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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사불상(四佛像)-1
잔마는 비틀거리며 잔영대 대원들에게 걸어갔다. 잔영대 대
원들은 악삼과 그 외 인물들이 도주한 동굴 앞에서 이를 갈
다가 동료들의 시신을 정리하고 있었다. 잔영대의 대장은
잔마가 다가오자 앞으로 달려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잔마는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잔영대가 당한 참상으로 시선이 옮겨
졌다. 잠시 후 잔마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하나가 흘러
나오더니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피해 사항을 보고하라. 잔영대 좌장."
잔마의 두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잔영대 좌대 총원 백 명, 사망 37명, 부상 25명, 현재 인원
38명, 이상입니다."
"부상자의 상태는?"
"사지가 잘리거나 큰 부상으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중상
자는 18명입니다. 경상자 7명도 한 삼일간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크윽..."
잔영대의 수하들을 잃은 아픔에 비해 오른 팔의 고통은 잔마
에게 아무런 아픔이 아니었다. 잔마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
가 왼 손으로 뼈만 남은 오른 팔의 팔꿈치 부분을 잡았다.
[와드득.]
"크악!"
잔마는 자기 손으로 오른 팔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왼손에
들려진 오른 팔이었던 뼈 조각을 암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휙.]
[퍽.]
가공스런 내공이었다. 뼈 조각은 암석으로 된 벽을 뚫고 들
어가 그 흔적도 남지 않았다. 잔마는 자신이 받은 고통과 원
한을 뼈 조각에 담아 집어 던진 것이다.
"셋째 오라버니..."
요마 모용혜는 잔마의 비통한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괴로워 하는 잔마를 모용혜는 그냥 나둘 수 없었다.
"셋째 오라버니, 지금 모습이 어떤 줄 아세요."
"뭣이!"
"지금 모습이 어떤 줄 아시냐 고요?"
"너, 너..."
"오라버니는 잔마에요. 천하의 잔마라고요. 강남의 모든 강호
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잔마라고요!"
"......"
"그런데 지금은 뭐지요... 제게 잔마의 모습을 보여 주세요.
셋째 오라버니."
잔마 도지광은 요마 모용혜의 물기어린 눈망울을 보면서 전
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잔영대 대원들을 바
라보았다. 그들은 동료들을 잃은 충격으로 낙담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잔마가 아
는 잔영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잔마는 잔영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 당한 느낌을 받았다. 차가운 물이 정
수리에 쏟아져 내려 발끝까지 흘러내린 듯한 느낌을 받은 잔
마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잔마의 시선은 잔영대 좌장을
찾았다. 잔영대 좌장의 안색도 다른 인물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잔마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냉엄한 어조로 외쳤다.
"뭐들 하는 것이냐! 우리는 잔영대다. 우리는 팔마당의 정예
로 강남 전역을 공포로 벌벌 떨게 만든 잔영대다. 좌장!"
"넷, 대주님."
"우장에게 연락해서 전 병력을 이끌고 집결하라고 알려라."
"네, 알겠습니다."
좌장이 허리를 굽히고는 급하게 달려가자 잔마는 고개를 끄
덕였다. 그리고 잔영대를 노려 보며 격렬한 목소리로 외쳤
다.
"너희는 누구냐?"
"잔영대입니다."
"그렇다. 강남 흑도의 지배자인 팔마당에서도 최강의 전력인
잔영대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 모습이 과연 잔영대라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이 모습은 잔영대가 아닙니다."
"그렇다. 지금 너희 모습을 보고 누가 잔영대라고 하겠느냐!
오히려 비루먹은 강아지라고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그런 취
급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잔영대는 잔마의 질문에 아니라고 일제히 외쳤다. 고함에
가까운 그들의 외침에는 혼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개로 있
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죽어간 동료와 여태까지 자신들
손에 죽어간 피의 값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들은 개가 아닌
늑대이기를 갈망했다. 잔마는 잔영대 생존자들의 외침을 듣
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열정적인 감정이 솟아 나왔
다.
"그렇다. 너희는 잔영대의 자랑스런 투사들이다."
"우와와!"
비록 38명에 불과했지만 그 함성은 수천의 병사들이 내는 함
성에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끝나
기도 전에 잔영대 우대(右隊) 대원 100명이 몰려와 합세해 함
성을 질렀다. 그들의 고함소리는 절곡에서 쩌렁쩌렁하게 울
려됐다. 특히 악삼 일행이 도주할까봐 그 퇴로를 막기 위해
밖에서 포진했던 잔영대 우대의 대원들은 좌대 대원들의 비
참한 죽음을 목격하자 타오르는 분노를 담아 함성을 질렀다.
