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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화 협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02)
11. 바버라 스탠윅(Barbara Stanwyck, 1907년~1990년)
루비 스티븐즈는 1907년 7월 16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쇼비즈 세계에 뛰어들기 전에는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고 배우로 데뷰하기 전에는 댄서나 코러스 걸로 일했어요. 바바라 스탠윅이라는 예명을 지은 것도 이 때 쯤으로, 어느 연극 포스터에 'Jane Stanwyck in Barbara Freitchie'이라고 쓰여진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군요.
스탠윅은 28년 보드빌 코미디언인 프랭크 페이와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헐리웃으로 옮겨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배우로 인정을 얻기 시작한 건 30년대 초엽 프랭크 카프라의 [The Miracle Woman (1931)], 윌리엄 웰먼의 [Night Nurse (1931)]와 같은 작품의 주연으로 발탁된 뒤부터였습니다.
30년대 중엽부터 시작된 스탠윅의 전성기는 40년대에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영화들이 이 시기에 나옵니다. [스텔라 달라스 Stella Dallas (1937)], [Golden Boy (1939)], [Meet John Doe (1941)], [Ball of Fire (1941)], [레이디 이브 The Lady Eve (1941)]... 네, 물론 [Double Indemnity (1944)]를 빼먹을 수 없죠. 이 당시 스탠윅은 미국에서 가장 돈 잘버는 커리어 우먼의 명단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5,60년대로 넘어가면서 스탠윅의 커리어는 서서히 주류에서 밀려납니다. 나이가 들어서였기도 하지만 시대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을텐데, 그건 스탠윅의 강하고 독립적인 이미지가 당시 관객들에게 잘 먹히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60년대 이후 스탠윅은 텔레비전에서 새 길을 찾았습니다. [The Barbara Stanwyck Show (1960)]처럼 자기 이름이 붙은 쇼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은 서부극 시리즈인 [The Big Valley]였지요.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겐 [가시나무 새 Thorn Birds (1983)]가 가장 잘 알려져 있겠고요.
바바라 스탠윅은 1990년 1월 20일 산타 모니카에서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12. 클로데트 콜베르(Claudette Colbert, 1903년~1996년)
클로데트 콜베르(Claudette Colbert, 1903년 9월 13일 ~ 1996년 7월 30일)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미국 연극, 영화 배우였다.
프랑스 생-망드에서 태어나 뉴욕 시에서 자란 콜베르는 1920년대 동안 브로드웨이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이후 유성 영화의 출현 시기에 영화계에 진출했다. 그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성공적인 영화 사업을 이룩하였고, 뛰어난 스크루볼 코미디 배우 중 하나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1930년대 후반에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여자 배우 중 한 사람이었으며, 나중에는 프리랜스 공연가가 되었다. 1934년에 어느날 밤에 생긴 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프라이빗 월드(1935)와 당신이 떠난 후(1944)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의 영화 출연은 1950년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여 1961년에 마지막 영화를 찍었다. 그는 그 후 연극 무대로 돌아왔고, TV에도 가끔씩 출연했다. 그의 경력은 60년 이상 이어졌다. 말년에 그는 바베이도스로 떠났고, 그곳에서 뇌졸중으로 인해 9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콜베르는 사라 시돈스 협회로부터 연극 관련 상을 받았고, 케네디 센터 공헌상을 받았으며,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역대 최고의 배우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13.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년~1982년)
그레이스 패트리샤 켈리(Grace Patricia Kelly, 1929년 11월 12일 ~ 1982년 9월 14일)는 미국의 배우이며 모나코의 대공 레니에 3세의 대공비(大公妃. 영어 Her Serene Highness the Princess of monacco, 프랑스어:Son Altesse Sérénissime la princesse consort de Monaco)이다.
1950년, 20세의 나이로 연기를 처음 시작한 후 그녀는 뉴욕에서 연극과 생방송드라마에 출연하였다. 1953년 10월, 모감보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후 그녀는 1954년,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갈채를 비롯해 5개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골든 글로브상을 탔다. 그녀는 26살에 은퇴하고 모나코로 가게 된다. 그녀는 모나코 공녀 카롤린과 알베르 대공, 그리고 스테파니 공주를 낳았다. 또한 그녀는 미국 시민권과 모나코 시민권을 둘 다 유지했다.
