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2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가 1,46-56)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for he has looked upon his lowly serv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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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자식이 없던 한나가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낳은 아이 사무엘을 데리고 성전으로 올라가 사제 엘리에게 보인다. 주님께서 보내 주신 아들이기에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제1독서). 엘리사벳의 축복의 인사에 마리아 역시 노래로 화답한다. 이 노래를 통해 마리아는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찬송하며 이스라엘이 구원될 것임을 예고한다(복음).
☆☆☆
한나는 자식이 없었지만, 주님께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한나는 아이가 젖을 떼자, 제물을 들고 아이와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 엘리 사제에게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다고 서약한다. 이 아기가 후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왕정이 확립된다(제1독서). 엘리사벳의 찬미가를 듣고, 마리아 또한 찬미가를 부른다. ‘마리아의 노래’는 초대 교회 때부터 불린 성모님의 찬미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다른 이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기쁨을 느낍니다. 더욱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에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 받은 사랑과 신뢰에 대한 환희의 노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사하며 사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길’이라는 오래전의 흑백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 잠파노가 유치장에 들어가자 주인공의 여자 친구인 젤소미나는 실의에 빠집니다. 그러자 주인공의 친구가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어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젤소미나,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어. 이 돌멩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세상 모든 것에도 의미가 있을 수 없어.” 돌멩이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면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요? ‘마리아의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낮고 천한 우리를 보살피시면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궁핍과 질병, 두려움과 불안 등 온갖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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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께서 복되신 분으로 일컬어지시는 것은 그분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의 증언대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시골 여인들이었던 엘리사벳이나 마리아께서 복된 여인들로 기록된 것은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찬미가를 듣고 화답하신 ‘마리아의 노래’는 가난한 이들의 염원이 절실히 담긴 신앙 고백입니다. 그 찬미가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유와 해방을 주시러 오시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가난한 이들의 애절한 노래이며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고, 불의한 사회 구조와 질서를 뒤집어엎으시어 역사 속에 새로운 변혁을 이룩하십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은 해방되어 참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곧 오실 아기 예수님은 세상과 인간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인생길과 인간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르게 이끌어 주십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태중에 계시는 그분께 인류를 대신하여 지극히 간절한 심정으로 찬미를 드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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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색깔’이 있습니다. 살면서 만든 것이지요. 밝고 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갑고 어두운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살려는 이도 많지만,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분위기’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오래 하면 ‘향기’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 이는 가까이 가면 ‘밝고 경건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어두운 느낌’을 주는 신앙인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가를 남기십니다.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성모님의 향기가 묻어 있는 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셨지만 겸손으로 일관하신 성모님의 신앙 고백입니다. 교만한 이를 흩으시고, 비천한 이를 높이셨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주님의 도움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쉽게 풀려 나간 ‘경험’입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실패인데도, 뜻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 도와주었던 ‘사건’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개입이었습니다. 축복을 ‘우연’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를 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늘 겸손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다시 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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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이 부족의 주술사에게 다가올 겨울 날씨가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술사는 날씨를 예측하는 조상들의 방법을 잘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는 안전한 방식을 택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든 겨울이 될 것이다.”
막연한 말이지요. 사람에 따라서 힘든 겨울이라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말에 크게 놀란 모든 인디언들은 달려 나가 땔감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땔감을 집 근처에 모아놓은 후에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힘든 겨울이 될까요?”
“그렇다니까.”
주술사가 거듭 이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더 먼 곳까지 가서 마지막 남은 땔감들까지 모조리 긁어모았습니다. 그냥 한 말인데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족 사람들 때문에, 아무래도 마음이 불안해진 주술사는 확실히 해두기 위해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습니다. 기상예보관은 다행히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힘든 겨울이 될 겁니다.”
주술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확실합니까?”
기상예보관이 다시 답했어요.
“그렇다니까요. 아주 확실한 징조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지금 인디언들이 부지런히 땔감을 모으고 있거든요.”
자신이 했던 말 하나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긴 세 사람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지요. 단 세 사람만 똑같은 말을 하면 모든 사람이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말과 행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 하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의 찬미가에 대한 답가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리아의 노래’를 하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사실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순간이지만, 성모님께서는 불평과 원망의 말보다는 오히려 감사의 찬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이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 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평과 불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사할 수 있고 그래서 주님을 기쁘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모습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다 더 큰 기쁨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식사는 내일로 미루지 않으면서 오늘의 할 일은 내일로 미루는 사람이 많다.(칼 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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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봇물 터지듯이>
구세사란 큰 무대에 비중 있는 조연 역할에 충실했던 두 여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상봉 장면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정말 희극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처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외관상으로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물론 ‘말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누구에겐가 탁 털어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 할 상대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또 누구였습니까?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엘리사벳이 지나가면 뒤돌아서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 나이에 그게 가능한 일이냐구?”
이런 두 여인이 극적인 상봉을 합니다. 그간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간 얼마나 털어놓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털어놓았다가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껏 털어놔도 아무 문제없는 대상을 만난 것입니다.
만나자 마자 두 여인의 입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봇물 터지듯이 말이 터져 나오는데, 그 말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노래였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칭송하는 찬미가가 되었습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놀라운 업적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자동으로 우리 입이 ‘쩍’ 벌어지는 시기입니다.
