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4 - 이인(里仁) - ⑮ |
1 |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증자)아! 우리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써 여러 가지 사물을 꿰뚫고 있는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증자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貫, 通也. 唯者, 應之速而無疑者也. 聖人之心, 渾然一理, 而泛應曲當, 用各不同. 曾子於其用處, 蓋已隨事精察而力行之, 但未知其體之一爾. 夫子知其眞積力久, 將有所得, 是以呼而告之. 曾子果能黙契其指, 卽應之速而無疑也. 貫은 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唯라는 것은 신속하게 대응하되 의문이 없다는 말이다. 성인의 마음은 혼연히 하나의 이치이지만, 널리 응대하되 세밀한 것에도 합당하여 그 쓰임이 각자 다르다. 증자는 그 쓰는 부분에 있어서 아마도 이미 일에 따라 정밀히 살펴서 힘써 행하였지만, 다만 그 몸이 하나라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공자께서 그가 진실로 힘을 쓴 지 오래되어서 장차 얻는 바가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증자를 불러서 알려준 것이다. 증자는 과연 그 가리키는 바와 묵묵히 뜻이 맞아서, 곧바로 신속하게 응하되, 의심함이 없었던 것이다. 新安倪氏曰 荀子勸學篇 眞積力久則入 謂眞誠之積用力之久 신안예씨가 말하길, “순자 권학편에 眞積力久則入(진실한 정성이 쌓이고 힘쓰기를 오래하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글귀가 있는데, 진실한 정성이 쌓이고 힘쓰기를 오래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一是一心 貫是萬事看甚事來 聖人只這心應去 只此一心之理盡貫衆理 주자가 말하길, “하나라는 것은 하나의 마음이고, 꿴다는 것은 만사 중에 어떤 일이라도 다 살펴본다는 것이다. 성인께서는 그저 이 마음으로 대응하여 가는 것이고, 이 일심의 이치로 온갖 이치를 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未唯之前 如何 曰 未唯之前 見一事是一箇理 及唯之後 千萬箇理只是一箇 如事君忠是此理 事親孝交友信 也是此理 以至精粗大小之事 皆此一理貫通之 曾子先只見得聖人千條萬緖都好 不知都是從這一心做來 及聖人告之方知都是從這一箇大本中流出 如木千枝萬葉都好 都是從這生氣流注貫去也 누군가 묻기를, “신속히 예라고 대답하기 전에는 어떠했나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아직 신속히 예라고 대답하기 전에는, 한 가지 일을 보면 하나의 이치일 뿐이었지만, 예라고 대답한 후에 이르러서는 천만 개의 이치가 그저 하나일 뿐이다. 예컨대 임금 섬기기를 忠으로 한다는 것은 이 이치이고, 어버이 섬기기를 孝로써 하고 벗 사귀기를 信으로 한다는 것도 역시 이 이치인데, 정밀하고 거칠거나 크고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하나의 이치가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증자는 먼저 단지 성인의 천 가지 조목과 만 가지 단서가 모두 좋다는 것만 알아보았을 뿐, 그 모두가 이 一心을 따라 만들어져 나온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가, 성인께서 그것을 알려줌에 이르자, 비로소 모두 이 하나의 큰 근본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예컨대 나무에서 천 개의 가지와 만 개의 이파리가 모두 좋지만, 그 모두가 이 생기의 흐름을 따라 꿰어진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曾子工夫已到千條萬緖 一一身親歷之 聖人一點 他便醒 觀禮記曾子問中問喪禮之變 曲折無不詳盡 便可見曾子是一一理會過來 증자의 공부가 이미 천개의 조목과 만개의 단서를 하나하나 몸으로 직접 겪는 경지까지 이르렀으니, 성인께서 한번 점을 찍어주자, 그는 곧바로 깨우쳤던 것이다. 예기의 증자문 편 안에서 상례의 변화를 질문한 것을 살펴보면, 곡절이 상세하지 않거나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곧바로 증자가 일일이 이해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一對萬而言 不可只去一上尋 須去萬上理會 若見夫子語一貫 便將許多合做底 都不做 只理會一 不知却貫箇甚底 貫如散錢 一如索子 曾子盡數得許多散錢 只無一索子 夫子便把這索子與之 今若沒一錢 只有一條索子 亦將何以貫 今不愁不理會得一 只愁不理會得貫 理會貫未得便言一 天資高者 流爲佛老 低底只成一箇鶻突物事 하나(一)는 만(萬)개에 상대하여 말한 것이니, 그저 하나 위로 가서 찾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만개 위로 가서 이해해야 한다. 만약 공자께서 一以貫之를 말씀하신 것을 보고서, 곧바로 장차 마땅히 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모조리 하지 않고서, 단지 하나만 이해하고자 한다면, 도리어 어떤 것을 꿰어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貫은 흩어진 돈을 꿰는 것과 같고, 하나란 노끈과 같은 것이다. 증자는 수많은 흩어진 돈을 다 셀 수 있었지만, 단지 노끈 하나가 없었을 뿐인데, 공자께서 바로 이 노끈을 주었던 것이다. 지금 만약 돈이 하나도 없는데, 단지 노끈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또한 장차 무엇을 가져다 꿸 것인가? 지금 하나를 이해할 수 없음을 걱정하지 않고서, 그저 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만 걱정한다면, 꿰는 것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으면서도, 곧장 하나를 말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천부적 자질이 높은 자는 불교나 도교로 흘러 빠질 것이고, 낮은 자는 그저 흐리멍덩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問中庸曰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上下察也 君子之道 造端乎夫婦及其至也 察乎天地 此是子思在天擧一物在地擧一物 在人擧夫婦 鳶與魚其飛躍 雖不同 其實一物爲之耳 夫婦之道亦不出乎此 是皆子思發明一貫之道也 孔子繫易辭有曰 以言乎遠 則不禦 以言乎邇 則靜而正 以言乎天地之間 則備矣 亦發明斯道也 曰 所引中庸易傳之言 以證一貫之理 甚善 愚意所謂一貫者 亦如是 누군가 묻기를, “중용에서 말하길,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뛴다.’고 하였으니, 이는 위아래를 밝게 살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그 단서가 만들어지는데,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천지를 밝게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사가 하늘에서 한 사물을 거론하고, 땅에서 한 사물을 거론하며, 사람에서는 부부를 거론한 것인데, 솔개와 물고기는 그 날고 뜀이 비록 같지 않지만, 사실은 한 사물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입니다. 부부의 도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자사가 일관의 도를 드러내어 밝힌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주역 계사에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먼 것을 말하면 끝이 없고, 가까운 것을 말하면 고요하면서 바르며, 천지간에서 말하면 다 갖추어졌다.’고 하셨으니, 이 역시 이 道를 드러내어 밝히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중용과 역전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일관의 이치를 증명한 것은 참으로 좋다. 