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일 수 있고 봉지일 수 있고 아스팔트일 수 있다 이것이 자두의 힘이다 자두의 힘이 가능하다면 가능한 만큼 출렁대고 있다 멀리서부터 자두가 느껴진다 폭발된 맛이 느껴진다 저녁의 모양으로 바로 선다 피시방으로 가는 자두 자두의 보폭은 다정해 자두의 어둠은 자두의 죽음보다 강하고 비로소 자두의 어깨를 만져본다 자두여 자두를 버린다면? 자두의 탄생을 잃는다면? 벌벌 떠는 나에게서 자두가 열린다면? 자두 두 개가 꼭 붙어서는 무한대로 번식한다 ‘자두 에프’ 당돌한 명명 자기복제의 자두와 자두들 왜 자두냐고 물으면 그것은 자두가 보았으므로 삼천원어치의 자두가 나뒹굴었으므로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났으므로
울지
다리 없는 것이 몸 전체로 힘을 주니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니 그것이야말로
절대 자두여야만 한다
⸻시집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 김기형 / 1982년 서울 출생. 2017년〈동아일보〉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이 시집의 첫 시인 「자두 f」는 모종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다.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시집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감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자두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두는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이다. “나뒹”군 자두는 울지만, “다리 없는” 자두는 “몸 전체로 힘을 주”며 “안으로 근육을 일으”킨다. 그러니 그것이야말로 ‘절대 자두’여야만 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울음을 힘과 가능성으로 전환시키는 시인의 시작은 우리에게 스며든다. ‘절대’라는 수식어를 통해 용기를 부여하는 시인의 손을 마주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절대적 자두는 우리의 두 손에 가득 담긴다. 우리는 이로 인해 충만해진다. ‘절대’라는 수식어는 힘이 세다. 안희연 시인의 발문은 우리에게 이러한 감정을 더욱 확신하게 해준다. “시인이 내민 것이 그러하니 이쪽의 우리들도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 여기 울고 있는 영혼이 있구나. 불을 갈망하는 목소리구나. 이 모든 건 살아 있다는 뜻이구나. 아프구나.”라는 뜻이 지금-여기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지만 이 모든 시는 기형의 손으로 쓰였다. 이 모든 게 기형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게 좋다. 세상이 정의하는 기형의 의미를 비켜나는 방식이어서 좋다. 매 순간 간절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서 좋다. 기형의 시는 기형의 시. 당신도 이 좋음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기형의 시」 중).”는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다시 한 번 시의 근원은 시인이고 시인의 근원은 시이다. 시인이 없다면 시가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가 없다면 시인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김기형 시인과 그의 시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시적 사유를 이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바라보며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라는 물음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은규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 시집 『다정한 호칭』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과정 졸업. 현재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