대림 시기는 부족하고 비참한 나란 존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우리 입에서 자동으로 찬미의 송가가 터져 나와야 하는 시기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느님께 바쳐드린 아름다운 선율의 찬미가였습니다. 오늘 루가복음사가가 전하는 ‘마리아의 노래’ ‘성모 찬가’에는 성모님의 삶과 신앙, 좌우명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녀의 한 평생은 하느님을 찬미했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기쁨에 찬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녀는 앉으나 서나, 길을 걸으나 늘 하느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동행하고 계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지금은 뚜렷하지 않으나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그 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마리아의 노래처럼 기쁨과 감사의 찬미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에서 악담과 저주와 거짓된 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기리는 감사의 찬미가가 하루 종일 흘러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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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피캇 - 하느님 찬미가
-이병우 신부-
오늘 복음은 엘리사벳의 칭송을 받은 마리아가 그에 대한 답가로 노래하는 하느님 찬미가 ‘마니피캇Magnificat’, 즉 ‘성모의 노래’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수도자들, 성직자들이 매일 저녁에 이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마리아는 이 노래를 통해서 겸손한 이를 돌보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며,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화답으로써, 무엇보다도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당신의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 안에서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마리아의 ‘신앙고백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성모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찬미의 노래를 불러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시는 이러한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내가 깊이 느낄 때,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것이라는 깊은 믿음이 있을 때, 우리도 성모님처럼 진실된 마음으로 감사의 찬미가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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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이른바 마니피캇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모님의 노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니피캇을 중심으로 묵상하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전후 사정을 고려해 복음관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니피캇이 엘리사벳 성녀와 만난 후 터져 나온 찬가이기 때문에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장면부터 봤으면 합니다. 더 여력이 있다면 성모님께서 예수 탄생 예고를 받으신 후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길부터 살펴보면 더욱 좋겠습니다.
엘리사벳의 집 모양과 분위기도 살펴보고 성모님과 만나 두 분이 함께 있는 가운데 빚어 나오는 분위기도 느껴보며 두 분의 대화를 귀담아들어 봤으면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모님께서 마니피캇을 노래하시는 모습을 찬찬히 보십시오.
다음에 유심히 봤으면 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집에 머무시는 석 달입니다. 그 석 달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탄생될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필경 성모님께서는 엘리사벳이 출산할 때까지 함께 머무셨을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성모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보고 익히시는지 꼼꼼이 살펴보면 커다란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성모님도 아기를 가지신 상태이신지라 그 몸놀림이나 말씀하시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시는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엘리사벳 집에서 어떻게 기거하고 계시는가를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체험들이 그대로 성모님 스스로의 출산 체험으로 연결되어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성모님께서 당신 집으로 돌아오신 다음의 생활 모습을 여운처럼 보면 유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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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 김혜림 수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엘리사벳의 이 말을 들으신 성모님께서는 그에 대한 응답처럼 ‘마리아의 노래’ 즉 마니피캇을 노래하신다. 아름다운 노래이다. 주님께서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을 기억하시고 구원해 주심에 대한 성모님의 억누를 수 없는 감사함이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하느님의 구원사업 중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신 성모님께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실 큰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셨다. 상상해 보건대 만일 이 순간 하느님께서 내게도 ‘큰일’?을 하시겠다는 의중을 보이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답을 드릴 것이다. “제게 큰일은 하지 마시고 그냥 평범하게만 살게 해주세요.”?라고 말이다. “모든 것이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성모님 흉내내어 고백하지만 정작은 신앙심이 얕아 하느님의 큰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살다 보면 겁이 나더라도 때로는 어떤 책임감으로 인해 또 마음이 상할 경우에라도 나는 미소천사로 위장하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언듯 보면 적응력도 좋고 성숙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조금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내 나름대로 ‘수도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기준과 규칙을 만들어 놓고 내가 다치는 것을, 싫은 소리 듣는 것을 지레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자인 카를 융은 인간한테는 내적 인격 이외에 외적 인격, 곧 ‘페르소나(persona)’?가 인간의 마음구조 안에 있다고 말했다. 페르소나는 우리에게 외적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해주는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페르소나에 사로잡히게 되면 내가 나만의 고유한 향기를 잃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나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페르소나에 사로잡히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셨다. 아기 예수님은 금방 오실 텐데 나는 아직도 성모님만 부러워하는 차원에서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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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멋진 순간이라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매력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즉, 인생의 기쁨이란 어떤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조되는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배가 고플 때에는 어떤 음식도 다 맛있습니다. 목이 마를수록 물맛은 더욱 더 시원합니다. 피곤하면 잠이 너무나도 고맙지요. 몸도 마음도 쉬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힘든 수고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정의 가치를 높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혼자 남았다는 고독에 빠져 있을 때 비로소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햇볕을 고맙게 여기게 되는 것은 비 때문이며, 새벽이 기다려지는 것은 밤의 어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회의 기쁨이 큰 것은 이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우리는 대조되는 삶 속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게 된다는 것을 많은 예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오늘의 삶이 고되고 힘들다면 그것은 내가 맞을 행복이 더욱 찬란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함이라고요. 따라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 어려움의 반대편에는 그 만큼의 행복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인 성녀의 삶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삶은 행복과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면서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이제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 찬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삶은 그렇게 행복해보이지 않지만, 이것 역시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끌어지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을 통해서 더 큰 행복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마니피캇이라고 불리는 성모찬송을 노래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고통과 시련의 시간을 겪게 됩니다. 문제는 이 고통과 시련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는가 아니면 고통과 시련의 반대쪽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고 힘차게 살아가는가 라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서둘러서 그 선택의 순간에서 결국 고통과 시련에 갇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정원에 꽃씨를 정성스럽게 심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주고 꽃씨 주위에 둘러 앉아 물끄러미 그 자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꽃씨를 정성껏 심고, 정성껏 가꾸면 예쁜 꽃이 나올 것이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꽃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 날, 어제보다 적은 아이들이 그 자리에 물을 주고 한동안 둘러 앉아 꽃이 나오길 지켜보았습니다. 당연히 꽃은 나오지 않았겠지요. 이제 그 다음 날이 되자 물을 주는 아이도 없고, 바라보는 아이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 꽃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싹도 틔워보지 못한 채 그대로 시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나오게 하려면 정성과 함께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은 분명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 없이는 꽃을 피우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통과 시련이 그냥 곧바로 사라지길 바라서는 안 됩니다. 행복의 꽃은 정성과 함께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다림은 과연 정성이 가득 담긴 기다림이었을까요?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기다림인 것 같아서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 오늘 이 아침 가득합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미소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다.(김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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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나누기
-손영순 수녀-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하느님의 말씀에 너무 기뻐서 환호하며 춤추며 뛰는 모습 말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게 나타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묵주 반지와 팔찌를 끼고 다닙니다. 묵주 반지를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용이하게 묵주 기도를 하려는 거겠지요. 그러나 가끔 자신이 어떤 표징을 하고 다니는지 잊고서는 신앙인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발견되는 그의 묵주는, 십자가는 그저 장식보다도 못한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언젠가 우리 교구 신부님 한 분이 안식년을 맞이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청소부 일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한번 경험하고 싶어서였지요. 늦가을이니 꽤 쌀쌀한 날씨에 휴게소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으려니 얼마나 추우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을 더욱 춥게 한 것은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컵을 아무 데나 버리고 먹다 만 음식들을 탁자에 놓고 떠나는 이들에게 주의를 주면 ‘청소부 주제에 누굴 가르치느냐’는 식의 핀잔과 질책을 하더랍니다. 그들의 손에는 묵주 반지와 팔찌가 있었구요. 이런 모습은 사제를 슬프게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도 슬프게 할 것입니다.
