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14장 34-36절 간구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시는 에수님
올림픽이나 많은 경기를 보면 승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대체로 승리를 하며, 우승에 목마른 사람들이 우승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훨씬 더 적극성을 띠게 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 굉장히 절박한 마음이었습니다. 자기는 나이도 어린 데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워낙 선정을 했고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기 때문에 나라는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왕이 되자 아버지에 비해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떨어졌고 그것은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계획하고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됩니다. 그 결과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하고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주저함없이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 지혜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로 재판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고 왕의 보좌에 앉았을 때 두 여인이 송사를 걸어왔습니다. 한 집에 사는 두 여인이 한 날에 아이를 하나씩 나았는데 한 여인이 잠버릇이 고약해서 자다가 자기의 아이를 깔아뭉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자다가 보니 자기의 아기가 죽은 것을 알게 된 이 여인은 상대방 여인이 깊이 잠든 사이에 아이를 바꿔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죽은 아기가 자기옆에 있는데 그 아기는 어제 자기가 안았던 아기가 아니라 옆에 여인이 낳은 아기였습니다. 이 여인은 그 여인에게 죽은 아기를 주면서 산 자기의 아기를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산 아기가 자기 아기고 죽은 아기가 너의 아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죽여 놓고 왜 남의 아이를 달라고 하느냐고 되려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이 소송이 오늘날로 말하면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고등법원에서 대법원으로 올라가듯이 많은 재판관들을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못하고 왕에게 까지 간 것입니다.
그 두 여인들은 계속해서 산 아기가 자기 아이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끝없는 실갱이를 듣던 솔로몬왕은 부하에게 시켜 그 아기를 칼로 반을 나누어 두 여인에게 반씩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솔로몬의 부하 군인이 큰 칼을 빼들고 아기에게로 가자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속이 탔습니다. 차라리 자기가 포기를 하면 아기는 살지만 끝까지 아기를 달라고 고집하면 아기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기의 친어머니는 아기를 위해 자기가 포기를 할 테니 그 아기를 저 여인에게 주시라고 솔로몬 왕에게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여인은 자기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기가 죽던 살던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뜻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결국 솔로몬왕은 아기의 생명에 대하여 절박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은 친어머니니 그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주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기도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 속에 간절함이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드뭅니다. 주시면 좋고 안주시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오늘 읽으신 본문을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34-36절까지입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여기보면 그들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게네사렛 땅에 배를 타고 도착을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알아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그 근방에 두루 통지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혹시나 우리 동네는 안오시나?”가 아니라 “우리 동네에도 예수님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혹시나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안오시나?”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 반드시 예수님께서 오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교회만이 간절한 기도가 나오기 때문이고 그런 곳에 예수님은 임재하셔서 자신이 행하고자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게네사렛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만을 보고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서의 권세를 보고 기다렸다가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해서 자기 지역에 사는 수많은 병자들이 아니라 모든 병자들을 데리고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은 그 모든 병자들을 치료해주기를 구했습니다. 동네가 한 마음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의 행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행동이 따릅니다. 엄마는 자기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모든 고생을 불사합니다. 아빠는 자식과 아내를 사랑하여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법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과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성도들에게 먹입니다. 목회자를 사랑하는 성도들은 목회자를 위해 필요를 채워줍니다. 사랑이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신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의 이웃들을 위해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그 지역에 있는 많은 불신자들을 위해 예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은 자기들과 함께 사는 병자들을 위해 예수님께 간곡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치료해달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는 사람은 믿는 만큼 예수님께 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어떤 점을 믿고 지금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믿음의 사람은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랑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때 이런 사랑과 믿음의 마음을 가진 겸손하고 적극적이며 간절한 동네가 있을까요? 그런 곳이라면 교회가 속히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가 다른 동네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면 이런 동네를 찾아 교회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가 사랑하며 약한 자와 병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동네, 서로 사랑해서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서로 알리는 동네가 필요합니다. 누가 이들에게 주위 사람에게 통보하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을 안하셨고 제자들 역시 나가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아서 통보하고 모아오고 치료를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모습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을 보면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 11절에도 역시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친구가 상대방을 잘되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라도 해주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 교회에는 필요합니다.
골로새서 2장 2절을 보면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정이나 교회나 동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가질 때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풍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제석교회도 역시 그리스도를 간절히 바라되 혼자만으로 끝나는 은혜가 아니라 온 교회, 온 가정, 온 동네에 영향을 주는 그런 사랑이 넘침으로 피차가 복을 받게 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