에서 이윤영을 지명했다가 인준을 받지 못하여 이범석을 지명했는데 이마저 국회에서 인준을 받지 못하면 대통령의 인사권 수행에 오점을 남길 수 있어 무소식 리더급인 조봉암을 택하게 되었다는 모종의 타협설이 있다. 언론인 천관우는 이승만의 조봉암 입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1948년 8월 2일, 조봉암 농림부장관 발령은 참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의외의 인선’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누구나가 좌익으로 보던 조봉암을 제1차 조각 제1호로 발표한 것은 ‘경사 중의 경사’이었다.
제헌국회가 열리자 마자 조봉암이 제1차 본회의부터 발언하여 ‘똑똑하다’는 인상을 당시의 이승만 의장에게 주어, 제2차 본회의 때는 이승만 의장 스스로 의장단에서 내려와서 조봉암과 악수도 하였다. 입각 교섭에서 조봉암은 농림부장관과 사회부장관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것을 제시받았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연립내각적 구상을 이해하여 농림부장관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조봉암 농림부장관 입각은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 뒤에 발표한 성명서에도 지적된 바와 같이 “좌익이라는 평을 받던 사람까지도 정부에 참여했다.”는 증거를 보여 거국내각의 주지에 맞춘 것이 아닌가 관측되는 것이다. (주석 4)
조봉암 선생 묘소 입구에 세워진 어록비
일제가 침략을 시작하면서 군량미 확보를 위해 만든 공출제도와 양곡배급제가 그때까지도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또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에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 터라, 우리 농민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원성과 기대는 하늘을 찔렀고, 국정의 가장 시급한 현안이 되고 있었다.
조봉암은 우선 ① 양곡매입법 ② 농지개혁법 ③ 협동조합법 제정 등의 정책목표를 정하고 입법을 서둘렀다. 하지만 사실상 국회를 장악한 한민당의 반대가 극심했다. 한민당은 지주층의 정당이었기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미군정청 산하 민주의원에서 농지개혁법안이 성안되었을 때도 친일협력자들로 구성된 한민당은 민주의원 등원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이 법안의 통과를 무산시켰다.
한민당이 주도하는 제헌국회는 죽산의 과감한 농지개혁 방안과, 농민들 사이에 그에 대한 지지가 날로 높아지자 차기 집권을 노리던 한민당은 조봉암의 모든 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장관 관사 수리비 문제를 들어 검찰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검찰에서는 무혐의를 받았으나 조봉암은 6개월 만에 장관직을 사임하여 농지개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봉암이 초안한 농지개혁의 원칙은 크게 반영되어서 6ㆍ25한국전쟁 기간에 북한이 예상했던 농민들의 인민군 지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봉암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주석
3> 윤길중, <이 시대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호암출판사, 1991.
4> 천관우, <대한민국 건국사>, 지식산업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