행복의 전형이신 마리아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그때에”로 시작하여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바로 어제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지요.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하하고 축복하는 대목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을 듣고 그때에 마리아가 응답으로 그 유명한 마니피캇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찬가에서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마리아 자신을 기쁘게 하시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쁨과 행복을 바랍니다.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을 자기의 노력으로 성취하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대학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어서, 예쁜 여자를 얻어서, 심지어는 도를 닦아 도사의 경지에 올라서 등.
이것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쁨관, 행복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기쁨과 행복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새 해 인사로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福 많이 받아 幸福하라는 祝福이지요. 즉 우리의 幸福은 받아 幸福해지는 幸福이라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그런데 福을 받으시라는데 누구의 福을 받으라는 말입니까? 나의 福을 받으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길가는 사람의 福을 뺏어 가지라는 것입니까? 나에게 줄 福이 있기나 합니까? 줄 福이 있다 해도 주시겠습니까? 내 福 주고 내가 幸福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내가 不幸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줄 복도 없지만 내 복을 줄 마음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 더위 사가라’고 할 마음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福 많이 받으라는 祝福은 福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福을 받으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福되고 幸福한 사람은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시고, 하느님께서 비천한 이를 높이시고,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를 배불리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하느님께서 높은 사람을 끌어내리시며, 하느님께서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어제 엘리사벳의 칭송 그대로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었고 그래서 복되고 행복한 분이십니다. 우리 행복의 전형이십니다 행복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불만만 늘어가고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말했지만, 며칠 굶어보기로 했습니다. 남들은 일주일씩도 단식하던데 저는 이틀 안 먹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성체를 영하면서 제가 얼마나 교만해있었나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는데 마땅한 행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준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는데 뭐 대단한 일이나 해드리는 것처럼 잔뜩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는데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식사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밥알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 하나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겸손함으로 살면 신학교 삶도 행복하리라 느꼈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이렇게 노래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찬미는 감사드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께 기뻐 뛰며 감사하는 이유는 바로 성모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의 겸손이 바로 하느님께 감사하게 하고 기뻐 뛰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평하고 우울해지는 것은 반대로 교만 때문이겠지요.
저는 겸손이 바로 행복의 비밀임을 깨닫고 이제 낮추고 사랑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습니다. 그런 감격은 며칠 내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기쁘지 않았고 다시 미사와 기도가 찬미가 아니라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겸손해지기 위해서 성인들의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많은 유명한 영성서적을 읽었지만 겸손 하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성의 두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책을 모조리 읽기로 하고 제 기억엔 거의 다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영성에 왕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죽여 나가면 영성이 증가한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굶으니 겸손해진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계속 육체를 죽이다시피 하며 사는 것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끊임없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지만 결론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에 “노력하라.”라고 합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 중에 뼈를 깎는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비록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더라도 그 천재성을 노력으로 승화시키지 않았다면 그 재능은 자신 안에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고 행복의 경지야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까?
아오스딩 성인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습관이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복된 노력이 결국은 몸에 베이고 그것이 덕이 되는 것이지 한 순간의 결심에 의해 겸손이나 사랑, 인내, 친절 등의 덕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1년에 자신의 단점 하나씩만 고쳐도 모두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노력하지 않으면 살면서 자신의 단점 하나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영성은 다름 아닌 ‘노력’에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데살 5,16-18)
즉, 하느님의 뜻은 기뻐했다가 슬퍼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하며 나의 일부로 만들어가야겠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살라고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기를 멈추면 균형을 잡기 어려워져 넘어지고 맙니다. 어떠한 성인도 한 순간에 성인이 되신 분들이 없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온 영혼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그날까지 정진, 또 정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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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바이킹>
-양승국신부-
모처럼 저녁시간 서울시내를 나갔었는데, 한 대형 백화점 앞은 그야말로 별세계였습니다.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안개 등, 휘황찬란한 성탄장식으로 저는 딴 세상에 온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성탄장식처럼, 동화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지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의료 사고로 인해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장을 잃고 억울해하는 한 유족들을 접하고 할말을 잃었습니다.
한 몇 일 차가운 강물위로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 여리디 여린 영혼들을 생각하며 밤잠을 설칩니다.
뿐만 아니지요. 마땅한 거처도 없이 잠수에 들어간 외국인 근로자들의 하염없는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삭막하고 팍팍한 시절입니다. 진정 가슴 설레는 일은 찾아보기가 힘든 나날들입니다. 마음 두근거리는 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 간절하고 애틋한 기다림에 밤잠을 설치게 되는 일은 점점 사라져만 갑니다.
"도대체 왜 이런가?"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도 높은 곳까지 올라와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실은 전혀 그게 아닌데,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올라 갈 데까지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 분명합니다.
놀이동산에 있는 바이킹을 탈때마다 "아! 그래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무릎을 칩니다.
우리네 인생은 하늘 높은 곳을 향해 힘차게 올라가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가슴 섬뜩함을 느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나는 장밋빛 나날일 때가 있는가 하면 죽음보다 더 괴로운 회색 빛 나날도 있습니다.