내가 생각하는 이른바 일관이라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一理貫萬事 固是說事物雖衆 只是一箇道理 此言吾道一以貫之 是就聖人應事處說 須要體認得聖人之心 全是理 行出全是道 如此方是吾道一以貫之 若只說萬理一原 却只是論造化 與此章意不相似 동양허씨가 말하길, “하나의 이치로 만사를 꿴다는 것은 본래 사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단지 하나의 도리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내 道는 하나로 꿰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성인께서 일에 대응하는 부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니, 반드시 성인의 마음은 전부가 이치이고 행하는 것은 전부가 道임을 체득하고 인식해야만 한다. 이와 같아야만, 비로소 내 도가 一以貫之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온갖 이치가 하나의 근원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도리어 그저 조화(造化, 만물의 창조)만을 논하는 것으로서, 이 장의 뜻과 서로 비슷하지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2 |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으니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했다. 盡己之謂忠, 推己之謂恕. 而已矣者, 竭盡而無餘之辭也. 夫子之一理渾然而泛應曲當, 譬則天地之至誠無息, 而萬物各得其所也. 自此之外, 固無餘法, 而亦無待於推矣. 曾子有見於此而難言之, 故借學者盡己ㆍ推己之目以著明之, 欲人之易曉也.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을 일컬어 忠이라고 하고, 자기 마음을 미루는 것을 일컬어 恕라고 한다. 而已矣라는 것은 끝까지 다하여 그 남음이 없다는 말이다. 선생님의 한 이치는 크고 순수하면서도 널리 응대하되 세밀한 것도 합당한데, 이를 비유하자면, 곧 천지가 지극한 정성으로 쉼이 없는 상태지만, 만물은 각자 자기 자리를 얻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면, 본래 남은 방법이 없고, 또한 미루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다. 증자가 여기에서 본 것은 있지만, 말하기를 어려워했는데,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의 진기와 추기의 항목을 빌려 이를 밝게 드러냈으니, 사람들이 쉽게 깨우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此聖道之一貫 이것이 바로 성인의 도가 하나로 꿴다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此就聖人分上移上一步 借天地之道之體用以形容聖道之體用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것은 성인의 분수 위에 나아가 한 걸음을 위로 옮기면서 天地之道의 體用을 빌려서 聖道의 體用을 형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自此之外 固無餘法 便是那竭盡無餘之謂 주자가 말하길, “이것을 제외하고는 본래 남은 방법이 없다는 것은 조금도 남음이 없이 다 해버린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聖道之體用與天地一 則至矣盡矣 不可以有加矣 故曰自此之外固無餘法 皆自然而然 莫之爲而爲 故曰亦無待於推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聖道의 體用이 천지와 더불어 하나이면, 곧 지극한 것이고 극진한 것이며, 더할 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제외하고는 본래 남은 방법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모두 자연히 그렇게 되어서, 어느누구도 가서 하지 않더라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또한 미루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河東侯氏曰 無恕不見得忠 無忠做恕不出來 誠有是心之謂忠 見之功用之謂恕 明道言 忠恕二字 要除一箇除不得 正謂此也 하동후씨가 말하길, “恕가 없으면 忠을 알아볼 수 없고, 忠이 없으면 恕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진실로 이러한 마음이 있는 것을 忠이라 말하고, 이를 功用에 드러내는 것을 恕라고 말한다. 명도선생이 말하길, ‘忠恕 두 글자 중에서 하나를 제거하고자 해도 제거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盡己之謂忠 推己及物之謂恕 忠恕二字之意 只當如此說 曾子說夫子之道而以忠恕爲言 乃是借此二字綻出一貫 一貫乃聖人公共道理 盡己推己不足以言之 緣一貫之道難說與學者 故以忠恕曉之 주자가 말하길, “자신을 다하는 것을 일컬어 忠이라 말하고,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을 일컬어 恕라고 말한다. 忠恕 두 글자의 뜻은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증자가 공자의 도를 설명하면서 忠恕로써 말하였는데, 마침내 이것이 이 두 글자를 빌려서 一貫의 道를 터뜨려낸 것이다. 一貫은 곧 성인의 公共의 이치이니, 자신을 다하고 자신을 미루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말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그렇지만 一貫之道는 배우는 자들과 더불어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忠恕로써 깨우쳐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一貫自是難說 曾子借學者忠恕以形容一貫 猶所謂借粗以形容細 一貫은 당연히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증자는 배우는 자들의 忠과 恕를 빌려서 일관을 형용한 것이니, 이는 이른바 ‘거친 것을 빌려다가 세밀한 것을 형용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忠恕則一 而在聖人在學者 則不能無異 此正猶孟子言 由仁義行與行仁義 別耳 曾子所言忠恕 自衆人觀之 於聖人分上 極爲小事 然聖人分上無非極致 蓋旣曰一貫 則無小大之殊 故也 猶天道至微 四時行百物生 莫非造化之神 不可專以太虛無形爲道體 而形而下者爲粗迹也 忠과 恕는 하나이지만, 성인에게 있어서와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가 다름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맹자가 말한 ‘仁義를 말미암아 행하는 것과 仁義를 행하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증자가 말한 忠恕는 뭇사람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성인의 분수 위에서는 지극히 작은 일이지만, 그러나 성인의 분수 위에서 지극함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대체로 이미 一貫이라고 말했다면, 크고 작은 것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天道가 지극히 은미해서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성하는 것은 조화옹의 신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로지 太虛의 無形만으로써 道體를 삼고서, 형이하학적인 것을 거친 자취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一是忠貫是恕 體一而用殊 一이란 忠이고, 貫이란 恕이니, 體는 하나지만 用은 다른 것이다.
忠只是一箇忠 一片實心做出百千箇恕來 忠은 그저 하나의 忠이니, 한 조각의 實心이 수백 수천 개의 恕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忠在一心上 恕則貫乎事物之間 只是一箇一 分著便各有一箇一 老者安之 是這一箇一 少者懷之 亦是這一箇一 莫非忠也 恕則自忠而出 所以貫之也 忠은 一心 위에 있고, 恕는 사물 사이에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저 하나의 一일 뿐이나, 나누면 곧 각자 하나의 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노인이면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의 一이고, 젊은이는 품어준다는 것도 역시 바로 이러한 하나의 一이니, 忠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恕는 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꿸 수 있는 것이다.
