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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鳴亭의 由來
우리 長興은 본래에 文林義鄕 이라 칭송되는 고을로서 수많은 文人과 義兵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그 밑 바탕에는 長興의 세곳의 鳳鳴之址가 있었는데
1) 汭陽江 東岸의 鳳鳴亭
2) 岐山의 鳳鳴齋 書堂
3) 南山西麓의 鳳鳴坮
문헌상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는 조선초기 長興都護府 府使 卞袍에 의해 鳳鳴亭이 창건 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曺汝欽의봉명정 중수기(1555) 동국여지지(1656) 장흥읍지 정묘지(1747)
대동지지(1861~1866)등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장흥의 선비들은 봉명정을 중국의 악양루, 황학정,등왕각에 빗댈정도로 예양강 봉명정의
풍광에 큰 자부심을 갖고 문학으로 노래 했던것 같으며
추강 남효온, 영천 신 잠, 기봉 백광홍, 점필재 김종직, 옥봉 백광훈, 반곡 정경달, 취곡 조여흠,
만수재 이민기 등이 鳳鳴亭 혹은 汭陽江 東亭에 대하여 읊은 漢詩들을 한양대학교 정 민 교수,
박형상 변호사, 한학자 김규정, 이하상 선생등이 한글로 번역 해놓은 자료들을
岐山마을 白光哲의 제공으로 김희태 문화재 전문위원의 감수를 받아
이곳에 장흥군이 도시숲 가꾸기 차원으로 건립해 주신 행복숲에 주민들의 합의로
亭號를 鳳鳴亭이라 이름하고 봉명정의 유래를 기록하는 바이다.
2010년 1월 일
密陽人 朴貴用 謹識
출전 : 점필재집(佔畢齋集) 김종직(金宗直)
호남의 이 절도사 계동이 관산 동정에 대한 네 수의 시를 부쳐 보여 주면서 화답하기를 요청하다[湖南李節度使 季仝 寄示冠山東亭四詩要和]
뛰어난 인물은 서남쪽에 있고 / 俊彩坤維上
외로운 성은 마읍 가에 있구려. / 孤城馬邑邊
산과 냇물은 한없이 아름다워 / 山川無限好
꽃과 달은 누굴 위해 고운가. / 花月爲誰姸
군교들 빗줄기처럼 뒤 따르니 / 列校從如雨
먼 백성들을 신선처럼 바라보리. / 遐萌望若仙
동정에 봄빛이 하도 호탕한지라 / 東亭春浩蕩
사공의 시편을 휘갈겨 쓰네. / 揮灑謝公篇
어리진을 겨우 파하자마자 / 才罷魚麗陣
행주에선 옥 술잔 넘치는구나. / 行廚灔玉杯
며느리 바우엔 햇살 빗기고 / 婦巖紅日側
예양강은 흰 마름꽃 피었네. / 汭水白蘋開
봄놀이는 점차 늦어만 가는데 / 春事垂垂晩
징서는 자주자주 내려오누나. / 徵書鼎鼎來
군문으로부터 이십 리 일대는 / 轅門二十里
다시 빙 둘러 화성을 띠었으리. / 更帶火城回
소덕문 앞으로 난 길은 / 昭德門前路
여전히 쭉 뻗어 가파르리. / 依然直復斜
명원엔 매실 열렸을 게고 / 名園已梅子
화려한 거리 버들 그득하겠다. / 繡陌盡楊花
날짜 정해 그윽한 골목 찾거든 / 指日尋幽巷
공과 모래사장에 앉아 즐기리. / 需公坐淺沙
만날 때 당해선 그리움 더하니 / 臨逢增戀嫪
때때로 택일하는 집 찾는다오. / 時訪建除家
[注]馬邑마읍 :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에 속했던 현명(縣名)이다.
謝公사공 : 남조 송(南朝宋)의 문장가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 듯하다.
魚麗陣어리진 : 군영(軍營)에서 실시하는 진법(陣法)의 이름이다.
行廚행주 : 본디 도시락을 이른 말인데 전하여 야외(野外)의 연회(宴會)를 뜻한다.
徵書징서 :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서(命令書)를 말한다.
火城화성 : 횃불로 성(城)을 에워싸서 성을 수비하는 것을 이름. 양(梁) 나라 때 양간(羊侃)이 후경군(侯景軍)의 핍박을 받았을 때 성(城) 주위에 횃불을 많이 던져 화성을 만들어서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데서 온 말이다.
#동정(東亭) : 예양강 동쪽 언덕에 있다. 부사 변포(卞袍)가 세웠다.(역, 김규정)
ㅡ먼저 드리는 말씀 ㅡ
장흥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고있는 박형상 변호사입니다.
