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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1730년 강렬하게 되기, 동물되기,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어느 관객의 회상
윌라드라는 B급 영화에서는 윌라드가 쥐의 도움을 받고 배신을 받는 내용의 영화다. 윌라드는 쥐되기가 된다. 분자되기는 쥐들의 번식과 더불어 무리 속에 존재하며 가족, 직업, 혼인등과 같은 그램분자적 역량을 잠식해 들어간다. 진화론은 계통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박물학적 계보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박물학은 A와 B사이처럼 관계의 견지에서만 사고될 수 있다. 박물학은 관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계열 아니면 구조로 파악한다. a는 b와 닮았고, b는 c와 닮았고,,,,이 모든 항들 자체는 그 계열인 근거인 완전성이나 질이라는 단 하나의 탁월한 항과 다양한 정도로 관계맺고 있다. 이것은 비율관계에 기반한 유비이다. 유비의 첫 번째 형식은 더 감각적이고 대중적이라고 간주되며,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유비의 두 번째 형식은 왕도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이 등가관계를 정하려는 지성의 모든 원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유비의 두형태는 다양한 평행상태를 유지하면서 공종했는데, <자연>은 거대한 미메시스와 같은 모방의 사슬로 사고되기도 했다. 동물들간의 상호관계는 과학의 대상일 뿐 아니라 꿈의 대상, 상징의 대상, 예술이나 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융에 따르면 동물은 진보나 퇴행이냐는 우월항의 계열로 사고되고 있다. 상상력을 가지고 계열을 가로지르며, 그것을 마지막 항으로까지 데려가는 모방, 이 마지막 항과 동일화하는 것 등이 갖는 명성을 구조주의는 규탄한다. 토테미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텍스트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외적 유사성을 넘어서 내적 상동성으로 향하기 상상적인 것의 계열적 조직화가 아니라 지성의 상징적, 구조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다. 나는 황소다 나는 늑대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와 여성의 관계는 수소와 암소의 관계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계열적 사고를 희생의 영역으로 환상과 몰상식이라고 단정하면서 구조를 옹호한다. 희생이라는 계열적 주제는 본래적 의미의 토템제도라는 구조적 주제에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회상
우리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변용시키는 특수한 동물되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구조주의는 생성을 해명하고 있지 않다. 생성을 부정하거나 생겅이 존재한다는 것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생성과 마주칠 때면 구조주의는 통시성의 모험을 내세우며 참된 질서를 외면한다. 되기(=생성)은 결코 관계 상호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생성한다는 것은 계열을 따라 진보하거나 퇴행하는 것도 아니다. 실재적으로 생성 그 자체는 생성의 블록이지 생성하는 자가 이행하는 고정된 몇 개의 항이 아니다. 인간의 동물되기는 인간이 변해서 되는 동물이 실재하지 않다 하더라고 실재적이다. 되기는 항상 계통과는 다른 질서에 속해 있다. 되기는 결연과 관계된다. 소통하고 전염되기 위해 유전적 계통적 진화이기를 그치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나타나는 진화형태를 역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역행은 퇴행이 아니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성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일이다.
어느 마법사의 회상 1
동물의 특성이 신화적인 것일 수도 과학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특성에 우리는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팽창, 전파, 전유, 전염, 서식의 양태에 흥미를 갖고 있다. 모든 동물은 무리의 양태를 갖고 있다. 이 양태들의 내부에 구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무리에 대한, 다양체에 대한 매혹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반자연적 관여이다. 작가가 마법사라면 글쓰기가 하나의 되기이기 때문이다. 쥐되기, 곤충되기, 즉대되기 등 이상한 되기에 의해 횡단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마법사인 까닭은 동물을 자신이 권리상 그 앞에서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개체군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 종류의 동물을 구별해야만 한다. 첫째는 오이디푸스적 동물이다. 고양이나 개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머저리들일 것이다. 두 번째로는 특성 또는 속성을 가진 동물, 유, 분류, 국가에 속하는 동물이 있다. 마지막으로 악마적이고, 무리들과 변용태들을 지닌 동물들이 있는데, 이들은 다양체, 생성, 개체군, 꽁트등을 만든다. 떼, 떼거리, 패거리, 개체군등은 열등한 사회적 형태가 아니다 그것들은 변용태요, 역량이요, 역행이며, 인간이 동물과 더불어 행하는 생성 못지 않게 강력한 생성 안에서 모든 동물을 포착한다. 전염병이나 전염에 의한 전파는 유전에 의한 계통관계와는 아무언 관계도 없다, 흡혈귀는 계통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동물은 무리이며, 무리는 전염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하며 변형한다고 말이다. 이질적인 항들을 갖고 있으며 전염에 의해 공동기능하는 이 다양체들은 일정한 배치물들 속으로 들어간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동물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리는 가족, 국가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가족이나 국가를 아래쪽으로 작동시키고 바깥쪽에서 교란시킨다. 무리는 동물의 실재인 동시에 인간의 동물되기의 실재이다. 전염은 동물의 서식인 동시에 인간의 동물적 서식의 전파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종류를 구분하기 보다는 동물이 가족제도, 국가장치, 전쟁기계 등에 통합될 수 있는 상이란 상태들을 구분해야만 한다.
어느 마법사의 회상 2
다양체가 있기 위해서는 예외도 있기 마련이다. 동물되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롸 결연을 맺어야만 한다. 한 마리 늑대란 있을 수 없으며, 패거리의 우두머리, 무리의 장, 아니면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쫓겨난 옛 우두머리가 존재하며, 은자 또는 악마가 존재한다. 요컨대 모든 동물은 자신의 특이자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리와 은자 사이에, 군중의 전염과 선택적 결연 사이에, 순수한 다양체와 예외적 개체 사이에 우연적 집합과 예정된 선택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그리고 모순은 실재적이다. 특이자는 개체도 종도 아니며, 그저 변용태들만을 운반할 뿐이며, 친숙하거나 주체화된 감정들도 특수하거나 기표작용적인 특성들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특이자란 무엇인가? 각각의 다양체마다 가장자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자리는 결코 중심이 아니라 포위선 또는 극단의 차원으로, 특정한 순간에 무리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선들이나 차원들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리의 요소들은 단지 상상적인 모조품일 뿐이며, 무리의 특성들은 단
지 상징적 존재물들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오직 가장자리, 즉 특이자뿐이다. 어떤 경우에건 가장자리나 특이자 현상이 없는 패거리는 없다. 마법사들은 들판이나 숲의 경계에서 늘 특이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들은 변방에서 줄촐한다. 그들은 마을 가장자리 또는 두 마을 사이에 있다. 중요한 것은 마법사가 결연이나 계약과 친근성을 가지며, 그래서 이들은 계통관계와는 대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특이자와 맺는 관계는 결연관계이다. 가족속에 늑대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악마와의 결연이 필요하다. 결연이나 계약이 표현의 형식이라면 내용의 형식은 감염증이나 전염병이다. 동물되기는 마법의 문제라는 이유는 1)동물되기는 악마와의 결연이라는 첫 번째 관계를 내포한다. 2)악마는 동물무리의 가장자리로 기능하는데, 인간은 전염을 통해 이 안으로 이행하거나 생성한다. 3)이 되기 자체는 다른 인간집단과의 결연이라는 두 번재 결연을 내포한다. 4)이 두 집단간의 이 새로운 가장자리는 무리 안에서 동물과 인간의 전염을 인도한다. 마법의 정치가 존재하는 것처럼 동물되기의 정치도 존재한다. 우리는 다음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1)전쟁기계에서 동물되기 2)번죄단체에서 동물되기 3)폭도집단에서 동물되기 4)금욕주의자 집잔에서의 동물되기 5)성스러운 능욕자형태로 성적 통과제의 결사에서의 동물되기, 물론 동물되기의 정치는 극히 모호하다. 원시사회조차도 동물되기를 끊임없이 전유해서 결국 동물되기를 파괴하고 토템적이거나 상징적인 대응관계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전사는 군인으로 전유되고, 교회는 마법사를 화형에 처하고, 은둔자를 성인이라는 온건한 이미지 속으로 통합시킨다.
어느 마법사의 회상 3
우리는 여성되기, 아이되기와도 만날 수 있다. 마약실험은 시공간의 좌표를 변경시키고, 분자되기가 동물되기를 교대하는 미시지각의 우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한다. 무리들, 다양체들은 끊임없이 변형되어 상대방속으로 들어가며, 서로 상대방 속으로 이행한다. 다양체는 그것의 요소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통일이나 이해의 중심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는다. 다양체는 그것의 차원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다양체는 본성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나누어지지도 차원을 잃거나 얻지도 않는다. 다양체의 차원들의 변화는 다양체에 대재하기 때문에, 결국 각각의 다양체는 이미 공생하고 있는 다질적인 항들로 조성되어 있으며, 또는 각각의 다양체는 그것의 문턱들과 문들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다른 다양체들로 끊임없이 변형된다. 각각의 다양체는 특이자로 기능하는 가장자리에 의해 규정된다. 일렬로 늘어선 가장자리들이, 다양체를 변하게 하는 연속된 선이 존재한다. 모든 섬유는 우주의 섬유이다. 일렬로 늘어선 가장자리의 섬유는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을 구성한다. 특이자 혹은 아웃사이더는 다양체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잠정적인 최대의 차원으로 다양체의 일시적 또는 국지적인 안정을 결정한다. 각각의 다양체는 공샌적이며, 동물되기, 식물되기, 미생물되기, 미친입자되기들을 온통 하나의 은하수로 통합한다. 생성들 또는 다양체들에는 미리 정해진 논리적 질서는 없지만 기준들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판판한 그렇지만 증감하는 차원들을 가진 다양체들을 자기 자신에게 기입하는 한에서 이 판은 차원들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고른판은 다양체의 차원수를 둘로 축소시키기는커녕 판판한 다양체들을 공존시키기 위해 그것들 모두를 재단하고 교차시킨다. 고른판은 모든 구체적 형태들의 교차이다. drhfmsvks에서는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며,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지각불가능한 것이 보이고 들린다. 고른판은 평면태, 또는 리좀권, 기준이다. n차원에서는 이것은 초권
역, 기계권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추상적인 형상 또는 차라리 형태를 갖고 있디 않기 때뭉에 추상기계이다. 추상기계의 각각의 구체적 배치물은 하나의 다양체이며, 하나의 생성, 하나의 절편, 하나의 진동이다. 또한 추상기계는 전체의 절단면이다.
