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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도 시의 명물, 물의 거울
오늘부터 예고 드린대로 <프랑스의 역사 문화 기행> 대장정이 시작됩니다. 프랑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흥미있는 역사적인 사건과 문화, 관련 인물들(문인, 화가, 과학자, 음악가, 장군 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울러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지방마다의 대표적인 와인 등에 관힌 얘기도 함께 곁들일 예정입니다.
방대한 자료들을 살피고 요리하면서 유익하고 재미있는 글이 되도록 힘써 보렵니다. 이 글도 앞으로 혹시 프랑스를 여행하실 때 요긴한 가이드 북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안내 순서는 아래 프랑스 지도에서 왼쪽 보르도 지역을 시작으로 프랑스 남쪽을 소개하고 이어서 중부와 북쪽 그리고 파리를 향하여 시계바늘 반대방향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갈 예정입니다.
[ <수상록>의 작가 미셸 드 몽테뉴의 고향을 찾아 ]
보르도라면 누구나 포도주를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명주(名酒)인 포도주는 프랑스에서도 남서부 지역의 보르도 지방이 명산지입니다.
보르도 서북쪽, 가론느 강과 도르도뉴 강이 합류해 흐르는 지롱드 강의 서안(西岸)인 메독 지역은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등 세계 최고급 적(赤) 포도주의 주고(酒庫)가 있는 곳입니다.
보르도 동쪽의 생테밀리용은 포도주 애호가들이 흔히 찾는 상표의 이름입니다. 보르도 남쪽의 그라브나 소테른은 백(白) 포도주로 이름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 지롱드 강을 사이에 두고 포도주의 명산지 메독(욍편)과 생테밀리옹(오른편)이 보입니다.
붉은색의 생테밀리옹 바로 오른편이 몽테뉴의 성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르도에서 936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으로 갑니다. 지롱드 강의 두 지류인 가론느 강과 도르도뉴 강이 가지를 벌리며 껴안은 이 길의 연변(沿邊) 일대를 앙트르 되 메르(두 바다 사이)라고 부릅니다.
하항(河港) 보르도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때는 앙트르 되 메르 산(産)의 백포도주를 8도 내지 10도의 온도로 마셔야 제격이라고 합니다. 주향(酒香)이 벌써 코 밑을 간지릅니다.
길 양쪽은 등성이의 비탈마다 포도밭입니다. 밀밭이 둘러싼 숲 사이를 길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나지막한 구릉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도르도뉴 강을 건너 카스티용 라 바티이유까지가 보르도에서 44km. 여기서 소로(小路)로 빠져서 동북쪽으로 9km 더 가면 생 미셸 드 몽테뉴 마을에 닿습니다. 침침한 숲을 헤치고 언덕으로 올라서면 하늘이 탁 트이면서 교회가 막아섭니다.
그 교회 옆에 석비(石碑)가 하나 서 있습니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를 찬양하여>. 수상록(隨想錄)의 저자 몽테뉴의 영지(領地)에 온 것입니다.
마을이라야 인구 겨우 5백 남짓. 지대 높은 곳에 농가들이 띄엄띄엄 퍼져있습니다. 몽테뉴 때는 생 미셸의 교구(敎區) 마을이던 것이 프랑스 대혁명 이후 본바르 교구와 합쳐져 생 미셸 드 본바르로 불려오다가 19세기 말에 마을이 낳은 대사상가(大思想家)를 기려 생 미셸 드 몽테뉴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마을 어귀를 지키는 고색 짙은 교회는 몽테뉴 일가의 영묘(靈廟)입니다. 안에는 몽테뉴의 아버지와 어린 나이로 죽은 몽테뉴의 자식들, 그리고 손녀, 증손녀들이 무덤으로 줄줄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4백년이란 세월의 퇴적이 한눈에 보입니다.
교회 맞은편이 몽테뉴의 영지 입구입니다. 고목의 서양 삼나무가 두 줄로 도열한 가로수 길이 길게 뻗쳐있습니다. 몽테뉴의 조부가 만들었다는 이 길로 공원 같은 녹지를 지나면 막이 열리듯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관(城館)이 나타납니다.
원통형의 높다란 탑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몽테뉴의 <수상록>에 나오는 유명한 탑입니다. 탑 바로 밑의 석벽(石壁)에 조그만 문이 달려 있습니다. <수상록>에서 "두드리는 사람에겐 아무에게나 열려 있다"던 문입니다.