자칫 <부동정>으로 못박힐뻔 했다가, 이번에 <봉명정>으로 복원된 소식을 듣고
지난번 <물축제때 발표문의 봉명정 관련원문>에 <해설 부분>을 덧붙여 기고합니다.
ㅡ예양강 봉명정 鳳鳴亭의 재발견
ㅡ<예양강의 역사와 문화>,2009,7,29 제2회 물축제 발표문에서
1,기초사실 관계
.
- 근거자료 -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봉명정중수기(1555?), 동국여지지(1656),
장흥읍지·정묘지(1747), 대동지지(1861~1866)
- 창정 - 조선초, 변포 부사
ㅡ"변포 부사가 언제 장흥부사로 재직했는지", 그 구체적 시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세조10년(1464)에 '전라도 경차관'직을 수행했던 점에서
그 시기를 간접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cf. 초계 변씨 장흥 이거(移居) - 변포 부사의 손자 변온(1474~1554)
-임진란 때 그 후손들인 '초계 변씨 13형제 순사충훈'을 기억해야한다.
- 중수 - 장응량 부사(1553.9.부임) 또는 한온 부사(?)
-한온 부사는 을묘왜변(1555) 때에 전사했다.
-관련자료 , '취곡 조여흠'의 '봉명정 중수기,1555(?).
-그 정확한 중수시점이 '장부사'인지 '한부사'인지 모호하다.
-장흥의 위의환 선생의 번역문이 있다.
-훼손 - 1579 (만력·기묘) 수해,
-정묘지(1747)-‘재(在)예양강동안 금폐’
- 명칭 - 왜 '봉명정'인가?, "봉명조양"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어 '죽실'을 먹고, '동화동(동화산)'에 산다"
- “서쪽에 '기산(岐山)'을 두고, 동쪽 방향에 봉명조양(鳳鳴朝陽)이 있게된다”
- '동정(東亭)·단정(短亭)·오리정(五里亭),관(官)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ㅡ위치 -재부성 동문외, 예강동안, 동문외 예양강안, 유정고치예강지곡(有亭高峙 汭江之曲)’
-동화동 바깥
cf.참고자료ㅡ <관산록>에 나타난, 영천 신잠의 거주지?
- ‘동화동 동화모옥’, ‘죽림(竹林)’이 있는 곳, ‘성 북쪽의 예양강가’,
-‘며느리 바위가 바라다보이는 곳 (...我居相對)’
- 구별 -
ㅡ봉명정 (동문외 예강동안),
ㅡ봉명대 (남산서록 남문밖, 동애 안중묵 선생의 소요처),
ㅡ봉명재 (안양 기산, 기산 8문장 배출)
- 봉명정의 문학사적 역사적 의의 - 이른바 ‘봉명정 문학’!
· 그 시경 장흥문사, 저명한 선비들이라면 한번쯤 ‘봉명정’을 노래했다. ·
장흥 ‘예양강·봉명정’ 풍광을 중국의 ‘악양루·황학정·등왕각’에 빗댈 정도로
장흥선비들은 고향땅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자료별첨>
- <봉명정>, 신잠·백광홍·백광훈·정경달·조여흠`임홍의`이민기…
- <동정>, 남효온
.................................................................................
13. <별첨자료> - 봉명정(동정) 한시
· 남효온 (1454~1492)
汭陽江東亭, 留別慶會 -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에게 이별시를 드림.
冠山雖麗非吾土, 別來五年紅顔蒼
相逢數日又相別, 淸淚浪浪落離觴
汭陽江水琉璃碧, 化落春光歸半强
聖朝一才無棄擲, 如君詞藻孰能忘
雷陽春竹南人思, 寇公應入中書堂
寄語努力加식飯, 鶴書赴隴今當忙
春天祖席東亭上, 竹馬情懷太堪傷
관산 수려해도 내 고향 아니거니
이별한지 다섯 해에 홍안은 늙었구려.
만난지 며칠만에 또 헤어지자 하니
맑은 눈물 샘솟아 이별 잔에 떨어지오.
예양강물 푸르기 유리구슬 같은데
꽃 지자 봄빛도 마지못해 돌아가네.
성군께선 한 인재도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 같은 글재주를 그 누가 잊으리오.
뇌양의 봄 되보면 그대 생각 날것이니
구공도 마땅히 중서당에 들었었소.
부탁노니 애써서 밥 거르지 마시오.
조정 소환 집에 올 날 이제는 바쁠게요.
봄날에 송별 자리 동정을 펼쳐주니
옛 친구 정회로 이 슬픔 견딘다오. (역, 김성언)
<해설> 여기의 '경회 윤구'는 연산군의 외삼촌으로 장흥 땅에 유배를 왔다.