어느 신학자의 회상
악마와 마녀의 계약이 실재하지 않을리 없다. 고유하게 악마적인 국지적 운동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분이다. 다른 한편 악마가 실재하는 동물들의 몸체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이른 우발적 사고들과 변용태들을 다른 몸체들에게로 옮기기도 한다. 인간이 실제로 동물이 되지는 않지만 인간의 동물되기라는 악마적 현실은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 될 수 있다. 악마는 운송자이며, 체질이나 변용태, 어 나아가 몸체마저도 운송한다. 본질적 형상이나 한정된 주체와는 전혀 다른 우발적 형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우발적 형상은 더와 덜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우발적 형상은 합성될 수 있는 개체화로 구성된 위도를 갖는다. 하나의 강도는 다른 강도들과 합성되어 또 다른 개체를 형헝하는 하나의 개체 즉 이것임이다. 주체들에 강도를 더해야지만 기형적으로 왜곡된 위도들, 빠름들과 느림들 그리고 경도로서 취해진 하나의 몸체나 몸체들의 집합에 대응하는 온갖 종류의 정도들을 수립할 수 있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1
스피노자에 따르면 궁극적 부분들은 수에 규정되지 않고 무한성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 그것들은 속도의 정도와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특정한 개체에 귀속되는데, 이 개체 자신은 더 복잡한 또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이 무한대로 계속된다. 각 개체는 무한한 다양체이며 전체 자연은 다양체들의 완전히 개체화된 다양테이다. 자연이라는 고른판은 하나의 거대한 추상기계와도 같은데 추상적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실재적이고 개체적이다. 고정판, 여기서 사물들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유비와 대립되는 내재성 또는 일의성의 판, 일자는 모든 다자와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되며 존재는 모든 차이나는 것과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된다. 절대적 부동성 또는 절대적 운동의 판이라고 불리는 동일한 고정판이 상대적인 속도를 가진 무형의 요소들에 의해 횡단되고 다시 이 요소들이 빠름과 느림의 정도에 따라 특정한 개체화된 배치물로 들어가는 그런 세계를 생각해야만 한다. 익명의 물질, 즉 다양한 연결접속을 행하는 미세한 물질의 무한한 미세 조각들이 서식하는 고른판 말이다. 아이들은 스피노자주의자이다. 꼬마 한스가 고추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기관 또는 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의 재료, 즉 연결접속들,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재료를 이루는 개체화된 잡다한 배치물에 따라 변화하는 요소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기관은 천가지 변천을 겪으며, 위치를 정하기도 어렵고, 식별하기도 어려우며, 때에 따라 뼈, 엔진, 배설물, 애기, 손, 아빠의 심장 등이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기관이 부분 대상으로 체험되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애니미즘이 아니며, 메커니즘도 아니고, 오히려 보편적인 기계주의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철학자의 아이되기이다. 몸체의 경도라고 불리는 것은 특정한 관계속에서 몸체에 속하는 입자들의 집합이며, 이 집합들 자체는 이 몸체의 개체화된 배치물을 규정하는 관계의 조성에 따라 상대의 일부분을 이룬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2
스피노자에게 또다른 측면이 있다 무한히 많은 부분을 한데 모으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 각각은 역량의 정도에 대응한다. 하나의 개체를 조성하고 분해하고 변양시키는 관계에는 개체를 변용시키는 강렬함들이 대응한다. 이러한 강렬함들은 개체 겉 부분에서 그리고 개체 자체의 부분에서 올 수 있다. 변용태는 생성이다. 경도가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외연적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위도는 특정한 능력 아래에서 내포적(=강렬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몸체들의 변용태, 행태학이 바로 에티카이다. 에티카의 관점에서 보면 기관의 특성들은 경도와 그 관계들로부터 또 위도와 그 정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기관을 전제하지 않는다. 반자연적 관여, 그러나 바로 구성의 판, 자연의 판은 온갖 책략을 이용해 자신의 배치물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해체하는 이러한 과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비도 상상도 아니며, 이 고른판 위에서의 속도들과 변용태들의 조성이다. 그것은 하나의 판, 프로그램 또는 차라리 하나의 다이어그램, 문제, 기계-물음이다. 문제의 각 단계마다 기관들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을 이 기관의 특수성에서 끌어내어 다른 기관과 함께 생성되게 하는 관계 속으로 요소들이나 재료들을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판의 실재가 판 자체의 일부인 그런 방식도 존재한다. 판은 무한하다 당신은 천가지 방식으로 그것을 시작할 수 있다. 동물되기의 실재성 동물되기가 변용태 그자체이자 몸소 나타난 충동이며, 따라 서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배치물들 그 자체가 아닌 충동들은 없다. 정신분석은 반자연적 관여들에 대한 감들도 없고 모든 출구가 막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가 올라갈 수 있는 배치물들에 대한 감도 없다. 동물되기를 파괴하려면 그것에서 하나의 절편만을 빼내고, 하나의 계기를 추상하고, 내적인 빠름과 느림을 도외시하고, 변용태들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항들간의 상상적 유사성이나 관계들간의 상징적 유비들만이 남게 된다.
어느 이것임의 회상
하나의 몸체는 이 몸체를 한정하는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ㅇ된 실체와 주체로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며, 또 이 몸체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이나 몸체가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른판위에서 몸체는 오직 경도와 위도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경로란 특정한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서 몸체에 속하는 물질적 요소들의 집합이다. 위도란 특정한 권력 또는 역량의 정도 아레에서 몸체가 행사할 수 있는 강렬한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몸체에서 이런 두 차원을 뽑아내고 자연의 판을 순수한 위도와 경도로 규정한 것은 바로 스피노자였다. 경도와 위도는 지도 제작의 두 요소인 것이다. 인칭, 주체, 사물 또는 실체의 양태와는 전혀 상이한 개체화의 양태가 있다. 우리는 그것에 이것임이라는 이름을 마련해 놓았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분자들이나 입자들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콩트들은 단순한 장소 설정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타당하며 사물들과 주체들의 변신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개체화인 이것임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에는 사물과 사람 유형을 한 형상화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것임 유형을 한 시공간적 좌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매우 단순한 타협은 피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들은 경도와 위도이며,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간의 빠름과 느림의 집합이며,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배치물들의 이것임들과 각각의 배치물안에서 생성의 잠재력들을 표시해주는 상호-배치물들의 이것임들을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관계들, 시공간적 규정들은 사물의 술어가 아니라 다양테들의 차원들이다. 고른판은 서로 교차하는 선들에 따라 조성되는 이것임들만을 담고 있다. 형식과 주체는 이 세계와는 무관하다. 이것임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은 점들이 아니라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리좀인 것이다. 그것은 동이한 언어의 용법이 아닌데 고른판이 이것임들만을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의 판과 표현의 한 이 기호계는 특히 고유명사, 부정법동사 그리고 부정관사나 부정대명사에 의해 조성된다. 실제로 형식적 의미생성과 인칭적 주체화에서 해방된 기호계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관사+고유명사+부정법 동사는 기본적인 표현의 사슬을 구성하며 가장 덜 형식화된 내용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유동적 시간에서 생성의 양태이자 생성의 시간으로서의 부정법을 다른 모든 양태들 및 시간들과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고유명사는 주체의 표시가 아니다. 고유명사는 우선사건, 생성 또는 이것임의 질서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지칭한다. 그것은 태풍에 고유명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로 부정관사와 부정대명사 또한 부정법 동사와 마찬가지로 결코 비결정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의는 소유격과 인칭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삼인칭 부정어 그, 그것, 그들, 그것들은 아무런 미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언표를 언표행위의 주체에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으로서의 집단적 배치물에 연관시킨다고 믿는다. 이 그, 그것은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배치를 도표화한다. 부정관사, 고유명사, 부정법 동사 이것들은 고른판 위에 있는 벼룩시장 광고문들, 전보물 형태의 기계들이다.
어느 관객의 회상
윌라드라는 B급 영화에서는 윌라드가 쥐의 도움을 받고 배신을 받는 내용의 영화다. 윌라드는 쥐되기가 된다. 분자되기는 쥐들의 번식과 더불어 무리 속에 존재하며 가족, 직업, 혼인등과 같은 그램분자적 역량을 잠식해 들어간다. 진화론은 계통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박물학적 계보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박물학은 A와 B사이처럼 관계의 견지에서만 사고될 수 있다. 박물학은 관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계열 아니면 구조로 파악한다. a는 b와 닮았고, b는 c와 닮았고,,,,이 모든 항들 자체는 그 계열인 근거인 완전성이나 질이라는 단 하나의 탁월한 항과 다양한 정도로 관계맺고 있다. 이것은 비율관계에 기반한 유비이다. 유비의 첫 번째 형식은 더 감각적이고 대중적이라고 간주되며,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유비의 두 번째 형식은 왕도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이 등가관계를 정하려는 지성의 모든 원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유비의 두형태는 다양한 평행상태를 유지하면서 공종했는데, <자연>은 거대한 미메시스와 같은 모방의 사슬로 사고되기도 했다. 동물들간의 상호관계는 과학의 대상일 뿐 아니라 꿈의 대상, 상징의 대상, 예술이나 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융에 따르면 동물은 진보나 퇴행이냐는 우월항의 계열로 사고되고 있다. 상상력을 가지고 계열을 가로지르며, 그것을 마지막 항으로까지 데려가는 모방, 이 마지막 항과 동일화하는 것 등이 갖는 명성을 구조주의는 규탄한다. 토테미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텍스트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외적 유사성을 넘어서 내적 상동성으로 향하기 상상적인 것의 계열적 조직화가 아니라 지성의 상징적, 구조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다. 나는 황소다 나는 늑대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와 여성의 관계는 수소와 암소의 관계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계열적 사고를 희생의 영역으로 환상과 몰상식이라고 단정하면서 구조를 옹호한다. 희생이라는 계열적 주제는 본래적 의미의 토템제도라는 구조적 주제에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회상
우리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도 변용시키는 특수한 동물되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구조주의는 생성을 해명하고 있지 않다. 생성을 부정하거나 생겅이 존재한다는 것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생성과 마주칠 때면 구조주의는 통시성의 모험을 내세우며 참된 질서를 외면한다. 되기(=생성)은 결코 관계 상호간의 대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사성도, 모방도, 더욱이 동일화도 아니다. 생성한다는 것은 계열을 따라 진보하거나 퇴행하는 것도 아니다. 실재적으로 생성 그 자체는 생성의 블록이지 생성하는 자가 이행하는 고정된 몇 개의 항이 아니다. 인간의 동물되기는 인간이 변해서 되는 동물이 실재하지 않다 하더라고 실재적이다. 되기는 항상 계통과는 다른 질서에 속해 있다. 되기는 결연과 관계된다. 소통하고 전염되기 위해 유전적 계통적 진화이기를 그치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나타나는 진화형태를 역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역행은 퇴행이 아니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성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일이다.
어느 마법사의 회상 1
동물의 특성이 신화적인 것일 수도 과학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특성에 우리는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팽창, 전파, 전유, 전염, 서식의 양태에 흥미를 갖고 있다. 모든 동물은 무리의 양태를 갖고 있다. 이 양태들의 내부에 구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무리에 대한, 다양체에 대한 매혹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반자연적 관여이다. 작가가 마법사라면 글쓰기가 하나의 되기이기 때문이다. 쥐되기, 곤충되기, 즉대되기 등 이상한 되기에 의해 횡단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마법사인 까닭은 동물을 자신이 권리상 그 앞에서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개체군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 종류의 동물을 구별해야만 한다. 첫째는 오이디푸스적 동물이다. 고양이나 개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머저리들일 것이다. 두 번째로는 특성 또는 속성을 가진 동물, 유, 분류, 국가에 속하는 동물이 있다. 마지막으로 악마적이고, 무리들과 변용태들을 지닌 동물들이 있는데, 이들은 다양체, 생성, 개체군, 꽁트등을 만든다. 떼, 떼거리, 패거리, 개체군등은 열등한 사회적 형태가 아니다 그것들은 변용태요, 역량이요, 역행이며, 인간이 동물과 더불어 행하는 생성 못지 않게 강력한 생성 안에서 모든 동물을 포착한다. 전염병이나 전염에 의한 전파는 유전에 의한 계통관계와는 아무언 관계도 없다, 흡혈귀는 계통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전염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동물은 무리이며, 무리는 전염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하며 변형한다고 말이다. 이질적인 항들을 갖고 있으며 전염에 의해 공동기능하는 이 다양체들은 일정한 배치물들 속으로 들어간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동물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리는 가족, 국가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으로 끊임없이 가족이나 국가를 아래쪽으로 작동시키고 바깥쪽에서 교란시킨다. 무리는 동물의 실재인 동시에 인간의 동물되기의 실재이다. 전염은 동물의 서식인 동시에 인간의 동물적 서식의 전파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종류를 구분하기 보다는 동물이 가족제도, 국가장치, 전쟁기계 등에 통합될 수 있는 상이란 상태들을 구분해야만 한다.
어느 마법사의 회상 2
다양체가 있기 위해서는 예외도 있기 마련이다. 동물되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롸 결연을 맺어야만 한다. 한 마리 늑대란 있을 수 없으며, 패거리의 우두머리, 무리의 장, 아니면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 쫓겨난 옛 우두머리가 존재하며, 은자 또는 악마가 존재한다. 요컨대 모든 동물은 자신의 특이자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리와 은자 사이에, 군중의 전염과 선택적 결연 사이에, 순수한 다양체와 예외적 개체 사이에 우연적 집합과 예정된 선택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그리고 모순은 실재적이다. 특이자는 개체도 종도 아니며, 그저 변용태들만을 운반할 뿐이며, 친숙하거나 주체화된 감정들도 특수하거나 기표작용적인 특성들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특이자란 무엇인가? 각각의 다양체마다 가장자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가장자리는 결코 중심이 아니라 포위선 또는 극단의 차원으로, 특정한 순간에 무리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선들이나 차원들을 고려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리의 요소들은 단지 상상적인 모조품일 뿐이며, 무리의 특성들은 단
지 상징적 존재물들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오직 가장자리, 즉 특이자뿐이다. 어떤 경우에건 가장자리나 특이자 현상이 없는 패거리는 없다. 마법사들은 들판이나 숲의 경계에서 늘 특이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들은 변방에서 줄촐한다. 그들은 마을 가장자리 또는 두 마을 사이에 있다. 중요한 것은 마법사가 결연이나 계약과 친근성을 가지며, 그래서 이들은 계통관계와는 대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특이자와 맺는 관계는 결연관계이다. 가족속에 늑대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악마와의 결연이 필요하다. 결연이나 계약이 표현의 형식이라면 내용의 형식은 감염증이나 전염병이다. 동물되기는 마법의 문제라는 이유는 1)동물되기는 악마와의 결연이라는 첫 번째 관계를 내포한다. 2)악마는 동물무리의 가장자리로 기능하는데, 인간은 전염을 통해 이 안으로 이행하거나 생성한다. 3)이 되기 자체는 다른 인간집단과의 결연이라는 두 번재 결연을 내포한다. 4)이 두 집단간의 이 새로운 가장자리는 무리 안에서 동물과 인간의 전염을 인도한다. 마법의 정치가 존재하는 것처럼 동물되기의 정치도 존재한다. 우리는 다음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1)전쟁기계에서 동물되기 2)번죄단체에서 동물되기 3)폭도집단에서 동물되기 4)금욕주의자 집잔에서의 동물되기 5)성스러운 능욕자형태로 성적 통과제의 결사에서의 동물되기, 물론 동물되기의 정치는 극히 모호하다. 원시사회조차도 동물되기를 끊임없이 전유해서 결국 동물되기를 파괴하고 토템적이거나 상징적인 대응관계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전사는 군인으로 전유되고, 교회는 마법사를 화형에 처하고, 은둔자를 성인이라는 온건한 이미지 속으로 통합시킨다.