夫子言一貫 曾子言忠恕 子思言大德小德 張子言理一分殊 只是一箇 在聖人分上 日用千條萬緖 只是一箇渾淪眞實底流行 貫注他更下不得一箇推字 曾子假借來說貼出一貫底道理 要知天地是一箇無心底忠恕 聖人是一箇無爲底忠恕 學者是一箇著力底忠恕 學者之忠恕 乃是忠恕正名正位 固是一箇道理 在三者自有三樣 程子曰 天地無心而成化 聖人有心而無爲 此語極是親切 공자께서는 一貫을 말하였고, 증자는 忠恕를 말했으며, 자사는 대덕과 소덕을 말했고, 장자는 이치는 하나지만 나뉨은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저 하나일 따름이다. 성인의 분수 위에서는 일상생활의 천가지 만가지 단서가 그저 하나의 순수하고 진실함이 흘러 행해지는 것일 따름이니, 다른 것에 쏟아부을지라도 더이상 하나의 推자를 쓰지 못하는 것이다. 증자가 빌려다가 말하여 一貫의 이치를 붙여냈으니, 천지는 마음이 없는 하나의 忠恕이고, 성인은 하나의 무위의 忠恕이며, 배우는 자는 하나의 힘쓰는 忠恕임을 알아야 한다. 배우는 자의 忠恕는 곧 忠恕, 正名, 正位인데, 본래부터 하나의 이치이지만, 세 가지에 있어서는 저절로 세 가지 모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정자가 말하길, ‘천지는 무심하지만, 조화를 이루고, 성인은 마음이 있지만, 행함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지극히 친근하면서도 적절한 것이다.
忠在聖人是誠 恕在聖人是仁 仁與誠 則說開了 惟忠恕二字相粘少一箇不得 忠은 성인에게 있어서는 誠이고, 恕는 성인에게 있어서는 仁이다. 仁과 誠이라면, 떼어서 말하였지만, 오직 忠恕 2글자는 서로 붙어 있는 것이므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問夫子之道如太極 天下之事如物之有萬 物雖有萬而所謂太極者 則一 太極雖一而所謂物之萬者未嘗虧也 至於曾子以忠恕形容一貫之妙 亦如今人以性命言太極也 不知是否 曰 太極便是一到得生兩儀時 這太極便在兩儀中 生四象時 這太極便在四象中 生八卦時 這太極便在八卦中 누군가 묻기를, “공자의 도는 태극과 같고, 천하의 일이란 마치 사물이 만개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물이 비록 만개나 있더라도,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은 하나일 뿐이고, 태극은 비록 하나이지만, 이른바 사물이 만개라는 것은 일찍이 줄어든 적이 없습니다. 증자가 忠恕로써 一貫의 오묘함을 형용한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性命을 가지고 태극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태극이 곧 일단 음양를 낳는 때에 이르면, 이 태극은 곧바로 兩儀 안에 있고, 四象을 낳을 때가 되면, 이 태극은 곧 四象 안에 있는 것이며, 八卦를 낳을 때가 되면, 이 태극은 곧 八卦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覺軒蔡氏曰 盡己之謂忠 須是此心發得十分盡 方是忠 若留得一分未盡 便不得謂之忠 推己之謂恕 須是推己心以及人 如己心之所欲 方是恕 若有一處推不到 便不得謂之恕 此是學者著力之忠恕也 下文程子曰 維天之命於穆不已 乾道變化 各正性命 朱子曰 譬則天地之至誠無息而萬物各得其所 此是天地聖人自然之忠恕也 學者誠能由著力之忠恕 亦可做到自然之忠恕 所謂及其成功 一也 각헌채씨가 말하길, “자신을 다하는 것을 일러 忠이라고 말하니, 반드시 이 마음이 십분 다 발현되어야만 비로소 忠인 것이다. 만약 약간이라도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다면, 곧 이를 일컬어 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미루는 것을 일러 恕라고 말하니,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기를 마치 자신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와 같이 해야만, 비로소 恕인 것이다. 만약 한 곳이라도 미루어서 이르지 못함이 있다면, 곧 이를 일컬어 恕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우는 자가 힘을 써서 행하는 忠恕인 것이다. 아랫 글에서 정자가 말하길, ‘오직 하늘의 命만이 심원함이 그침이 없고, 乾道가 변화하여 각자 性命을 바르게 한다’고 말하였고, 주자는 ‘비유하자면 천지의 지극한 정성은 그침이 없으면서, 만물은 각자 제자리를 얻는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천지와 성인의 자연스러운 忠恕인 것이다. 배우는 자가 진실로 능히 애써 노력하는 忠恕를 말미암을 수 있다면, 또한 자연스러운 忠恕까지도 해낼 수 있으니, 이른바 그 공을 이룸에 미쳐서는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曾子就聖人分上移下一步 借學者忠體恕用之名以形容聖道之體用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것은 증자가 성인의 분수 위로 나아가다, 한 걸음을 아래로 옮겨서, 배우는 자의 忠體恕用의 이름을 빌림으로써, 聖道의 體用을 형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蓋至誠無息者, 道之體也, 萬殊之所以一本也; 萬物各得其所者, 道之用也, 一本之所以萬殊也. 以此觀之, 一以貫之之實可見矣. 대개 지극한 정성이 쉼 없다는 것은 도의 몸이니, 만 가지 다른 것들이 하나의 근본으로 삼는 바이다.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도의 사용이니,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지는 바이다. 이로써 관찰한다면,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는다는 것의 실질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朱子曰 忠者盡己之心 無少僞妄 以其必於此而本焉 故曰 道之體 恕者推己及物 各得所欲 以其必由是而之焉 故曰道之用 주자가 말하길, “忠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거짓됨과 망령됨이 없게 함으로써, 반드시 그것이 여기에서 근본을 두도록 하기 때문에, 道의 體라고 말하는 것이다. 恕라는 것은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니, 각자 바라는 바를 얻게 함으로써, 반드시 그것이 이를 말미암아서 가도록 하기 때문에, 道의 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忠卽是實理 如維天之命於穆不已 亦只以這實理流行發生萬物 牛得之而爲牛 馬得之而爲馬 草木得之而爲草木 忠은 곧 實理(실질적 이치)이니, 예컨대 오직 하늘의 命만이 심원함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이, 또한 단지 이러한 실질적 이치가 유행함으로써 만물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소가 이를 얻으면 소가 되고, 말이 이를 얻으면 말이 되며, 초목이 이를 얻으면 초목이 되는 것이다.
