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전쟁이 터질 때마다 '게임 체인저'가 되는 무기가 등장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기관총이 게임체인저였다. 참호 속에 숨어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돌격 앞으로' 명령에 달려오던 병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제 2차세계대전에선 참호전이 사라졌다. 당시 최강으로 평가받은 독일의 티거(Tiger), 판터(Panther) 전차(탱크)들이 기관총으로 무장한 진지를 무참하게 짓밟고 지나갔다. 탱크의 성능과 작전, 보유 댓수가 승패를 좌우한 게임 체인저였다. 역사적 기록으로 남은 유명한 전투들은 대체로 '탱크전'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최대 규모 전쟁이라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게임 체인저는 무인기(드론)이다. 상대 지역 폭격이나 공습에는 미사일과 함께 드론이 빠지지 않는다. 수십 대의 드론이 야음을 틈타 상대 지역의 주요 목표물로 날아갔다는 기사들이 거의 매일 지면을 메운다.
우크라이나 수상드론(위)와 드론 운용 부대/사진출처:우크라 국방부
드론의 개념도 하늘을 날아 목표물을 타격하는 기존의 전통 드론, 즉 무인기 외에 적 함대를 파괴하는 수상 드론, 주요 교량 파괴를 목표로 하는 수중 드론, 지상전을 펼치는 지상 드론(무인 탱크, 전투 로봇)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드론의 활약에 전쟁 당사국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제 3국들도 드론전을 연구하고, 드론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안티드론' 장비 개발에 나서고 있다. 날아오는 드론을 격추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 장비(방공미사일, 대공포, 안티드론 총 등)에 드론을 무력화하는 재밍(전파 방해)용 전자기기, 드론이 공격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막 설치 등이 주목을 끈다.
후방의 주요 목표물 파괴를 겨냥한 드론은 주로 상대의 대공방어망을 피해 최대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진화되고 있다.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폭발물도 최대한 적재할 수 있는 쪽으로 개량된다.
반면, 포격전이 치열한 최전선에서는 상대의 진지를 정찰하거나 몰려오는 적 기갑 부대(탱크와 장갑차 등)를 차단하기 위해 기동력 있는 소형 드론이 유용하다. 특히 튀르키예(터키)제 '바이락타르 TB2' 드론은 202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탱크 잡는 드론'으로 빛을 발했다.
2년을 훌쩍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바이락타르 TB2' 드론을 능가하는 정찰및 자폭 드론들이 대거 선을 보였고, 전문 병사들이 직접 운용하는 FPV 드론이 접근전에서는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다. 아직까지 드론의 명중률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나, 값싼 드론으로 값비싼 탱크를 무력화하니, 그 가성비는 엄청나다.
탱크위에서 공중 폭발하는 란셋 개량형 러시아 드론/사진출처:텔레그램 @Sitrep_links_in_eng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외교전문 매체 포린 폴리시는 최근 나토 관계자들을 인용, "우크라이나군의 FPV 드론은 밤이나 흐린 날씨에는 조준이 어려운 값싼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어 효율성이 낮다"며 "비행 중에 자연적으로 폭발하거나 반대로 목표물을 타격해도 폭발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지적했다. 외교정책연구소(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의 유라시아 프로그램(Eurasian Program) 선임연구원인 로브 리는 "FPV 드론의 정확도는 대체로 50% 미만"이라며, "러시아군의 경우, 우크라이나 탱크를 파괴하는데 10대 이상의 드론이 필요할 정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워 진격을 계속하는 러시아군에게 명중률이 낮은 드론도 위협적이다. 가성비가 높기 때문이다. 드론 퇴치를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이유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9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에서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 점령 이후 서진 중인 러시아군이 크라스노고로프카와 마리인카 전선에서 철판으로 뒤덮인 탱크를 공격 첨병으로 내보냈다"며 "탱크를 드론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텔레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 T-72 탱크 전체가 장갑 철판으로 덮혀 있어 마치 딱딱한 껍질을 등에 이고 다니는 '거북이'를 연상케 한다. 이 철판 탓에 포탑은 거의 좌우로 회전하지 못하고 전방으로 고정돼 있다. 하지만, 이 탱크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이전 위치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방어용 장갑 철판으로 뒤집어쓴 러시아 T-72 탱크/사진출처:텔레그램
러시아 군사 텔레그램은 안티드론 철판을 두른 T-72 탱크를 '화덕'(мангал)이라고 불렸다. 화덕 위에 바비큐용 철판(혹은 철망)을 얹은 모습이라고 했다. 차체 지붕과 포탑은 물론, 측면에도 견고한 캐노피(챙)를 댄 상태다. 또 무한 궤도(바퀴)앞에는 지뢰제거용 KMT-6 궤도 트롤을 단 타입도 있다. 서방 외신은 이를 ‘코프 케이지’(Cope cage)로 조롱하기도 했다. 가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덜 불안한 상황을 믿는 행동에 빗댄 신조어다.