"멈춰라!"
잔마는 잔영대 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고양시키자
왼 팔을 들고는 멈추라고 명령했다. 잔영대 대원들은 잔마
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원한을 갚는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다."
잔마는 말을 멈추고 잔영대 대원들의 시체를 향해 눈을 돌렸
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시선을 잔영대 대원에게
돌렸다.
"우리는 동료의 시신이 이런 곳에서 굴러다니게 할 수 없다.
먼저 시신을 정리한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잔영대 대원들은 잔마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합창했다.
잔마는 잔영대 대원들의 합창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장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고 좌장은 원수들이 들어간 동
굴에서 추적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챙기도록 한다. 그럼 모든
일은 한 시진 이내로 해결하고 다시 집결하기로 한다."
"네 알겠습니다."
잔영대 대원들은 잔마의 명령에 일제히 합창했다. 잔마가
취마와 요마가 있는 장소로 몸을 돌리자 잔영대의 좌장과 우
장이 앞으로 나섰다. 좌장과 우장은 각기 맡은 임무를 수
행하기 위해 잔영대 대원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마와 취마가 있는 장소에 도착한 잔마는 정좌를 하
고 앉았다. 잔마는 자리에 앉자마자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
다.
"셋째 오라버니!"
요마 모용혜는 잔마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깜짝 놀라 가까이
가려했다. 그런데 잔마는 힘겹게 손을 올리며 떨리는 목소
리로 요마의 행동을 말렸다.
"그.. 냥 있어 다... 오."
"오라버니..."
"네 덕분에 내가 본 모습을 찾았다. 게다가 잔영대의 사기도
올라갔다. 그런데 내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면 모든 일은 도
루묵이다. 그냥 있어다오."
잔마는 창백한 안색에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침착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요마 모용혜는 잔마의 부탁을 듣자 눈동
자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그리고 쓸데없는 자책은 하지 말아라."
"네!..."
"다섯째와 여섯째가 죽은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제가 쓸데없이 연락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있지 않
았어요."
"그렇겠지. 하지만 다섯째와 여섯째를 비롯해 우리 형제 모두
가 네 시신을 보고 울분을 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셋째 말이 맞다."
취마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
지만 잔마와 요마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둘 째 오라버니, 그건 무슨 말씀인가요?"
"네가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고 악삼을 쫓아 다녔다간 큰일날
뻔했다."
취마는 요마에게 말을 하면서 잔마의 오른 편에 앉았다. 그
리고 잔마의 부셔져 잘라진 오른 팔을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둘 째 형."
"입에 이거나 물게. 동생."
"네!"
취마가 잔마에게 던진 것은 헝겊덩이였다. 잔마는 취마가
자신의 팔을 소독하려는 것을 알았다. 잔마는 헝겊을 옆으
로 치우면서 말했다.
"형님, 저는 잔마입니다."
"고통이 심하네. 자네가 비명을 지르면 아이들 사기가 떨어지
네."
"만약 헝겊으로 고통을 참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기가 더
떨어집니다."
"하아~, 알겠네."
취마는 한숨을 쉬고는 잔마의 관절 부위를 자세히 봤다. 잔
마는 직접 왼 손으로 오른 팔을 으스러뜨리고 뽑은 덕분에
팔꿈치의 관절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즉 오른 팔은 팔
꿈치 이하부터 없어졌다는 것이다. 더욱이 강제로 관절부위
와 뼈를 으스러뜨리는 바람에 힘줄과 관절, 물렁뼈가 완벽하
게 으깨져 있어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취마는 잔마의상
처 부위를 보면서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독한 사람..."
취마는 자신도 모르게 잔마를 독종으로 분류했다. 잔마는
취마의 한 마디에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잔마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창백해져 갔다. 취마
는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순식간에 독한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고통스러울 것이네. 이 술은 보통 독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거 한 방이면 소독할 필요가 없네."
"알았습니다. 형님."
취마는 잔마의 으깨어진 오른 팔에 술을 붓기 시작했다. 피
와 뼈 조각, 살점이 술에 씻겨 내려갔다. 그러나 잔마의 새
하얗던 안색은 새까맣게 죽어갔기 시작했다. 잔마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고 그 사이로 진홍의 핏물이 흘러 내
렸다. 그러나 잔마는 단 한마디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취마는 일차로 술로 잔마의 잘려진 팔을 닦아내고 상처부위
를 자세히 관찰했다.