희망으로만 가득 찬 유년시절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 내려놓고 떠나야할 임종의 순간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떠나갑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한 설렘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인연들도 50년 60년이면 다 떠나갑니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지위도 도달하기 무섭게 물려주고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써 모아왔던 재물도 언제 빠져나갔는지 모르게 빠져나갑니다.
그 모든 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결코 영원한 설렘,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한 우리의 연인이자 희망, 설렘의 대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마니피캇(성모의 노래)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님을 향한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온통 주님의 현존으로만, 주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생애였습니다.
주님으로 가득 채워졌던 성모님의 인생이었기에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고 고통스럽다해도 끝까지 표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집안에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이가 안 좋은지 이 부자간은 만났다 하면 서로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어느 날 그 도시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가서, 남편과 아들의 관계를 좋게 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현자는 아들과 아버지를 각각 따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며칠 후 먼저 아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가장 불만스러운 점을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꿀밤을 때리는 것이 가장 싫어요. 그건 저를 어린애로 무시하는 것이잖아요.”
이번에는 아버지를 불러 아들에게 가장 사랑을 잘 표현한 일을 이야기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표현하기가 영 쑥스러워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들에게 살짝 꿀밤을 때리곤 하죠.”
현자는 두 사람을 함께 불러 그 사실을 알려 주며 서로의 손을 맞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처럼 당신들 또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모든 일을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해’라는 안경을 끼는 일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화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서로간의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뜻만을 내세우다 보니 싸움만 일어날 뿐이지요. 즉,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때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하느님과 한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대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하느님과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관계로 살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느님을 이해하려기보다는 내 뜻만을 내세울 때가 많았으며,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자주 불평과 불만을 던졌던 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느님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생활하는 한 인물을 볼 수가 있지요.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 좀처럼 그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불평과 불만을 던지기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맞춰서 생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과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관계를 만들 수가 있으며,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이 세상에게 되돌려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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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는 자의 기쁨
-심종민 신부-
‘마리아의 노래’라고 부르는 이 복음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소녀 같은 성모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향한 성모님의 온전한 신뢰가 느껴집니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 상식 밖의 일을 대하면서 성모님께서 느꼈을 두려움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기쁨과 환희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의 모습이고, 그 뜻을 발견한 이의 기쁨이 아닐까요? 두려움마저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이 복음은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은총을 우리는 오늘 복음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은총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성모님의 이러한 태도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표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을 보면서 그냥 ‘좋은 글이구나’, ‘좋은 노래구나’ 하고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노래가 내 삶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의 노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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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선물리스트>
오늘 복음은 복음서 안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찬가 중 하나인 ‘성모의 노래’입니다. 수도자들은 매일 저녁 기도 때 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성모님께서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4시기 경 밀라노에서 활동했던 성 암브로시오 교부께서는 ‘성모의 노래’는 성모님의 ‘완벽한 겸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찬가라고 강조했습니다.
참된 겸손은 ‘자기비하’ ‘자기혐오’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약함이나 부족함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무한한 자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크신 그분 앞에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기뻐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의 노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여종 마리아가 부른 역사상 가장 겸손한 기도였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자신의 뱃속에 잉태한 마리아는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만삭이 다되어가는 엘리사벳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내면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노래가 터져 나왔는데, 바로 ‘성모의 노래’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찬가를 통해 첫 번째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 잉태’란 대사건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신 선물임을 천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과 축복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밝힙니다.
자기 낮춤, 겸손의 덕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덕행이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으뜸가는 덕행입니다.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진리의 길입니다. 참된 겸손은 우리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그 사랑에 힘입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감을 고백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하느님을 떠나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함에서 시작합니다.
참된 겸손은 나는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축복과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함에서 시작합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매일 내게 주어지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축복과 은총을 한번 헤아려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매일 아침 내게 보내주시는 선물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보십시오.
‘선물리스트’ 제일 하단부에 이렇게 적으십시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김찬선신부-
내가 마리아라면 어떤 심정일까를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미혼모가 즉시 떠올랐습니다. 미혼모의 심정이겠지요. 자기의 행위에 대한 후회, 자기와 아이를 버린 남자에 대한 분노, 이런 것은 없을지라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걱정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마리아의 수태를 고지하며 천사 가브리엘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과 더불어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기쁨 중에서 마리아는 오늘 자신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렇듯 두려움과 기쁨 중에서 기쁨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군들 두려움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쁨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정적인 미래를 보는 사람과 밝은 미래를 보는 사람의 차이인데 이것은 순전히 자기 혼자 미래를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과 하느님과 함께 미래를 살아가려는 사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자기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을 맞닥뜨릴 때 두렵지 않을 인간은 없습니다. 비록 큰 힘이 못되더라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이 조금 덜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셔야만 합니다.
어제는 하나원에 가서 탈북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한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었습니다. 모스크바를 통해서 들어온 사람. 3달을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몽골까지 걸어가 거기서 들어온 사람,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태국을 통해 들어온 사람, 배를 타고 직접 넘어왔는데 인천까지 거의 다와 풍랑에 그만 배가 뒤집혀 같이 오던 사람은 죽고 자기만 간신히 살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왔건 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은 극도의 두려움이었고 이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배고픔의 고통, 추위의 고통, 가족을 두고 떠나온 고통, 이런 것도 크나큰 고통이었지만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는 두려움, 이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번 24일이면 그 중의 한 기가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대한민국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데 어떤 앞날이 자기들을 기다릴지 또 다시 두려움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저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여러분 여정에 동행하신 하느님께서 앞으로도 함께 계실 것이라고 얘기해주고 그 표시로 나도 당신들의 여정에 함께 하겠노라며 저의 번호를 알려주니 모두 전화번호를 적습니다.