본채는 개인 살림집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탑만 공개합니다. 대상인(大商人)의 집안이던 에켐 가(家)는 몽테뉴의 증조부 때인 1477년 이 성관과 영지를 사들여 귀족이 되었으며 아버지 때에 몽테뉴 가(家)로 성씨(姓氏)를 고쳤습니다. 몽테뉴는 이 성관에서 태어나 여기서 <수상록>을 쓰고 죽었습니다.
1885년 가정부의 촛불 부주의로 불이 나 본관은 순식간에 타버리고 따로 떨어진 탑만 살아 남았습니다. 몽테뉴가 태어난 방은 없어졌지만 그가 <수상록>을 집필하던 탑의 서재는 다행히 현존하게 되었습니다.
성관은 1811년까지 몽테뉴의 후손이 살고 있다가 팔아 버린 뒤 한때는 소작인들이 관리하여 탑은 창고로 쓰이는 등 버려진 상태에 있기도 했고 1860년 나폴레옹 3세 때의 재상(宰相)이던 마뉴가 사서 지금 그 증손녀의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 본관은 화재 이듬해에 복구하면서 옛 스타일에 새 맛을 가미했습니다.
* 본관
몽테뉴는 35세 때인 1568년 아버지가 죽자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영주가 되었고, 1570년 보르도에서의 법관생활에서 물러난 후 이 성관으로 돌아와 은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성관의 탑 3층의 서재에 붙은 방에는 벽에 라틴어로 새긴 그때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지금도 또렷합니다.
" 기원 1571년 만 38세에 이른 미셸 드 몽테뉴는 오랫동안의 고등법원의 예속생활에 지쳐 아직 혈기는 있으나 여생의 나날을 편안히 지내려고 한다...."
몽테뉴는 자저(自邸)로 돌아와서부터 탑 속에 스스로 갇힌 채 명상의 생활을 시작하여 내성(內省)의 문장을 수시로 썼고 10년 만인 1580년 2권 94장의 <수상록>으로 묶어 첫 출판을 했습니다.
이듬해 보르도 시장(市長)으로 다시 출사(出仕)했다가 5년 만에 도로 돌아와서는 집필을 계속하여 제3권을 추가한 <수상록>의 신판(新版)을 1588년에 냈습니다. 이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4년 동안은 이 1588년판 한 권을 곁에 놓고 매일 보필수정(補筆修正)을 가하는 작업이 탑에서의 일과였습니다.
그가 죽은 후인 1595년 가필한 수정판이 나와 이 <보르도 판>이 오늘날 <수상록>의 결정판입니다. 보르도의 시립도서관에는 몽테뉴가 1천 4백 군데나 손질한 1588년판 <수상록>의 수택본(手澤本)이 진열되어 그의 사상의 각고(刻苦)를 촌탁(忖度)케 합니다.
* 촌탁(忖度) : 남의 마음을 미루어서 헤아리다
성관의 탑은 <수상록>의 제3편 제3장에 소개된 것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서재는 3층에 있다. 1층은 예배당이고 2층은 침실과 거기 딸린 방인데 나는 때때로 혼자가 되기 위해 여기서 눕는다..."
맨 아래층의 원형 예배당은 10명 정도가 들어앉을까 말까합니다. 몽테뉴가 태어났을 때 영세 받은 곳이 이 예배당인지 아니면 마을 입구의 교회인지 분명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좁다란 나선형 계단으로 2층의 침실로 오릅니다. 이 침실과 아래층 예배당과는 통구(通口)가 뚫려있어 몽테뉴는 이따끔씩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예배를 보았습니다. 침실에는 말안장들과 여행용 궤짝이 놓여 있습니다.
<수상록>의 제3권 제9장에서 몽테뉴는 침대 위에서 보다는 집 바깥에서 말 위에 탄 채 죽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방에서 죽었습니다.
3층의 서재는 몽테뉴가 <수천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방>이라던 곳입니다. 그 책들이 지금은 한 권도 없습니다. 몽테뉴의 딸이 어느 수도원에 기증했는데, 1683년 이래 이 책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서재에는 낡은 책상과 뼈대만 앙상한 의자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몽테뉴의 사색의 잔해(殘骸)입니다. 천장을 올려다 보면 들조들에다 몽테뉴가 좌우명(座右銘)으로 손수 새긴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명귀(名句),격언(格言)들이 빽빽합니다. 모두 54개나 됩니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내게 이싱하지 않다"-<수상록> 제2권 제11장
"자기가 아는 것을 과신하는 사람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수상록> 제2권 제12장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수상록> 제2권 12장 등등...
