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르모 여행4 - 콰트로칸티 지나 에마누엘레거리의 팔레르모 대성당을 보다!
우리 일행 4명은 팔레르모 시내 프레토리아 광장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조성된
너무나도 섬세하고 화려한 남녀 나체상이 서 있는 분수 를 보고는.....
벨리니 광장에서 코펜하겐의 아말리엔보르 궁전 처럼 네 모퉁이가
똑 같은 모습의 건물 4채가 서 있는
이른바 콰트로 콴티 에서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상을 구경한다.
그러고는 다시 팔레르모의 중심 대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거리 Corso Vittorio
Emanuele 를 두리번 거리며 구경하면서 걸어 대성당 Cathedrale 으로 향한다.
먼저 이탈리아를 통일한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의 모습을 보는 데,
토리노의 사보이(피에몬테) 왕으로 가리발디 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를 통일했다!
이탈리아는 서북부 토리노 피에몬테와 사르데냐는 이탈리아인 사보이 왕가가 통치했으나...
천수백년을 독립 도시국가로 내려온 베네치아등 북부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었고 여기 시칠리아와 나폴리등
남부 이탈리아는 외국인인 스페인계 부르봉 왕가 의 지배에 신음하고 있었다.
1,860년 5월 가리발디 가 제노바에서 붉은 셔츠 천인대를 조직해 시칠리아 서부 마르살라에
상륙해서는... 시칠리아 민중들의 성원을 받으며 부르봉왕가의 군대를 격파하고
팔레르모 에 입성했다. 이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있으니
비스콘티 감독의 "들고양이" 는 리소르지멘토가 상륙한 날부터 시작한다.
이탈리아 통일후 토리노 새 정부에서는 시칠리아 귀족 살리나 공작에게 상원의원을 제안하나
거절한다. 살리나 공작 버트 랭카스터는 말하기를 "나는 구시대 계급 의 대표입니다."
" 시칠리아인은 25세기동안 외국 문명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 이 땅에서 싹튼 것은 없으니 빈털터리 노인이지요?"
넓은 광장에 엄청 크게 자리잡아서는 위압감 부터 주는 큰 건물은 바로
1,185년에 팔레르모 대주교 옵파밀리오가 세운 팔레르모 대성당 카떼뜨랄 Cathedrale 이다!
정작 대성당으로 들어가니 옛날 그 섬세한 성인들의 조각상이 늘어선 전통적인
양식은 아니고..... 선이 굵고 단순한게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1,767년에 팔레르모 대주교 필란지에리가 대대적으로 개수한 때문인가 보네?
대성당 내부 바닥에 길게 모자이크가 되어 있어 베르가모 베키오 광장 처럼
달력 인가 해서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그리스 신화 속의 그림에서 부터 전갈에다가 양과 물고기라???
소까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독실한 크리스챤인 울 마눌은 아마도 성경 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 같다고 추측하네?
이 대성당은 12세기에 지어진 노르만 양식 으로 후일 증축되었다는 데,
돔은 로마네스크 양식 이며...
내부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왕들이 잠든 왕실묘 와 왕관등 보물관이 있단다!
프랑스와 스페인 왕 들이 어째 여기 팔레르모에 잠들었나 의아하한 생각이 드노라니....
저절로 시칠아의 복잡하고도 험난한 역사를 생각나게 하는 데!
그리스인 들이 식민을와 정착한 시칠리아 섬에 페니키아 카르타고인 들이 서부를 잠식한다.
그 필연적인 충돌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 의 결과 승자인 로마 땅이 되어 팍스 로마의 태평성대 를 누린다.
하지만 훈족과 게르만 민족의 침략 으로 서로마가 망하고 서고트, 동고트, 롬바르드족에
이어 반달족이 휩쓸고 지나간 시칠리아 섬을 비잔틴 제국이 일시 회복을 한다.
그러자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마호멧의 후예인 이슬람 사라센 인 들이 642년에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시칠리아 섬 동남부 시라쿠사를 습격해 천명을 납치해 노예로 판다.