1982년 9월 14일 그녀는 자동차를 운전하던 도중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차에 같이 타고 있던 그녀의 딸 스테파니 공주는 살아남았다.
1999년 6월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미국영화의 전설적인 50명의 배우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참고로 그녀와 모나코대공국에 대한 국내 관련 책으로는 '그레이스 켈리와 유럽 모나코 왕국 이야기'가 있다.
14.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 1911년~1995년)
헐리웃 영화사에 지금껏 숱한 여배우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녀만큼 특정 쟝르에서 모범적인 배우 활동을 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 그녀는 브로드웨이에서나 존립했을 뮤지컬이라는 쟝르를 스크린으로 옮겨놓고 대중들이 좀 더 편하고 가깝게 다가오도록 자신의 연기 인생중 대부분을 춤추고 노래하면서 헌신했다. 물론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 1899~197), 데니스 모간(Dennis Morgan, 1908~1994), 그리고 딕 파월(Dick Powell, 1904~1963)같은 걸출한 춤꾼이자 파트너의 도움이 있었다 한다해도 그녀가 아니었다면 대중들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쟝르가 되었을 것이다. 버지니아주 인디펜던스에서 버지니아 캐서린 맥메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 집밖을 떠도는 아버지를 보고 자신만큼은 가정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 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녀는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20대가 되기도 전인 1929년 의사인 첫 남편, 잭 페퍼와 결혼식을 치렀지만 첫아이가 죽고나자 2년도 되지않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재혼한 어머니의 새 남편, 즉 양부의 도움을 받아 열 일곱살 때부터 보드빌 무대에 선 그녀는 첫 결혼후 6개월이 지난 1929년 성탄절 날, 꿈에 그리던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다. 이듬해 20분짜리 단편 뮤지컬인 <기숙사의 밤>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의 이름인 진저에서 착안하여 그후 예명으로 사용했고 그녀의 화려하고 우아한 춤솜씨는 순식간에 제작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후 너댓편의 장, 단편 영화에 출연했지만 아직은 루디 발레(Rudy Valle, 1901~1986)나 잭 오키(Jack Oakie, 1903~1978)같은 남성 스타들을 이겨내기는 커녕, 멜로 전문이었던 클로데트 콜버트(Claudette Colbert, 1903~1996)조차도 넘어서지 못했다. 늘 춤추는 일이 즐거웠지만 스타시스템의 한계를 느끼게 된 그녀는 데뷔 초창기 무렵, 잡다한 코메디와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면서 자신의 연기 경력을 쌓는데만 급급해졌다. 다행히 버스비 버클리가 총제작을 맡은 <42번가, 1933년>와 <1933년의 황금채굴자들, 1933년>같은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연기 인생조차도 장담 할 수가 없었다. 갈팡질팡하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쏜톤 프리랜드가 연출한 뮤지컬 <리오로의 여행, Flying Down to Rio, 1933년>였다. 그 작품에서 그녀는 천상의 파트너인 탭댄서, 프레드 아스테어를 만났다.
15. 메이 웨스트(Mae West, 1893년~1980년)
배우 겸 작가 메이 웨스트(Mae West)가 없었다면 1920~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은 훨씬 을씨년스러웠을 것이다.
또 그가 없었다면 자유와 여성 인권은 실제보다 더디게 확장됐을 것이다. 그는 보드빌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을 누비며 ‘리비도의 여신’이라 불렸고, 실제 삶에서도 청교도적 금욕주의와 위선을 조롱하며 자유롭고 당당하게 개인의 삶을 즐겼다. 그가 남긴 말들은 지금 들어도 뭉클하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갈 수 있다.(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지만, 제대로만 살면 한 번으로 족하다. (You only live once, but if you do it right, once is enough.)
“사랑은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지. 가난과 치통만 빼곤. (Love conquers all the things except poverty and toothache.)”
“내 몸매가 썩 멋지진 않지만 난 그걸 드러낼 줄 알았다. (I didn’t discover curves; I only uncovered them.)”
그렇게 드러낸 그의 몸매에 인류가 감응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입술 선을 모방해 ‘메이 웨스트 소파’란 걸 만들었고, 그의 가슴처럼 부푼 해상 구명조끼를 군인들은 ‘메이 웨스트’라 불렀다. 여성들은 그를 통해 자신의 몸과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곤 했을 것이다.