몽테뉴는 이따끔씩 이 명귀(名句)들로 붓을 갈며 <수상록>을 이 방에서 썼습니다.
<수상록>에는 "내가 탑에서 거처를 할 때 매일 아침 큰 종이 아베 마리아를 울렸다"(제1권 23장)고 쓰여 있으나 탑의 맨 꼭대기에 있던 이 종각(鐘閣)은 지금 없어졌습니다.
서재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파노라마는 몽테뉴가 여기 섰던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2백 헥타르나 되는 성관에 딸린 영지의 들판과 숲이 아득히 시야에 들어옵니다. 맑은 날은 전망이 20km 너머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낮은 언덕들은 리드와르 주(州)의 계곡으로 잦아지고 일대는 여기도 주로 포도밭입니다. 몽테뉴도 "포도밭이 이 고장의 주자산(主資産)"이라고 했습니다.
[ 몽테뉴와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프랑스 모럴리스트 문학(1)의 선구자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특색이 인간을 성찰하여 인간성을 분석. 탐구하는 모럴리스트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 교본(敎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입니다.
3권 107장으로 된 수상록은 작자가 읽은 책에 대한 감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自省) 등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많은 예해(例解)와 인용(引用)을 섞어 심사(深思)하고 통찰하여 인간 지식을 집대성(集大成)한 것으로 그 지혜로운 말들은 인류의 고전(古典)이 되어 셰익스피어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혀 옵니다.
"Que Sais Je(끄 세 즈-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한마디는 <수상록>의 제2권 12장에 나옵니다.
* 보르도시 몽테뉴 거리
[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
아래 글은 일본의 저명한 작가 훗타 요시에(2)의 명저 <미셸 성관의 사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세계는 소용돌이치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세계인식은 심각한 진동에 휩싸여 있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혼란은 당장이라도 정치화하여 처참한 전란으로 치닫고 있다.
보편적 세계종교로 자타가 인정하던 로마 교회에 공공연히 저항하고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으로 유럽의 절대적 정신기반인 기독교에 균열이 생긴 전대미문의 사태! 이제 새로운 시대는 칼과 전쟁이 아닌, 지혜와 교양을 가진 인간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미셸 성의 고독한 운둔자이자 프랑스 왕정의 실력 있는 시종무관 미셸 드 몽테뉴! 그는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쾌락주의적 천성과 스토아주의적 절제라는 양극적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자연적 이성과 격정적 감성의 충만한 합일을 꿈꾼 자유주의자였다.
<에세>라는 위대한 시대적 유산을 낳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는 극심한 내전(3)의 혼란과 광분의 유혈전장 속에서 정신의 피뢰침을 높이 치켜들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한복판을 그렇게 건너갔다.
너무도 비극적이며 너무도 희극적인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노츨된 그 시대는 이른바 '관절이 어긋난 시대'였다. 광분의 종교적 전쟁이 나은 유혈과 비이성이 이 역사 풍경화의 표면적 테제라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라는 인문주의의 거대한 태동은 이면의 안티테제다.
이 역사에서 유혈만큼 빨리 잊혀지는 것도 없다. 인간의 피는 땅에 흡수되어 흙의 자양분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당시는 최악의 시대였고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도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몽테뉴의 찬란한 글은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량 살육을 저지르고 있던 군주와 귀족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고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정말 훌륭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설령 시대가 최악이었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보르도의 포도밭
[ 몽테뉴와 글쓰기 ]
프랑스 문학의 특징을 말할 때 앞세우는 것 중 하나는, 그 큰 물줄기 속에 철학(사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입니다. 각 시대에 따른 사조 일반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각 개인의 문학세계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친숙한 예로 사르트르(4)를 들자면, 그는 문학사에서도 크게 다루어지고 철학사에서도 크게 다루어집니다. 이런 전통의 줄기를 더듬어가다 보면, 몽테뉴에 이르러 그 뿌리를 만나게 됩니다. 문학과 사상의 행복한 결혼-이것이야말로 글쓰기의 고귀한 지향점이라면, 그 전통의 문을 연 것만으로도 몽테뉴는 의미심장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몽테뉴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분들은 대개 몇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몽테뉴는 <에세> 한 책으로 문학사의 한 장이 되었다는 것, 또한 우리가 '에세이'라고 부르는 글쓰기 방식은 몽테뉴의 '에세'에서 유래했다는 것 때문에 문학사전 같은 책을 보면 몽테뉴를 '에세이(수필)'의 비조(鼻祖)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 비조(鼻祖)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또는 모든 사물의 시초를 말한다.