一本是統會處 萬殊是流行處 在天道言之 一本是元氣之於萬物有日月星辰昆蟲草木之不同而只是一氣之所生 萬殊則是日月星辰昆蟲草木之所得而生者 一箇自是一箇模樣 在人事言之 則一理之於萬事有君臣父子兄弟朋友動息灑掃應對之不同而只是此理之所貫 萬殊 則是君臣父子兄弟朋友之所當於道者 一箇是一箇道理 其實只是一本 하나의 근본이란 통합하여 모이는 곳이고, 만가지 다른 것이란 흘러 행해지는 곳이다. 天道에 있어서 말하자면, 一本이란, 만물에 있어서 원기가 비록 해와 달과 별과 곤충, 초목의 다름이 있지만, 단지 하나의 기가 만들어낸 바란 것이고, 萬殊란, 해와 달과 별과 곤충과 초목이 원기를 얻어서 생겨난 바란 것인데, 하나는 당연히 하나의 자기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다. 人事에 있어서 말하자면, 하나의 이치가 만사에 있어서 군신과 부자, 형제와 붕우, 움직임과 그침, 쇄소응대의 다름이 있지만, 모두 단지 이 이치가 관통하는 것이고, 萬殊는 바로 군신과 부자, 형제와 붕우가 각자 道에 합당한 바인바, 하나는 그 하나의 이치일 따름이나, 사실은 단지 하나의 근본인 것이다.
慶源輔氏曰 集註又擧天地之體用而釋之 雖不言聖人之體用 然在其中矣 故直言道之體道之用而已 亦不復明言天地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집주에서는 또한 천지의 體用을 거론하면서 풀이하였다. 비록 성인의 체용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道의 體와 道의 用을 곧장 말하였을 따름이고, 또한 다시금 천지를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萬殊之所以一本者 指用之出於體 謂萬殊之實出於一本也 本之所以萬殊者 指體之散於用 謂一本之實散於萬殊也 指用之出於體 指體之散於用 則一以貫之之實 可見矣 萬殊가 一本이라는 것은 用이 體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킨 것이니, 萬殊가 실제로 一本에서 나옴을 말한 것이다. 근본이 萬殊가 된다는 것은 體가 用에서 흩어짐을 가리킨 것으로서, 一本이 실제로 萬殊에서 흩어짐을 말한 것이다. 用이 體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키고, 體가 用에서 흩어지는 것을 가리켰다면, 一以貫之의 실질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西山眞氏曰 天地與聖人只是一誠字 天地只一誠而萬物自然各遂其生 聖人只一誠而萬事自然各當乎理 學者未到此地位 且須盡忠恕二字 誠是自然底忠恕 忠恕是著力底誠 孔子告曾子以一貫 本是言誠 曾子恐門人曉未得 故降下一等告以忠恕 要之 忠恕盡處 卽是誠 서산진씨가 말하길, “천지와 성인은 그저 하나의 誠자일 뿐이다. 천지가 그저 하나의 誠이면, 만물은 자연히 각자 그 삶을 이루고, 성인이 단지 하나의 誠이면, 만사가 자연스레 각자 이치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또한 반드시 忠恕 2글자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誠은 자연스런 忠恕이고, 忠恕는 애써 노력하는 誠인 것이다. 공자가 증자에게 一以貫之로 알려준 것은 본래 誠을 말한 것이었다. 증자는 문인들이 이를 깨우치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한 등급 내려서 忠恕로 알려준 것이다. 요컨대, 忠恕를 다하는 곳이 곧바로 誠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一以貫之 之字指萬而言 萬字一之對也 一是指道之總會處 萬是指道之散殊處 道之總會在心 道之散殊在事 以道之總會在一心者 貫道之散殊在萬事者 故曰 吾道一以貫之 當看道字 問曾子答門人何不曰 一本萬殊體立用行之類 而曰忠恕 何也 曰 不若忠恕兩字 學者所易曉 便可用功 盡得忠 便會有這一 盡得恕 便會以貫之 一以貫之是自然底忠恕 忠恕是勉强底一以貫之 曾子之學 主於誠身 故其告人便就行處說 쌍봉요씨가 말하길, “一以貫之에서 之자는 萬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萬자는 一자의 짝이다. 一은 道가 모두 모이는 곳을 가리키고, 萬은 도가 흩어져 달라진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道가 함께 모임은 마음에 있고, 도가 흩어져 달라짐은 일에 있다. 道가 一心에 함께 모여 있는 것으로써 道가 만사에 흩어져 달라진 것을 꿰기 때문에, 내 도는 하나로써 꿴다고 말한 것이니, 마땅히 道자를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증자는 문인에게 답할 적에 어찌하여 一本과 萬殊, 그리고 體가 정립되고 用이 행해지는 부류를 말하지 않고서, 忠恕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忠恕 두 글자를 말하는 것만 못하다. 배우는 자가 쉽게 깨우치는 것이라면, 곧 힘을 쓸 수 있고, 忠을 다할 수 있으면, 이 하나(一以貫之의 一)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恕를 다할 수 있으면, 곧 그것들을 꿸 수가 있는 것이다. 一以貫之는 자연스러운 忠恕이고, 忠恕는 힘써서 노력하는 一以貫之인 것이다. 증자의 학문은 자기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에, 그가 사람들에게 알려줄 적에 실행하는 부분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上言至誠無息 是以天地之至誠無息 喩夫子之一理渾然 萬物各得其所 是以天地之生萬物 各得其所 喩夫子之汎應曲當 下言至誠無息者道之體 是言夫子之心至誠無息 乃道之體 萬物各得其所 是言夫子之應萬事 各得其所 爲道之用 동양허씨가 말하길, “위에서 至誠無息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천지가 至誠無息한 것으로써 공자께서 一理가 순수함을 비유한 것이고, 만물이 각자 제 자리를 얻었다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냄에 있어 각자 제자리를 얻었다는 것으로써 공자께서 널리 대응하고 자잘한 것도 합당하게 하신 것을 비유한 것이다. 아래에서 至誠無息이라는 것이 道의 體라고 말한 것은, 이는 공자의 마음이 至誠無息하니, 이것이 곧 道의 體라고 말한 것이고,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었다는 것은, 공자가 만사에 대응하여 각자 제자리를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道의 用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4 | 或曰: “中心爲忠, 如心爲恕.” 於義亦通. 혹자가 말하길, 마음을 가운데로 하여 치우치지 않게 하면 忠이 되고, 내 마음과 같이 남에게도 행하면 恕가 된다고 하였는데, 뜻에서는 역시 통한다.