그는 권투선수 출신 아버지와 속옷모델 어머니의 딸로 1893년 8월 17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부터 교회 공연을 시작해 7세 때부터 아마추어 무대에 섰고, 14세에 보드빌 배우로 데뷔했다. 18세 무렵엔 춤과 연기로 유명해져 ‘꼬마 요부(baby vamp)’로 불렸고, 40세 되던 33년 헐리우드로 진출해 일약 월드스타가 됐다. 그는 ‘Sextette(1978)’ 까지 12편의 영화를 찍었고, 30대엔 직접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다. ‘Sex(1926)’ 등 작품 때문에 외설죄로 구류를 사는 등 오래도록 검열에 시달렸다.
웨스트는 “결혼으로 남자가 바뀌리라 기대하지 마라. 교화는 학교에서나 하는 일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는 18세에 잠시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16. 비비언 리(Vivien Leigh, 1913년~1967년 7월 7일)
비비언 리(Vivien Leigh, 1913년 11월 5일 ~ 1967년 7월 7일)는 영국의 배우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전형적인 남부 여인 스칼릿 오하라 역으로 첫 번째, 웨스트 엔드 공연 후 영화화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의 블랑슈 뒤부아 역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보다는 연극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남편 로런스 올리비에의 연출작에도 여러 번 출연했다. 30년의 무대 경력 동안, 노엘 카워드나 조지 버나드 쇼의 희극 여주인공부터 오필리아, 클레오파트라, 줄리엣, 맥베스 부인 등의 고전적 셰익스피어 캐릭터까지 두루 소화했다.
리 자신은 아름다움이 진정한 배우의 길에 걸림돌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건강 악화가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성년 대부분을 조울증으로 보내 함께 일하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1940년대 중반 처음 발견된 만성 결핵으로 발작이 반복되자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올리비에와는 1960년 이혼했으며, 가끔 무대에 오르다 1967년 결핵으로 죽었다. 향년 54세.
17. 릴리언 다이애나 기시(Lillian Diana Gish, 1893년~1993년)
1912년부터 1987년에 이르는 75년 동안 활동을 한, 미국의 배우였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유명 영화 스타였다.
1893년 10월14일 미국 오하이오 주 스프링필드(Ohio, Springfield)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릴리언 다이아나 드 기쉬(Lilian Diana de Guiche)이다. 집을 나간 아버지를 대신하여 언니 도로시 기시 (Dorothy Gish)와 함께 어머니에 이끌려 5살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하였다.
친구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로 부터 그리피스(D. W. Griffith)를 소개받고 바이오그래프 스튜디오(Biograph Studios)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리피스의 단편영화 《보이지 않는 적 An Unseen Enemy》(1912)으로 자매가 데뷔하였고 《베툴리아의 유디트 Judith of Bethulia 》(1914),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Nation》(1915), 《인톨러루스: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고투 Intolerance: Lover's Struggle Throughout the Ages》(1916),《트루 하트 수지 True Heart Susie》(1919), 《꺽인 꽃 Broken Blossoms》(1919), 《웨이 다운 이스트 Way down East》(1921)등의 작품을 그리피스와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MGM으로 옮겨 《라보엠 La Boheme》(1926),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1926), 《바람 The Wind 》(1928)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에서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1946년 《태양아래 결투 Dule in the Sun》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하였다. 91세에 출연한 《8월의 고래 The Whales of August》(1987)를 마지막 작품으로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1993년 2월 27일 9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8. 셜리 제인 템플(Shirley Jane Temple, 1928년~2014년)
미국의 배우이다. 1934년 4월 19일 《Stand Up and Cheer!》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1930년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아역 배우였다.
