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 곱디고운 지명 속에 삶의 지혜가
정 운 종(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나는 가끔 지인을 만날 때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堤川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곤 한다. 산자수명 청풍명월의 본향, 충절의향 의병의 고장 제천에서 태어난 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제천은 금성 면을 비롯해 청풍 수산 한수 덕산 송학 봉양 백운 등 어쩌면 그토록 곱디고운 이름들이 모였는지 그 아름다운 지명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청풍명월의 진수를 깨닫게 된다. 금성(錦城)이란 이름만 해도 그렇다. 구룡, 진리, 적덕, 사곡, 활산, 중전, 포전, 월림, 위림, 양화, 대장, 동막, 그리고 일부지역이 청풍호로 수몰된 월굴, 성내리와 제천 시로 편입된 산곡, 명지, 강제리 등 문자 그대로 비단처럼 고은 마을 이름을 가진 지역이 바로 금성 면이다.
금성 면은 예로부터 금수산을 주산으로 섬겨왔다. 제천 10경의 하나인 금수산은 글자그대로 비단처럼 곱고 아름다움이 빼어난 명산이다. 이처럼. 비단 금(錦)자에 함축된 의미도 아름답지만 월림리(月林里) 또한 그 지명이 뜻하는 대로 달(月)과 수풀(林)이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마을이다. 마을 등 뒤로 계향산(桂香山)이 병풍처럼 둘러 쳐졌으니 이 또한 천혜의 경관이 아닌가.
중국에는 달과 계수나무에 대한 설화가 많이 있다고 한다. 이름난 관광지인 계림(桂林)의 계수나무에 얽힌 설화를 떠 올리지 않더라도 금성면 월림리 뒷산 계향산은 바로 그 계수나무 숲(桂林) 속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산이 아닌가 싶다. 이곳 월림리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거성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의 손자인 정양(鄭瀁)의 후손들이 1668년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영일정씨 집성촌이 되었다. 정 양은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경북 봉화에 은거하며 위국충절을 불태웠던 태백오현(잠은 강 흡, 각금당 심장세, 두곡 홍우정, 손우당 홍석, 포옹 정 양)중의 한분으로 월림 계향산 자락에 묘소가 있다. 1895년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뒤이어 단발령이 반포되자 의암 류인석(柳麟錫)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의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의 전군장으로 활약했던 의병장 송운(松雲) 정운경(鄭雲慶) 선생과 70년대 서울 ‘인사동 한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계산(桂山) 정원태(鄭元泰)선생의 고택과 묘소도 이곳에 있다. 계산 선생은 1960년대 초 제천에 계림중학교(지금의 대제중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고 한학에 밝아 문하엔 항상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필자도 어린 시절 계산 선생 문하에서 통감(通鑑)을 배우며 한문을 익히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새롭다.
1950년대 제천문학회가 태동할 무렵 그 창립멤버였던 고 정승민(鄭承旼) 씨와 시조시인 고 정운엽(鄭雲燁) 씨도 이 마을 태생이다. 정승민 씨는 이때 향토문학지 ‘계봉’(桂峰)을 창간할 정도로 열성적인 문학청년이었다. 이 마을 청년들이 연출한 신파극 ‘복남이의 서름’에서 내가 그 복남이 역을 맡아 화제가 된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며 향수에 젖곤 하지만 내 고향 제천 금성면 월림리는 이처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제천시내에서 30리 밖 오지인 탓인지 급속도로 도시화 돼가는 주변 지역의 발전과는 거리가 멀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현들의 우국충정과 젊은이들이 본보인 문학적 창의와 개척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값진 교훈을 일깨워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 것이다. 알고 보면 제천의 다른 마을의 역사와 전통에도 자랑거리가 많을 것이다. 우리 모두 말로만 고향 사랑 운운하기보다 고향의 역사와 전통에서 값진 교훈을 얻고 실천하려는 노력을 생활화함으로써 자랑스러운 제천을 더욱 자랑스럽게 홍보하면 어떨까. 고향 자랑이 지나쳤다면 고향 사랑의 충정으로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