막상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여니 내년에 어떤 일이 닥칠지 저에게도 언뜻언뜻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듭니다.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빈자리에 불안과 두려움이 스며드는 것이지요. 즉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 아닌 다른 곳에 계신 것은 아니지요?’하고 혼자 되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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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는 동반자
- 황지원 신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수도원에 입회를 했습니다. 어린 나이였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깨닫기에 아직 미숙한 사람이기에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면서 조금 불안했습니다. 부르심에 “예” 하며 응답했지만 수도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주실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 입회한 후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의 부르심을 전하는 형제들의 모습 안에서, 그들의 격려와 사랑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은 믿음과 감사로 변화되고 형제들이 있기에 지금도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하며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어린 처녀가 하느님의 힘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했지만, 어찌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 소식을 듣고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성모님은 천사가 알려준 친척 엘리사벳에게 가서 그 소식을 다시 확인받습니다. 그 순간 성모님의 입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그 구원사업의 협조자로서 그분을 찬미하는 성모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흔들리게 하지만 그 순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또한 내가 그러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준다면 우리 삶이 하느님 안에서 더욱 풍요로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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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하고 기뻐 뛰니
-장재봉신부-
두 밤이 지나면
예수님이 탄생하는 성탄입니다.
이제 오실 아기 예수님께
온 세상 교회가 한 마음으로 그분을 기다리고
환영하며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기뻐 뛰는 마음으로 불러드리면 좋겠습니다.
해서
아기 예수님을 신나게 해드리면
참 좋겠습니다.
+++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가, 석 달가량을 머물렀던 사실을 전합니다.
석 달 동안 세례자요한을 잉태한
언니 엘리사벳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성모님께는 정말 아름다워서
소중하게 기억되는
시간들이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여
주님을 함께 찬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귀하고 아름답기 마련이니까요.
석 달 동안
두 여인은 하느님의 권능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감하며 지냈겠지요.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믿음을 칭송했을 듯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성모찬송은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질긴 기도와 눈물을 바쳤던 한나가
하느님의 응답으로 얻은 사무엘을
기쁘게 바치면서 올려드린 한나의 기도와 흡사합니다. (1사무 2,1-10 참조)
아이를 얻지 못하는 슬픔이
너무나 서러워서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였던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낳고
하느님께 서원했던대로
하느님께 아들 사무엘을 바치면서 고백한 기쁨의 노래를 들으면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쉬이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마리아는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상태,
천사의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불안
불확실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서둘러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려나,
마리아는 오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앞당겨,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야말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
(히브 11,1)임을 새기게 됩니다.
한나처럼
하느님을 향해서 끈질기게 청을 드리고
마리아처럼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을 때,
이번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찬송하며 기뻐 뛰는’ 시간이 될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로 부터 쏟아져 내리는 은총이 너무나 벅차고 감사해서
평생 기억하게 될
축복의 때일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성모찬송을 목청껏 바쳐드리는
기쁨의 때일 것을 믿습니다.
두 밤만 자면
우리 예수님이 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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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젊은 나이에 거대한 기업의 이사로 발탁된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능력만큼이나 야심도 대단해서 자신의 일에 온 힘을 쏟아 붙고 있었지요. 그에 따라 사회적 인정을 받으면서 출세의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몸인지라 집안일에까지 충실할 수는 없었지요. 특히 잦은 야근과 출장은 빵점짜리 남편, 아빠로 만드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휴일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이라서 그는 나름대로의 시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음, 우선 모자란 잠 좀 실컷 자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좀 보자.’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오랜만에 놀이동산으로 나들이를 가자고 합니다. 이 말에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이 분위기를 자신이 깰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놀이동산에 함께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이 사람은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은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쉴 수 있는 소중한 내 시간들이 낭비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간, 옆방의 아이들도 일기장에 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썼어요.
“오늘은 아버지와 놀이공원에 다녀왔다. 내 인생 최고로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180도 정반대입니다. 하긴 저도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지요. 판공성사를 주러갔다가 사제관에 있는 체중계 위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글쎄 ‘83’이라는 숫자가 찍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숫자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번에는 제 동창신부가 체중계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저와 똑같은 숫자인 ‘83’이 새겨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동창신부가 너무나 좋아합니다. 체중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지요.
똑같은 ‘83’이라는 숫자인데, 누구는 괴로워하고 누구는 즐거워합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놓일지라도 누구는 행복할 수 있고, 또 누구는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이 항상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자기 자신이 문제라는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성모님께서는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실 성모님의 입장을 잘 생각해보면 결코 이러한 기쁨의 노래를 부를 상황이 아닙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이 아기를 가졌으니, 간음했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인데도 기뻐하면서 찬미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의탁과 겸손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우리 역시 내게 주어지는 상황 탓, 남의 탓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의탁하는 겸손의 마음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 하고 싶지요? 성모님을 닮으세요.
내게 주어진 상황에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바쳐요.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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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을 닮아요
-조명연 신부-
이 세상은 정말로 불공평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살고…. 누구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는 그 조그만 재능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누구는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반면, 또 다른 누구는 다른 사람들의 외면만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특히 내 자신이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주님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저절로 생겨나지요.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모님께서 행복해보이십니까? 열다섯의 나이에 아기를 가진 것이 행복한 것일까요? 그것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임신이 행복할까요? 그러나 앞이 캄캄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입장에서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시면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머니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나는 얼마나 주님의 입장을 헤아리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도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러한 반성과 실천의 모습이 바로 성모님을 닮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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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있는 사람
-허영엽 신부-
◆“어머니, 저는 한순간도 어머니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외국으로 입양갔다가 20년 만에 돌아온 아들이 공항에서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다. 어머니는 살림이 어려워 도저히 많은 자식을 다 부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눈물을 머금고 어린 아들을 미국에 입양시켜야 했다. 이제는 훌쩍 커서 대학생이 되어 돌아온 아들은 어머니에게 손때가 묻어 닳아버린 작은 돌과 10원짜리 동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미국으로 떠날 때 어머니가 고국과 어머니를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며 아들의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힘이 들 때 이 돌과 동전을 보며 매일 어머니를 생각했다.”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통곡했다. 다섯 살 어린이가 이국땅에서 언젠가는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낸 것이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 삶에서 기다리는 것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운 사람이 부르는 기다림의 노래다. 지금 마리아의 노래는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에 짓눌리고 두려움에 잠을 설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아름다운 노래였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고 주님을 기다리면서 견뎠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맡겼던 처녀 마리아처럼 되기에는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부족하다. 아직 온전하게 마음을 비우지 못해서일까? 그러나 우리는 마리아처럼 다시 한 번 자신을 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믿음을 갖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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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의 여인 한나 -경규봉 신부-
한나는 젖을 뗀 사무엘을 데리고 주님의 성전에 찾아가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린다. 그녀는 사무엘이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임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자식이 없어 브닌나로부터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 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느님의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신이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하느님께 도로 바친다.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 : 2,21).