추강의 조대기에 "광(廣)주이씨 이침"과 함께 등장하며, '장흥 우음'에도 등장한다.
"예양강수유리벽"이란 문구가 예사롭지 않다. 장흥의 별호 하나가 "벽사'인데,
추강의 별호이기도하다. 영천 신잠도 '예양강물의 푸르름'을 노래한 바 있다.
· 신잠 (1491~1554)
鳳鳴亭 -在府之東門外
伊昔何時有鳳鳴 저 옛날 언젠가 봉황이 울었었지.
亭今獨在만稱名 정자만 홀로 남아 그 이름 무성하네.
依依山影自朝暮 산 그림자 온 종일 의의롭게 늘어지고
袞袞行人相送迎 사람들은 곤곤하게 맞이하고 지나보낸다.
獨對斜陽共寂寞 석양에 홀로 마주서니 온 세상 적막한데,
幾經世變空崢嶸 뒤집히는 세상사에 변함없이 우뚝 서있네.
我來最晩更流落 지금 여기 이제와 시작하는 타향살이
훼훼不聞雙淚傾 봉황 울음 듣지 못해 두 눈물 흐르네. (역, 박형상)
<해설> 영천 신잠은 1521년에 장흥에 유배와 무려 17년간을 보냈다.
장흥의 예양서원(오현사)이 있기이전에 <신잠사>에 그 한분을 먼저 모셨었다.
기산8문장의 김윤, 장흥의 문과급제자 김희련, 기봉 백광홍이 그 제자이다.
'훼훼"는 봉황의 울음소리라 한다.
첫부분의 "유봉명"과 마지막의 '훼훼불문"을 호응시켜 옮겨보았다.
· 백광홍(1522~1556)
又呈七律 (다시 칠언율시를 올리다.-영천 선생에게 바치는 시)
南中何處最淸凉 남녘 땅 어느 곳이 가장 맑고 시원한가
鳴鳳高亭檀一鄕 명봉정(鳴鳳亭) 높은 정자 한 고을에 으뜸일세.
楹立汭江魚鱉背 정자 기둥 예양강의 고기등에 솟아있고
甍連獅嶽桂衫香 사자산에 잇닿아 계수나무 향기롭다.
嵐粧石色前峯白 이내가 돌빛 꾸며 앞 뫼는 희디 흰데
鷺拂楊化遠浦蒼 백로는 양화(楊化)털고 먼 포구는 아득하다.
爲送靈川還北路 영천 상공 북녘으로 가는 길을 전송하매
王孫原草斷離腸 들판에 왕손초는 이별 애 끊나니. (역, 정민)
<해설> 앞서말한대로 기봉 백광홍은 영천 선생의 말년 제자로 짐작되는데,
영천 선생이 태인 현감으로 부임해가면서, 그곳의 일재 이항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된다.
<기봉집>에는 유배지 장흥을 다시 찾아온 영천 선생을 기봉이 각별하게 모시는 시가 있다.
여기의 '왕손초'는 '이씨 왕손'이란 뜻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중국 강남땅에 유배 또는 유랑하는 귀한 신분의 사람. 또는 그 곳 남쪽 유배지의 풀을 지칭한다
· 백광훈(1537~1582)
鳳鳴亭下次韻 (봉명정 아래서 차운하다.)
長橋日映水如天 긴 다리에 해 비치고 물도 하늘빛인데,
鶯전孤城柳不煙 꾀꼬리 우는 외로운 성에 버들가지 휘날린다.
最是江南好風景 이게 바로 강남에서 가장 좋은 풍경일레라.
釣磯深處倚竿眠 낚시터 깊숙한 곳에서 낚시대에 기대존다. (역, 이하상)
<해설> 옥봉은 기봉의 동생이다. 요절해버린 형 대신에 우리 장흥 띵을 빛낸 분이다.
여기의 "긴다리(장교)"는 아마 그때의 "예양강 대나무 다리(죽교)"였을 것이다.
옥봉 선생은 예양강 봉명정 풍광을 "강남호풍경"이라고 극찬했다.
"옥봉의 조기"는 그 전대의 "추강 조대"와도 그 맥락이 통할 것이다.
어떤 이는 예양강을 "강태공의 위수"로, 어떤 이는 "엄자광의 동강"으로 보았다.
· 정경달(1542~1602)
鳳鳴亭
山濕今朝雨 산은 축축한데 오늘 아침 비가 내리니
溪含昨夜雲 계곡은 어젯밤 구름을 머금었지.
西林僧有路 서림사 스님 길이 있어
芝蕨自芸芸 지초와 고사리로 저절로 많다네. (기산문집, 김규정)
鳳鳴亭
綠楊江水野烟生 푸른 버들 강물은 들에 연기를 일으키고
舞蝶飛花滿鳳鳴 춤추는 나비 달리는 꽃은 봉명정에 가득하네.