"음~..."
"왜 그래요, 둘째 오라버니."
"별거 아니다. 단지 둘째에게 좀 더 심한 고통이 일어날 것이
다."
취마는 잔마의 오른 팔 살 속에 박혀 있는 뼈 조각을 뽑아내
고 뒤틀린 경맥과 관절 부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핏물과 살
점, 뼛조각이 씻겨 나가서야 보이기 시작한 상처를 본 취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술에 불을 질렀다.
[화르륵~.]
"허억!"
잘려진 팔에 불길이 치솟아 버리자 잔마의 안색은 붉게 달아
올랐다. 그리고 잔마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고 말
았다. 그만큼 통증이 컸던 것이다. 잔마는 요마에게 시
선을 돌려 떨리는 목소리를 물었다.
"혜매... 두 아우의 시.. 신은 어떻게 했느... 냐?"
"걱정마세요."
"그래... 너만 믿겠... 다."
잔마는 더 이상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버렸다.
요마 모용혜는 잔마가 기절하자 부르르 떨다가 석진에 대해
이를 갈았다.
"둘째 오라버니. 셋 째 오라버니는 이상 없는 것이죠?"
"그래, 이제 치료가 끝났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다행이군요..."
요마 모용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악
중악에게 돌렸다. 악중악을 바라보는 모용혜의 시선은 칼날
과 진배없었다. 취마는 얼음장처럼 싸늘한 요마의 시선이
악중악을 향한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악중악이 일부로 오행도의 비밀을 말해 시선을 돌려 악삼과
석진이 도주하는 시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그래요. 둘째 오라버니."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직은 아니다. 너무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
"그렇군요. 셋째 오라버니는 불구가 되는 중상을 당했고 다섯
째 오라버니와 여섯째 오라버니는 황천으로 갔지요. 덕분에
우리 남매는 영원한 이별을 한 것이죠."
"그렇다. 이 원한을 잊을 수는 없지."
취마의 눈동자는 충혈됐는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요마는 분노로 몸을 떠는 취마와 달리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수를 해야 이 슬픔이 사라질 것이에요. 하지만 그동안 나
는 울지 않을 것이에요. 나는 요마이니까. 항상 교태를 담은
미소로 뭇 남성들의 혼을 빼는 요마이니까, 절대로 울지 않고
미소를 지을 꺼 에요."
"혜매..."
"둘째 오라버니, 두 오라버니의 시신을 부탁드려요."
"알았다."
"잔영대를 끌고 악삼이 도망간 동굴에 들어가겠어요. 둘째 오
라버니는 낙양으로 가서 장강수로연맹의 정예를 모으세요."
"장강수로연맹을!"
"네, 만약을 대비해야 해요."
"알았다. 그럼 저들도 끌고 갈 생각이냐?"
"물론이죠.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 낙양에 가시면 구류방주에
게 내가 내린 명령을 실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세요."
취마는 슬쩍 악중악을 비롯해 등곡, 강천리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취마의 시선을 따라간 요마의 눈동자에서 한순간
섬뜩한 느낌이 드는 빛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요마의 말아
올린 입술이 붉게 빛내며 위험함을 풍겼다. 취마는 요마
의 모습에서 불길함을 느끼자 호리병을 입에 대고 술을 벌컥
벌컥 마셨다.
"물론이죠.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 낙양에 가시면 구류방주에
게 내가 내린 명령을 실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세요."
"그렇게 하마."
요마 모용혜는 악중악 등에게 가있던 시선을 의식을 잃고 앉
아 있는 잔마에게 옮겼다. 그리고 잔영대가 모든 준비를 끝
내는 한 시진 후를 기다리며 의식을 잃은 잔마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취마는 쉬지 않고 호리병을 입에 대고 술을 마시
며 기다리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악중악은 잔영대의 움직임에도 아무런 안색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등곡과 강천리는 악중악과 달리 잔영대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해대전이 열려 문제가 발생
하면 싸워야 할 적 중에 하나가 잔영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대단하군."
"사기를 올리는 방법도 특이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동해
방이나 북해방의 적으론 못 미치는 것 같소. 등 각주."
"허... 악삼에게 당했다고 너무 쉽게 단정하시는군요."
"그럼 아니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악삼에게 당한 피해는 더 컸습니다. 그것도 단 일격
에 당한 피해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폭약 때문에..."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입니다.
악삼은 강적입니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묻겠습니다. 과연
잔마를 단 몇 수만에 불구로 만들자가 몇이나 있습니까?"