한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복했기 때문에 사무엘의 한평생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 사무엘의 봉헌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니라 영원한 봉헌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욥 1,21), 하느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함을 깨닫고 있었다(시편 15,4). 그리하여 그녀는 모성애를 뛰어넘는 헌신적인 결단을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어여삐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으므로, 그녀도 하느님께 사무엘을 봉헌한다.
한나는 참으로 믿음 깊은 여인이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간절히 구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실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께 간구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신앙은 결코 실망하지도, 성급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신앙은 곧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신앙은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기력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필요로 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탄생과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까지도 모두가 은총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사도 바울로의 권고대로 살아간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을진대 어찌 기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앙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힘이요 은총임을 알면서 어찌 자신을 봉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삶의 일부인 시간을 봉헌하고, 노력의 대가를 봉헌하고, 자신의 삶 전체, 생명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신앙이다.
한나는 참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의 분신인 사무엘을 낳기 전에도 그를 온전히 봉헌하기로 서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서 젖을 떼자마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녀는 아이가 없어서 고난을 당할 때에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은 후에도 결코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달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참 신앙인이었다.
이처럼 믿음 깊은 한나는 곧 예수님을 강생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신 성모님을 보여주시는 예표이다. 한나와 성모님처럼 믿음 깊은 여인이 곧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며 맞이하는 참 신앙인임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 자신을 아는 겸손한 신앙인,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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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미워요! -조옥진 신부-
이제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아기 예수의 성탄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설레임과 기쁨으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오늘 복음에 보면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이를 가진지가 벌써 여섯달 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라는 이 구절을 이해하고 수용하기에 저 역시 신앙적 갈등을 느낄 만큼 매우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15년 전 필리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필리핀에도 한인 성당이 있고 본당 신부님이 계셨습니다만, 마침 본당신부님이 한국에 가시는 바람에 제가 임시로 본당을 도와주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한인 성당에 나가시는 30대 중반의 자매님이 남편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어느 날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아들 둘이 있는데도 딸을 하나 갖고 싶어 뒤늦게 임신을 하였습니다. 임신 중에도 건강한 모습을 늘 지니고 저를 보기만 하면 "신부님! 우리 아기 예쁘겠죠!"하면서 매우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이 세상에 주어진다는 것이 참으로 하늘의 축복이고 행복이며 즐거움이구나 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면서 예쁜 딸아이를 낳으라고 늘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2시쯤 되어서 본당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데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종부성사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잠결에 대충 옷을 입고 병자 가방을 챙긴 채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예쁘게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했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태아가 성급하게도 그만 8개월만에 태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조산이었습니다.
금방 태어난 아기는 조산으로 인해 너무나 작았고 인큐베이터 안에 있었습니다. 숨만 꼴딱거리면서 허덕이는 이 조그마한 하고 애처로운 아기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고, 병자 성사를 주면서 하느님의 도움을 열심히 청했습니다. 그러나 새벽2시쯤 되었을 때, 결국 이 아기는 엄마?아빠의 품에 안겨 보지도 못한 채 그만 하늘 나라로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때, 너무나 깜짝 놀라고 충격적인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은 미워요!"하고 절규하며 외치는 아기 엄마의 울부짖음에 모두가 넋을 잃은 채 아무런 달램도 해답도 못해 드린 채 모두가 묵묵부답하기만 한 채 눈시울만 글썽거렸습니다. "하느님은 미워요!" 정말 저의 마음 안에도 그런 울부짖음이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 과연 사제는 무엇을 해 주어야 할 것이며,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정말 하느님이 밉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겪은 이 뼈아픈 사연은 방금 읽은 성서의 내용과는 너무나 반대적인 상황입니다. 제1독서인 사무엘 상권에서는 한나의 감동스런 이야기가 앞으로 마리아 안에서 실현될 사건의 예고일 뿐만 아니라, 루가1,46-56 속의 마리아는 한 아기의 잉태로 인한 임신부로서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는 시편에서 영감을 받은 감사의 찬가입니다.
이 찬가는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애타는 기다림이 성취된 데에 감사를 드리는 노래입니다. 이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이 이 노래를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 주는 여인들의 축복과 희망, 믿음과 기다림이 이루어져 있는 이 복음의 내용과 제가 필리핀에서 겪은 경험과 어떻게 조화를 시켜야 할 것인가? 아직까지도 여기에 대한 화두(話頭)를 깨우치지 못하고 속타는 마음만이 나의 사제로서의 무능함, 비참함이 한꺼번에 온 몸에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한참동안 고통스런 슬픔을 삭힌 이 자매가 마음의 평정을 이루었을 때, 저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하느님이 참으로 밉지요? 저도 이 순간에는 정말 하느님이 밉네요! 그러나 미운 하느님을 용서해 줍시다. 그래야 하늘나라로 간 아기도 비록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엄마의 마음에 더 좋은 일이 생기도록 하느님께 부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기들의 부탁을 다 들어 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자매님에게 참으로 행복스런 삶을 가지도록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실 것입니다. 자매님이 신앙의 눈을 뜰 때 그 순간에 가장 큰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사(每事)가 잘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사가 잘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매사가 모든 면에서 잘 되어 갈 것입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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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노래
-민경철 신부-
주님의 섭리를 알아보게 되거나, 주님의 함께하심,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될 때가 있었나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체험하고 알게 된 그분을 노래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알리고 싶어집니다. 동시에 차분하게 내면화시키면서 말이지요. 죽은 문자로 남아 있던 말씀이 살아 움직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말마디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주님의 사랑을 훔쳐본다고나 할까요? 아무 생각 없이 불러왔던 성가 노랫말들이 심금을 울리기도 합니다. 정성스럽게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감동적으로 찬양하고 있음을 본인도 의식한 채 가슴과 목과 입을 열고 있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자신의 뱃속에서 체험하신 분. 마리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태중의 아기님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노래가 절로 나온 것이지요. 오늘 마리아의 마음으로 구원의 찬양을 한 곡 불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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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된 여자인가?