어느 마법사의 회상 3
우리는 여성되기, 아이되기와도 만날 수 있다. 마약실험은 시공간의 좌표를 변경시키고, 분자되기가 동물되기를 교대하는 미시지각의 우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한다. 무리들, 다양체들은 끊임없이 변형되어 상대방속으로 들어가며, 서로 상대방 속으로 이행한다. 다양체는 그것의 요소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통일이나 이해의 중심에 의해 규정되지도 않는다. 다양체는 그것의 차원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다양체는 본성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나누어지지도 차원을 잃거나 얻지도 않는다. 다양체의 차원들의 변화는 다양체에 대재하기 때문에, 결국 각각의 다양체는 이미 공생하고 있는 다질적인 항들로 조성되어 있으며, 또는 각각의 다양체는 그것의 문턱들과 문들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다른 다양체들로 끊임없이 변형된다. 각각의 다양체는 특이자로 기능하는 가장자리에 의해 규정된다. 일렬로 늘어선 가장자리들이, 다양체를 변하게 하는 연속된 선이 존재한다. 모든 섬유는 우주의 섬유이다. 일렬로 늘어선 가장자리의 섬유는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을 구성한다. 특이자 혹은 아웃사이더는 다양체의 가장자리를 두르고, 잠정적인 최대의 차원으로 다양체의 일시적 또는 국지적인 안정을 결정한다. 각각의 다양체는 공샌적이며, 동물되기, 식물되기, 미생물되기, 미친입자되기들을 온통 하나의 은하수로 통합한다. 생성들 또는 다양체들에는 미리 정해진 논리적 질서는 없지만 기준들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판판한 그렇지만 증감하는 차원들을 가진 다양체들을 자기 자신에게 기입하는 한에서 이 판은 차원들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고른판은 다양체의 차원수를 둘로 축소시키기는커녕 판판한 다양체들을 공존시키기 위해 그것들 모두를 재단하고 교차시킨다. 고른판은 모든 구체적 형태들의 교차이다. drhfmsvks에서는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며, 모든 것은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지각불가능한 것이 보이고 들린다. 고른판은 평면태, 또는 리좀권, 기준이다. n차원에서는 이것은 초권
역, 기계권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추상적인 형상 또는 차라리 형태를 갖고 있디 않기 때뭉에 추상기계이다. 추상기계의 각각의 구체적 배치물은 하나의 다양체이며, 하나의 생성, 하나의 절편, 하나의 진동이다. 또한 추상기계는 전체의 절단면이다.
어느 신학자의 회상
악마와 마녀의 계약이 실재하지 않을리 없다. 고유하게 악마적인 국지적 운동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분이다. 다른 한편 악마가 실재하는 동물들의 몸체를 받아들여 이들에게 이른 우발적 사고들과 변용태들을 다른 몸체들에게로 옮기기도 한다. 인간이 실제로 동물이 되지는 않지만 인간의 동물되기라는 악마적 현실은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 될 수 있다. 악마는 운송자이며, 체질이나 변용태, 어 나아가 몸체마저도 운송한다. 본질적 형상이나 한정된 주체와는 전혀 다른 우발적 형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우발적 형상은 더와 덜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우발적 형상은 합성될 수 있는 개체화로 구성된 위도를 갖는다. 하나의 강도는 다른 강도들과 합성되어 또 다른 개체를 형헝하는 하나의 개체 즉 이것임이다. 주체들에 강도를 더해야지만 기형적으로 왜곡된 위도들, 빠름들과 느림들 그리고 경도로서 취해진 하나의 몸체나 몸체들의 집합에 대응하는 온갖 종류의 정도들을 수립할 수 있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1
스피노자에 따르면 궁극적 부분들은 수에 규정되지 않고 무한성에 의해 나아가게 된다. 그것들은 속도의 정도와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따라 특정한 개체에 귀속되는데, 이 개체 자신은 더 복잡한 또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이 무한대로 계속된다. 각 개체는 무한한 다양체이며 전체 자연은 다양체들의 완전히 개체화된 다양테이다. 자연이라는 고른판은 하나의 거대한 추상기계와도 같은데 추상적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실재적이고 개체적이다. 고정판, 여기서 사물들은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 유비와 대립되는 내재성 또는 일의성의 판, 일자는 모든 다자와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되며 존재는 모든 차이나는 것과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로 이야기된다. 절대적 부동성 또는 절대적 운동의 판이라고 불리는 동일한 고정판이 상대적인 속도를 가진 무형의 요소들에 의해 횡단되고 다시 이 요소들이 빠름과 느림의 정도에 따라 특정한 개체화된 배치물로 들어가는 그런 세계를 생각해야만 한다. 익명의 물질, 즉 다양한 연결접속을 행하는 미세한 물질의 무한한 미세 조각들이 서식하는 고른판 말이다. 아이들은 스피노자주의자이다. 꼬마 한스가 고추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기관 또는 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의 재료, 즉 연결접속들,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재료를 이루는 개체화된 잡다한 배치물에 따라 변화하는 요소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기관은 천가지 변천을 겪으며, 위치를 정하기도 어렵고, 식별하기도 어려우며, 때에 따라 뼈, 엔진, 배설물, 애기, 손, 아빠의 심장 등이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기관이 부분 대상으로 체험되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애니미즘이 아니며, 메커니즘도 아니고, 오히려 보편적인 기계주의이다. 스피노자주의는 철학자의 아이되기이다. 몸체의 경도라고 불리는 것은 특정한 관계속에서 몸체에 속하는 입자들의 집합이며, 이 집합들 자체는 이 몸체의 개체화된 배치물을 규정하는 관계의 조성에 따라 상대의 일부분을 이룬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2
스피노자에게 또다른 측면이 있다 무한히 많은 부분을 한데 모으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 각각은 역량의 정도에 대응한다. 하나의 개체를 조성하고 분해하고 변양시키는 관계에는 개체를 변용시키는 강렬함들이 대응한다. 이러한 강렬함들은 개체 겉 부분에서 그리고 개체 자체의 부분에서 올 수 있다. 변용태는 생성이다. 경도가 특정한 관계 아래에서 외연적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위도는 특정한 능력 아래에서 내포적(=강렬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몸체들의 변용태, 행태학이 바로 에티카이다. 에티카의 관점에서 보면 기관의 특성들은 경도와 그 관계들로부터 또 위도와 그 정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기관을 전제하지 않는다. 반자연적 관여, 그러나 바로 구성의 판, 자연의 판은 온갖 책략을 이용해 자신의 배치물들을 끊임없이 만들고 해체하는 이러한 과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비도 상상도 아니며, 이 고른판 위에서의 속도들과 변용태들의 조성이다. 그것은 하나의 판, 프로그램 또는 차라리 하나의 다이어그램, 문제, 기계-물음이다. 문제의 각 단계마다 기관들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을 이 기관의 특수성에서 끌어내어 다른 기관과 함께 생성되게 하는 관계 속으로 요소들이나 재료들을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판의 실재가 판 자체의 일부인 그런 방식도 존재한다. 판은 무한하다 당신은 천가지 방식으로 그것을 시작할 수 있다. 동물되기의 실재성 동물되기가 변용태 그자체이자 몸소 나타난 충동이며, 따라 서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배치물들 그 자체가 아닌 충동들은 없다. 정신분석은 반자연적 관여들에 대한 감들도 없고 모든 출구가 막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가 올라갈 수 있는 배치물들에 대한 감도 없다. 동물되기를 파괴하려면 그것에서 하나의 절편만을 빼내고, 하나의 계기를 추상하고, 내적인 빠름과 느림을 도외시하고, 변용태들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항들간의 상상적 유사성이나 관계들간의 상징적 유비들만이 남게 된다.
어느 이것임의 회상
하나의 몸체는 이 몸체를 한정하는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ㅇ된 실체와 주체로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며, 또 이 몸체가 소유하고 있는 기관이나 몸체가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고른판위에서 몸체는 오직 경도와 위도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경로란 특정한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에서 몸체에 속하는 물질적 요소들의 집합이다. 위도란 특정한 권력 또는 역량의 정도 아레에서 몸체가 행사할 수 있는 강렬한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몸체에서 이런 두 차원을 뽑아내고 자연의 판을 순수한 위도와 경도로 규정한 것은 바로 스피노자였다. 경도와 위도는 지도 제작의 두 요소인 것이다. 인칭, 주체, 사물 또는 실체의 양태와는 전혀 상이한 개체화의 양태가 있다. 우리는 그것에 이것임이라는 이름을 마련해 놓았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분자들이나 입자들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콩트들은 단순한 장소 설정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타당하며 사물들과 주체들의 변신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개체화인 이것임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한편에는 사물과 사람 유형을 한 형상화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것임 유형을 한 시공간적 좌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매우 단순한 타협은 피해야만 할 것이다. 당신들은 경도와 위도이며,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간의 빠름과 느림의 집합이며,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배치물들의 이것임들과 각각의 배치물안에서 생성의 잠재력들을 표시해주는 상호-배치물들의 이것임들을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관계들, 시공간적 규정들은 사물의 술어가 아니라 다양테들의 차원들이다. 고른판은 서로 교차하는 선들에 따라 조성되는 이것임들만을 담고 있다. 형식과 주체는 이 세계와는 무관하다. 이것임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은 점들이 아니라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리좀인 것이다. 그것은 동이한 언어의 용법이 아닌데 고른판이 이것임들만을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의 판과 표현의 한 이 기호계는 특히 고유명사, 부정법동사 그리고 부정관사나 부정대명사에 의해 조성된다. 실제로 형식적 의미생성과 인칭적 주체화에서 해방된 기호계의 관점에서 보면 부정관사+고유명사+부정법 동사는 기본적인 표현의 사슬을 구성하며 가장 덜 형식화된 내용들과 상관관계를 맺는다. 유동적 시간에서 생성의 양태이자 생성의 시간으로서의 부정법을 다른 모든 양태들 및 시간들과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고유명사는 주체의 표시가 아니다. 고유명사는 우선사건, 생성 또는 이것임의 질서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지칭한다. 그것은 태풍에 고유명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세 번째로 부정관사와 부정대명사 또한 부정법 동사와 마찬가지로 결코 비결정된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의는 소유격과 인칭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삼인칭 부정어 그, 그것, 그들, 그것들은 아무런 미결정도 함축하지 않으며, 언표를 언표행위의 주체에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건으로서의 집단적 배치물에 연관시킨다고 믿는다. 이 그, 그것은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배치를 도표화한다. 부정관사, 고유명사, 부정법 동사 이것들은 고른판 위에 있는 벼룩시장 광고문들, 전보물 형태의 기계들이다.
1837년 리토르넬로에 대해
어둠속에 한 아이가 낮은 목소리로 두려움을 달래려 노래를 한다. 이 노래는 이미 하나의 도약이다. 노래는 카오스 속에서 날아올라 다시 카오스 한가운데서 질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의 소리 벽이다. 벽의 일부는 소리적인 것이다. 주부의 흥얼거리는 소리, 라디오를 켜놓은 소리가 그것이다. 카오스는 거대한 검은 구멍으로 변하기도 하고, 불안정한 점을 찍기도 한다. 다른 때는 하나의 점 주변에 고요하고 안정된 외관을 만들지만 말이다. 리토르넬로는 영토적이며 영토적인 배치물이다. 사람들은 때론 카오스로부터 영토적 배치물로 나가기도 하고, 영토적 배치물을 벗어나 다른 배치물로 나아가기도 한다. 또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상호배치물이, 그리고 이행 또는 도주와 관련된 성분이 중요하다.
