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 1993년
3
베트남 정글 속 금광캐기
헌혈의 대가는 「월남특수」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라야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
삶에 이토록 해탈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전쟁」이란 단어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 이는 구약성서에서나 나오는 말,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서 전쟁은 바퀴벌레만큼 필요악으로 남아 있다.
며칠 전 남북한이 UN에 동시가입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듣고 점점 멀어져 가는 전쟁을 떠올린 난 우연히 지나간 일기를 뒤적이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두 페이지를 발견했다.
「1990년11월, 오늘 읽은 안정효(安正孝」의《하얀전쟁》은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외무장관 시절 내가 추진했던 월남 파병엔 이토록 그늘진 구석도 있음에 난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한다. 물론 난 지금도 경제 실리란 큰 것을 얻기 위해선 불가피했었다고 자인(自認)한다. 그러나 앞으로 난 결코 그늘에 있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잊어선 안 된다. 소설 속 주인공 한기주 병장이 청와대 뒷산을 바라보며 던진 독백이 지금도 내 귓전을 때린다.《…언젠가 저곳에 살던 대통령은 그가 이 민족을 위해 옳고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를 월남으로 보냈다. 국제적인 체면이나, 어쩌면 한국전쟁 동안 우리들을 도와 준 미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중략)…. 그까짓 이유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들이 그 대가로 벌어들인 피 묻은 돈이 나라의 발전과 현대화를 위한 밑거름 노릇을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공훈 때문에 대한민국은 적어도 그 상부계층은 세계시장으로 거보를 내디뎠다. 목숨을 팝니다. 용병의 민족…》….
「1991년 3월. CNN 뉴스를 보니 걸프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모습이 자못 우습다. 애초부터 코기리와 생쥐의 싸움이었거늘, 그렇게 신중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미국은 한술 더 떠 총알 한 방 안 쏴본 병사들에게까지 카페레이드를 벌여주며 법석을 떤다. 반쪽 올림픽이었던 LA올림픽 때도 그랬었다. 자랑할 만한 게 그렇게도 없어졌는가. 아마 내 생각엔 자존심을 회복했대서 그런 것 같다. 자기들이 국(GOOK)이라 깔보던 월남에서 입은 상처를 월남 패망 16년만에 비로소 회복했다는 자위 때문일 게다. 세월의 무성함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나 미국에게 월남이 주는 의미는 다르다. 분명「월남전」은 이제 우리에겐 잊혀질 유산이 돼 가고 있다. 그러나 하루 하루가 쌓여 역사가 되고 과거의 거울에서 우리가 미래의 지표를 찾아야 된다면 월남전은 반드시 진실의 몸짓으로 남아었야만 한다. 때문에 당시 외무장관으로 월남 파병 결정에 관여했고 미국과의 교섭에서 실질적인 임무를 총괄했던 나로선 역사에 작은 교훈을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1964년 가을은 낙엽조차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싶도록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한 ․ 일 국교정상화라는 난제뿐 아니라 월남 파병이란 복병이 내목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미 미국은 번디(미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서울로 급파, 브라운 대사와 함께 양동작전으로 한일회담과 월남 파병에 손을 쓰고 있었다.
사실 따져보면 월남 파병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박 대통령이 19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시절 미국을 방문했을 때 케네디에게 이미 파병 의사를 밝혔다는 얘기부터, 1964년 초 러스크 미 국무장관 방한 때는 구체적인 얘기가 오갔을 거란 추측까지 심증은 깊고 또한 오래됐다.
하나 이런 설을 뒷받침하듯 그해 9월22일 의무관과 태권도 교관으로 구성된 140여 명이 월남 땅을 밟자, 전투병 파병은 사실상 초읽에 들어간 상태였다. 남은 것은 오직 문서화하는 것뿐,
내가 월남문제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시기는 바로 그때였다.
10월2일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대좌하기 몇 분 전 번디는 이미 내게 운을 떼고 있었다.
「이 장관, 미국의 월남전 개입을 어떻게 보십니까?」
난 사실대로 느낌을 얘기했다.
「글쎄, 솔직히 난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목적과 명분을 모르겠소.」
「아, 그거야 자유월남을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게 이상하단 말입니다. 완벽하게 월남을 보호하려면 외교적으로 타협하든지 아니면 군사적으로 밀어붙여야 되잖소. 그런데 월맹이 타협을 피하니 길은 하나,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소련 ․ 중국 눈치를 보며 북위 18도선을 그어놓고 제한전쟁을 벌이니 승산이 있는 전쟁인지 의문입니다.」
정곡을 찔렀는지 번디의 얼굴에 고통스런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번디가 입을 열었다.