人去酒醒春菽菽 사람은 가고 술은 깨었으나 봄은 조용하고 쓸쓸해.
一聲鳴鳥下西城 한 마디 새 울음 소리 서쪽 성에 내려 오네.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책 가운데 어제의 잘못을 깨우쳤다 했으니
寒暄有語得依歸 한훤당(김굉필) 말씀 얻어 돌아와 의지하리.
優游涵泳無窮樂 조용히 학문의 깊은 뜻을 완미하는 끝없는 즐거움
顔孟何人亦庶幾 안회와 맹자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되려하는가? (기산문집, 김규정)
<해설> 충무공 이순신의 종사관, 그 반곡 선생이다.
선생을 무반으로 곧잘 오해하는데, 그는 대과 급제자이고, 그 아들 정명열도 대과급제하였다.
기산문집의 번역원문을 그대로 소개하긴 했으나, 차후 편액 현판작업을 감안한다면,
"일성명조하서성"은 "봉명조양"에 호응시켜 고쳐보고,
"ㅡ亦庶幾" 부분 의미도 더 살려보완했으면 한다
· 조여흠(1549~1579)
題鳳鳴亭
鳳鳴亭上又淸秋 봉명정 위엔 높고 푸른 가을하늘
地戴明公淑氣浮 대지 위에 우뚝 서 맑은 기운 넘쳐나네.
踈雨白鷗汭浦曲 성긴 비속에 백구는 예양굽이 넘나들고
落霞孤驁壯元頭 지는 가을놀 장원봉엔 홀로 해오라기
仁風蕩蕩草從偃 인산의 탕탕한 바람에 풀들은 드러 눞고,
恩澤汪汪水共流 은택은 깊고 넓어 물처럼 함께 흐른다.
夜靜餘閒看物象 고요한 밤 여유롭게 제 모습들 보여주니
世間別境更何求 이 세상 별경을 어디가 찾겠는가? (역, 박형상)
<해설> 취곡 조여흠 선생 역시 소과 급제자인데,요절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봉명정 자체를 "명공"으로 보았다. 그의 <봉명정중수기>가있다.
장흥성읍의 "예양강(곡),장원봉(두)" 실경을 노래했다. "수인산 인풍, 대야 은택"으로 빗대볼만하다.
- 重修鳳鳴亭序 (조여흠)
봉명정 위치를 “.鳳鳴亭, 재장흥부 동문외, 예양강상, 개(蓋)국초 부사변포건야 …
… 유정고치 예강지곡 (有亭高峙 汭江之曲)….....”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임홍의
鳳鳴亭
亭上靑山亭下流 정자 위 푸른 산 정자 아래 흐르는 물
長堤十里暮烟脩 긴 뚝방 십리길에 저녁연기 멀다.
滿目風光吟不盡 눈 가득한 풍광 다 읊을 수 없어
洞賓誰識岳陽樓 동빈 도사라도 어찌 악양루를 기억할까.
<해설> 여기의 "장제십리"는 오늘날의 "장흥 예양강 뚝방길"과도 그 맥락이 통할 것이다.
"여동빈"은 중국의 악양루에 그 이야기가 남아있는 중국의 도사이다.
추강의 장흥우음이나 여타 시에도 여동빈은 등장한다. 이에 이런 전고도 있거니와
기산마을에서는 달리 악양루를 찾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기산문집의 '(기산)동네손님'을
'악양루의 동빈도사'으로 고쳐 옮겨보았다.
ㅡ한편, <안양 기산의 봉명정> 쪽은 "안양 기산 8문장을 낳은 봉명재를 기리는 봉명재정"
또는 "오래전에 없어진 예양강 봉명정을 기려 후대에 기억해본 봉명신정"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 이민기 (1646~1704)
鳳鳴亭用黃鶴樓韻
三盃取醉誰家酒 석잔에 취해보면 뉘집 술인들 어떠랴.
百尺登臨郡郭樓 백척 성곽루에 올라 온 고을 내려다 본다.
行路古今人去去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제 갈길 오고가고
源泉晝夜水悠悠 샘물은 쉼 없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만 가네.
亭空樹老殘橋外 잔교 옆 텅빈 정자에 세월을 머금은 나무
鳥宿烟沈芳草洲 자욱한 안개에 새는 잠들고 꽃들은 피어난다.
千載鳳鳴名獨在 천년전 봉황이 울었거니 그 이름 남아있는데
丈夫無事任閒愁 장부 할 일 없음에 깊은 근심에 빠져드네. (역, 박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