카오스로부터 환경과 리듬이 태어난다. 성분의 주기적 반복에 의해 구성된 시간-공간 블록이 환경이다. 환경은 카오스에 결려 있으며, 카오스는 환경을 소진시키거나 침입하여고 위협한다. 그러나 환경은 카오스에 맞서 반격을 한다.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여기서 카오스-리듬, 카오스모스가 나온다. 리듬은 박자나 템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불규칙하더라도 박자와 템포와는 다르다. 박자란 규칙적이고 불규칙한 것을 떠나 코드화된 형식을 전제하며 이 형식의 측정단위 또한 가령 변화하더라도 결국은 소통되지 않는 환경에 안주하는데 반래 리듬은 코드변환 상태에 놓인 불평등한 것 혹은 공동의 척도를 갖지 않는 것이다. 정말 활동적인 순간들의 결합(리듬)은 언제나 행위가 일어나는 것과 다른 판위에서 실현된다. 행위는 특정한 환경에서 일어나지만 리듬은 두 가지 환경 사이에서 혹은 두가지 사이 -환경 사이에서 비롯된다. 리듬은 물과 물 사이 혹은 시간과 시간 사이, 개와 늑대 사이, 황혼녁이나 새벽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리듬을 갖는 것은 차이이다. 반복은 차이를 낳지만 리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가지 중요한 코드변환이 있다. 여기서 잉여가치의 덧코그화가 작동한다. 또 영토화도 시작된다. 영토란 하나의 행위로서 이행위가 모든 환경과 리듬을 촉발해 영토화를 행하는 것이다. 영토화란 환경과 리듬들을 영토화했을 때 생겨난다. 환경의 성분이 방향의 기능이 아니라 표현의 차원이 되었을 때 영토가 생성된다. 색이 있는 개체는 영토를 확보하고 있지만 색이 없는 개체는 무리를 짓는다. 영토화란 표현성을 가진 리듬의 행위 또는 질을 획득해나가는 환경성분들의 행위이다. 한 영토의 지표화는 차원과 관계가 있으나 박자가 아니라 리듬으로서 그렇게 한다. 영토를 가진 동물이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개체를 향해 공격성을 보이는 동물을 말하게 될 것이다.
소유란 예술적인 것이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포스터 록은 플래카드이다. 서명이다 고유명은 완전히 형성된 주체의 부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역이나 영토를 형성해 나가는 주체의 부호이다. 영토를 나타내는 지표는 기성품이다. 리토르넬로가 표현적으로 되는 것은 리듬과 선율이 영토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 리듬과 선율이 표현적으로 되는 것은 영토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표현성을 일정한 환경 속에서 일정한 행동을 일으키는 일시적 충동의 직접적인 효과로 환원해서는 안된다. 산호초어의 색깔은 자기-객체적이다. 객체적 운동이란 표현적인 질이나 표현의 질료는 상호유
동적인 관계를 맺는데, 그러한 관계는 표현적 질이 제공하는 영토와 관련해 충동이 만들어내는 내부환견과의 관계를 또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외부환경과의 관계를 표현해 나간다. 표현은 자율적이며 모든 표현적 질은 상호내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환경이 영토적 모티프를 구성한다. 이 관계는 영토적 대위법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점 또는 대위법은 아직 외부환경의 상황과 영토와의 관계를 표현하면서도 고정적인 것이건 가변적인 것이건 외부 환경의 상황으로부터 자율적이다. 충동과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관계 자체는 관계되어진 것들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다 표현의 질료들의 관계는 영토와 내적 충동 그리고 영토와 외적 상황과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표현 자체에서도 자율성을 갖는 것이다. 영토적 모티프는 리듬적 얼굴 또는 리듬적 인물을 형성하고 영토적 대위법은 선율적 풍경을 형성한다고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표현적 질은 상호가변성 또는 불별션의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해서 영토를 표시하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영토와 내적 충동 또는 외적 상황과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모티프와 대위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모티프와 대위법 속에서 태양, 기쁨, 슬픔, 또는 위험이 소리가 되고 리듬이 되고 선율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모티프에는 박이 없으며 위치가 결정되는 경우도 없다. 상수들조차도 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상수는 가정된 것인 만큼 점점 더 경화되며 연속적 변주에 저항하면서도 결국은 변화를 돌출시키고 만다. 영토란 두 개체간의 임계적 거리를 말하며 이 거리를 표시하는 것이다. 내 영토를 나 자신의 몸 위로 옮겨 내 몸을 영토화해 보기로 하자. 거북이 등딱지나 갑각류의 껍질이 바로 그것이다. 임겨적 거리는 박자가 아니라 리듬이다. 능동적 리듬, 복종된 리듬, 목격자의 리듬등 리듬적 인물이 형성된다. 예술은 인간을 기다리지 않으며, 뒤늦게 인공적인 조건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세계에 나타난다. 영토내에서 두가지 효과 즉 기능들의 재조직과 힘들의 재결집을 주목해야 한다. 영토적 리토르넬로는 직업적인 리토르넬로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기능들의 영토화는 기능들이 노동이나 직업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종간에 한정된 공격성 또는 특수화된 공격성은 필연적으로 영토화된 공격성이게 된다. 영토는 다양한 환경에 포함된 모든 힘을 결집시키고 대지의 힘들을 모아 하나의 다발로 만든다. 외연으로서의 영토는 대지의 내적 힘들과 카오스의 외적인 힘들을 떼어 놓는다 해도 내포에서는 깊이에서는 사정이 일변해 두 유형의 힘이 서로 결합해 가며 오직 대지만을 선별기준이나 목표로 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토화의 기표들이 모티프와 대위법으로 발전해가는 것과 기능들을 재조직하고 힘들을 결집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순간으로 되돌아 론다. 리듬이 표현-되기로 나가고, 표현에는 고유한 질이 나타나며, 나아가 표현의 길료가 형성되어 모티프와 대위법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코드와 영토사이의 엇갈림을 확인하는 것이다. 영토는 자유를 보장한 코드의 여백에서 출현하는데, 이것은 한정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른 형태로 한정된다. 영토는 반대로 특정한 탈코드화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토화는 다름 아니라 동일한 종의 코드의 여백 위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요인으로서, 이 종에 속한 각각의 개체들에게 분화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 영토성 자체가 종차들에 대해 엇갈림이 있기 때문이다. 영토를 가진 동물과 영토를 갖지 않은 동물 사이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덜 코드화되어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영토 자체는 이행의 장소잉다. 영토는 최초의 배치물로서 최초로 배치되는 것이다. 배치물도 원래는 영토적인 것이다. 리토르넬로의 이행. 리토르넬로는 영토적 배치물을 향해 나가며, 그곳에 설치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밖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표현의 질료가 모여 영토를 성립시키고 영토적 모티프나 영토적 풍경으로 발전해 나갈 때 이것을 리토르넬로라고 일컫는다.
영토적 배치물은 끊임없이 다른 배치물로 이행한다. 영토성과 탈영토화간의 이러한 양의성은 타고난 것의 양의성과 같은 것이다. 영토는 자신의 제일 깊은 곳에 있는 강도의 중심과 통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양의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토를 구석구석 관통하는 대규모의 탈영토화 운동이 있다. 이 운동에 코스모스가 끼어들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더 이상 대지의 힘들로 결집된 영토화된 힘이 아니라 탈영토화된 코스모스의 되찾은 힘, 해방된 힘이 된다. 영토는 언제나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탈영토화 중이며 설사 다른 배치가 재영토화를 초래한다고 해도 다른 배치물들로 이행중이다. 리토르넬로를 분류하자면 1)영토를 구하고 영토를 표시하고 영토를 배치하는 영토적 리토르넬로 2)배치물 속에서 특별한 기능을 넘겨받는 영토화된 기능을 가진 리토르넬로 3) 같은 리토르넬로가 새로운 배치물을 표시하고 탈영토화-재영토화에 의해 새로운 배치물로 이행하는 경우 4) 영토의 내부에서 혹은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힘들을 모아 결집시키는 리토르넬로가 있다.
고름의 문제는 분명 하나의 영토적 배치의 성분들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질적인 것들끼리 동일한 배치물 혹은 여러 가지 상호배치물 속에서 동시에 성립되는 경우에는 이미 공존 내지 연속 형태로 혹은 이 두가지가 중복된 형태로 반드시 고름 문제가 제기된다. 콘크리트는 혼합되는 요소에 따라 고름의 정도가 변화하는 다질적인 재료일 뿐만 아니라 철근은 특정한 리듬에 따라 넣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철골의 자기-지지식 표면은 복잡한 리듬적 인물을 형성한다. 영토적 배치물은 공존과 계속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하여 환경을 공간과 시간을 다진 상태를 말한다. 영토화의 비표가 영토의 모티프나 영토의 대위법이 되며, 서명과 플래카드가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차원들, 다양한 종들 그리고 다질적인 질들을 연결하는 진정한 기계적 오페라가 성립되지 않는 한 하나의 질에는 모티프나 대위법이 있을 수 없고 또 특정한 차원상의 리듬적 인물과 선율적 풍경도 존재할 수 없다. 타고난 것은 생득 그 자체라 해도 탈코드화된 생득이며, 또 획득 바로 그 자체라 해도 영토화된 획득힌 것이다. 따라서 타고난 것은 생득성의 탈코드화와 학습의 영토화에 의해 성립되며, 이때 한 쪽이 다른 쪽과 겹쳐 양자가 조합되는 것이다. 영토적 배치물은 이 배치물을 탈영토화하는 운동에 휩사일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기계에 시동이 걸린다. 이것은 기계와 배치물간의 차이이다. 기계란 탈영토화과정에 있는 배치물에 삽입되어 배치의 변화와 변이를 그려내는 첨점들의 집합이다. 기계론적 효과는 없기 때문이다. 효과는 언제나 기계적이다. 우리가 기계적 언표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기계의 효과들로 바로 이것들이 표현의 질료에 포함되는 고름을 규정하는 것이다. 같은 기계가 종의 영토적 배치물을 다른 종들간의 상호배치물을 향해 열기도 한다. 또는 기계가 완전히 배치물을 뛰어 넘어 코스모스로의 출구를 여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또는 패쇄 효과를 낳는 경우도 있다. 기계들은 언제나 하나의 배치물이건 영토를 열거나 닫았다가 하는 특이한 열쇠인 것이다. 표현의 질료는 분자적인 것과 매우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 표현의 질료라는 말 자체가 표현은 질료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표현의 질료는 고름을 획득함에 따라 몇 개의 기호계를 형성한다. 그램분자 상태와 분자 상태의 관계는 먼저 원자의 개별적 현상은 통계적인 혹은 확률론적인 집적에 포함될 수 있는데, 그러한 집적은 우선 분자 속에서 그리고 그램분자 상태의 집합속에서 그러한 현상의 개별성을 제거해 버리려 한다. 두 번째로 구분해야 할 것이 개별성과 통계성이 아니라는 점은 너
무나 분명해보인다. 세 번째로 분자내에 한정된 내적인 힘은 집합에 그램분자적인 형태를 부여하면서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위치선정이 가능하고 다른 하나는 위치설정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차이는 한편으로는 지층화된 체계 또는 성층작용 체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고르는, 자신을 고르는 집합 사이에 있다고 말이다. 수평방향에서 요소들간에 선형적 인과관계가 성립할 때 그리고 수직 방향에서는 집단간에 계층화를 위한 위계가 나타날때는 언제나 코드화된 성층작용 체계가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고름집합은 매우 이질적인 성분들이 모여 다져지고, 형상-질료의 규칙적인 연속 대신 계층의 단락 또는 역전된 인과관계를 가진 차원들이 나타나 이질적인 재료와 힘 사이에 포획관계가 성립하는 경우에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생명의 장은 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의 장은 성층작용의 장과 고름의 집합을 동시에 겸하고 있다. 영토적 배치물은 탈코드화를 동반하며, 이러한 배치를 촉발하는 탈영토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배치물의 고름은 환경들의 성층작용에 머물고 마는 것과 대립한다. 모든 배치물은 두 한계 사이 지층체계와 고른판 사이에 있다.