朱子曰 中心爲忠 如心爲恕 見周禮䟽 如比也 比自家心推將去 仁與恕 只爭些子 自然底是仁 比而推之便是恕 주자가 말하길, “中心爲忠 如心爲恕라는 구절은 주례 소에서 보인다. 如는 견준다는 뜻이다. 자기 마음을 견주어서 장차 미루어 간다는 말이다. 仁과 恕는 단지 약간 다툴 뿐인데, 자연스러운 것은 仁이고, 견주어서 미루어가는 것은 恕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中心爲忠 謂中心所存本無一毫之不盡也 如心爲恕 謂如我之心而推之於外 無彼此之間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中心爲忠이란 중심이 보존하는 바에 본래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如心爲恕란 내 마음과 똑같이 하여 그것을 밖으로 미루어감으로써 피차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5 | ○ 程子曰: “以己及物, 仁也; 推己及物, 恕也, 違道不遠是也. 忠恕一以貫之: 忠者天道, 恕者人道; 忠者無妄, 恕者所以行乎忠也; 忠者體, 恕者用, 大本達道也. 此與違道不遠異者, 動以天爾.” 정자가 말하길, “나의 마음으로써 외물에 미치는 것이 仁이고,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외물에 미치는 것이 恕인데, 중용에서 ‘忠恕는 道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忠恕는 一以貫之다. 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 恕라는 것은 사람의 도다. 忠은 망령됨이 없고, 恕는 忠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忠은 몸이고 恕는 작용이니, 큰 근본이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도다. 이것이 도에서 멀지 않다는 것과 다른 것은 하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以己是自然流出 不待安排布置 推己是著力便有轉折 只是爭箇自然與不自然 주자가 말하길, “자신으로써 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니, 안배함과 배치함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을 미룬다는 것은 힘을 써서 하는 것이니, 곧바로 구르고 꺾임이 있다. 단지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다툴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以己及物是大賢以上聖人之事 聖人是因我這裏有那意思便去及人 如因我之饑寒 便見得天下之饑寒 自然恁地去及他 便是以己及物 如賢人以下知得我旣是要如此 想人亦要如此 而今不可不敎他如此 三反五折 便是推己及物 只是爭箇自然不自然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大賢 이상의 성인의 일이다. 성인은 내가 여기에서 저런 의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인해 곧 가서 남에게 미치는데, 마치 내가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으로 인해 곧바로 천하가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가서 타인에게 미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으로써 남에게 미치는 것이다. 예컨대 현인 이하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미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것을 안다면, 남도 또한 이와 같이 하고자 할 것임을 생각하여, 이제 그도 이와 같이 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세 번 돌이키고 다섯 번 꺾는 것, 바로 이것이 자신을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단지 자연스러우냐 부자연스러우냐를 다툴 따름이다.
朱子曰 天道是體 人道是用 動以天之天 只是自然 주자가 말하길, “하늘의 도는 體이고, 사람의 道는 用이다. 하늘로써 움직인다는 말에서 하늘이란 그저 자연스러움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問天道人道初非以優劣言 自其渾然一本言之 則謂之天道 自其與物接者言之 則謂之人道耳 曰 然此與誠者 天之道 誠之者 人之道 語意自不同 누군가 묻기를, “천도와 인도는 처음부터 우열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혼연하고 一本한 입장에서 말하면, 이를 일컬어 천도하고 말하였고, 그것이 사물과 접하는 것으로써 말한다면, 이를 일컬어 인도라고 말했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러나 이것은 ‘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이고, 정성스럽게 하려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라는 말과 그 뜻이 저절로 같지가 않다.”라고 하였다.
忠是未感而存諸中者 所以謂之天道 恕是已感而見諸事物者 所以謂之人道 忠是自然 恕是隨事應接略假人爲 所以有天人之辨 忠은 아직 느끼지 않고서도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천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恕는 이미 느껴서 사물에 나타난 것이니, 따라서 이를 인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忠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恕는 일에 따라서 응접하는 것이라서 다소 인위적인 것을 빌리기 때문에, 따라서 하늘과 사람의 분별이 있는 것이다.
問推程子動以天之說 則聖人之忠恕爲動以天 賢人之忠恕爲動以人矣 又以忠爲天道 恕爲人道 何也 且盡己推己 俱涉人爲 又何天人之分 曰 彼以聖賢而分 此以內外而分 盡己雖涉乎人爲 然爲之在己 非有接於外也 從橫錯綜 見其倂行而不相悖 則於此無疑矣 又曰中庸之言 則動以人爾 누군가 묻기를, “정자의 ‘動以天’의 학설을 미루어간다면, 성인의 忠恕는 動以天이고, 현인의 忠恕는 動以人입니다. 그런데 다시 忠을 천도로 여기고 恕를 인도로 여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또한 盡己와 推己는 모두 人爲와 관련되어 있는데, 또 어째서 天과 人을 구분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저것은 성인과 현인으로써 구분한 것이고, 이것은 내외로써 구분한 것이다. 盡己가 비록 人爲와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자기 안에서 행하는 것이지, 밖과 접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종횡으로 뒤섞여서 그것들이 나란히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여기에 어떠한 의심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중용의 말씀(忠恕違道不遠)은 動以人(사람으로써 움직인다)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忠恕是對立底道理 故以體用言 其體無妄 故曰天 其用推行 故曰人 잠실진씨가 말하길, “忠恕는 대립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體와 用으로 말한 것이다. 