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 주일 주님세례 축일
공현 대축일을 1월 7일이나 8일에 오는 주일로 옮겨 지내는 곳에서는, 주님 세례 축일은 바로 다음 월요일에 지낸다. 이때 신경은 바치지 않는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으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을 내리시고, 당신의 아들로 선포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만민의 주님께서 전해 주신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로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5-16.21-22 그때에 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21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오. 프란치스코 제자 중에 경건한 한 수도사가 기도 중에 꿈을 꾸었는데 마침 하늘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하늘나라에 수많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된 의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빛나고 좋은 보석의자 하나가 비어있었는데 수도사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저렇게 좋은 의자에 어떤 사람이 차지할 것인가?” 그러자 갑자기 옆에 있던 한 천사가 말했습니다. “저 자리는 원래 가장 지위가 높은 천사의 자리였는데 그 천사는 교만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비어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종 프란치스코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사는 너무 신기하여 꿈에서 깨어나 프란치스코를 시험해 보기로 작정하였는데 과연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겸손하기에 하느님께서 훌륭하고 아름답고 좋은 자리를 주시겠다고 하시는지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그 수도사가 선생님이신 프란치스코를 모시고 길을 걷게 되었는데 수도사는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프란치스코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자 프란치스코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형제여!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사는 “스승님의 말씀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어찌하여 스승님이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하고 늘어졌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수도사에게 나지막히 말하였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만약 저들에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만큼의 은혜를 주셨다면, 저들은 아마도 나보다 몇 만 배 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이웃에게 봉사했을 것이요. 그런데 내 어찌 그들과 감히 비교할 수 있단 말이요?”
나는 항상 프란치스코 사부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성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순간순간 느낄 때 마다 두려워집니다. 그분이 그렇게 살았는데 나는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신발 끈을 풀고 맺는 것은 미천한 종의 역할이었지만 그의 종이 될 자격조차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지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가장 대인(大人)인 요한이 자신을 그렇게 낮추어 겸손한 것은 상대적으로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요한에게 비견하여 나는 어떤 자세로 주님 앞에 서 있는가 생각하면 그간의 나의 생각과 행동과 말은 주님께 얼마나 불경스러웠는지 주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두렵게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한 일꾼이 있었기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겸손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물에 잠기며 세례를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주님은 커지셔야 한다.’(요한 3, 30)고 하신 것처럼 주님을 들어 높일 수 있는 겸손한 종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곰곰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째,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 은총 없이는 겸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성인성녀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겸손하게 살 수 있었고, 은총으로 겸손의 덕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은총 안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성사생활과 기도에 전심전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둘째,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내 삶의 중심에 주님께서 계신다면 나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성인성녀가 그렇게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습여성성(習與性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습관이 오래 되면 마침내 천성이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말이나 행동에서 겸손하도록 노력하면 몸에 익어지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에서 언제나 조심하는 것은 중요하고 겸손하게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철학은 겸손을 가르치는 학문이며 수학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겸손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겸손하지 않다면 결국 아무 것도 없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넷째로, 아주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는 정성이 겸손한 자세입니다. 내게 맡겨진 일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정성을 주님께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만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나는 겸손하지 못한 교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죄를 또 짓고 있습니다. 이제는 겸손한 자세로 살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며 며칠 가지 못할 약속이 될지언정 주님의 은총만을 믿고 희망으로 또 다짐하고 약속한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