셜리 템플은 1928년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의 유복하고 원만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딸을 눈여겨본 모친은 딸이 세 살 되던 해에 무용학교(Meglin's Dance School)에 입학시켰다. 1933년 20세기 폭스의 전신인 폭스 필름의 관계자에게 발탁되어 7년 계약을 맺고 영화 《Stand Up and Cheer!》로 데뷔했다. 템플의 두 번째 영화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Little Miss Marker》는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고 여덟 살이 될 무렵에는 1년에 50만 달러를 벌어들이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을 맞아 경제가 침체되어 있었지만 셜리 템플을 모델로 한 인형과 각종 관련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등 그의 브랜드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미국에 셜리 템플이 있는 한 우리는 괜찮을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할 만큼 셜리 템플은 당시 미국의 상징이자 희망이었다. 템플은 일곱 살 때 아카데미상 아역상을 수상했으며 클라크 게이블,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등 유명 배우들을 누르고 3년 연속 박스 오피스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아역 배우의 대명사였던 템플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그는 17세에 잭 애거(Jack Agar)와 결혼, 21세에 은퇴를 선언했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 린다 수잔(Linda Susan)을 두었지만 4년 후 이혼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가나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사를 지내는 등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2] 1972년에는 공개석상에서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음을 밝히기도 했다. 2006년 미국배우협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셜리 템플은 1930년대 하와이 와이키키의 로열 하와이안 호텔을 자주 방문했는데 나이가 어려 술을 마실 수 없는 그를 위해 석류 시럽과 탄산음료를 넣은 칵테일을 만들어주었고 이 칵테일에는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19. 리타 헤이워드(Rita Hayworth, 본명 Margarita Carmen Cansino, 1918년~1987년)
1940년대에 당시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던 미국의 영화 배우이자 무용가였다. 37년 동안 61개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며 AFI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 명으로 명단에 올라가기도 했다.
팀 로빈스와 모건 프리먼이 출연한 <쇼생크 탈출, 1994년>에서 팀 로빈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오손 웰즈(Orson Welles, 1915~1985)를 비롯하여 다섯 차례나 결혼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채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그녀는 늘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당대의 핀업걸로서 혹은 지식층의 중요한 반려자로 인기가 많았다. 스폐인의 대표적인 탱고 댄서였던 부친, 에두아르도 칸시노의 딸, 마가리타 카르멘 칸시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전부터 아버지가 연기하는 무대에 올라 듀엣으로 춤을 출만큼 다부진 재능과 끼를 선천적으로 물려받았다. 15살이 되던 해 그녀는 자신의 예능적인 끼를 알아본 20세기 폭스사의 인사담당자이자 프로모터인 윈필드 시한의 눈에 띄면서 직업배우로 나서게 되었다. 1935년 그녀는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 1900~1967), 클레어 트레버(Claire Travor, 1910~2000) 등이 공연한 해리 래크만의 드라마인 <단테의 지옥>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크래딧을 완성하였지만 그후 수년간은 생활고 마져 걱정할 만큼 배우로서의 진전이 없었다.
20. 로런 버콜(Lauren Bacall, 1924년~2014년)
뉴욕 시에서 태어난 바콜은 훗날 법적으로 버콜(Bacall)로 성을 바꾼 내털리 와인스타인버콜(Natalie Weinstein-Bacal)과 판매직으로 일한 윌리엄 퍼스크(William Perske)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이민자였으며 가족은 폴란드, 루마니아, 독일 출신이다. 그의 부모는 그가 다섯 살일 때 이혼하였으며 그는 그의 어머니 성 "바콜"(Bacall)을 이어받았다. 바콜은 더 이상 그의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어머니와 굳건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가 영화 스타가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를 캘리포니아로 모셨다.
21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1934년~ )
헐리우드와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연기력, 육체파를 겸비한 전설적인 여배우.
1951년 쿠오 바디스로 데뷔했으며 이후 두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했다. 세계적인 미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어렸을 때는 너무 못생겨서(얼굴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서양인 입장에서조차도 부담스러울 만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다) 유모가 이런 애가 커서 이렇게 미인이 되서 인정받을 줄 알았겠냐는 말을 했을 정도. 그러나 그녀의 독특한 외모와 아우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인상으로 자리잡아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돌체 앤 가바나 같은 패션 브랜드에서 차용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처럼 우아하게 늙고 싶다며 롤 모델로 삼는 여배우들도 종종 있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와 인척 관계로 약간 이어져 있다. 무솔리니의 손녀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의 이모가 소피아 로렌이기 때문이다. 즉, 무솔리니의 며느리와 자매 지간이다. 공교롭게도 소피아 로렌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해바라기'와 '특별한 날'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크고 아름다운 거유의 소유자로도 매우 유명하다. 실제로 이 가슴이 다칠 경우 초거액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보험을 들어놨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