그 體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에, 天이라고 말한 것이고, 그 用은 미루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人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黃氏曰 以聖人比學者 聖人之忠是天之天 聖人之恕是天之人 學者之忠是人之天 學者之恕是人之人 畢竟忠是體 近那未發 故雖學者亦有箇天 恕是用 便是推出外去底 故雖聖人亦有箇人 황씨가 말하길, “성인으로 배우는 자와 비교하자면, 성인의 忠은 天의 天이고, 성인의 恕는 天의 人이다. 배우는 자의 忠은 人之天이고, 배우는 자의 恕는 人之人이다. 필경은 忠이 體라 저 未發의 상태에 가깝기 때문에, 비록 배우는 자라고 할지라도, 역시 다소나마 天이 있는 것이다. 恕는 用이니, 곧 미루어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다소나마 人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陳氏曰 中庸以中爲大本 是專指未發處言之 此以忠爲大本 則是就心之存主眞實無妄處言之 徹首徹尾無間於未發已發 程子只是借大本達道四字言之 其意自不同 진씨가 말하길, “중용에서는 中을 大本으로 삼는데, 이는 未發處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忠을 大本으로 삼았으니, 이는 마음이 보존되어 眞實無妄함에 주안점을 둔 곳으로 나아가 말한 것으로서, 철두철미하게 未發과 旣發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 정자는 단지 ‘大本達道’라는 네 글자를 빌려서 말한 것이니, 그 의미는 저절로 같지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6 | 又曰: “‘維天之命, 於穆不已’, 忠也; ‘乾道變化, 各正性命’, 恕也.” 또 말하길, “오직 하늘의 命만이 엄숙함에 그치지 않는데, 이것이 忠이다. 乾道가 변화하여 각자 性命을 바르게 하는데, 이것이 恕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維天之命於穆不已 此不待盡而忠也 乾道變化各正性命 此不待推而恕也 주자가 말하길, “‘오직 하늘의 命만이 심원함이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다함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忠이 된다는 것이다. ‘乾道가 변화하여 각자 性命을 바르게 한다.’ 이것은 미루어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恕가 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陳氏曰 天命卽天道之流行而賦於物者 不已卽無息也 此摘詩二句以言 天地之道至誠無息 卽天地之道之忠也 由乾道之變化 以生萬物而萬物各得其性命之正 此摘易二句而言 萬物之各得其所 卽天地之道之恕也 朱子謂 譬則天地之至誠無息而萬物各得其所 及至誠無息者 道之體 萬物各得其所者 道之用等語 皆是祖述程子此條而敷演之 皆是卽天地之道以形容聖人之道 根源於程子而盡發於朱子 淵乎微哉 진씨가 말하길, “천명은 곧 천도가 유행하여 사물에 품부된 것이고, 不已는 쉼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시경 2구절을 잘라내어, 天地之道가 至誠無息한 것이 곧 天地之道의 忠이라고 말한 것이다. 乾道의 변화를 말미암아 만물을 내었으되, 만물은 각자 그 성명의 올바름을 얻었다는 것, 이것은 주역의 2구절을 잘라내어,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은 것은 곧 天地之道의 恕라고 말한 것이다. 주자는 ‘비유하자면 천지의 지극한 정성이 쉼이 없으며 만물은 각자 제자리를 얻는다’ 내지 ‘지극한 정성이 쉼이 없는 것은 道의 體이고,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는 것은 道의 用이다’라는 등등의 말을 했는데, 모두 정자의 이 조목의 말을 본떠 서술하고 부연한 것이고, 모두 천지의 도로써 성인의 도를 형용한 것이다. 정자에게서 근원해서 주자에게서 모두 다 발현되었으니, 깊고도 정밀하구나!”라고 하였다.
曾子借忠恕以明一貫 是將一貫放下說 程子借天地以明忠恕 是將一貫提起說 증자는 忠恕를 빌려 一貫을 밝혔는데, 이는 一貫을 내려놓고 말한 것이고, 정자는 天地를 빌려 忠恕를 밝혔는데, 이는 一貫을 일으켜 세워서 말한 것이다. |
7 | 又曰: “聖人敎人各因其才, 吾道一以貫之, 惟曾子爲能達此, 孔子所以告之也. 曾子告門人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亦猶夫子之告曾子也. 『中庸』所謂 ‘忠恕違道不遠’, 斯乃下學上達之義.” 또 말하길,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각자 그 재주에 따라서 하였는데, 내 도는 하나로 그것을 꿴다고 한 것은 오직 증자만이 이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공자께서 그에게 알려 주셨던 것이다. 증자가 문인들에게 일러 말하길, 선생님의 도는 忠恕일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공자가 증자에게 일러준 것과 같다. 중용에서 말하는 이른바 忠恕는 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곧 아래에서 배워 위까지 통달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渾然一理者 純亦不已 無毫髮之間斷 在學者則爲忠 在夫子則爲一 在天地則爲至誠無息也 汎應曲當者 酬酢萬變無不合乎理 在學者則爲恕 在夫子則爲貫 在天地則爲萬物各得其所也 一則體 貫則用 體隱而用顯 故用可見 學者之所能知 體不可見 非學之至者 不能知也 以子出門人問觀之 當時侍坐非必一人 獨呼曾子語之 惟曾子爲能達此耳 호씨가 말하길, “渾然한 一理라는 것은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아서 터럭만큼이라도 중간에 끊김이 없다는 것이니,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는 忠이 되고, 공자님에게 있어서는 一이 되며, 천지에 있어서는 至誠無息이 되는 것이다. 泛應曲當이라는 것은 온갖 변화에 수작함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니,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는 恕가 되고, 공자님에게 있어서는 貫이 되며, 천지에 있어서는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는 것이 되는 것이다. 一은 곧 體이고, 貫은 곧 用인데, 體는 은미하고 用은 드러나기 때문에, 用을 볼 수가 있는 것이고, 배우는 자도 능히 알 수 있는 바이다. 체는 볼 수 없는 것이니, 배움이 지극한 사람이 아니라면, 능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공자님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는 것으로써 살펴보건대, 당시 공자님을 모시고 앉아있었던 사람은 틀림없이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독 증자만을 불러서 말해준 것은 오직 증자만이 이것을 능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曾子之才能達一貫 故夫子以一貫告之 門人之才未達一貫 惟可告以忠恕 故曾子以忠恕告之 此所謂敎人各因其才 所以曰 亦猶夫子之告曾子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증자의 재주는 능히 一貫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공자께서는 一貫으로써 알려준 것이다. 문인들의 재주는 미처 一貫을 알지 못하였기에, 오직 忠恕로 알려주어야만 되었다. 