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렘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렘1: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렘1: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렘1:15)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렘1: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렘1: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렘1: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소명의식(렘 1:11-19)”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1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본 문단은 두 개의 환상에 대한 기록입니다. 문단 구조로 볼 때에 10절에서 바로 17절로 옮겨가도 문맥을 이해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문단을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내용으로 볼 때에, 이 문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환상을 보이심으로써 예레미야의 소명의식을 기정사실화하는 데에 알맞은 말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환상은 살구나무에 관한 내용입니다. 개역성경은 살구나무로 번역하였지만 원어 상 “샤케드”라는 뜻은 열매나무인 아몬드를 뜻합니다. 이 나무는 이른 봄에 꽃을 피워서 일명 깨우는 나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샤케드는 “쇼케드(지켜보다)”는 단어와 발음이 매우 흡사하여 이 문구를 수사학적인 기교로 해석합니다. 즉, wordplay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샤케드) 가지(막켈)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쇼케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11-12)”
가지로 번역된 막켈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해석을 할 때, 유다를 향해 임박한 심판을 이루실 것임을 지켜본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아몬드)를 보여주시면서 유다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니 그들의 최후를 지켜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이미 선포하신 대로 “여러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일(10)”이 그대로 성취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실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미 심판을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주셨습니다. 두 번째 환상은 좀더 구체적인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선지자는 끓는 물이 가득한 솥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심판은 북쪽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남쪽은 당연히 남유다를 지칭하지만, 북쪽의 끓는 가마솥은 어느 나라를 의미하는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이는 어제 언급한 내용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은 시기가 언제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주전 620년은 고대 근동의 강자였던 앗수르가 힘을 잃고 멸망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북쪽으로부터 위협은 막을 내릴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요시아 왕이 이 틈새를 이용하여 북 이스라엘의 옛 영토까지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시기와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롯 앗수르가 예전의 강력한 세력은 아니라 할지라도 전성기의 기본세력은 남아 있어서 감히 앗수르에 대항하는 나라는 없었을 시기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북쪽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은 남유다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될 만한 여건과 조건을 구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견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갑자기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믿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백성을 심판하는 신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신에게 무릎을 꿇어서 심판을 당할 수 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은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북쪽 즉 바벨론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에는 그들이 이와 같은 변명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북쪽으로부터 시작되는 심판은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5)”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성문 어귀는 그 성읍의 장로들이 모여 재판을 열고 판결을 집행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15절 말씀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재판과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예언은 나중에 그대로 실행되었습니다.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이 함락되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매
바벨론의 왕의 모든 고관이 나타나 중문에 앉으니 곧 네르갈시레셀과 삼갈네부와 내시장 살스김이니 네르갈사레셀은 궁중장관이며 바벨론의 왕의 나머지 고관들도 있더라(렘 39:2-3)”
그러면 이렇게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과 유다를 치고 그들을 이방인의 재판에 끌려 나와 굴욕적인 판결을 받게 만드신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던 우상숭배의 범죄 때문이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치적으로 친 바벨론파냐? 친 애굽파냐의 갈등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피폐해진 경제적인 난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패망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은 신학적이요 윤리적인 문제에 기인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겼고 음행을 비롯한 악을 자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치는 보수에서 진보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상대적 빈곤과 부익부 빈익빈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백성들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기적인 이익에만 몰두하였지, 부패건 부정이건, 상관없이 그저 나만 잘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의 분출이었습니다. 오로지 경제적 강자가 의인이요, 경제적인 성공이 존경과 명예를 준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세상적이며 사탄적인 사고였습니다. 세상이 그런 목적을 추구한다는 것은 일말의 이해가 될 수 있겠지만, 교회가 그들의 선두에 서서 조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크게 실망한 일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호와보다 경제적 가치와 윤리도덕과는 무관하게 성공의 사례를 찾았고, 그런 타락한 세상적 평판의 잣대로 신실한 교회요 신자라는 부추김이 많은 순진한 신자들을 현혹하였으며, 지금도 그 몽상 가운데 앉혀놓아 빠져나올 수 없게 하는 교회 교회마다 저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부와 권력, 축복의 기준을 양적인 수와 거대한 시멘트 건물을 짓는 것으로 바꿔치기한 음모에 있습니다.
점치는 일, 절에 가 시주하는 일 등도 우상숭배의 일종이지만, 위와 같이 돈의 우상이 되고, 세상의 시류와 유행이 우상이 되고, 자식 걱정 핑계로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경우와 더욱 더 기발한 것은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신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바로 우상숭배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현재를 사는 신자들이 저 애굽의 바알이나, 아데미 여신상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지만, 음란과 음행을 행하며 성적쾌락을 자유라는 미명 하에 수도 없이 상대를 바꾸는 행위 자체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십계명 준수 조항은 살아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17-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심판의 임함에 대한 선포를 하게 될 예레미야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돌리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렘 1:17)”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레미야의 사역이 엄청나게 힘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심판계획에 대해서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그대로 선포하도록 권면하고 계십니다. 결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셨습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들 앞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18)” 처럼 예레미야를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약속은 예레미야에게 용기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가 당할 환난과 핍박이 경감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본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사역이 결코 쉽지도 않을 것이며 많은 핍박과 수난이 따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수모와 환난과 고초를 겪을지라도 확실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의 의지를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성도들, 특히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이와 같은 고난과 환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에 기인하는 어떤 보장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안전은 보장하시지만 그는 뼈를 깎는 고통과 시련을 감수해야 했던 것처럼, 사명자 역시도 시대를 불문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을 숙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난 행복해요~~ 난 기뻐요 라는 찬송이 그저 쉽게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도 심판의 심각성을 우회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선포하는 사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목숨을 거는 사명이요, 일생 동안 쌓아온 경륜을 헌 신짝처럼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선각자를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성도로서의 불운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교계 지도자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자기 변명에 급급한 자들이 가끔 있을 뿐, 아예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를 시간 속에 덮어버리려는 악당들만 수두룩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그 잘못을 정당화하려는데 혈안이 된 자들의 몰상식과 뻔뻔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남 유다가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배척하였지만, 이 시대의 예레미야는 아예 사망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누구도 나서서 목숨을 건 진언이나 심판의 심각성을 선포하는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비굴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미련한 자들만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기껏 거리에 피켓 들고 나선 목사들 경우는 딱지 하나 받고자 무허가 건물에 세 들고, 재개발지구 땅값 내려달라는 구호로 세상의 조소거리만 제공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까? 이번 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