고전주의라는 말은 형상질료관계 또는 형식 실체관계를 가리킨다. 형태는 하나하나가 이른바 하나의 환경의 코드로서,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이행은 진정한 코드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해라! 천지창조다! 창조의 나무를 세워라! 고전주의 예술가는 하나 둘의 이분법을 사용한다. 낭만주의시대는 고전주의와 달리 조물주를 포기하고 영토화하고 영토적 배치물을 포함된다. 대지다. 영토와 대지다! 예술가는 천지창조 대힌 이번에는 토대 정초 행위와 자기를 동일시한다. 영토는 인식 조건으로서 또 인식 근거로서 대지에 대한 엇갈림을 포함하고 있다. 대지 본연의 리토르넬로는 영토적이건 그렇지 않건 모든 리토르넬로를 취한다. 낭만주의의 근본적인 혁신은 형식에 대응하는 실체적 부분이 없고 코드에 대응하는 환경도 없으며, 형식의 범위 내에서 코드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는 카오스 상태의 질료도 없는 것이다. 낭만주의가 결여한 것은 민중이다. 영토에는 고독한 소리가 떠돌고 있다. 영토는 민중을 향해 열린 것이 아니라 친구나 연인을 향해 반쯤 열려 있는 것이다. 대지가 민중에 의해 매개되며 민중 없이 대지는 존재할 수 없다. 군중은 전면적으로 개체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민중은 개체화되어야 한다. 근대는 코스모스적인 시대이다. 배치물은 더 이상 카오스의 힘들에 맞서지 않고, 대지의 힘과 민중의 힘들 속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고 대신 코스모스의 힘들을 향해 열린다. 문제는 시작이 아니며 창립이나 정초도 아니다. 고름 또는 다짐이 문제인 것이다. 즉 이처럼 무음이고 비가시적이며 사유가 불가능한 힘들을 포획하려면 어떻게 재료를 다지고 재료에 어떻게 고름을 부여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리토르넬로조차 분자적인 동시에 우주적인 것이 된다. 고름의 음악기계, 음의 질료를 분자화하고 원자화하고 이온화하고 코스모스의 에너지를 포획하는 음의 기계가 신시사이저이다. 신시사이저는 매개변수를 이동시킨다. 신시사이저는 고름을 조직함으로써 선험적 종합판단에서 근본원리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아리들의 그림이나 광인들의 문장, 소음콘서트는 잡음만을 재생해 내고 검은구멍만을 양상하는 공명상자만 남게 된다. 광인이나 잡음의 재영토화는 퍼지집합을 고르게 하거나 탈영토화된 재료안의 코스모스의 힘을 취하는 대신 그저 이 집합을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근대적인 형상은 아이나 광인 나아가 예술가가 아니라 코스모스적인 장인이다.
재료는 분자화된 질료이며 포획해야 할 다양한 힘들과 관련되어 재료를 대상으로 한 고름의 조작
에 의해 규정된다. 민중은 오늘날 최고로 분자화되어 있다. 분자적 집단, 진동자의 민중이 되어 수많은 상호작용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시인으로 살 것인가 살인자로 살 것인가? 살인자는 분자적 집단으로 조직된 민중을 폭격하는 자로 배치물을 폐쇄해 검은 구멍으로 밀어넣는다. 시임은 이러한 집단이 미래의 민중의 씨를 뿌리거나 낳을 수 있으며 미래의 민중속으로 이행해 코스모스를 열수 있으리라고 희망을 갖고 분자적 집단을 해방시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민중과 대지는 이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코스모스의 사방팔방에서 폭격당하는 것이 아니라 코스모스의 벡터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코스모스 자체가 예술이 될 것이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근대 나름대로 어느 시대에도 퍼지집합이 성립해 나름의 다짐과정을 만들어 왔다. 다양한 환경의 리토르넬로, 영토적 리토르넬로, 민중적 민요적 리토르넬로, 분자화된 리토르넬로등이 있다. 리토르넬로가 음과만 유독히 관계하는 이류는 음이 탈영토화될수록 그만큼 정련되고 특수성을 획득해 자율적인 되어가기 때문이다. 색채는 사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점점 영토성에 밀착되어간다. 화가의 리토르넬로와 음악가의 리토르넬로는 역이다.
기원전 7000년 -포획장치
명제 13- 국가와 국가의 형태들
<문제제기>
1. 고대국가의 덧코드화로부터 발생하는 탈코드화의 양상은 무엇인가?
2. 잉여를 발생시키는 과정에서 덧코드화가 수반하는 탈코드화는 어떤 것인가?
3. 국가가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조직하면서 어떤 주체화 과정을 형성하는가?
4. 탈코드화된 흐름과 함께 형성되는 자본주의 공리계는 어떠한 양상인가?
5. 자본주의가 국가라는 홈페인 공간의 공리계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6. 예속과 노예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7. 인간-기계가 예속적 관계로 변모하게 되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핵심테제>
1.1 고대국가는 덧코드화를 행할 때는 반드시 동시에 이로부터 벗어나는 다량의 탈코드화된 흐름을 만들어낸다. 탈코드화는 흐름의 상태가 그에 고유한 코드에 포함되지 않은 상태, 흐름 자체의 코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1.2 덧코드화를 일으키는 제국내에서 형성되지만 필연적으로 배제되고 탈코드화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방노예가 그러하다.
2.1 덧코드화 장치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독자적으로 탈코드화된 흐름 즉 화폐, 노동, 소유의 흐름을 발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2.2 잉여의 흡수라는 이러한 경제적 요청은 의문의 여지없이 제국적 국가가 전쟁기계를 전유할 때 나타나는 중요한 측면중의 하나이다.
2.3 잉여가치는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에 대한 잉여가치가 된다.
3.1 이리하여 전혀 다른 국가의 극이 등장하는데 공공영역은 소유의 객관적 본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사적인 것이 된 공동의 전유수단을 가리키게 된다.
3.2 국가장치가 새로운 임무 즉, 기존의 코드화된 흐름을 덧코드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체가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접합접속을 조직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3.3 기계적 노예화는 사회적 예속체제에 의해 대체된다.
4.1 주체화, 접합접속, 전유 등의 작용은 탈코드화된 흐름이 계속되고 나아가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는 새로운 흐름을 막을 수 없다.
4.2 이 새로운 사회적 주체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이러한 흐름들을 접합접속하는 작용들에서 넘쳐나와 더 이상 국가장치가 규제할 수 없는 탈코드화 수준에 이를 때 비로소 구성된다.
4.3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을 위한 일반적 공리계와 함께 형성된다.
4.4 즉 사적 소유는 이제 토지, 물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법 대신 권리 자체를 대상으로 하게
4.5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고유한 탈영토화를 무한히 능가하는 탈영토화의 힘을 동원해 왔다.
5.1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폐지될 수 없으며 다만 형태를 바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5.2 국가를 초월하는 세계적 공리계의 실현모델이 되는 것이다.
5.3 국가는 덧코드화의 초월적 페러다임과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공리계를 위한 내재적인 실현모델이 된다.
5.4 국민의 문제는 민중을 갖지 못한 대지와 대지를 갖지 못한 민중이라는 두가지 극단적 형태로 첨예화된다.
6.1 노예화는 인간 자체가 상위의 통일성의 관리와 지휘 아래 인간들끼리 또는 다른 것과 함께 합류하는 기계의 구성부품이 되는 경우에 나타난다.
6.2 예속은 상위의 통일성이 동물이건 도구건 기계건 인간을 외부의 것과 연관된 주체로서 구성할 때 나타난다.
6.3 인간은 기술적 기계에 노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속된다.
7.1 인간-기계 체제가 과거의 비가역적이고 비순환적인 과거의 예속관계를 대체하면서 이 두요소간의 관계를 가역적이고 순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7.2 노예화는 국제적 세계적이지만 예속은 국민적 측면에 속하는 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정보과학도 인간-기계체제로서 세워지는 국가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7.3 예속, 즉 계약은 두 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사이에서 같은 인간 안에서 '나는 나'라는 예속되는 자이자 주권자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7.4 예속이라는 것도 국가의 본질적 계기, 즉 시민적 포획 또는 기계적 노예화를 준비하기 위한 중계점일 뿐이다.
<요약발제>
국가는 어떻게 진화해 가는가? 진화 또는 변질의 요소들은 무엇인가? 진화한 국가는 고대의 제국적 국가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고대국가는 덧코드화를 행할 때는 반드시 동시에 이로부터 벗어나는 다량의 탈코드화된 흐름을 만들어낸다. 탈코드화는 흐름의 상태가 그에 고유한 코드에 포함되지 않는 상태, 흐름 자체의 코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국가 자체도 덧코드화를 통해 이것을 벗어나는 새로운 흐름을 가능하게 하고 발생시킨다. 공유체계를 만들어낼 때는 반드시 이 체계와 함께 사유 체계의 흐름이 생겨나 공유체계의 장악 범위를 흘러나간다. 이 사유체계 자체는 고대체계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 덧코드화의 그물을 통과해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하게 주변으로 구성된다. 즉 덧코드화를 일으키는 제국 내에서 형성되지만 필연적으로 배제되고 탈코드화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할까? 해방노예가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방노예라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배제된 집단이라는 집단적 형상이다. 덧코드화 장치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독자적으로 탈코드화된 흐름 즉 화폐, 노동, 소유의 흐름을 발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덧코드화에 고유한 내용으로서 이러한 잉여는 단순히 축적되
어야 할 뿐만 아니라 흡수되고, 소비되고, 실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잉여의 흡수라는 이러한 경제적 요청은 의문의 여지없이 제국적 국가가 전쟁기계를 전유할 때 나타나는 중요한 측면중의 하나이다. 에게해 민족들은 스스로는 축적을 형성하지 않고도 동방의 농업의 축적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가능하면 언제든지 동방의 축적물을 약탈하고, 더 규칙적으로는 중부 유럽과 서유럽에서 가져오는 일차 산물과 동방의 축적 일부를 교환했다. 그 결과 서방의 야금술 장인과 상인들은 국지적 국가장치에 의해 축적된 잉여에 직접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동방에서와는 전혀 다른 지위를 갖게 된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동방에서는 덧코드화되는 동일한 흐름이 유럽에서는 탈코드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잉여가치는 코드의 잉여가치가 아니라 흐름에 대한 잉여가치가 된다.
이리하여 전혀 다른 국가의 극이 등장하는데, 공공영역은 소유의 객관적 본성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사적인 것이 된 공동의 전유수단을 가리키게 된다. 속박은 인격적인 것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 의존 관계는 소유자의 것인 동시에 소유권과 소유자의 것으로서 공동체적 또는 기능적 관계들을 대체하게 된다. 노예제도조차 변해 이것은 이제 더 이상 공동체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공적인 사용이 아니라 개별노동자와 관련된 사적 소유권과 관련된 것을 규정하게 된다. 국가장치가 새로운 임무 즉, 기존의 코드화된 흐름을 덧코드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체가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접합접속을 조직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국적 기표에 의한 조작은 주체화 과정으로 대체되어왔다. 기계적 노예화는 사회적 예속체제에 의해 대체된다. 진화된 제국과 하등 다름없이 자치도시는 봉건제도 토대로서 고대국가를 전제했다. 그리고 자체가 진화된 제국과 접촉하면서 이 제국의 작용을 계속 받아들이는 동시에 활발히 새로운 국가형식을 준비하고 있다.
주체화, 접합접속, 전유 등의 작용은 탈코드화된 흐름이 계속되고 나아가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하는 새로운 흐름을 생성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탈코드화된 흐름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탈코드화된 흐름이 합류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며 그물코 또는 재코드화로 기능하는 화제선별적 접합접속을 행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현실화되려면 탈코드화된 흐름의 전체적 적분이 선행하는 장치들을 능가하고 전도시킬 수 있는 일련의 전체화된 결합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사회적 주체는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이러한 흐름들을 접합접속하는 작용들에서 넘쳐나와 더 이상 국가장치가 규제할 수 없는 탈코드화 수준에 이를 때 비로소 구성된다. 한편으로 노동의 흐름은 이제 더 이상 노예제 또는 농노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이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는 더 이상 토지, 상품, 화폐를 통해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등질적이고 독립적인 순수한 자본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된 흐름을 위한 일반 공리계와 함께 형성된다. 사적 소유는 더 이상 사람과 사람의 의존관계가 아니라 유일한 속박을 구성하는 하나의 주체의 독립성을 표현하게 된다. 즉 사적 소유는 이제 토지, 물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법 대신 권리 자체를 대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탈영토화의 새로운 문턱이 등장하는 것이다.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의 자본주의적 문턱에 도달할 때 전유는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전유를 위해 국가가, 또 명확하게 정치와 법에 의한 통치는 필요없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초국가적 역량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통화량을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고유한 탈영토화를 무한히 능가하는 탈영토화의 힘을 동원해 왔다. 자본주
의의 탈영토화 역량은 토지가 아니라 물질화된 노동 즉 상품을 대상으로 하여 성립된다. 이 모든 측면은 자본주의는 국가 없이도 운용될 수 있는 경제 질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자본주의는 시장의 이름만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 까지 이르는 탈영토화를 위해 국가에 맞선 투쟁의 목소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공리계라는 단어를 단순한 메타포로서 사용하지 않으려면 공리계를 온갖 유형의 코드, 덧코드화, 재코드화와 구분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리계는 본성을 특정하지 않은 채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무매개적으로 실현되는 순수하게 기능적인 요소와 관계들을 직접적으로ㅛ 취급한다. 내재적 공리계는 다양한 분야를 통과할 때마다 다양한 실현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폐지될 수 없으며 다만 형태를 바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국가를 초월하는 세계적 공리계의 실현모델이 되는 것이다. 국가에 의한 탈영토화는 그보다 강력한 자본의 탈영토화를 완화시키고 그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 자본에 재영토화를 초래한다.
