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5년(1510)에 삼포왜란이 발발하였다가 진압되었고
임신약조(壬申約條)를 통하여 제포 한 포구만을 개방하고 세견선을 줄이고 주모자를 체포하는 것 등으로 대마도와 협상을 이루었지만,
일본내에서는 이미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원래도 느슨하였던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통제력은 더욱 악화된 데다가,
1540년대 부터는 일본 큐슈지역 다이묘들과 결탁한 왕직같은 중국 해적세력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여 동아시아의 해역은 혼돈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이들의 주 침공 목적지가 중국이었기에 조선은 큰 피해는 없었으나,
이따금 연안지역에 표류 혹은 약탈하는 중국 선박들(황당선)이 도착하거나,
해상에서 당인 혹은 왜구들과 소규모 전투가 발생하여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방패사이로 엿보는 왜구를 방패 틈으로 화살을 쏘아 맞추었다는 기록이 나타난 때가 바로 이 시기.).
그래도 왜구가 조선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는 행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구의 선박 20여척이 남해안 섬에 정박하고 진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중종39년(1544)4월12일 새벽3시경
왜구는 선박 20여척을 사량진 동강어구에 돌입시켜 포위시키고는
200여명의 인원을 선발하여 사량진을 뒤에서 포위하여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침입해온 왜구는 갑주를 갖추고 있었으며,
궁시와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기구(아마도 사다리)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이 침입이 다른 전투들과는 달리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조선의 군진을 함락시키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군은 화살을 쏘고 사다리를 타며 공격을 하였는데,
당시 사량진을 수비하고 있던 만호 유택(柳澤)은 군사들을 이끌고 방포하는 한편(아마도 사전총통이나 팔전총통같은 화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화살을 난사하며 대응하였는데,
한참동안 접전하다가 날이 밝을때까지 전투가 지속되는데 남쪽 모퉁이 옹성이 무너지고
그 쪽으로 왜군이 들어오려 시도하는데
만호 유택이 직접 군관들을 이끌고 가서
성으로 침입해들어온 왜구들에게 화살을 날려 왜구 지휘관 한명을 죽이고 목을베니
오전11시경이 되어서야 왜구는 물러갔습니다.
조선군은 전사자 한명에 부상자가 10명이었고
왜구는 화살에 죽은사람이 20여명이었으나 그들을 모두 배에 태워 돌아갔으며, 그 외에 활 18정, 도자 3구, 화살집 10, 갑옷 5, 장창 7, 대환도 1를 얻었습니다.
성이 포위당했을때 이미 위급함을 알렸지만 적량 만호(赤梁萬戶) 김희장(金希章)과 소비포 권관(所非浦權管) 금팽조(琴彭祖) 등은 전투가 이미 끝난 그날 오후에나 비로소 왔고,
가배 권관(加背權管) 남자용(南自容), 당포 만호(唐浦萬戶) 김준(金俊), 고성 현령(固城縣令) 봉귀달(奉貴達) 등은 다음날인 13일에나 도착하였습니다.
사량도에 있는 사량진은 고려말에 최영이 왜구를 방비하는 체계를 갖출때 부터 세워진 곳 이었는데(그래서 최영장군 사당도 있습니다),
육지와 떨어진 섬이어서 방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성종시절 그리고 연산군시절에 꾸준히 사량진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사량진을 폐지하면 왜구가 사량도를 통하여 조선을 침략하기 쉬워진다는 의견도 아울러 꾸준히 제기되어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량진 왜변은 삼포왜란이후 왜구가 작정하고 조선의 군사시설 함락을 목적으로 공격을 한 사건이었기에 조선조정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와서, 왜인들에 대한 강경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삼포왜란 이후 줄어든 세사미두(歲賜米豆)의 확대를 위하여 이번 침략을 방임 혹은 동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까지 나와서 절왜론(切倭論)까지 대두되었으나,
소이전(쇼니씨)과 국왕사(國王使)만을 받아들이고 대마도와는 교류를 끊겠다는 입장으로 결론 지었다가,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거상이 끝난 명종2년(1547)에가서야 대마도의 지속적인 요청과 더불어,
조정의 여론도 당시보다는 잠잠해져 다시 정미약조를 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해안은 안정되지 못하고, 되려 왕직 서해와 같은 중국해적과 결탁하여 왜구의 배는 점점 대형화 되고,
비록 소수기는 하지만 조총 등의 화약병기까지 갖추는 등 전력이 이전보다 강화된 왜구의 침입을 맞딱뜨리다가 을묘왜변을 마주하게 됩니다(을묘왜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을묘왜변1,2를 참조).
사량진을 수비하였던 만호 유택은 일각에서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진이 포위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경상우병사 김일과 경상우수사 허연 등이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는 죄로 체직당한데 반하여,
유택은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여 진이 함락당하지 않게 하였다는 공이 있었기에 중종이 끝까지 보호하였습니다.
대마도와의 통교거부가 대세였던 명종즉위년(1545) 성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홍문관의 한 관리는 상소를 올려
성리학적 화이론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대마도와의 관계를 사량진 왜변 이전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주장했는데 그 해에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해에 또한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고향으로 낙향하고 자신의 아호를 토계에 퇴계로 바꿉니다.
첫댓글 캬. 좋은글 감사합니다.
재밌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ㅋ
그 홍문관의 관리가 퇴계 이황이군요
네. 그리고 저 상소의 이름은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 입니다~ ㅎ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라 더 흥미로웠어요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네요 ㅎ
조선군은 궁술빨로 커버가 가능한 소규모 접전에서 더 잘싸우는것 같아요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몰랐네요.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가 은근 많이 있습니다 ㅎㅎ
재밌어오
재밌다니 다행이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