鼻 : 코 비 祖 : 조상 조
옛날 중국에서는 사람이 모태(母胎) 속에서 자랄 때, 맨 처음 코가 형태를 이루기 시작한다고 하여 코를 모든 사물의 시작으로 본 데서 비롯된 말이다.
그의 <에세>는 흔히 <수상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지만 그가 '에세'라는 용어로 자신의 글쓰기를 규정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입니다. 그저 심심풀이 삼아, 마음속에서 걸핏하면 '뺑소니치는' 생각들을 붙잡아 '보겠다'는 것이지요.
그의 글쓰기를 상상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무슨 책을 읽다가 어떤 구절이 문득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자 전에 읽었던 일화며 전에 겪었던 일들이 두서없이 기억에 떠오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왜냐하면 그는 자주 고백하고 있듯이 기억력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얼른 책상 앞으로 가서는, 공책에다 구절을 적고, 일화를 적고, 추억을 적고, 그것들을 자신의 생활 및 사고방식과 비교하여 주석을 덧붙입니다. 그래서 몽테뉴는 자신의 책을 몽상과 망상과 추억과 성찰의 '잡동사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체 또한 무슨 거창한 담론을 피력하는 투가 아니라, '우스꽝스럽고, 개인적이고, 간결하고, 난잡하고, 토막토막 끊기고, 밋밋하고, 노골적이고, 상스럽고, 딱딱하고, 거만하고, 유창하지도 않은, 말하자면 '시장바닥에서 쓰이는 말투'인 것입니다.
이런 문체로 쓰인 '잡동사니'를 읽어가다 보면, 어느 결에 우리는 옛 선현들과 만나고 있고, 아픈 현실을 지나가고 있고, 더 나아가 인간성의 본질을 사색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지요.
끝으로 몽테뉴는 한 위대한 작가,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꽃을 피운 르네상스가 프랑스로 건너 온 시대였고, 그 르네상스의 도도한 흐름 속에 종교개혁에 따른 인간 해방이 합류한 시대였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종교적 분쟁과 정치적 투쟁이 맞물리면서 '성 바르텔르미의 대학살(4)'과 '세 앙리의 전쟁(5)'으로 이어지는 전란과 분열의 시대를 겪게 됩니다. 몽테뉴는 바로 그런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시대가 그랬기에 그는 성탑의 서재에 칩거했고, 회의(懷疑)했고, 망상과 몽상 속에서 사색의 금싸라기를 건져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대가 평온했다면 그는 결코 <에세>를 일궈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1) 모랄리스트 문학
16세기에 <수상록>을 쓴 몽테뉴를 필두로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문학이 절정을 이룬 것은 17세기의 고전주의 문학시대로, <잠언과 성찰>의 라 로슈푸코, <팡세>의 파스칼, <사람은 가지가지>의 라브뤼예르 등이 나왔다.그들은 한결 같이 있는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허심탄회하게 규명하고, 살아 있는 현실과의 접촉을 한시라도 잃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일상생활의 경험을 단편적으로 기술하고 이에 대한 처세훈(處世訓)을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보편적인 인간상을 그리려 하였다. 몽테뉴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인간조건의 완전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라는 말이 모랄리스트들이 보편성을 지향하는 근거이다.
몽테뉴의 친구 라보에시, 경건한 종교가 상 프랑수아 드 살, 철학자 데카르트, 우화시인 라퐁텐, 극작가 몰리에르, 가깝게는 아미엘, 베르그송, 알랭, 지드, 발레리, 보나르 등에서도 모랄리스트의 요소가 뚜렷하다. 프랑스 문학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모랄리스트적 요소이며 수많은 모랄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프랑스 문학의 근본적 특질이기도 하다. 모랄리스트란 한편으로는 도덕가란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모랄리스트와는 뜻을 달리 한다.
(2) 훗타 요시에
1942년 게이오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태평양전투시에는 중국에서 복무했다. 1951년부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고야>, <미셸 성관의 사람 :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 등의 저작이 있다.
역사와 시대, 사상과 철학, 예술과 종교의 문제를 긴 호흡과 통찰력 있는 사색을 통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요시에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적 작가이자 사상가로 명성과 존경을 받아왔으나 1998년 9월 5일 타계했다.