국가는 덧코드화의 초월적 페러다임과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공리계를 위한 내재적인 실현모델이 된다. 근대국가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문제들은 아주 독특하게 정치적인 것이 된다. 1. 모든 근대국가는 자본주의 공리계와 관련해 동형적이지 않는가? 따라서 민주국가, 전체주의 국가, 자유주의 국가, 심지어 전체 국가간의 차이는 그저 구체적인 변수, 경우에 따라 항상 재배치되는 변수들의 세계적인 분배에 좌우된다고 불 수 있지 않은가? 세계 시장은 오직 하나 자본주의 세계시장 밖에 없다. 2. 반대로 세계적인 자본주의 공리계는 실제로 하나의 다형성을 심지어 모델의 이형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1) 일반적 생산관계로서의 자본은 자본주의 이외의 구체적인 생산 부문과 생산수단도 쉽게 통합해 낼 수 있다. 2) 관료적 사회주의 국가는 자체가 다양한 생산방식을 발달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할 때만 공리계 자체를 넘어서는 역량을 갖는 집합체를 형성할 수 있다. 3. 이처럼 근대국가의 유형학은 메타경제학과 결합된다. 따라서 모든 국가를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으로 다루는 것은 부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은 극히 다양한 형태를 가진 것을 모두 국민국가로 특징짓고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실현모델로서의 국가일 뿐이다. 국민이 구성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대지와 민중이다. 국민문제는 민중을 갖지 못한 대지와 대지를 갖지 못한 민중이라는 두가지 극단적 형태로 첨예화된다.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 위에서 국민이 형성되는데, 국민은 이데 대응하는 대지와 민중을 확고하게 해주는 근대국가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형태로 자본주의 공리계에 의해 실현모델이 되어 간다.
우리는 기계적 노예화와 사회적 예속을 다른 개념으로 구별한다. 노예화는 인간 자체가 상위의 통일성의 관리와 지취 아래 인간들끼리 또는 다른 것과 함께 합류하는 기계의 구성부품이 되는 경우에 나타난다. 예속은 상위의 통일성이 동물이건 아니면 도구건 기계건 인간을 외부의 것과 연관된 주체로서 구성할 때 나타난다. 이때 인간은 기계의 성분이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가 되어 기계에 의해 노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예속된다. 고대제국을 거대 제국이라 부를 수 있으며, 기계를 특정한 기능을 갖고 인간의 제어 아래 운동의 전달과 작업의 수행을 위해 움직이는 고정적 요소들의 결합이라고 본다면 인간기계야 말로 어느 관점에서 보더라도 진짜 기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의 승리, 특히 동력기계의 승리를 가져온 것은 근대국가와 자본주의였다. 인간은 기술적 기계에게 노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속된다. 자본가는 자본이라는 사적인 주체성을
형성하는 표현행위의 주체가 되지만 다른 한쪽의 프롤레타리아는 불변자본을 실현하는 기술적 기계에 예속되는 언표의 주체가 된다.
자본주의가 세계적 규모로 주체화 기획으로 출현하더라도 그것은 탈코드화된 흐름들의 공리계를 형성할 뿐이다. 주체화 과정과 그에 상응하는 예속은 바로 국민국가 또는 국민적 주체성이라는 틀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기계 체제가 과거의 비가역적이고 비순환적인 과거의 예속관계를 대체하면서 이 두 요소간의 관계를 가역적이고 순환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사용이나 활동이 아니라 상호간의 내적인 소통에 기반하고 있다. 권력장용은 언어, 지각, 욕망, 운동 등을 대상으로 하여 미시-배치물을 통과하는 표준화, 변조, 모델화, 정보라는 절차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왔다. tv시청자는 생산과 사용방법이 아닌 기계에 속하는 입구와 출구, 피드백 또는 순환으로서의 내재적인 부품이 되는 한 사람들은 인간기계로서 tv에 노예화된다. 노예화는 국제적, 세계적이지만 예속은 국민적 측면에 속하는 것으로 국한 시켜서는 안된다. 정보과학도 인간-기계 체제로서 세워지는 국가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예속과 노예화는 두 단계라기보다는 공존하는 두 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한 세가지 형태는 1. 고대의 제국적 국가, 이것은 페러다임으로서 덧코드화를 통해 이미 코드화된 흐름으로 노예화 기계를 만든다. 2. 발달된 제국, 자치 도시, 봉건제, 군주제 등 극히 다양한 국가들 이 국가들은 주체화(=노예화)와 예속에 의해 작용하고 탈코드화된 흐름들을 국지적으로 또는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시킨다. 3. 근대의 국민국가, 탈코드화를 앞의 경우보다 멀리까지 진행하고 흐름들에 대한 공리계 또는 전면적 결합의 실현모델로 존재한다. 어떠한 것이건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국가를 겨냥한 전쟁기계를 형성하기 쉽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흐름들이 전쟁기계와 연결되는지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이러한 흐름을 국가가 전유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접합접속 또는 전면적 결합 속으로 들어가는지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 근대 국가는 고대제국과 시공간을 초월한 통일성을 갖고 있다. 헤겔의 말대로 모든 국가는 국가로서의 존재의 본질적 계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힘들의 커플화라는 의미에서도 아주 독특한 하나의 계기가 존재한다. 국가의 이러한 계기가 바로 포획, 끈, 그물, 넥섬, 마법적 포획이다. 예속, 즉 계약은 두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 사이에서, 같은 인간 안에서 나는 나라는 예속되는 자이자 주권자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체가 자기자신을 묶는 이리하여 가장 마법적인 조작, 유일한 보편성, 유일한 장벽과 끈으로서 자기를 세우기 위해 장벽과 끈을 뒤집는 국제적 에너지를 갱신시킨다. 예속이라는 것도 국가의 본질적 계기, 즉 시민적 포획 또는 기계적 노예화를 준비하기 위한 중계점일 뿐이다.
명제 14- 공리계와 현재의 상황
<문제제기>
1. 자본주의의 공리의 배가의 경향과 공리의 뺄셈의 경향은 어떻게 존재하며, 또한 동어반복적인 허구적 뺄셈을 통한 배가인 파시즘과 뺄셈의 경향인 전체주의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2. 자본주의는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는가? 전체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어떠한 양상을 보이는가?
3. 자본주의의 동형성은 사회주의의 이형성과 제 3세계의 다형성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4. 공리계의 한계에 따라 드러나는 전쟁기계의 역량은 어떻게 조직되는가?
5.동-서, 남-북간의 불균형과 내부 식민지라는 흐름은 탈코드화의 운동이 공리계에 유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6. 소수자와 다수자의 차이는 무엇이며 공리계의 가산집합과 소수자의 불가산집합의 차이를 통해 형성된 군중은 어떠한 양태를 보이는가?
7. 소수자가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적으로 만들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핵심테제>
1.1 자본주의의 공리들은 분명히 정리적 명제나 이데올로기적 공식이 아니라 자본의 기호론적 형태를 만들고 생산, 유통, 소비의 배치의 성분으로 들어가는 조작적인 언표이다.
1.2 정당, 노조, 세계시장 등의 여러 가지 공리의 배가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공리는 제거하고 빼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1.3 전체주의 국가는 최대 국가가 아니라 비릴리오의 공식대로 무정부-자본주의의 최소국가이다.
1.4 파시즘은 전체주의와 구별된다. 파시즘의 경우 공리의 번식은 허구의 것 또는 동어반복의 것으로서 뺄셈을 통한 배가이며 파시즘은 이것의 매우 특수한 사례이다.
2.1 맑스의 이윤률의 경향적 저하의 장에서는 자본주의는 우주의 한계, 자원과 에너지의 극한적인 한계에 직면하는 듯한 척한다.
2.2 자본주의는 자체에 고유한 한계에 충돌하는 동시에 이 한계를 더 멀리 밀고 나가며 이러한 한계를 연장한다.
2.3 공리의 수를 제한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이 한계와의 대결이라면 한계를 이동시키는 경향은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4 어디서나 노동자의 투쟁은 특히 파생적인 명제에서 출발하는 자본주의 기업이라는 틀을 넘어선다.
3.1 원칙적으로 모든 국가는 동형적이다. 다시 말해 유일한 같은 외부의 세계시장에 따르는 실현영역이다.
3.2 사회주의 국가들이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공리계의 실현모델인 것은 외부에 유일한 세계시장이 존재하고, 이 시장이 여전히 결정적인 요인으로 심지어 이 시장이 유래한 생산관계를 초월해 결정적인 요소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3.3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형성이 부과되면 자본주의는 이를 어떻게든 최대한도로 소화하는 반면 제 3세계의 다형성은 부분적으로는 식민지화를 대체하는 공리로 기능하는 중심에 의해 조직되기 때문에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4.1 공리계의 한계가 이동할때마다 역량의 연속적인 문턱이 나타난다.
4.2 전쟁기계의 자율화, 자동화가 현실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공식은 뒤집어진다. 즉, 정치가 전쟁의 연속이 된다.
4.3 우리는 이미 제 3차 세계대전 와중에 있다. 이 전쟁기계는 특정한 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
니라 공리계의 요청에 따라 내부와 외부의 불특정한 적을 요구한다.
5.1 과잉군비에 의한 동서간의 중심에서 균형이 잡힐수록 남북축에서는 불균형 또는 불안정화가 심화되어 중심에서의 균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5.2 중심국가들은 단지 제 3세계를 즉 외부에 제 3세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에서 생겨나는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내부의 제 3세계도 갖고 있다.
6.1 우리 시대는 소수자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소수자는 반드시 수의 적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되기 또는 변동, 즉 잉여적인 다수자를 형성하는 이러저러한 종류의 공리들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6.2 공리계는 예를 들어 무한하더라도 요소는 가산집합을 다루지만 소수자는 불가산집합 공리화될 수 없는 퍼지 집합 요컨대 도주 또는 흐름에서 비롯되는 군중이자 다양체를 구성한다.
7.1 소수자가 혁명적인 것은 세계적 규모의 공리계를 의문시하는 훨씬 더 심층적인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역량, 즉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형상과 보편적 의식을 발견한다.
7.2 노동자계급이 자본 또는 자본의 일부로서 나타날 뿐 자본의 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의 판에서 벗어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은 끊임없이 혁명적으로 되고 가산집합들간에 성립되는 지배적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요약발제>
정치학은 명증한 학문이 아니다. 온갖 종류의 불확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계수들이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 과학에서 공리론은 실험이나 직관과 대립하는 초월적, 자율적, 결정적 역량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소위 결정 불가능한 명제들에 직면하거나 제어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우월한 역량들과 대결하는 것이 공리론의 특징이다. 공리론자들은 과학의 정치가로서 수학에서는 너무 빈번하게 출현하는 도주선을 폐쇄하고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넥섬을 강제로 부과하려 하고 과학에 대해 국가 정치를 수핸한다.
1. 부가, 제거
자본주의의 공리들은 분명히 정리적 명제나 이데올로기적 공식이 아니라 자본의 기호론적 형태를 만들고 생산, 유통, 소비의 배치의 성분으로 들어가는 조작적인 언표이다.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공화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통합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 고용, 조합조직, 사회제도, 국가의 역할, 국외시장과 국내시장에 관한 공리를 다양화하고 새롭게 발명해내야 했다. 케인즈 경제학과 뉴딜정책은 이러한 공리의 실험실이다.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국가의 두 극은 투자영역과 이익의 원천과 관련해 공리를 추가하고, 고안해내려는 이러한 경향에 의해 규정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이와 반대의 경향도 관찰된다. 즉 공리는 제거하고 빼려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최대 국가가 아니라 비릴리오의 공식대로 무정부-자본주의의 최소국가이다. 파시즘은 전체주의와 구별된다. 국내시장을 억지로 없애는 것과 공리의 축소라는 면에서는 전체주의 극과 일치하지만 외적 부문에 중시를 국외자본에 호소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경제를 통해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경우 공리의 번식은 허구의 것 또는 동어반복의 것으로서 뺄셈을 통한 배가이며 파시즘은 이것의 매우 특수한 사례이다.
2. 포화
어떤 체계의 포화가 전도점을 나타낸다고 했을 때 과연 한 체계 내의 정반대되는 두 경향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의 이윤률의 경향적 저하의 장에서는 자본주의는 우주의 한계, 자원과 에너지의 극한적인 한계에 직면하는 듯한 척한다. 자본주의는 자체에 고유한 한계에 충돌하는 동시에 이 한계를 더 멀리 밀고 나가며 이러한 한계를 연장한다. 공리의 수를 제한하려는 전체주의적 경향이 한계와의 대결이라면 한계를 이동시키는 경향은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애매한 교대가 브라질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안에서 공리는 회수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자본주의 공리계의 항상적인 재조정 즉 부가와 제거는 테크노크라트에게만 국한된 투쟁의 과제가 아니다. 어디서나 노동자의 투쟁은 특히 파생적인 명제에서 출발하는 자본주의 기업이라는 틀을 넘어선다. 이러한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세계 규모의 노동관료기구와 테크노크라트들이 가하는 위협은 국지적 투쟁이 국가차원과 국제차원의 공리들을 직접 표적으로 삼고 공리가 내재성의 장으롯 삽입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날 때만 제거될 수 있다. 이처럼 생생한 흐름들이 또 이 흐름이 제기하고 강제하는 질문들이 가하는 압력은 공리계 내부에서 작용하기 않으면 안된다.