그래서 증자는 忠恕로써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사람을 가르침에 각자 그 재주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니, 이 때문에 ‘또한 공자께서 증자에게 알려준 것과 같았다’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忠恕名義自合依違道不遠 乃掠下敎人之意 欲學者下學乎忠恕而上達乎道也 曾子却是移上一階說 聖人之忠恕 到程子又移上一階說 天地之忠恕 其實只是一箇忠恕 須自看敎有許多等級分明 주자가 말하길, “忠恕는 그 名義가 저절로 違道不遠과 부합하지만, 도리어 끌어내려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뜻이니,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아래에서 忠恕를 배워서 위로는 도에 이르도록 하고자 함이다. 증자는 도리어 위로 한 계단 옮겨서 성인의 忠恕를 말하였고, 정자에 이르러서는 다시 위로 한 계단을 더 옮겨서 천지의 忠恕를 말하였지만, 사실은 그저 하나의 忠恕일 따름이니, 반드시 가르침에는 수많은 등급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或問曾子未知體之一處 莫是但能行其粗而未造其精否 曰不然 聖人所以發用流行處 皆此一理 豈有精粗 緣他但見聖人之用不同而不知實皆此理流行之妙 故告之曰 吾道一以貫之 曾子遂能契之深而應之速 云而已矣者 謂聖人只是箇忠 只是箇恕 只是箇至誠不息萬物各得其所而已 혹자가 묻기를, “증자는 體가 一인 부분을 미처 알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그저 그 거친 것만을 행할 줄 알면서 그 정밀한 것에는 아직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지 않다. 성인께서 用이 흘러 행해지는 부분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 모두 모두 이 一理였으니, 어찌 정밀하고 거친 것이 있었겠는가? 증자가 다만 성인의 用이 같지 아니함만 보았을 뿐, 사실은 모두 이 이치가 흘러 행해지는 것이라는 오묘함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증자에게 일러 말하길, ‘내 도는 하나로 그것을 꿰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고, 증자도 마침내 깊이 합치되어 신속하게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而已矣라고 말한 것은 성인께서는 그저 忠이고 그저 恕이며 그저 至誠無息이어서 만물이 각자 제자리를 얻는다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貢尋常自知識而入道 故夫子警之曰 汝以予爲多學而識之者歟 對曰 然 非歟 曰非也 予一以貫之 蓋言吾之多識不過一理耳 曾子尋常自踐履入道 事親孝則眞能行此孝 爲人謀則眞箇忠 與朋友交則眞箇信 故夫子警之曰 汝平日之所行者 皆一理爾 惟曾子領略於片言之下 故曰忠恕而已矣 以吾夫子之道無出於此也 又曰 夫子只以一貫語此二人 亦須是他承當得 想亦不肯說與領會不得底人 曾子是踐履篤實上做到 子貢是博聞强識上做到 자공은 평소에 지식을 통하여 도에 들어가려 하였기 때문에, 공자께서 그에게 경계하여 말하길,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였다. 자공이 대답하여 말하길, ‘그렇습니다. 아닙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 말하길, ‘아니다. 나는 一以貫之한다’고 하였다. 대체로 내가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그저 하나의 이치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증자는 평소에 실천을 통하여 도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어버이를 섬길 적에 孝를 행함에 있어 진짜로 이 孝를 행할 수 있었고, 남을 위하여 도모할 적에는 진짜로 忠을 다하였으며, 친구와 사귈 적에는 진짜로 신의를 다하였기 때문에, 공자께서 그를 경계하여 말하길, ‘네가 평소에 행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이치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오직 증자만이 이 말 한마디에 깨달았기 때문에, 그저 忠恕일 따름이니, 내 선생님의 도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또 말하길, “공자께서 단지 一貫으로써 이 두 사람에게만 말했던 것은, 역시 틀림없이 그들이 이어받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증자는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 위에서 해낸 사람이고, 자공은 널리 듣고 강하게 기억하는 것 위에서 해낸 사람이다.
曾子父子相反 曾點天資高明 見得甚高 却於行上工夫踈略 曾參天資本魯 合下不曾見得 却是日用間積累做工夫去 一貫之說 待夫子告之而後知 然一唯之後 本末兼該 體用全備 故傳道之任不在其父而在其子 虛實之分 學者其必有以辨之 증자의 부자지간은 서로 반대였으니, 증점은 천부적 자질이 고명하였고, 보아서 터득함이 매우 높았지만, 실행하는 것 위에서의 공부는 소략하였다. 증삼은 천부적 자질이 본디 노둔하여, 원래부터 보아서 일찍이 터득한 적이 없었지만, 도리어 일상생활 중에 쌓아 모으는 것에 공부를 해나갔다. 一貫이라는 말은 공자께서 알려주기를 기다린 연후에 알게 되었지만, 한번 예라고 대답한 후에는, 근본과 말단을 겸하여 갖추었고, 體와 用이 전부 다 갖추어졌기 때문에, 도를 전하는 임무가 그 아비에게 있지 않았고, 그 자식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허와 실의 구분은 배우는 자라면 반드시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潛室陳氏曰 聖人一心渾然天理 事物各當其可 猶一元之運 萬化自隨 初無著力處 至於學者須是認得人己一般意思 却安排敎入塗轍 須是下工夫方可 要知忠恕是一貫意思 一貫是包忠恕而言 忠恕是箇生底一貫 一貫是箇熟底忠恕 又曰 易所謂何思何慮殊塗而同歸 百慮而一致者 正聖人一貫之說也 잠실진씨가 말하길, “성인의 一心은 渾然한 天理이니, 사물은 각자 그 옳은 바에 합당하다. 이는 마치 一元이 운행하니, 만물의 조화가 스스로 따르고, 처음부터 힘을 쓰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배우는 자에 이르면, 반드시 남과 자신이 같은 뜻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도리어 안배하여 途轍(길에 난 수레바퀴 자국, 前轍)에 들어가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니, 반드시 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되는 것이다. 忠恕가 一貫이라는 의미이니, 一貫은 忠恕를 포함하여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忠恕는 하나의 익지 않은 날 것의 一貫이고, 一貫은 하나의 잘 익은 忠恕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길, “주역에서 말하는 이른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는가? 