(3) 극심한 내전
프랑스에서는 1560년부터 1598년까지 거의 40년 동안 구교도와 신교도간에 지독한 종교전쟁이 벌어졌다.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염증을 느낀 신교도들은 성모 마리아와 성자 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신앙과 기도에 입각한 간결한 종교 의식을 행하였다.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종교 개혁의 선구자 루터와 칼뱅 사상이 유럽 전역에 마치 전염병처럼 널리 펴져 나갔다. 프랑스에서는 카톨릭이 신교도들을 완전 박살내려고 나서면서 내전이 벌어졌고 아는 프랑스를 극단적으로 양분했다. 드디어 끔찍한 생 바르텔르미의 신교도 대량 학살을 초래했다.
(4) 장 폴 샤르트르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소설가, 극작가. 1905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1980년 사망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 역시 남편에 버금가는 활동을 한 바 있다.알베르 카뮈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별명은 ‘실존주의의 교황’이었다고 한다.
파리에서 태어난 사르트르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이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아버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어린 사르트르는 외가로 갔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의 친할아버지였는데, 사르트르는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서재에서 마음껏 책을 보는 등 꽤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랑스 국립대학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동안, 사르트르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멸시했으며, 강의를 잘 듣지도 않았다. 또 단벌옷에 슬리퍼를 끌고 다녔으며, 주정뱅이로 보일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스물두 살에 소설을 썼으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재수 끝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르트르는 이 무렵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나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지만 삶의 반려자로 지냈다. 또한 두 사람은 서로의 자유를 위해 자식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사르트르가 이 학교를 수석으로, 보부아르가 차석으로 나란히 졸업했다.
1940년대 초반에는 독일군에 항거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직접 참여했고, 1945년부터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자유문필가로 살았다. 사유재산제를 반대했던 그는 집 대신 호텔에서 지내고, 카페에서 글을 썼으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1952년에는 공산주의 운동에도 가담했으나 그 후 당에서 나왔다. 1964년, 노벨문학상을 거절해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만 치우쳐 있어서 그 공정성을 잃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르트르는 작은 키에 사팔뜨기였으나, 유머러스한 성격 덕분에 사람들을 곧잘 웃겼다. 게다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열심히 귀담아 듣고 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이미 세 살 때 잃어버렸고, 1975년에 왼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져서 독서는 물론 집필도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1980년 4월 15일, 전부터 앓아온 폐기종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이었다. 저서로는 <존재와 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등이 있다.
(4) 성 바르텔르미 대학살
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위그노 전쟁(신구교도간의 전쟁) 중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가톨릭 세력이 개신교 신자였던 위그노인들에게 행한 대학살을 말한다. 학살이 시작된 8월 24일 밤이 가톨릭에서 예수의 12사도였던 바르텔르미의 축일이었기 때문에 성 바르텔르미 축일의 학살이라 부른다.
(5) 세 앙리의 전쟁
프랑스의 종교전쟁 중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세 사람의 앙리가 주축이 되어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세 사람의 앙리란 당시의 국왕인 발루아왕조의 앙리 3세, 그리스도교도인 부르봉가의 앙리 드 나바르, 가톨릭교도인 기즈가의 앙리 드 기즈를 가리킨다. 앙리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혈통상 왕과 가장 가까운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계승을 주장하였다.
가톨릭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에스파냐와 교황의 원조 밑에, 기즈공(公)을 중심으로 뭉쳐 왕을 파리로부터 추방하였다. 그러나 왕당파의 반격으로 기즈공이 암살되고, 왕도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되었다. 결국 앙리 드 나바르가 앙리 4세로 즉위하여 부르봉왕가를 열었다.
[ 보르도 시 명소 ]
* 보르도 생 앙드레 대성당
밖에서 이 성당을 올려다보면 햇살이 성당의 석조 탑과 외관을 살구색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신의 영광과 더불어 프랑스 역대 왕들의 흔적을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이 성당은 보르도만의 독특하고 특별한 그리고 입체적인 질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우뚝 서 있습니다.
1137년 이 성당에서 아키텐의 엘레오느르와 루이 7세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엘레오노르(1)는 중세 전성기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아키텐과 푸아티에 공작 윌리엄 10세의 딸로 태어나 장차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될 열다섯 살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결혼한 지 다섯 달 만에 프랑스 왕비가 되었습니다.