3. 모델, 동형성
원칙적으로 모든 국가는 동형적이다. 다시 말해 유일한 같은 외부의 세계시장에 따르는 실현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형성이 국가간의 등질성 또는 증질화를 동반하는지를 질문하여야 한다. 하나의 통합된 국내 시장을 향해 나가는 경우에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고름 즉, 공리계 집합 또는 통일성은 권리 또는 생산관계로서의 자본에 의해 규정된다. 공리들의 상대적 독립성은 결코 이 전체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분업 또는 부문들에서 유래한다. 부가와 제거를 두 극으로 하는 모델의 동형성은 각각의 경우에 국내 시장과 해외시작이 어떻게 분배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 중심국가군에만 적용될 수 있는 첫 번째 양극성 2) 서구와 동방, 자본주의 국가와 관료사회주의 국가라는 양극성, 사회주의 국가들이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공리계의 실현모델인 것은 외부에 유일한 세계시장이 존재하고, 이 시장이 여전히 결정적인 요인으로 심지어 이 시장이 유래한 생산관계를 초월해 결정적인 요소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3) 중심- 주변의 양극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공리들간의 차이와 자율성이 공리계 전체의 고름을 침해하는 일은 전혀 일어날 수 없다. 역시 중요한 문제는 세계 규모의 공리계와 관련한 동형성 문제이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형성이 부과되면 자본주의는 이를 어떻게든 최대한도로 소화하는 반면 제 3세계의 다형성은 부분적으로는 식민지화를 대체하는 공리로 기능하는 중심에 의해 조직되기 때문에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중심국가간에는 원칙적으로 모델들의 동형성이 있다. 그리고 관료사회주의 국가들에 의해 부과되는 이형성과 제 3세계 국가들에 의해 조직되는 다형성이 있다.
4. 역량
공리계는 필연적으로 공리계가 처리하는 역량보다 큰 즉, 공리계의 모델이 되는 집합의 역량보다
는 큰 역량을 만들어낸다고 가정해보기로 하다. 우리는 즉각 이러한 역량을 서로 연속되어 있는 군사, 산업, 금융 등의 테크놀로지 복합체가 체현하고 있는 파괴역량, 전쟁역량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예속되는 가변자본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기계적 노예화의 한 요소가 된다. 공리계에서 불변자본의 비율이 증가함에 따라 기존 자본의 가치저하와 새로운 자본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복합체에서 체현되는 전쟁기계에 대응하는 리듬과 규모를 갖게 된다. 공리계의 한계가 이동할 때마다 역량의 연속적인 문턱이 나타나게 된다. 언제나 전쟁은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을 전면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진 다양한 요인 특히 파시즘이라는 요인은 이러한 운동을 역전시킨 첫걸음이 되었다. 전쟁기계의 자율화, 자동화가 현실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제 2차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공식은 뒤집어진다. 즉 정치가 전쟁의 연속이 되는 것이다. 또 평화가 무제한의 물질적 과정을 전면전쟁으로부터 기술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전쟁은 전쟁기계의 구체화가 아니라 전쟁기계 그 자체가 구체화된 전쟁이 된다. 우리는 이미 제 3차세계대전 중에 있다. 전쟁기계는 경제-세계를 포위하고 있는 연속적인 것의 역량으로서 공리계 전체를 지배하고 세계의 모든 부분을 접촉시키고 있다. 전쟁은 평화의 일부분이 되었다. 국가는 전쟁기계를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자체가 전쟁기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 기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전쟁기계는 특정한 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리계의 요청에 따라 내부와 외부의 불특정한 적을 요구한다.
5. 포섭된 중항
오늘날에는 남-북의 축 즉, 중심-주변의 축이 동서축보다는 중요하며, 원칙적으로는 남북의 축이 동서 축을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저자들이 많다. 과잉군비에 의한 동-서간의 중심에서 균형이 잡힐수록 남-북 축에서는 불균형 또는 불안정화가 심화되어 중심에서의 균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불균형은 자본주의의 기능에 필수불가결한 불평등교환이라는 공리의 귀결이다. 오늘날 탈코드화된 흐름들이 중심의 공리계 속에 유입되면 될 수록 이러한 흐름들은 주변에서 벗어나고 공리계로서는 제대로 해결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심국가들은 단지 제 3세계를 즉 외부에 제 3세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에서 생겨나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내부의 제3 세계도 갖고 있다. 중심의 탈영토화, 즉 중심이 영토와 국가의 집합에서 이탈함에 따라 주변주 구성체들은 진정한 투자의 중심이 되는 반면 중심부 구성체들은 점점 주변화된다. 이탈리아의 네그리의 내부 주변주이론이 그러하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기계적 노예화와 고전적 예속의 차이를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6. 소수성
우리 시대는 소수자들의 시대가 되고 있다. 소수자는 반드시 수의 적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되기 또는 변동, 즉 잉여적인 다수자를 형성하는 이러저러한 종류의 공리들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소수자를 규정하는 것은 수가 아니라 수와의 내적인 관계이다. 하나의 소수자는 다수일 수 있지만 동시에 무수(無數)일 수 있다. 공리계는 예를 들어 무한하더라도 요소는 가산집합을 다루지만 소수자는 불가산집합 공리화될 수 없는 퍼지 집합 요컨대 도주 또는 흐름에서 비롯되는 군중이자 다양체를 구성한다. 국가 또는 공리계는 분명히 소수자들에게 지역적 또는 연합
적 아니면 명목상의 독립을 주는 식으로 요컨대 새로운 공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반격한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은 황인종이건 흑인이건 새로운 다수자, 즉 무한가산집합이 된다고 해서 충분한 표현을 얻은 것은 아니다. 소수자의 특성은 예를 들어 소수자가 단 한사람의 성원으로 구성되더라도 셀 수 없는 것의 역량을 확보하는데 있다. 소수자의 역량은 다수자의 체계 속에 들어가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역량이나 필연적으로 동어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다수자의 기준을 전복시킬 수 있는 역량이 아니라 아무리 적더라도 불가산 집합의 힘을 무한가산집합의 힘에 맞세울 수 있는 힘에 따라 측정된다.
7. 결정불가능한 명제
공리계는 무한 불가산 집합의 역량 자체를 구체적으로는 바로 전쟁기계의 역량을 끌어낸다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기계를 소수자에 대한 일반적 처리에 동원하게 되면 바로 이 전쟁기계가 제거한다고 생각되는 절대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도 자본주의의 공리계는 전쟁기계가 절멸시키려고 하는 것을 끊임없니 생산, 재생산한다. 하나의 소수자를 뿌리뽑아도 바로 이 소수자에서 또 다른 하나의 소수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공리, 사회적 지위들, 독립 등을 동반하더라도 통합을 통해 소수자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없다. 소수자가 혁명적인 것은 세계적 규모의 공리계를 의문시하는 훨씬 더 심층적인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역량, 즉 독자성은 프롤레타리아 속에서 형상과 보편적 의식을 발견한다. 노동자계급이 자본 또는 자본의 일부로서 나타날 뿐 자본의 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의 판에서 벗어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은 끊임없니 혁명적으로 되고 가산집합들간에 성립되는 지배적 균형을 파괴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필요에 따라 소수자를 분쇄하려는 목적으로 오래 지속되리도 않을 국가를 유지하고 조직하는 예는 자주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한 다음 다시 이것을 더 멀리 밀어내지만 이와 동시에 이 공리계를 벗어나는 온갖 종류의 흐름들을 사방으로 발생시킨다. 자본주의는 실현모델로서 기능하는 가산집합속에서 이러한 모델을 가로지르며, 전도시키는 불가산집합을 발생시킬 때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새로운 대지를 그리고 전쟁기계를 구성하는 연결접속 속에 들어가려 하는데 이 기계는 절멸을 위한 전쟁 또는 전면적 공포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다만 혁명적 운돌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여기에 다시 고른판과 자본의 조직 혹은 계획이나 발전의 판의 대립 또는 관료 사회주의 적 판의 대립과 마주치게 된다. 세계적 규모의 노예화 체계로서 하이테크가 떠오를디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노예화조차 바로 여기서 결정 불가능한 명제와 운동은 흘러넘치고 있다. 이 모든 결정 불가능한 명제의 한가운데를 통과하지 않는 투쟁, 공리계의 결합에 맞서 혁명적 연결접속을 구축하지 않은 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1440년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핵심어 >
팰트, 퀼트, 패치워크, 매끈한 공간, 홈페인 공간, 국가장치, 잉여노동
<핵심명제>
1. 직물에서 퀼트에서 패치워크로의 발전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2. 불레즈의 이론은 음악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3. 바다가 홈페인 공간이 되었다가 다시 매끈한 공간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홈페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은 어떻게 다른가?
5. 거리와 크기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6. 국가장치나 잉여노동이 없는 곳에는 노동모델도 없는 이유는?
<논증>
1.1 직물에서 퀼트는 이민의 초기역사에 있어서의 홈페인 공간을 의미한다.
1.2 퀼트직물은 패치워크로 변하면서 홈 페인공간에서 미끈한 공간이 창출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2.1 블레즈의 이론은 매끈한 시공간은 헤아리지 않고 차지할 수 있지만 홈이 패인 공간을 차지하려면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2.2 홈이 패인 공간은 로고스적인 옥타브를 갖는데 반해, 매끈한 것은 노모스이다.
2.3 음악은 홈이 패인 공간이라는 질서의 사선을 부여하며, 매끈한 연속적 변주로 가지고 있다.
3.1 바다 위의 원양항해는 바다 위에 경도와 위도라는 홈페인 공간의 지도를 그린다.
3.2 그러나 바다는 전쟁기계에 봉사하기 위한 유목의 공간 즉 매끄러운 공간이 된다.
4.1 홈이 패인 것에서는 두점 사이에 선이 있지만 매끈한 것에서는 두선 사이에 점이 있다.
4.2 매끈한 선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간격이 열려 있으나 홈이 패인 것은 차원적이기 때문에 간격이 닫혀 있다.
4.3 곡면 또는 공간에 있어서 홈이 패인 공간에서 곡면은 닫혀 있으며 지정된 절단에 따라 규정된 간격에 따라 배분이 일어나지만 매끈한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열린 공간위에서 빈도와 경로의 장단에 따라 분배가 일어난다. 로고스와 노모스의 차이가 그것이다.
5.1 크기와 달리 거리는 분할 될 때마다 본성이 바뀐다. 온도, 속도가 그것이다.
5.2 거리의 다양체들은 연속적 변주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인 반면 크기의 다향체들은 상수와 변수를 배분한다.
6.1 국가장치나 일모델은 홈페인 공간을 창출하는 잉여모델이다. 잉여의 덧코드화 없이는 코드화 작용니 자본도 없다. 국가는 기계라는 일반화된 소외를 기반으로하여 홈페인 공간을 창조해 낸다.
6.3 자본과 국가의 차이는 매끈한 자본과 홈페인 자본의 차이일 뿐이다.