길은 달라도 귀결점은 같고, 백번 생각해도 하나에 이른다’는 것은 바로 성인의 일관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忠恕爲說 蓋有三言 一謂忠爲天道 恕爲人道者 此以微而天理顯而人事分忠恕也 而聖人人事之際 莫非天理之流行 非微顯一以貫之與 二謂忠者無妄恕者所以行乎忠者 此以內而存心外而行事分忠恕也 而聖人之行事 莫非此心之無妄實爲之 非內外一以貫之與 三謂忠者體恕者用大本達道者 此以靜而未發 動而已發分忠恕也 而聖人已發之和 皆未發之中實爲之 非動靜一以貫之與 是三者各以兩端相爲對待 而以此觀彼 脈絡相因 亦猶忠之所以爲恕 而恕之本乎忠也 쌍봉요씨가 말하길, “忠恕에 관한 학설로는 대체로 3가지 말이 있는데, 하나는 忠이 天道이고 恕가 人道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은미하면 天理이고 드러나면 人事라는 것으로써 忠恕를 구분한 것이지만, 성인께서 人事를 행할 즈음에 天理의 流行이 아님이 없으니,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을 모두 일이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둘째는 忠이라는 것은 거짓이 없는 것이고, 恕라는 것은 忠에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안에서는 마음을 보존하고 밖에서는 일을 행한다는 것으로써 忠恕를 구분한 것이지만, 성인의 행사에는 이러한 마음의 거짓 없음이 실제로 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內外를 一以貫之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는 忠이라는 것은 體이고 恕라는 것은 用으로서 大本이자 達道(널리 통하는 도)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고요하면 未發이고 움직이면 旣發이라는 것으로써 忠恕를 구분한 것이지만, 성인께서 이미 발현하신 조화는 모두 未發인 중에 실제로 그것을 행한 것이니, 動靜을 모두 一以貫之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세 가지는 각자 양 끝을 가지고 서로 대비한 것으로서, 이것으로 저것을 살펴보면, 맥락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니, 이 역시 忠은 恕가 되는 존재이지만, 恕도 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程子謂忠恕違道不遠 下學忠恕所以上達一貫 此論不可易 曾子用功處 不必他求 只看大學所說便是 問大學所說 如何是忠恕 曰 修身以上忠之事也 齊家以下恕之事也 問程子曰 以己及物仁也 推己及物恕也 不言忠恕而言仁恕 何也 曰 此先言仁恕之別 且先敎人識恕字之本義 然後言一以貫之之忠恕 與違道不遠之忠恕不同 蓋違道不遠之恕 正是推己及人之恕 而一以貫之之恕 則是以己及人之仁 與推己及人之恕有異 故曰此與違道不遠異者 動以天爾 정자는 ‘忠恕는 道로부터 멀리 있지 않으니, 아래에서 忠恕를 배우는 것은 위로 一貫에 이르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논리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증자가 힘을 썼던 부분은 달리 구할 필요가 없이, 그저 대학에서 말하는 것만 살펴보아도,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 묻기를, “대학에서 말한 것이 어째서 忠恕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대학 8조목 중 修身 이상은 忠의 일이고, 齊家 이하는 모두 恕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정자가 말하길, ‘자신으로써 외물에 미치는 것은 仁이고, 자신을 미루어서 외물에 미치는 것은 恕다’라고 했는데, 忠恕를 말하지 않고 仁恕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仁恕의 구별을 먼저 말한 것이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恕자의 本義를 알게 한 연후에, 一以貫之의 忠恕가 違道不遠의 忠恕와 같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대체로 違道不遠의 恕가 바로 推己及人의 恕이지만, 一以貫之의 恕라면 곧 以己及人의 仁이니, 推己及人의 恕와는 다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違道不遠과 다른 것은 하늘로써 움직인다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王氏曰 朱子之說 是言一貫而忠恕在其中 程子之說是言忠恕而一貫在其中 朱子於夫子之意詳 程子於曾子之意詳 程子言以己及物一句 上應無待於推 下應動以天爾 왕씨가 말하길, “주자의 말은 一貫을 말하였으나 忠恕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고, 정자의 말은 忠恕를 말하였지만 一貫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주자는 공자의 뜻을 상세히 살펴보았고, 정자는 증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았던 것이다. 정자는 以己及物이란 한 구절을 말하였는데, 위로는 미루어감을 기다지 않는다는 것에 호응하고, 아래로는 하늘로써 움직일 따름이라는 것에 호응한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曾子借學者之忠恕以明夫子一貫之似 程子則卽天地之忠恕以明夫子一貫之眞 末擧中庸違道不遠 專爲學者言也 本只是下學之事 未說到上達 因論語之一貫而及中庸之忠恕 則中庸之言 乃下學上達之意 蓋下學忠所以上達聖人之一 下學恕所以上達聖人之貫也 大抵不說出天地之忠恕 則人以一貫爲淺近而忽聖人之道以爲易 不說歸學者之忠恕 則人以忠恕爲高虛而畏聖人之道以爲難 此程子朱子敎人之意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증자는 배우는 자의 忠恕를 빌려다 공자님의 一貫과 비슷함을 밝혔고, 정자는 천지의 忠恕에 나아가 공자님의 一貫이 가진 진상을 밝힌 것이다. 끝머리에서 중용의 ‘違道不遠’을 거론한 것은 오로지 배우는 자를 위하여 말한 것이다. 본래는 그저 下學의 일이어서 미처 上達까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논어의 一貫을 바탕으로 하여 중용의 忠恕에까지 미쳤으니, 중용의 말은 마침내 下學上達의 의미인 것이다. 대체로 아래에서 忠을 배우는 것은 위로 성인의 一에 이르기 위함인 것이고, 아래에서 恕를 배우는 것은 위로 성인의 貫에 이르고자 함인 것이다. 대저 천지의 忠恕를 말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一貫을 淺近한 것으로 여겨서 성인의 도를 소홀히 대하여 쉽다고 여겼을 것이고, 배우는 자의 忠恕로 돌아감을 말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忠恕를 고상하며 허황된 것으로 여겨서 성인의 도를 두려워하여 어렵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자와 주자가 사람을 가르친 뜻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曾子之學 固主於力行 然亦未嘗不先於致知 觀集註隨事精察而力行之之語 精察卽致知也 況大學成於曾子 格物致知 實大學之始敎 又觀記曾子問中禮之權變 曲折纖悉必講明之 豈有全不加意於致知而變化其氣質之魯者哉 신안진씨가 말하길, “증자의 학문은 본래부터 力行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그러나 또한 일찍이 致知(앎을 지극히 함)을 앞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집주에서 나오는 ‘일에 따라 정밀히 살펴서 힘써 행한다’는 말을 살펴보자면, 정밀하게 살핀다는 것이 바로 앎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다. 하물며 대학이 증자에게서 완성되었으니, 격물치지가 실로 대학의 첫 가르침인 것임에랴! 다시 禮記의 曾子問편의 禮의 權變을 살펴보면, 미세한 곡절이나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전부 반드시 연구하여 밝혔으니, 어찌 전혀 致知에 뜻을 보태지 않으면서도 그 기질의 노둔함을 변화시킴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