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계 서북쪽 천자산은 토가족 족장이 자칭 천자(天子)라고 한 데서 이름 유래한 곳이다. 3천5백 개 계단 끝 정상은 1920년까지 토가족 고위층만 오를 수 있는 신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해발 2084미터 정상에 서니, 운무 속의 산봉우리들은 바다 위의 섬 같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듯 안하(眼下)의 풍경 웅장하다.
무릉원은 3억8천만년 전에 해저에서 솟아올라 억만년의 침수 붕괴로 협곡과 수려한 봉우리 생긴 것이다. 금강산, 설악산 수십개 합친 것처럼 광대한 규모로, 위가 평평한 것은 그랜드캐니언 비슷하나, 기암절경에 운무가 낀 모습은 모래와 돌로 이뤄진 그랜드캐니언 보다 한 차원 웃길이다.
전망대는 어필봉(御筆峰), 선녀산화(仙女散花) 기암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하룡(賀龍)장군 동상 옆에는 영지버섯, 수정, 나무뿌리 파는 기념품점과 돈 받고 기념사진 같이 찍어주는 토가족 복장 원주민 처녀가 있다. 내려오는 케이불카는 6인용 37대가 금방금방 연결되어 거대한 암봉을 스칠듯, 낙락장송 부딪힐듯, 스릴있게 케이불카 코스를 만들었는데, 설악산 권금성처럼 기다릴 필요가 없어 좋다.
서안(西安)
아침 비행기로 내린 서안은 비가 내린다. 관중평야 그 넓은 옥수수밭이 가을비에 젖고 있다.
"모처럼 왔는데, 비 때문에 관광은 좀 그렇겠다."
"아니다. 저 비 속에 관운장이 적토마 위에 높이 앉아 청룡언월도 치켜들고 달리는 모습 봐라. 그 뒤에 현덕을 호위한 장비 호랑이 수염과 날카로운 장팔사모도 보인다."
나는 이렇게 응답했다.
여기가 어디냐? 관중평야 아니냐? 위수(胃水)에서 낚시하시며 때 기다리던 우리 동이족(東夷族) 강태공 여상(呂尙)께서 문왕을 만난 곳이고, 시황제가 천하통일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하고, 만리장성 축성한 도읍지고, 항우와 유방이 자웅을 겨룬 곳이고, 당 현종과 양귀비 로맨스가 꽃 핀 장소며, 이태백, 두보, 도연명 등 성당(盛唐) 천하문장이 부침한 곳이다. 서안은 돌맹이 하나도 유적이다.
천년 13왕조의 도읍지 서안은 세계 4대 고도(古都)의 하나이다. 그 역사의 깊이와 폭이 로마나 아테네보다 깊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출발지 서안의 현주소는 스산하기 짝이 없다. 60년대 구로공단 모습이다. 휑한 아스팔트길 옆에 자전거포와 이발소 간판 보인다. 평균 월급은 1000원(元), 한화로 15만원이고, 30평아파트 임대료가 600원(元)이란다. "촌년이 아전서방 얻으면 갈 지 자 걸음 걷고, 육계장 아니면 밥을 안먹는다."는 식으로 한국인이 지금 여기 와서 거드럼 피우는 건 돈 때문이다.
성곽 남문가 호텔에 짐 풀고, "비림(婢林)"에 가서 왕유, 왕희지, 안진경, 구양순 친필 비석 보고, 책으로 엮은 탑본(榻本)도 구경했다. 서예가 누구나 탐내는 왕휘지 "난정기(蘭亭記)"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260원(元) 호가하는 공자님 전신상 탑본을 한참 흥정해 30원(元)에 샀다.
그 다음에 당현종의 로맨스로 유명한 여산(驪山) 화청지(華淸池) 온천에서, 양귀비가 목욕한 해당탕(海棠湯) 40도 온천물에 손도 씻어보고, 양귀비가 즐겨먹은 달콤한 석류도 사먹었다. 난중에 자결한 양귀비 무덤은 서안 70K 지점에 있는데, 그 무덤의 흙을 얼굴에 바르면 미인이 된다는 속설 때문에 관광객이 하도 흙을 파가는 바람에 지금 돌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끝으로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진시황의 병마용을 구경했다. 황릉 지하에 망루와 실물대의 병사 토용을 묻어놓았다. 병마용은 죄수 70만명을 동원하여 40년간 만들었는데, 도굴 방지를 위해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을 장치하고, 능을 만든 장인들과 후궁을 묻어버린 지하궁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 무슨 큰 구경거리 났는가. 끔찍한 무덤 속을 부산하게 다니는 시간에 나는 홀로 벤치에 앉아 달콤한 석류를 먹으며 백락천의 "장한가"(長恨歌) 한구절 음미했다.
구름같은 귀밑머리, 꽃같은 얼굴, 머리의 금비녀는 걸음마다 흔들리고,
부용무뉘 방장 드리운 따뜻한 방에서 봄밤을 보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