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취가(三白醉歌)
낮이면 뻐꾹새가 한가롭고, 밤이면 두견새가 서러운 늦봄이다. 이맘때가 되면 농가에서는 모심기 철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일 년 중 가장 바쁜 농사철을 맞게 된다.
속담에“모심기 철에는 죽은 중(僧)도 꿈틀거리고, 부지깽이도 움직인다. 고 하니 농번기임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렇게 바쁜 시기인데도 군 복무를 마차고 갓 돌아와 반거들충이로 놀고 있는 나에게는 품앗이 한번 부탁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용바우 와 나에게도 품앗이 요청이 왔다. 옆집 달순 이가 모심기품앗이 부탁이 왔어 쉽게 허락을 해버렸다. 한번 품앗이꾼으로 발탁이 되면 온품을 받는 상일꾼으로 대우가 바뀌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으로 품앗이 일꾼으로 뽑혀갔어 추억을 남긴 전원의 일들이 내 가슴에 잊을 수 없는 농심을 젖게 한다.
남의 집에 처음 일을 하러 가는데 과연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근심 반 걱정 반이다. 아침나절에는 못자리판에서 모를 쪘다. 엎드려 일을 하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듯 저려왔다. 지금은 모판의 육묘, 논갈이, 써레질, 추수, 타작 등 기계화시대만, 70년대 초만 하여도 대부분이 인력과 축력(畜力)에 의존하여 농사일을 하던 때였다. 농가에서농우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존재였다.‘온간재물’이라 하여 농가마다 한 마리 이상 길렀다. 모심기 철에는 논갈이, 써레질 등, 힘든 일은 소가 도맡아 했다.
논바닥에 물을 대어 논갈이와 써레질을 하여 부드럽게 고른 후 모춤 이를 듬성듬성 던져놓고 10여명의 일꾼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못줄에 표시된 눈금을 보고 심어나가는 일이 마칠 때까지 반복되었다.
모심기는 종일 엎드려 일하니 얼굴과 손발이 부어 몸 전체가 무거워짐을 느낀다. 처음 하는 나로서는 힘든 하루였다. 농사일이 몸에 베인 큰 일꾼들은 몇 날 며칠을 하여도 힘든 기색이 없다.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달 순이 아버지께서 곁에 오더니 용바우 와 나를 못줄만 옮겨 꽂아 나가라고 했다. 모심기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이기에 저려오던 허리를 펼 수 있고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수월했다.
재래식 모심기에는 두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막걸리와 모심기농요(農謠)이다. 막걸리를 마시면 체내에 흡수가 되어 갈증을 없애고 배고픔을 모르며 새로운 힘을 쏟게 하고, 모내기 농요는 구성진 가락이 지루함을 잊게 하고 기분전환을 시키는 심리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오늘도 달 순이네 집 큰 머슴은 입심 좋게 모내기 농요를 들녘이 떠나갈 듯 우렁차게 부르다가 다시 끊어질 듯 가냘프고 구성지게 선창을 불러대니 나머지 일꾼들이 후창 화답하여 뒤를 따라 반복한다. 농요소리가 들녘에 메아리 칠 때마다 한줄 두줄 논뙈기를 메워 나간다.
징개 만개 넓은 들에 점심때가 다가온다. 모시적삼 반 적삼에 분통같은 저 젖 보소./너무 보면 병이되고 손톱만큼만 보고 가소.
구성진 가락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흥겨워 신명나게 하며, 때로는 남녀 간의 연정유발과 해학적인가사로 흥미로움을 더해주니 노소 할 것 없이 일심동체가 되어 힘든 줄 모르게 일을 해 나갔다.
점심때가 되서 들녘원두막까지 달순 이가 가져온 밥 광주리에 일꾼들은 둘러앉아 점심밥과 함께 농주를 백자사발에 흥건히 따라 마시고 피로를 풀기위해 낮잠을 즐겼다. 나와 용바우 는 개울가 숲속에서 낮잠을 잘려는 찰나였다. 달순 이가 개울가로 내려오더니 땀에 젖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적삼 옷자락을 살짝 들어 젖히더니 우윳빛 가슴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상기된 얼굴과 땀에 젖은 가슴을 개울물로 씻지 않는가! 때 묻지 않는 젊은 날의 추억이 지금도 아름답기 만하다.
꿀맛 같은 단잠에서 깨어나 모심기는 다시 시작됐다. 인력으로 심는 모심기라 해가져도 열 마지기 논바닥을 메우기 바빴다.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어둠이 올 무렵 모내기를 마치고 흙투성이 몸을 시냇물에 씻어댔다. 남은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구변 좋은 용바우 가 자작한 삼백취가(三白醉歌) 가사로 앞소리를 먹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쾌지나 칭칭나네’를 후창하면서 신명나는 어깨춤을 추어대며 춤판을 벌렸다.
오월이라 단오절 모심기 제철이네../힘든 농사일도 손 모으면 신명나네./ 금년농사풍년 되어 장가들게 하여주소./남원 골엔 춘향이일색이고, /우리 동네엔 달순 이가 일색일세./월백(月白),주백( 酒白), 수밀도백(水蜜桃白)이니,
삼백(三白)에 취해 보세./우리 동네 사람들은 상부상조 으뜸이네./서로 돕고 살아가세. 서로 돕고 살아가세.
삼백취가는 동네 어귀에 와서야 끝이 났다. 난생 처음 품앗이일꾼으로 뽑혀가 일하고보니 ,몸은 힘들지만 상부상조로 전통을 이어가는 가는 두레 풍습에 흠뻑 젖은 기분 좋은 하루였다. 마을로 돌아오는 논둑길과 모내기를 마친 들녘을 아미( 蛾眉)같은 단오절 초승달이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첫댓글 참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