이후 698년에 이르면 이슬람 사라센인 들은 리비아, 튀니지와 알제리등을 지배하는 데,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사이 람페두사 섬을 거쳐
704년 튀니스를 출항한 함대가 비잔틴(동로마) 령인 시칠리아 섬 남부를 습격해 약탈한다.
710년에 이르면 모로코를 제압한 이슬람 사라센인들은 지중해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해
스페인 땅에 있던 게르만족의 서고트왕국을 정복 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한편 이슬람이 된 튀니스의 무어인과 베르베르인 들은 727년부터 다시
시칠리아 섬 남부를 약탈하였으며....
마침내 827년에는 1만명의 이슬람 병사가 시칠리아 서남부 마차라에 상륙하였다.
마차라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물리친 이슬람군은 시칠리아 정복에 나서 시라쿠사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는 중에 교황은
피사 선박에 기독교 군대를 태워 이슬람의 근거지인 튀니지를 공격 한다.
하지만 사라센군은 829년에는 튀니스를 출항해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하여 로마로 진격해서는
로마 성 밖에 있던 베드로 성당을 약탈 하는 것으로 보복을 한다.
마침내 830년에는 이 도시 팔레르모가 이슬람군에 함락 되었으며 메시나를 점령하고
840 년에는 나폴리와 동맹을 맺은 해적들이 아드리아해를 북상해 베네치아 해군을 격파한다.
이 이슬람 해적들이 이제는 티레니아해를 건너 이탈리아 땅을 습격하기 시작하니
서로 분열되어 혼거한 게르만족 랑고바르드 왕국과 비잔틴 제국 은 이를 방어할 힘이 없었다.
이에 교황의 요청으로 프랑크 제국의 루도비코 황제 는 서기 860년에 이탈리아에 들어오나
남 이탈리아에서 이슬람 사라센에게 패하고 포로가 될뻔 하였던 것이다!
878년에는 무려 50년간이나 농성하던 시라쿠사가 마침내 함락되고
"교회는 모스크로 개조" 되자....
교황은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청하나 비잔틴 함대는 오히려 해적들에게 패배한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노르만 인 들이 이탈리아 남부에 왕국을 세운후
이슬람교도들이 무려 230년 간이나 지배하던 시칠아를 결국에는 탈환하는 데....
노르만 왕국의 왕 루제로 2세 는 200여년 이상이나 이교도인 이슬람 교도들의 수중에 있던
팔레르모를 되찾았으니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이처럼 대성당" 을 크게 지었던 것이라!
그런데 여기 대성당에는 왕실묘가 있으니...
그 중에는 독일왕이자 신성 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6세의 묘 도 있다.
하인리히 6세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게 영국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인 데....
리처드 영국왕 은 제3차 십자군으로 오리엔트에서 살라딘과 싸워 연전연승을 한 승리왕이다.
그런데 귀환도중에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간다는게 풍랑으로 트리에스테 부근에
표류하였고 신분을 변장해 독일로 가다가 ......
십자군 아코성에서 다툰바 있는 오스트리아 레오폴트공에게 체포 된다.
영국왕을 넘겨받은 하인리히 6세 황제 는 프랑스왕 필리프의
집요한 인수요구를 끝내 거절하고
리처드를 신하로 삼은 외에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주고 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독일왕 하인리히 6세가 여기 팔레르모 대성당에 묻힌 이유는 그가 17세 때인 1,186년에
32세인 노처녀 시칠리아의 공주 콘스탄차와 결혼 해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이탈리아에서는 황제파인 기벨리니당과 교황파인 구엘프당이 투쟁하고 있었는데
황제는 시칠리아 왕위를 얻어 교황청을 포위 하고자 정략결혼 을 했던 것이네?
이후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국왕 노르만 왕조의 굴리엘모 2세는 죽으면서
고모인 콘스탄차 에게 왕위를 전하나.....
시칠리아 민족주의자들이 독일왕의 지배를 거부 하고는 서자인 탕크레드를 옹립한다.
이에 하인리히 6세 는 나폴리를 포위하고 이탈리아 남부를 지나 1,194년 12월에
여기 팔레르모의 대성당에서 시칠리아 왕위 에 오른다.
