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간 목요일 미사 강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아름다운 하느님과의 화해의 모습을 그린 성경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바로 죄인으로 치부 받던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고 향유를 부어준 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맥락은 너무 잘 알고 계시니까, 그러나 오늘 복음을 좀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이 향유 옥합을 든 이 여인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는 묵상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 중에 한 사람인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어요. 이 바리사인은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의 율법에 엄청난 경건함을 가지고 지키고자 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 당시 유대인 가운데 죄인으로 취급받는 세리, 창녀, 과부, 고아,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굉장히 폄하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른바 자기의 도덕적 감정이 굉장히 의롭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던 사람이죠. 그런데 그런 바리사의 집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그것도 이 바리사의 기준에서는 죄인이라고 낙인 찍힐 만한 여인이었죠. 구체적으로 어떤 여인인지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이 여인은 이전에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고, 또 어떤 이유에서든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느끼고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한 여인의 행동과 동시에 여인을 바라보는 바리사이와 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우리가 이 복음 속에서 상상으로 그려보면 좋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 묵상 방법 중에는 우리가 단순히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성경의 상황을 내가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려본 가운데에서 그 여인의 모습,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 예수님의 시선을 돌아가면서 내가 그 모습으로 한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묵상을 하다가 그 여인이 나라면 어떤 느낌일까를 묵상하면 그것이 성경 묵상에 굉장히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비유를 하나 들죠. 빚진 두 사람 중에 더 많은 탕감을 받은 사람이 더 그 채권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세속적 논리를 가지고, 이 여인은 그토록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걸 자신의 삶으로 드러낸 표현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어떤 신자는 굉장히 큰 채권자에게 빚을 진 분이 갑자기 회사가 큰 위기에 처해서 도저히 빚을 탕감할 수 없을 때, 그동안 그분과 거래했던 깊은 우정을 생각해서 굉장히 큰 금액의 채권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제 내 인생은 끝났구나라고 생각할 때, 그래도 나와 거래했던 사람이 그 많은 채권을 포기해 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에 대해서, 사실 그것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사람을 더 도와주고 기억해 주겠다는 마음이 인지상정으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비유는 너무나도 적절한 것입니다. 많이 탕감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사랑받고, 그런데 이 복음은 사도 바오로의 마음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당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칠삭둥이인 자기에게까지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정말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자신, 당신 자신을 들여다보실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그런, 어찌 보면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봤을 때는 가장 죄인 중에 죄인이었던 바오로가 180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전환을 몸소 겪었던 거죠.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총을 바오로 사도는 너무 많이 받아서, 정말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고, 그 애쓴 마음으로 자신의 평생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시죠. 어찌 보면 바오로 사도 역시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의 그 죄과를 하느님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거듭나게 됐다는 이 놀라운 체험이 바닥 친 인생을 다시 하느님께로 봉헌할 수 있는 결정적인 회심의 기회가 된 거죠.
사실, 우리 신앙에도 그런 기회들이 사실 많이 있어요. 적게, 크게 내 인생을 한번 흔들어 놓았던 사건들을 견뎌내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체험됐다면,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믿음을 갖고 교회 봉사하면서 또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하겠죠. 저는 사실 그런 회심의 체험이 우리 일상 안에서도 기도하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지만, 우리 가톨릭 신앙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과의 화해 장소는 바로 고해소죠. 그래서 고해소에서 이렇게 있다 보면 교우분들이 고해성사를 모두가 다 보지는 않으시니까, 대부분 판공성사 때 몰아보기. 하시니까, 그런데 이렇게 가끔 성사를 보러 오시는 분들을 들으면, 이분이 정말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면서 후회하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제가 꼭 저한테 고해성사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통회의 기도를 바치시라고 해요. 고해성사에 들어가면 대문짝 맞게 써놨어요. 통회의 기도문,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사랑받으셔야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했기에, 악을 저지르고 죄를 지은 모든 잘못에 용서를 청하나이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죄질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결심하오니, 우리 주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이게 통회의 기도예요. 이 기도문은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들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죄에 대한 상처들을 기억하게 해요. 아무리 내가 죄가 많아도 그것을 사제에게 시시콜콜 다 얘기못하잖아요. 그런 그 속마음을 보면, 그 통회의 기도를 바치라고 제가 하거든요. 그러면 문구에서 눈물 흘리시는 분도 많아요. 단순히 남의 잘못을 고백한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이건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면 부끄러움도 있지만, 그 부끄러움을 고백함으로써 내가 치유된다는 카타르시스 같은 게 있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쭉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이 고해성사를 했지만, 제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신학교에서 신학생 때 교수 신부님한테 고해성사를 보던 기억입니다. 지금은 생활 지도 신부랑 영성 지도 신부가 분리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교수 신부들이 생활지도와 영성지도를 다 했거든요. 고해성사를 볼 때 이런 마음이 들죠. 내가 이 죄를 고백하면 신학교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데 약간 그런 불안감이 있죠. 그런데 이걸 꼭 내가 치유 받고 가고 싶으니까, 그걸 정말 용기를 내서 그 죄를 고백하게 되면,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 죄에 대한 통회의 마음이 나와요. 그래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럴 때는 내 자신의 깊은 상처로부터 치유될 때 나오는 눈물도 있거든요. 자매님들이 너무너무 슬프면 엉엉 울잖아요. 엉엉 소리 내서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는 말을 하시거든요.
저는 오늘 복음서의 여인도 자신의 모든 죄로부터 예수님의 큰 사랑을 느꼈을 때, 그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던 이 여인의 위대함이 예수님께 칭송받은 거라 생각해요. 우리 시대에는 이런 자기 성찰과 또 자기 회심의 능력이 필요한 때예요. 사실 우리가 자기 죄를 고백하기보다는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졌다는 식으로, 우리는 자기의 합리화와 변명에 일삼잖아요. 그것이 너무나도 이 사회 전반에 펼쳐져 있어서, 진솔한 인간관계가 맺어지는데 굉장히 장애가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주님과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전했으면 합니다. 아멘,
송용민 신부
첫댓글 강론 말씀 들으며 문득 고해성사만 없다면 성당에 다니겠다는 친구 생각을 했습니다.
고해성사에 익숙하지 못함을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