<요약>
매끈한 공간과 홈이 패인 공간, 유목적 공간과 정주적 공간, 전쟁기계가 전개되는 공간과 국가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 두공간의 본성은 다르다 이것의 다양한 양상과 두공간의 관계를 볼 수 있는 몇가지 모델을 살펴보도록 하자
기술모델
직물은 원칙적으로 홈에 페인 공간으로 규정될수 있는데 한쪽은 고정되고 유동적인 다른 한쪽은 고정된 위아래를 통과한다. 씨실은 날실의 왕복운동을 하게 만들며 공간은 닫혀 있다. 펠트는 개별적인 실이나 교차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압축에 의해 얻어지는 섬유의 얽힘만이 있을 뿐이다. 뒤엉킨 십합체는 등질적이지 않다. 하지만 펠트는 매끈하며, 한점한점 직물공간에 대립한다. 코바늘 뜨개질은 짜나가는 공간이 중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방향으로 열린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늘어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그린다. 자수와 천조각을 무한히 하나하나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패치워크는 다수에 가까운 테마나 대칭성, 공명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간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즉, 중심이 없으며 기본 모티프는 단일한 요소로 구성된다. 무현의 천조각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방법은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다. 패치워크는 말 그대로 하나의 리만공간이며, 아니 오히려 리만공간이 바로 패치워크라 할 수 있다. 패치워크의 매끈한 공간은 이 매끈하다는 것이 등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무형의 무정형의 공간으로서 옵 아트를 예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퀼트는 천조각을 이어붙인 두 개의 보를 하나로 꿰맨 것으로 때로는 사이에 심을 넣기도 한다. 17세기 이주민에게 퀼트는 유행하였으나 패치워크 기술로 발달한다. 이것은 마치 홈이 페인 공간에서 매끈한 공간이 떨어져 나와 새로이 출현하게 되는 것과 같다. 패치워크는 이주의 진행에 따라 유목과의 친화성의 정도에 따라 이민이 걸어온 괘적의 이름을 가지고 대표하며 열린 공간에서의 속도와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음악모델
블레즈는 매끈한 시공간은 헤아리지 않고 차지할 수 있지만 홈이 패인 시공간은 차지하려면 헤아려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공간을 절단하는 방법에는 기준에 따라 정하는 방법과 불규칙적이고 비규정적으로 임의대로 절단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절단들과 음정들의 배분율은 모듈이라고 불리는데, 모듈이 없어지면 주파수의 배분은 절단을 갖지 않게 된다. 홈이 패인 것은 항상 하나의 로고스를 예를 들어 옥타브 같은 것을 갖는데 반해 매끈한 것은 하나의 노모스이다. 왜 분명한 방향을 갖고 있는 매끈한 공간은 홈이 패인 공간과 융합되는 경향이 있는가? 홈이 패인 것은 고정된 것과 가변적인 것을 교차시켜 서로 구별되는 형식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속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바다모델
홈이 패인 공간에서 선이나 괘적은 점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매끈한 공간에서는 정반대로 된다 점이 괘적에 종속되는 것이다. 매끈한 공간에서 선은 차원이나 계량적 결정인이 아니
라, 벡터, 방향이다. 그것은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변용태이다. 그것은 광학적 지각이라기보다 촉지적 지각이다. 홈에 패인 공간에서는 형식들이 하나의 질료를 조직하는데 반해 매끈한 공간에서는 재료들이 힘들을 지시하든가 아니면 힘들의 징후노릇을 한다. 매끈한 공간은 외연이 아니라 강렬한 내포적 공간이다. 바다에 홈이 패인 것은 원양항해 때문이다. 바다에는 일련의 점과 경선과 위선, 경도와 위도가 교차하는 지도가 존재한다. 홈파기는 점진적으로 확대되면서 모든 장소, 모든 면을 바둑판처럼 나눠 나간다. 차원적인 것이 조금씩 확립되어 가면서 방향적인 것을 종속시키고 그것에 중첩된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전쟁기계에 봉사하는 유목으로 변형된다. 바다는 하늘의 성층권 만큼이다 다시 매끈한 공간이 되는데 이러한 미묘한 전도는 홈이 패인 육지를 좀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대칭적인 두가지 운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매끈한 것에 홈을 파는 운동과 홈이 패인 것에 다시 매끈함을 부여하는 운동이다.
매끈한 것과 홈에 패인 것의 차이는 1) 우선 점과 선의 관계가 정반대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홈이 패인 것에서는 두점 사이에 선이 있지만 매끈한 것에서는 두선 사이에 점이 있다. 2)선의 본성이 구별된다. 매끈한 선은 방향적이기 때문에 간격이 열려 있으나 홈이 패인 것은 차원적이기 때문에 간격이 닫혀 있다. 3) 곡면 또는 공간에 있어서 홈이 패인 공간에서 곡면은 닫혀 있으며 지정된 절단에 따라 규정된 간격에 따라 배분이 일어나지만 매끈한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열린 공간위에서 빈도와 경로의 장단에 따라 분배가 일어난다. 로고스와 노모스의 차이가 그것이다.
정주민이지만 농민은 매끄러운 공간에 있을 수 있으며 열린 공간을 경작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폴리스, 도시, 마을 대립시켜야 한다. 농업은 오히여 도시가 발명하였다. 홈을 파는 힘은 도시를 경유한 후에나 그렇게 될 수 있다. 매끈한 공간은 도시를 벗어나고 있지만 도시 자체도 거대 빈민가, 임시 거주자, 유목민과 혈거민 등 화폐, 노동 또는 주거의 홈파기와 무관한 유목민을 형성한다. 즉, 도시의 유목민 말이다.
수학모델
리만이 다양한 것을 술어상태에서 떼어내 다양체라는 실사로 만든 것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다양체는 홈이 파여지고 이 다양체의 결정인들은 크기이므로 계량될 수 있다. 마이농과 러셀은 거리라는 개념을 채용해 이것을 크기와 대립시켰다. 크기와는 반대로 거리는 분할 될 때마다 반드시 본성이 바뀐다. 온도나 속도가 그예이다. 강도들은 하나의 차이이기 때문에 분할의 각항이 다른 항과 본성상 구분되는 질서에 따라 분할 된다. 거리의 다양체들은 연속적 변주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는데 반해 크기의 다양체들은 상수와 변수를 배분한다. 베르그송은 지속이란 결코 분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분할 때마다 분할되는 것은 반드시 본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가 잘못된 논증임을 알게 된다. 크기가 변하더라도 그것에 의해 홈이 패인 공간이 확대되거나 감소하거나 하는 일만이 일어날 뿐이다. 물질은 홈이 패인 다양체와 매끈한 다양체,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의 대립을 왔다갔다 한다. 수가 계량의 상관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크기는 반드시 수와 관련해서만 공간에 홈을 팔 수 있으며 이와 반대로 수는 점점 복잡해져가는 크기들 간의 관계를 표현해 주면서 이를 통해 이상적인 공간을 산출해내지만 이것은 홈 파기를 강화해 물질 전체와 홈파기를 공외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수는 스스로 매끈한 공간에 분배되는데 분할되면 반드시 본성과 단위를 바꾸어버리며, 이 단위 각각은 이미 크기가 아니라
거리를 표상한다. 헤아려진 수가 홈이 패인 공간에 관여한다면 헤아리는 수는 매끈한 공간과 관련된다. 소수자 과학은 직관, 발자취, 여정, 나아가 물질, 특이성, 변주, 직관주의 기하학, 헤아리는 수에 대한 감각과 취향을 다수자 과학에 전달해주어 이 과학을 끊임없이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하나의 근방에서 다음 근방으로의 연결은 규정되지 않으며 무한한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이리하며 가장 일반적인 리만 공간은 서로 나란히 놓여 있기는 하지만 서로 관계를 맺지 않는 조각들의 우정형의 모임으로 나타나게 된다. 리만공간은 순수한 패치워크이다. 이 공간은 부정형의 비등질적인 것으로서 일종의 매끈한 공간인 것이다. 계량과 무관하게 빈도 또는 축적 과정과 연결접속될 때, 이것들은 매끈한 공간의 노모스가 나타내는 두가지 측면이기도하다. 번역이란 이차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매끈한 공간을 순치시키고 덧코드화에 계량화하고 중립화시키는 동시에 바로 이 공간에 증식, 확장, 굴절, 갱심, 돌출의 환경을 제공하는 조작으로서 이러한 환경이 없는 매끈한 공간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매끈한 리만적 조각들이 유클리드적 접합접속을 받아들이는 방법들의 정밀함과 복잡함이 여기에 있다. 모든 진전은 홈페인 공간에 의해 그리고 이 공간안에서 이루어지지만 모든 생성은 매끈한 공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프랙탈을 무한히 반복하면 이렇게 해서 생긴 선분은 곡선이 된다. 매끈한 공간은 바로 이를 통해 홈페인 공간과의 차이와 관계를 동시에 고려하는 일반적 규정들을 받아들인다.
물리학 모델
매끈한 것이 등질적인 것과 상호소통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단지 홈페인 것이 완전한 이상적인 등질성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매끈한 것을 부활시켜야 하며 다시 그렇게 하려면 등질적인 것의 운동에 중첩되면서도 자체로서는 전혀 다른 운동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간이 어떻게 홈파기의 극한을 피해나가는지는 편위운동과 소용돌이를 통해서다. 이 둘사이에는 매끈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이 공간의 요소는 편위이며, 이 공간에는 나선이 서식한다. 데모크리토스로부터 루크레티우스에까지 이르는 고대원자론에서 유클리드의 등질적이고 홈이 패인 공간과는 전혀 다른 아르키메데스 기하학과 고체 물질이나 박층구조의 물질과는 전혀 다른 데모크리토스의 물리학 사이의 얼밀한 상관관계가 나타나는 층위이기도 하다. 모든 활동에 일모델을 강요하는 것, 모든 활동을 가능한 또는 잠재적인 노동으로 번역하는 것, 자유로운 행동을 규율하는 것, 자유로운 행동을 노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여가로서 간주하는 것, 일 모델은 근본적으로 국가장치의 일부이다. 그리고 일은 잉여의 성립을 통해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노동이란 잉여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증명- 국가장치와 잉여노동이 없는 곳에는 노동모델도 없다. 오히려 자유로운 행동의 연속적인 변주만이 있다. 노동과의 차이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말하지만 태만한 사회가 아니다 무정부상태는 무법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토목공사에서 시작된 잉여노동은 노동자체에 융해해 들어갔었다. 마르크스는 기계가 잉여가치를 만들고 자본의 유통은 가변자본과 불젼자본의 구분을 의문시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감지했다. 잉여노동 속에서 인간 소외 자체가 일반화된 기계적 예속으로 대체되러 가며, 이리하여 전혀 노동하지 않고도 잉여가치를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매끈한 공간을 필연적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홈파기는 주로 자본주의 국가라는 극, 즉, 자본의 조직화에서 현대 국가장치가 수행하는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반대로 세계자본주의는 매끈한 공간을 창출한다. 본질적인 것은 홈페인 자본과 매끈한
자본의 구별일 뿐이다.
미학모델 : 유목민 예술
리글은 정말 경이로운 몇몇 문장을 통해 근거리 파악-촉지적 공간이라는 쌍에 근본적인 미학적 지위를 부여해주었다. 우리에게는 매끈한 것이야말로 근거리 파악의 특권적인 대상인 동시에 cr지적 곤강의 요소처럼 여겨진다. 반대로 홈이 패인 것은 오히려 원격지각, 좀더 광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이제 홈페인 것이 파국으로 사라져 새로운 매끈한 공간이 생기고 또 다른 홈 패인 공간이 펼쳐진다. 독자는 긴기억을 갖는 반면 작가 자신은 짧은 기억을 갖고 쓴다. 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첫 번째 측면은 방향, 좌표, 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 단자론적 관점은 오직 유목적 공간에만 접속될 수 있다. 전체와 부분들은 그것들을 보고 있는 눈에 광학적인 것이 아닌 촉지적인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홈이 패인 공간은 원거리 파악의 요구들에 의해 규정된다. 방향설정의 항상성, 부동적인 좌표의 교환을 통해 얻어지는 거리의 불변성, 주위환경에 젖어듦으로써 얻어지는 접속, 중심관점의 구성이 그러하다. 홈 페인 것과 매끈한 것은 단순히 포괄적인 것과 국지적인 것으로만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홈이 패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은 아직 상대적인 것인 반면 매끈한 것에서 국지적인 것은 이미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유목민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으로 존재하며, 접속들과 방향 변화들을 무한대로 연속시키면서 매끈한 공간을 구성한다. 사막 또는 하늘 또는 바다, 대양, 무제한적인 것은 우선 포괄하는 것의 역할을 담당하며 수평선이 되는 경행이 있는 것이다. 대지에 홈을 파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처럼 매끈한 것의 이중적인 처리를 즉, 한편으로 포괄하는 수평선이라는 절대적 상태까지 도달하거나 환원되는 것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포괄적인 것에서 배제되는 것을 자신의 조건으로 내포한다. 유목민들은 제국 또는 이주민들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이 둘중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었으며, 유먹민에세 고유한 예술의지는 부정되었다. 세 번째 쌍은 추상적인 선-구체적인 선에 개입한다. 추상적인 선이란 매끈한 공간들의 변용태지 홈파기에 호소하는 불안감이 아니라 원시 예술은 추상적인 것 또는 전 구상적인 것에서 시작된다. 예술은 처음부터 추상적이며 그 기원에서부터 추상적인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었다. 제국적 선들은 추상적인 선과 동시에 등장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유기적이며 배아상태인 강렬한 삶, 기관없는 강력한 삶, 기관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명력 있는 몸체를 생각해 보자. 선이 도주적인 이동성을 통해 기하학에서 벗어나면 이와 동시에 삶도 제자리에서 소용돌이치고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유기적인 것에서 몸을 뺀다. 추상작용에 고유한 이러한 생명력이 바로 매끈한 공간을 그린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홈파기와 매끈하게 하기라는 조작에서의 다양한 이행과 조합이다.
신승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