이후 그가 없는 틈에 다시 반란이 일어나니 1,197년에 메시나에 상륙했는 데,
에전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28세 나이로....
그만 말라리아 에 걸려 사망하니 시신을 수도인 여기 팔레르모 대성당으로 운구 했던 것이네?
왕위는 3살짜리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이었는데 다음해에 어머니 콘스탄차마저 죽으니
그는 여기 팔레르모에서 고아처럼 자라면서 이슬람 문화와 아랍어 까지 익혔다고 한다.
어머니 콘스탄차가 그를 나을때 나이가 당시로는 늙은 마흔살이라
출생에대한 시비를 없애고자 이탈리아 안코라 마을
광장 시장통에 산실을 차리고 주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출산 했다나?
이탈리아어로 페데리코라 부리는 그 어린 아들이 외롭게 성장해 자기 실력으로 시칠리아
왕이 되고 남부 이탈리아를 회복한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라 시인 샤르트를
후원했으며 6차 십자군을 일으키고 대성당 지하에 묻힌
프리드리히 2세로 이슬람 문명을 존중하여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1,270년말 대성당에서는 1,274년 7월 22일에 제9차 십자군 에 나서자고 이루지못할
서약 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왕 루이 9세 를 비롯한 왕과 왕자,
제후및 기사들이 나선 제8차 십자군에서 카르타고에 상륙해
이슬람 튀니스군과 싸웟으나 역병으로 죽은 루이 9세 를 비롯한 여러 왕들의 영전 앞에서!!!
돌이켜 보건대 로마를 침략한 이슬람은 노르만에게 점령되고, 노르만 왕조를
이어받은 독일 왕조도 이후 프랑스 앙주공에게 망하고
앙주는 다시 스페인 아라곤에게 망하지만... 그 아라곤도 결국에는 쫃겨나니 덧없어라!
또한 페니키아와 그리스 신전이나 로마 신전 이 기독교 교회당이 되고
다시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되었다가.....
또다시 기독교 성당으로 변신 하는걸 보자니 경허 스님의 “참선곡”이 생각이 난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꿈속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쏘냐?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성당은 새로 지었는지......
현대적인 느낌이 나네요?
콰트로 콴티..
로마에도 사거리에 이런 형태의 건물에 조각을 만들어 놓았던데 여기에도 있군요.
그냥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건물인데도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예술적으로 보여 로마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사거리에 어떻게 이렇게 건물과 조각을 만들어 놓을 생각을 했는지 ,,,,,,,,,,,
팔레르모 대성당도 정말 대단하네요.
이런 성당들 들어갈때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었는데,,,,,
천정의 벽화며 대리석 기둥들,,,높은 천정 곳곳의 보물같은 예술적 조각과 그림들,,,,
정말 이태리 성당들 내부를 보면 그 예술성에 혀를 내두들 정도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까지를 공부하고 하시는 여행은 정말 멋진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아무런 사전 지식 (역사 문화)의 배경 없이 여행 가서 멋진 건물이네. 멋진 그림이네,,,,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가지고 그 성당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나 그 도시 형성과정 그 도시를 기반으로 흥망성쇠했던 왕조들까지 두루 알고하는 여행은 그저 피상적으로 보고오는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여행이실거 같아요.
여행을 하는 도시의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 그 도시를 배경으로 했던 소설이나 영화라도 보고 여행하는 습관을
가지고 여행하려 하다보니 로스킬레님의 여행기가 새삼 감동으로 와닿네요.
@비전 흔히 하는 얘기로....
"여행은 아는만큼 보인다" 고 하지요!
사실이 그러할진대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직장이나 생업에 바쁜 사람들은 준비하기가 만만치 않을터입니다.
저야 다행히 시간이 있는지라....
그리고 저 콰트로 콴티!
네거리에 사각현 건물을 짓는 것이야 쉽지만
저렇게 반원형으로 짓는다는게 말처럼 쉽지야 않을 터인데도
비용과 시간을 들인건 예술적 감각 때문일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