"십대고수나 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잔마가 당한 것은 악삼
이 비겁하게 중간에 기습을 했기 때문이오."
"강 호법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중요한 것은 무공이
아닙니다. 악삼은 강합니다. 무위를 떠나 인간적으로 강합니
다. 그에게는 비겁이나 정정당당히 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
기면 끝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
하다는 겁니다."
등곡은 악삼을 나름대로 분석한 내용을 강천리에게 알려주며
그 위험성을 말했다. 그런데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고 있던
악중악이 등곡의 의견을 듣고는 고개를 흔들더니 입을 열었
다.
"잘못 알고 계십니다."
"무슨 말인가? 악 사제."
"악삼이 강자인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비겁함이나 정
정당당함의 구별이 없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이기면 모
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 악삼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부나 권력을 원
하는 것인가?"
"악삼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생존입니다."
"생존?"
악중악의 대답이 그들에겐 피부에 닿지 않았다. 그들도 북
해방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몇 번이나 넘어서 살아 왔지만 악
삼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 이상 생존이 뜻한 것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악중악이 악삼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은 예전부터 악삼의 재능과 무공의 성취에 관심을 가지고
세밀하게 관찰해왔기 때문에 이런 답을 내놓을 수가 있었다.
물론 악중악 본인도 처음 북해방에 끌려가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미련등을 느끼고 나서야 악삼의 마음을 절실하
게 이해했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을 벗어나자 악중악은
그 무공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다시는 그런 공포를
맛보지 않으려면 강자가 되야 한다는 것을 뼈 속 깊이 체득
한 악중악은 생명을 걸고 무공을 익힌 것이다. 그래서 그
무공의 성취가 놀라운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등곡과 강
천리는 악중악이 말한 생존이 악삼이 가진 강함의 비밀이라
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잔영대 대
원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멈추더니 정렬하기 시작해 그들은
대화를 멈추었다. 잔영대 대원들이 정렬하자 요마 모용혜가
맨 앞에 나섰다.
"잔마 삼 형이 잠시 나에게 너희들의 지휘권을 나에게 위임
했다. 나는 너희들과 함께 동료들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 내
뜻을 따르겠는가?"
"네, 따르겠습니다."
"와아! 와아!"
요마 모용혜 앞으로 잔영대의 좌장과 우장이 나오더니 명령
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좌장과 우장이 대답하기 무섭게 잔
영대 대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요마 모용혜는 고개
를 끄덕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시선을 돌렸다. 떨떠름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등곡과 강천리에게 시선이 옮겨진 것이
다. 모용혜는 나비같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
다. 그리고 그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도 나를 따라 움직일 건가요?"
"그렇게 해야지요."
"어차피 악삼을 잡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동행을 거부하신다
면 오히려 무릎을 끓고 부탁을 드렸어야 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뜻이 제 뜻과 일치하는군요."
요마 모용혜의 미소는 고혹적이었다. 그런데 고혹적인 미소
속에 숨겨진 위험을 악중악이나 등곡, 강천리는 읽어 내렸다.
그들은 북해방주의 밑에서 살아왔기에 겉으로 드러난 현상
속에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데 능숙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
떤 식으로 위험이 다가 올지는 그들도 알 수가 없었다.
유영군주와 황보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잔영대가 포위하자 악삼과 조 집사, 석진, 갈운영, 갈운지, 척
금방이 공격을 시작해 천지가 피바다로 변하는 듯한 장면을
목격하고는 겁에 질려버렸다. 그녀들은 평생을 통 털어 살인
을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규방의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한꺼번에 수십 명이 넘는 생명들이 난도질당해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을 봤으니 충격으로 얼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유영
군주와 황보영은 살아 생전 처음 보는 살육을 목격하고 두려
움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악삼이 자신들 손을 잡고 동굴
안을 달리고 있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대략 반
시진 정도 달려나가자 더 이상 뛸 수 없다며 양진이 땅바닥
에 쓰러지자 양혜선과 유영군주, 황보영도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들은 다리가 후둘거려 걷는 것은 고사하고 서 있
기도 힘들었다. 악삼은 그들이 주저앉아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자 바로 찰향적의 기공을 이용해 자신들이 달려온 길을
관찰했다. 그런데 추적의 손길이 없자 아무런 말없이 양손
에 잡고 있던 유영군주와 황보영을 나주었다. 악삼이 손을
나버리자 안 그래도 땅바닥에 체신없이 주저앉아 있던 황보
영과 유영군주는 거의 축 늘어져 버렸다. 그런데 악삼이
두 여인만 챙기자 갈운지는 입술이 한 자나 튀어 나왔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에 급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솟아나는
심통을 내리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말 한마디 안하고 내리
눌리기엔 갈운지의 마음 속에 타오른 울화가 너무 컸다.