-박용식 신부-
본당 신자 중에 아주 대조적인 두 자매, 안나와 데레사가 있다. 안나는 부유한 집에서 곱게 자라 명문대학을 졸업한 뒤 의사한테 시집을 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남편은 돈만 잘 벌어올 뿐 아니라 아주 모범적인 가장이다. 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도 말썽을 피우지 않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다.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것이 없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안나를 ‘복 받은 여인’이라고 부러워한다. 반면에 데레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든 이래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이 막일을 하며 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과 자식들도 항상 속을 썩이는 골칫덩어리다. 주위 사람들은 데레사를 보고 ‘지지리 복도 없는 여인’이라고 동정을 한다. 그런데 안나와 데레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 온갖 복을 누리고 있는 안나는 자신의 복이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해하고 있다. 그러나 데레사는 고통 중에도 불안하거나 불행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님께서 큰 복을 주실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복된 여인은 누구일까? 성모 마리아는 안나와 데레사 중에 누구와 더 비슷할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여인임을 노래로 고백한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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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준 신부-
어제의 복음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성모님의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어제 복음에서 성모님을 만난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믿음과 태중에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칭송을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서 복되신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처녀가 임신을 하면 돌팔매질을 당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목숨을 완전히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굽어보셨음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죽을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지만, 아무런 망설임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을 믿음 말고는 달리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목숨을 건만큼 부귀 영화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위험만 벗어나면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세에서는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험난한 길만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맞이하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삶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체험하게 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믿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 세상에 맛볼 수 있는 그 어떤 기쁨과 즐거움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또 이미 그것을 누리고 계셨기 때문에 앞으로 맞이하게 될 고통과 시련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부르신 찬미의 노래가 우리들 마음 안에서도 울려 퍼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희망이고, 나의 구세주시라는 고백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겨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 성모님의 마음처럼 기뻐 뛸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해 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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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마리아
-강영구 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장미꽃에서 장미 향기가 나오고, 국화꽃에서 국화향기가 납니다. 소나무에서 솔향이 나고, 향나무에서 향나무 향이 납니다. 불 켜진 촛불은 스스로를 태우며 환한 빛으로 주위의 어둠을 밝히고 스스로를 불사르는 향은 악취를 몰아내고 방안을 향기롭게 합니다.
가슴 가득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마리아의 입에서 찬미 노래가 나옵니다. 성모의 노래(Magnificat)는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닙니다. 옹달샘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듯 가슴에서 흘러넘치는 노래입니다. Magnificat은 온 몸과 삶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한 마리아의 가슴은 노래하지 않고 견딜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하느님의 큰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제 당신이 Magnificat을 노래할 차례입니다. 행여 입술로만 노래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만 노래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탐욕과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한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는 노래가 아닙니다.
오늘 당신의 말 한마디와 미소가 당신의 손길과 발걸음이 Magnificat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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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삶과 기도의 결론 마니피캇(Magnificat)>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마니피캇(Magnificat, 성모님 찬가)입니다.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은 마리아는 마니피캇으로 응답합니다.
성모님 찬가는 성서의 여러 찬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훌륭한, 그러나 겸손한 신앙인인 마리아의 기쁨과 확신에 가득 찬 신앙고백이자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입니다.
마니피캇은 부족하고 비천한 자신을 기억하여 찾아주시고 메시아 잉태라는 감지덕지한 사명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이 찬가는 주님의 온전한 아들딸이 되기를 결심하는 수도자들, 사제들, 봉헌생활자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래이기에 매일 저녁 성무일도 때 마다 사용됩니다.
매일 바치는 찬가이기에 식상할 것 같고, 지루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부르지만 그때 마다 성모님의 성덕이, 성모님의 기쁨이, 성모님의 고통이, 성모님의 향기가 손에 잡힐 듯 전해옴을 느낍니다.
어떤 수녀원에서는 종신서원 예식을 끝낸 수녀님들이 하느님과 회중들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헌생활을 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촛불을 켜들고 마니피캇을 노래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칩니다. 특별한 지향을 두고 간곡히 부탁드리는 청원기도,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터져 나오는 탄원기도, 9일기도, 54일 기도, 청원을 허락해주심에 기뻐하며 올리는 감사기도...
