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선교사(318 파트너즈 대표). ‘탈북자 구출’ ‘탈북자 북송 반대’ 하면 언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과거엔 탈북자 국내 입국, 인신매매 당한 탈북여성 구출 등을 했다면 지금은 꽃제비 돕기, 북한 지하교회 돕기 사역을 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로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 머물고 있는 그를 최근 방한 때 만났다.
▲ 318 파트너즈선교회 스티브 김 선교사 ⓒ유코리아뉴스 김성원
스티브 선교사의 원래 직업은 가구 도매업이었다. 이태리 가구를 중국에서 가공해 미국에 되파는 일이었다. 돈도 꽤 벌었다. 이 사업을 위해 스티브 선교사는 1987년부터 중국 광동성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만 해도 조중 접경지역이던 길림성이나 흑룡강성은 스티브 선교사의 관심 밖이었다.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광동성 심천시의 한 한인교회에서 새가족반을 맡고 있던 그는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한인 신문에 교회 광고를 내기로 했다. 1만명 가까운 한인 사업가들이 머물고 있는 심천시였지만 교회 출석자는 세 한인 교회를 합해도 250명이 안됐다. 한 명이라도 믿는 자들을 방황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사명에서 공안의 눈을 무릅쓰고 광고를 감행한 것이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수많은 한인들이 찾아오며 이 교회는 상해 이남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탈북자들이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탈북자들이 홍콩 접경 도시인 심천시까지 찾아오게 되었을까. 배경은 이랬다. 탈북자들의 탈북 루트는 원래 몽골이었다. 중국 북동부에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길이었다. 그만큼 탈북자들에게는 위험한 길이었다. 결국 90년대 말 중국 공안의 급습으로 이 길은 막히게 된다.
그러자 탈북자들은 홍콩으로 오는 길을 선택했다. 길림이나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며칠씩 걸려 광동성을 찾고, 여기서 다시 홍콩 접경도시인 심천 국경을 넘으려면 생명의 위협을 무릅써야 했다. 하지만 이중 철조망을 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갈 데 없고 허기진 탈북자들은 결국 한인 신문 광고를 접하고 한인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처음 탈북자들이 교회에 찾아왔을 때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목사님이나 교회에 보고하면 ‘위험하니까 빨리 내보내라’고 말하기 일쑤였지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위험에 빠진 탈북자들을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생각했죠.”
할 수 없이 스티브 선교사는 그 탈북자들을 자신의 아파트에 데리고 같이 살았다. 그러다 탈북자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아파트 한 채를 아예 따로 임대해 살게 했다. 계속해서 탈북자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나중엔 여러 채의 아파트를 임대하기도 했다.
스티브 선교사의 마음속엔 그저 가난하고 굶주린 탈북자들을 먹이고 돈 벌게 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한사코 귀향을 반대했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행이었다. 탈북자를 접해보지 않았던 스티브 선교사로서는 난감했다. 탈북자를 한국에 보내는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한국에 있는 탈북자에게 문의를 했지만 거액의 수고비를 요구해왔다. 그때 한 교회 관계자로부터 ‘탈북자들이 베트남을 통해 한국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수소문을 해 베트남의 한인 선교사와 연락을 한 후 직접 베트남을 찾아갔다. 그 선교사의 소개로 베트남 현지인 동생을 통해 탈북자 구출 계획을 짰다. 중국을 거쳐 베트남에 오면 다시 캄보디아로 보내 그곳의 선교사님을 통해 2~3개월 신앙훈련을 시킨 뒤 태국 방콕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시키는 루트였다.
비용도 스티브 선교사가 다 댔다. 한 번에 9~10명씩, 1인당 600달러를 줘야 했다. 자신이 돈을 대고 원하는 사람을 골라 탈북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에 안드는 탈북자가 있으면 선택에서 배제시키기도 했다. 나중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마치 스티브 선교사 자신이 사역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미국 가서 후원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모금 액수만큼 자신이 후원하는 매칭펀드 방식으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나중엔 한국 교회와 연계해 한국에 입국시킨 뒤엔 하나원 입소에서부터 교회와 탈북자가 일대일로 결연해 캐어하는 일도 진행했다. 이렇게 4년간 사역하면서 스티브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시킨 탈북자는 100여명. 스티브 선교사가 개발한 루트를 통해 국내 입국한 탈북자는 약 800명 가량 된다고 정부 관계자가 알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2003년이었다. 당시 교회는 예배드릴 공간이 없는 상태였다. 전염병 사스가 창궐했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도 호텔도 빌리는 게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교회는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를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통해 건축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스티브 선교사는 건축위원장을 맡았다. 2층짜리 공장 건물을 구입해 리모델링을 거쳐 그해 7월에 헌당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탈북자 구출 사역에 매진했다. 한국의 석병교회 이 목사로부터 수양딸을 삼은 탈북 고아 자매, 은선이를 구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동북 삼성에서 오는 일행 4명을 넘겨받았지만 알고보니 그 중 한 명이 첩자였다. 그는 결국 중국 공안에 체포돼 5년 형을 선고받고 연길 감옥에 수감돼 만 4년을 채우고 2007년 9월 출소했다.