"쳇, 또 동굴이네. 완전히 두더지가 다 됐네. 에휴~, 저번에는
식량이나 횃불, 동굴 지도가 있어 무사히 통과했지만 이번엔
어쩔까나!"
"지매!"
"운지야!"
갈운지가 불안을 조장하는 말을 하자 악삼과 갈운영은 동시
에 그녀를 불렀다.
"쳇! 알았어요."
갈운지는 입술을 쭉 내밀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버렸
다. 두 사람은 갈운지의 치기어린 행동에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척금방은 세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
이었다. 척금방은 누가 없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녀는
시선을 조 집사에게 향했다.
"조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금방 아가씨."
"혹시 석 무사님을 보셨어요?"
"옛! 석진 무사님이요?"
"네, 지금 보이지 않으시네요."
"저는 양씨 남매를 챙기느라 석진 무사님을 보질 못했습니
다."
"그럼..."
"뭔 걱정입니까? 천하의 석진 무사님이십니다. 아마 배후를
막기 위해 남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석진 선배는 내상이 심합니다. 그런데 배후를 막
기 위해 남는다는 것은 만용이고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석진 선배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들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모두들 어둠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거렸다. 그런데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떨며 표현하기 힘든 두려움에 젖어 있는
데 악삼이 갑자기 등뒤에 매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
기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었고 악삼은 그 중에
서 육각형의 상자를 꺼냈다. 악삼은 창 끝에 육각형 상자를
달더니 상자 안을 열어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열량공이
힘이 악삼의 손가락을 통해 발출되었다.
[픽.]
가벼운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피어났다. 악삼이 꺼낸 것은 심지와 기름 잔이 들어가 있는
등이었다. 모두들 어둠 속에 빛이 나타나자 불안감이 사라
졌는지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갈운지는 악삼
이 언제 저런 준비를 했는지 몰라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악가가, 이런 거 언제 준비한 것이에요?"
"태을궁의 지하 미로를 헤맬 때를 생각해 어떤 상황 속에서
도 버틸 수가 있을 만한 장비들을 생각해 두었지. 다행히 낙
양에는 좋은 물건이 많더구나. 시간도 충분했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이군요. 그런데 돈은 어디서 구하신 것이
죠?"
"빌렸다."
"빌려요? 누가 빌려 줬어요?"
"조 집사님이 빌려 주셨다."
"조 집사님이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조 집사에게 향했다. 그러자 조 집사
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갈운지는 조 집사의 행동
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 집사님은 참 재미있군요. 뛰어난 무위를 가졌으면서도 집
사를 하고 있는데다가 부끄러움까지 잘 타고 정말 재미있네
요."
"허엄... 어서 석진 무사님이나 찾도록 하죠."
"그럴 필요가 없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악 소협."
찰향적의 기공은 멀리서 들려오는 석진의 투털거림과 기어오
는 소리가 포착됐다. 특히 석진의 투털거림을 들은 악삼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래서 조 집사의
질문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 집사는 악삼이
너무나 어이없어 하는 안색을 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
시 후 석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들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아니!"
"엉."
"웬 일입니까?"
석진을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고 놀란 안색을 지우
지 못했다. 석진은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
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물어오자 오른 손을 목 뒤로 돌려 쓰
다듬으며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악삼 만은 한숨을 내쉬며
어이없어 했다. 악삼의 눈에 비친 석진의 퍼렇게 멍든 오른
쪽 눈탱이는 한심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 멍을 보고
다들 걱정하며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악삼은 아니었다.
석진은 악삼의 표정과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을 보고 깨달
았다.
"아하하! 악 동생..."
"석진 선배, 야맹(夜盲)이 뭡니까! 강호의 고수가 밤눈이 어두
워 동굴에서 넘어져 눈에 멍이 들다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
다."
"헉! 그 그게..."
"야맹!"
"밤눈이 어두워!"
"그럼 눈에 난 멍이 넘어져서 돌부리랑 찍어서 난 것!"
석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을 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강호에서 30위권 안에 들어가는
고수가 배 멀미하는 것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이번에는 밤눈
이 어둡다고 넘어져서 눈에 멍을 달고 왔으니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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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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