그러나 마리아처럼 찬미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고통 앞에서도 결국 삶이 축복임을 깨달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기도의 결론은 언제나 찬미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보다 성숙한 기도입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우리, 늘 불충실했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지난 삶을 돌아보면 결국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찬미의 기도입니다. 마리아께서 바치셨던 마니피캇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늘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복음 한 구절 한 구절을 묵상해보십시오. 성서 전반 그 어디든 한번 살펴보십시오. 거기 사용된 언어, 교훈은 늘 희망적입니다.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의 나날이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또 하루의 삶에로 초대하신 하느님께 기쁨과 감사에 찬 찬가를 부르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 어느 순간, 생명의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 어느 순간에 우리 기도의 결론이 마니피캇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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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피캇 - 성모의 노래는 곧 예수님의 노래
-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의 전사(前史) 중 네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들려준다. “Magnificat anima mea Dominum ...”(내 영혼이 주님을 크게 찬미하며 ...)라는 시작부분의 첫 글자를 따 ‘마니피캇’(Magnificat), 또는 ‘천주 찬미가’로 불리는 마리아의 노래는 참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고 장엄하며, 가히 혁명적이고 깊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마니피캇을 마리아가 직접 지어 읊었다고 생각하는 성서학자들은 거의 없다. 루가가 복음서를 집필하기 전에 이미 부활공동체가 예수의 인류구원사건을 기리기 위해 지어 불렀다는 것이 통설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학자들은 구약시대 말기에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메시아사상과 결부시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와 유사한 노래를 읊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의 노래와 비슷한 내용의 찬가는 이미 구약성서에 있다. 엘카나의 아내이자 석녀(石女)였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아이를 야훼 하느님께 봉헌하며 바친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1사무 2,1-10) 사무엘을 통하여 한나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의 처지가 이처럼 바뀌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그토록 원했던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지만, 한나는 이 모든 것이 야훼 하느님의 크신 은총임을 깨닫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기도한 것이다. 물론 마리아는 한나와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행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이 비단 자신에게뿐 아니라 마리아 안에 잉태된 메시아를 통하여 온 세대에 베풀 것으로 깨달은 것이다. 메시아는 온 세대의 처지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하느님 고유의 방식으로 준비된 역전과 개벽을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이다. 사람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별된다. 있는 자는 통상 부유하고 권세를 가졌으나 거만하고 교만한 자들이다. 없는 자는 비천하고 배고픈 이들이지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거만한 자들을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거두어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마니피캇의 내용은 앞으로 메시아 예수께서 세상에 대하여 펼치실 일이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이 일을 오늘 마리아의 입에 노래로 담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니피캇은 분명 마리아가 부른 감사와 찬미의 노래이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한 번은 해보았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저 소박하고 순진하기만 했을 마리아, 배운 것도 넉넉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마리아, 청년 요셉과 약혼하여 혼인날을 기다리며 매사에 조신(操身)하고 있었을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지식이 담겨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 사실은 우리가 마리아의 노래 때문에 놀라기 전에 어제 복음에서 엘리사벳의 마리아에 대한 칭송에서부터 놀랬어야 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2-45)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약간의 억측이 담긴 주장을 했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순간 성령 하느님께서 태아인 요한을 시켜 이와 같은 칭송을 드렸다는 것이다. 즉 성령을 통하여 요한이 예수께 드린 칭송이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하고 여섯 달을 지내는 동안은 놀라움과 기쁨의 나날이었다. 엘리사벳은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하느님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고, 자기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갔던 것이다. 마니피캇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리아가 천사의 예방을 받고 메시아 탄생의 예고를 접하는 순간 한줄기 내적 광명이 그녀를 꿰뚫고 지나가며 그녀의 정신을 밝혀주었고 지식을 머리에 담아 주었다. 엘리사벳보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훨씬 더 많이 자신을 열고 있었다. 그래서 마니피캇은 성령의 노래이며,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신 메시아 예수의 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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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루가 1,39-56)
-유 광수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누구와 만나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어떤 특별한 주제를 정해 놓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면 주로 일상적으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과연 우리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는가? 우리들이 만나서 주로 나누는 이야기의 화제는 무엇인가?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나눈 이야기를 보면 세속적인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라고 했고, 마리아는 이를 받아서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등 모두가 주님에 관한 이야기,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것을 영적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이런 영적인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신자들이고, 수도자들이고, 성직자들이라 하더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터 놓고 자기의 영적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우리 자신들이 영적 이야기를 나눌 소재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영적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영적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영적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나눌 내용이 없다. 어쩌면 그마만큼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것들이 멀리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 영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적 이야기란 무엇인가?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주님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적인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깨닫게 된 것들을 나누는 것이다. 즉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일들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고, 주님의 은총으로 내 삶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무엇을 새롭게 깨달았으며, 어떤 일들이 내 안에서 이루워졌고 또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워지고 있는지를 나누는 것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나눈 이야기들은 전부 주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나열한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마니피깟"이라고 한다. 마니피깟이란 "위대하다, 장엄하다, 참으로 놀랍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니피깟이란 "주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에 관한 노래"라는 뜻이다. 그럼 주님께서 마리아에게만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는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다. 다만 내가 그 일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보지 못하는가?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주님의 말씀을 보고 듣지 않으니까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주님께서 매순간 우리 각자에게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영적인 의식이 없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의식에만 깨어있고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도 마리아처럼 나의 마니피깟을 부를 수 있을 때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마니피깟이어야 한다. 한 순간도 주님께서 내 안에서 위대한 일들을 하지 않으시는 순간이 없고, 또 내 주위에 펼쳐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주님의 위대한 일들을 찬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신비가이고, 인생은 살아야 할 신비이지 풀어야할 과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신비를 감상하고 노래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흘러 가는 구름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오늘 살아있음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오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음을 보고 주님을 찬미하라. 내가 함께 사는 가족이 있음을 보고 주님께 찬미하라.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을 주님을 찬미하라. 등등 끊임없는 찬미가 즉 마니피깟을 불러라.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시편 150,8)
성바오로가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코후 3,17)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으로 사는 사람 즉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에서 모든 곳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어떠한 막힘도 없이 자유롭게 주님을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이 되고, 작곡가가 되고, 화가가 된다. 한 마디로 창의적인 사람이 된다. 그것도 지칠 줄 모르는 창의성이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라고 시인 랭보의 기상천외한 시상이 나타나듯이, 또 다윗 왕이 왕이면서도 너무 즐거워 주님 앞에서 발거벗고 춤을 추었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새로운 노래 새로운 춤을 추게된다. 얼굴에 주름살을 펴고싶은가? 얼굴이 아름다워지고 싶은가? 춤을 추고 싶은가? 찡그린 얼굴을 활짝펴고 싶은가? 마음에 늘 기쁨으로 울렁거리는 삶을 살고 싶은가? 나의 영혼이 주님을찬양드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내 안에서 어떤 위대한 일들을 하셨는지를 들여다 보라. 그것을 보기 시작할 때 당신의 모습은 아름답게 변화되기 시작하리라.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 얼마나 신명나는 삶인가! "나는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쳐 댄다네. 그러고는 춤을 춘다네!" 오늘 우리도 종탑마다 돌아다니며 종을 치고 그러고는 춤을 추는 하루가 되자. 마니피깟을 부르는 멋진 하루가 되자. 마리아 본명을 가지신 모든 분들에게 영명일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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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