탈북자 사역을 하다가 겪은 4년의 생지옥은 그를 더 철저한 사역자로 만들었다. 감옥도 그의 탈북자 사역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감옥은 오히려 탈북자 사역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4년간 감옥에서 스티브 선교사가 만난 탈북자는 100여명. 4년간 감옥 밖에서 그가 한국으로 보냈던 탈북자 숫자와 같다. 감옥 밖에서 스티브 선교사는 탈북자들에게 그저 돈 있고 배려심 있는 한국계 미국 사람이었다면, 감옥 안에서 스티브 선교사는 탈북자들의 아버지로 통했다. 감옥에 들어온 탈북자의 처지를 얘기로 들으며 스티브 선교사는 수없이 눈물을 훔쳤다. 농가의 소를 잡아먹고 온 아이, 오토바이 훔친 죄로 들어온 아이, 싸우다가 사람 죽인 아이, 인삼밭 서리하다가 잡힌 아이 등 사연은 많았지만 공통점은 가난과 배고픔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을 감싸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중 15년형을 선고받은 양강도 출신 젊은이들인 영진이와 성남이에게는 감옥에서 세례까지 주고 양자로도 삼았다. 이들은 지금도 둘은 동북 C시의 감옥에서 형기를 채우고 있다.
▲ 318 파트너즈의 꽃제비사역을 돕고 있는 일산충신교회 선교담당자들이 스티브김 선교사(가운데)와 사역 결과에 대해 나누고 있다.
감옥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일은 성찬식이었다. 아내가 면회 때 넣어준 포도주스 가루와 빵을 아껴뒀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갖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인 빵과 피를 나누는 감격의 성찬식은 감옥을 사랑의 공동체로 바꿔놓았다.
“지금도 간증을 다니면 다른 탈북자 사역보다 4년간의 감옥 얘기를 더 많이 합니다. 그 감옥은 저에게 하나님을 만난 잊지 못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4년 동안 저를 철저히 훈련시키셨습니다.”
감옥 출소 때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까지 탈북자가 나한테 찾아와서 도왔는데, 앞으로는 내가 탈북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도울 겁니다.” 당시 워싱턴 북한자유주간 행사에서 만난 탈북여성연대 강수진 대표로부터 ‘중국 내 인신매매 당하는 탈북 여성들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318 파트너즈를 만들었다. 318은 빼앗긴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보낸 318명의 구원의 투사들을 의미한다. 최근까지도 그는 이 사역을 했지만 이제는 접었다. 인신매매 당한 탈북자들 중 대부분이 이미 가정을 가지고 안정된 삶을 사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좀더 나은 삶을 갖기 위해 때로는 자녀까지 버리며 한국에 가고자 하였지만 스티브 선교사는 좀 더 급박한 위기에 놓여 있는 탈북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318 파트너즈가 새로 시작한 게 꽃제비 북한 고아 돕기 사역이다. 지금도 조중 접경지역에 있는 쉼터를 통해 꽃제비 돕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의 마음속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북한 내부를 직접 돕는 사역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북한 내 지하 교회는 1만~2만개, 지하교회 교인은 10만~40만명에 이른다. 그 중 일부를 맡아 돕고 있는 것이다. 곧 북한도 방문할 예정이다.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가능하다. 이번 방문은 다른 탈북 사역자들과는 달리 정식으로 비자 신청을 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아직 비자신청 절차가 진행중이지만 그는 무난할 거라고 보고 있다. 지하교회를 돕기보다 그 땅을 밟고 기도하기 위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북한 땅을 지배하는 영적 견고한 진의 실체를 직접 보고 느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스티브 선교사에게 중국 땅의 문을 다시 열어 주셨다. . 김 선교사는 “중국이든 북한이든 나를 구금하면 오히려 나를 더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나의 모든 안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중국도 북한도 당국자가 머리가 있는 한 그렇게(구금)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사역 방향이 북한 내부로 향하면서 그가 만나는 사람도 탈북자가 아닌 북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주로 조중 접경지역에 와 있는 북한 사람들이다. 스티브 선교사 본인이 직접 북한을 들어가지 못할 때 들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돕거나 아니면 이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돕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북한 사람들을 모두 탈북자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들 북한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탈북 안하겠다’고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인민을 배반하고 사랑하는 고향과 가족 친지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들, 특히 젊은이들의 애국심은 얼마나 투철한지 모릅니다.”
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양심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거라는 게 스티브 선교사의 믿음이다. 그러면서 북한을 향한 남한의 시각도 이젠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못살고 굶주리고 그래서 멸망하는 북한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북한은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북한을 회복시키시고 복 주시고 북한 사람들을 복음으로 세워 열방을 위한 복음 증거자로 삼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43장이 말하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첫댓글 좋은글감사~선교사님 힘내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