기동력이 필요한 장갑차량은 포탑과 차체 일부만 철판으로 덮었다. 자폭용 드론과 FPV 드론이 떨어뜨리는 폭발물로부터 차량의 핵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달 초, 특수 군사작전에 투입된 장갑차량(탱크와 장갑차)1,300여대에 드론 보호용 장치를 지난 해부터 설치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같은 보호 장비를 갖춘 탱크가 곧바로 실전에서 포착된 것이다. T-72B3 탱크의 해치 위에는 전자전 장비를 설치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코프 케이지'와 같은 드론 보호 장비의 설치가 러시아군에만 있는 건 아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군도 가자 지구 공격에 앞장서는 '메르카바' 탱크를 보호하기 위해 포탑 위에 ‘안티드론 장갑 스크린’을 설치한 모습이 언론이 공개된 바 있다.
러시아군의 드론 방어 전략은 바다 위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는 핵추진 탄도미사일 잠수함 ‘툴라’(Tula) 위로 드론 방어 철장을 설치한 데 이어, 적극적으로 적의 드론을 격추시키는 '드론잡는 드론' 운용을 추진중이다.
우크라이나 수상 드론을 추적하는 러시아 드론/사진출처:영상 캡처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 흑해 함대 소속 군함들은 우크라이나의 '수상 드론' 퇴치를 위해 집적탄으로 무장된 FPV 드론을 갖추기 시작했다. 함대를 향해 달려오는 적 수상 드론을 FPV 드론으로 추적해 결정적인 순간에 탑재된 집적탄을 터뜨려 격침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성공 확율이 어느 정도가 될 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수상 드론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은, 지난 달부터 흑해 함대의 전략 자산들이 잇따라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해군은 3월 24일 세바스토폴에 정박중인 러시아 대형 상륙함 '아말'과 '아조프', 흑해 함대의 통신 센터 및 인프라 시설을 공격했다. 또 3월 초에는 러시아 정찰함 '세르게이 코토프'가 우크라이나 수상 드론 '마구라 V5'에 당했다. 약 6,500만 달러 상당의 순찰함이 수상 드론에 의해 무력화됐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러시아는 또 우크라이나가 사용하는 안티드론 전술 방식도 곧 차용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 주둔 미 공군 총사령관 제임스 헤커 장군은 지난 달 26일 우크라이나가 사용 중인 이란제 샤헤드 드론의 탐지 시스템을 소개했다. 한마디로 마이크가 달린 휴대폰 8천 대가 우크라이나 전역의 타워에 부착돼 날아오는 러시아 드론의 방향과 속도를 추적한다는 것. 특수부대가 이를 모니터링하면서 패트리어트 방공미사일보다 저렴한 대공포로 샤헤드 드론을 추적, 격추하고 있다는 게 헤커 장군의 설명이었다.
세상의 이치는 안티드론 수단이 발전하면, 또 이를 뚫기 위한 기술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가장 핫한 AI(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한 드론이다. 미국 등은 이미 우크라이나가 AI 드론으로 러시아의 주요 목표물을 공격하도록 돕고 있다고 미 CNN 방송이 지난 2일 보도했다.
AI가 탑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크라이나 장거리 드론/사진출처:X(옛 트위트)
보도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정유시설을 공격하는 일부 우크라이나 장거리 드론에는 AI가 탑재돼 있다. '머신 비전'으로 불리는 AI는 드론이 상대의 방어망을 피해 스스로 이동 경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목표물 몇 미터 위까지 정확히 날아가도록 만든다. 당연히 위성과의 통신이 불필요해 안티 드론의 '재밍'도 통하지 않는다. 현지 지형에 관한 각종 위성 데이터로 훈련된 덕분이다.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장거리 자폭용 드론에 ‘화상 인식 표적화 체계’(IRTS)라는 'AI' 기술을 접목할 계획이다. 카테리나 체르노호렌코 우크라이나 국방부 차관은 영국 텔레그래프지와의 회견에서 "IRTS 기술 덕분에 드론은 러시아의 '재밍' 공격을 피해 더 먼 곳까지 날아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드론 개발→안티드론 수단 등장→신기술 접목 드론 개발로 이어지는 '드론 전쟁'은 우크라이나 전쟁 내내 이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