* 보르도 대극장(그랑 테아트르)
신고전주의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건물의 코린트 양식 기둥 꼭대기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뮤즈(예술과 학문의 여신)의 아홉 여신을 포함한 열두 여신이 서 있습니다. 저녁에 조명이 들어오면 이 여인들은 어둠 속에서 더욱 고귀하게 보이고, 낮에는 햇살 덕분에 이들이 입은 옷의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 물의 거울
라 부르스 광장의 ‘물의 거울’은 보르도시의 대표적인 명소입니다. 가로 130m, 세로 42m인 물의 거울은 바닥에서 솟아나 고인 물이 거울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주변 경관이 비칠 때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의 극치를 드러냅니다.
15분 간격으로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것도 볼만한데, 특히 밤이면 야경과 함께 물안개를 만들어 운치를 더합니다.
* 피에르 다리와 보르도 시청
열일곱 개 석조 아치와 철제스트리트 램프가 줄지어 서있는 고풍스러운 돌다리입니다. 고전주의 양식의 보르도 시청에서는 옛날에 몽테뉴가 시장으로 근무했을 당시를 회상해 봅니다.
* 카눌레 빵
보르도에서 꼭 한 번은 먹어봐야 할 명물 빵입니다. 이 빵은 일단 한입에 쏙 들어갈 만큼 아주 작습니다. 불에 탄 듯한 거뭇거뭇한 색깔을 한 원통 모양의 케이크인데, 겉에는 세로로 홈이 파여져 있습니다. 바깥은 딱딱한 듯 바삭하고 캐러멜처럼 쫀득하며. 안쪽은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바닐라향과 크림향이 진하게 납니다.
이 빵은 우리나라 빵가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엘레오노르
* 당시의 영국왕이 다스리는 지역은 빨간색 땅으로서 프랑스 왕이 다스리는 가운데 연두색의 조그만 지역
보다 훨씬 컸습니다. 영국은 원래 북쪽의 노르망디 반도지역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엘레오노르가 아키텐
을 가지고 헨리 2세와 결혼하는 바람에 이렇게 왕창 커지고 말았습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라고도 한다. 1137년 엘레오노르의 아버지 아키텐 공작 윌리엄이 세상을 떠나자 왕의 땅보다 더 넓은 영지를 상속하였다. 아키텐은 프랑스 남서부의 5개주를 합해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해 7월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다. 이후 1147년 남편과 함께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등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남자 저 남자와 바람을 피우면서 루이 7세와 갈등이 깊어져 1152년 이혼하였으며 몇 개월 뒤 다시 잉글랜드왕 헨리 1세의 손자 헨리와 결혼하였다. 이후 헨리는 1154년 헨리 2세로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를 비롯하여 노르망디, 프랑스 서부 등을 통치하였다.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의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두었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아키텐과 푸아티에의 영지 관리에도 힘을 쏟았다.
1173년 남편 헨리 2세와 불화를 겪던 중 아들 리처드와 존이 어머니를 구박하는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였다. 아들들의 반란이 실패하자 붙잡혀 감금되었으며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한 뒤 풀려났다. 이후 리처드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존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도와 잉글랜드의 영토를 지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 엘레오노르의 두아들, 리차드와 존
사자왕 리차드
‘사자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했다. 훗날 로빈 후드 전설이라든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등을 통해서 중세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사자왕’ 이라는 별명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십자군 전쟁(3차) 시 적군인 이슬람군이 붙였다고 한다. 사자왕 리차드는 항상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용맹함은 적군도 감탄을 했다고 한다. 사자왕 리차드 1세는 중세 유럽인들보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에게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리차드 1세는 기사도 문화의 전형이었다. 교양 있고 행동거지도 세련되었으며 심지어 시인이기도 했다. 또한 대담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한 마디로 문무가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당한 풍채를 지녔으며 큰 키에 금발 머리, 강한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몸을 돌보지 않는 희생정신으로 부하들의 존경심과 강한 충성심을 얻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리차드의 동생인 존 왕은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들에게 ‘마그나카르타’를 강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존은 전쟁만 하면 지고 땅은 땅대로 뺏기는 칠칠치 못한 주제에 세금만 잔뜩 부과하니 귀족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아둔한 그는 대부분의 프랑스땅을 빼앗겼다.
마그나 카르트(대헌장)에 서명하는 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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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장정을 거북이 걸음이나마 같이 하겟읍니다
프랑스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어 새로히 공부하는 자세로 임하겟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