「…이 장관 말대로 …제한전쟁을 벌이고 있어 힘든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존슨 대통령은 어떻게 하든 힘으로 월맹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어려운 경우겠지만 …한국이 우릴 도와 줄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각하께서 결정할 문제지요.」
어렵게 꺼내놓곤 슬거머니 닫아 버린 그의 입을 보며 난 그때 그의 방한 목적을 눈치챘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후 박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한 그는 한일회담으로 분위기를 끌면서 시나브로 월남 이얘기를 꺼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미국은 월남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몹시 외로운 처지입니다. 제가 워싱턴을 출발하기전 존슨 대통령은 각하께 꼭 미국의 처지를 말씀드리라 부탁하셨습니다.」
역시 노련했다. 그는「파병」이란 단어는 옷깃 속에 숨긴 채 넌지시 접근하는 꾀를 쓴 것이다. 그걸 알 리 없는 박 대통령이 순박한 군인답게 말려드는 건 당연한 일.「거 내 생각엔 미국은 중국 ․ 소련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소. 월맹은 베트콩을 동원해 싸우는데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을 성역시하고 북폭(北爆)도. 해안봉쇄도 안하며 그저 18도선 이남만 지키려하니 도대체 무슨 전쟁이 그러오. 전쟁이란 일단 이기고 봐야 한는 게 아니겠소.」
「옳습니다. 각하 생각이 옳습니다. 증국 ․ 소련은 신경과민으로 지켜보고 영국 ․ 프랑스 등 자유진영도 비판적 시각이니 참 어렵습니다.」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번디는 즉각 맞장구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제 존슨 대통령은 중대결심을 하려 합니다. 물론 거기엔 조금 전 각하께서 지적하신 북폭과 해안봉쇄도 포함됩니다.」
갑자기 박 대통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존슨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데 고무된 표정이었다. 군인 출신답게 그가 시원스레 말을 뱉는다.
「존슨 대통령이 그런 결심으로 우리에게 군사 협조를 요청한다면 난 언제라도 미국을 도울 용의가 있소.」
끝내 번디는「파병」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않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확답을 얻어낸 것이다.
영빈관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살펴본 번디의 얼굴은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가는 줄곳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박 대통령에 대한 찬사를 계속 늘어놓았다.
「이 장관, 각하는 내가 만나본 아시아의 지도자 중 가장 위대한 분입니다.」
그러나 난 이미 사태를 예견, 할 말을 비축하고 있었다.
「번디 차관보, 월남 파병에 관한 한 박 대통령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겁니다. 정치적인 발언이란 걸 감안해야죠. 후에 미국 정부가 정식으로 한국군의 파병을 요청하면 행정적인 실무작업이 뒤다라야 할 겁니다. 그러면 그 일을 결국 내가 맡을 텐데 가만 따져보니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난 들떠 있는 그를 진정시키며 월남 파병이 만만찮은 과제임을 인식시켰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박 대통령이 시원스런 대답으로 이미 파병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세계 여론과 국민들의 반응은 뻔할 뻔자였다. 공산권은 물론 자유진영조차 명분없는 싸움이라고 매도하는 월남전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 피흘리게 한다는 건 사실 사서 돌팔매질을 당하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내생각은 어차피 매를 맞아야 한다면 뽑을 수 있는 실리만큼은 최대한 챙기자는 속셈이엇던 것이다.
아무튼 박 대통령의 의중을 꿴 미국은 그후 케네디 시절 주월(註越) 미국 대사를 지낸 롯지와, 경제학자이며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로스토 교수를 서울로 보내 국내의 여론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서서히 여건 다지기에 나선다.
그해 12월, 그간「6 ․ 3사태」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한일회담이 재개되고 박 대통령이 서독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자 존슨은 박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하였다. 박 대통령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음은 물론이었고, 고독한 거인 미국은 결국 한국을 월남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젠 나와 브라운 대사간의 실무 타결만이 남았을 뿐, 하나 이게 만만치 않았다.「이것 보시오, 이 장관, 한국전쟁 때 미국은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 파병했습니다. 그럼 한국도 이번엔 미국 입장을 생각해 줘야지요. 그런데 왜 조건을 붙입니까? 너무한 것 아닙니까. 월남이 만일 적화된다면 다음 차례는 바로 한국입니다.」
「물론 우리도 미국이 우방이며 한국전쟁의 은인이란 도덕적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소. 그러나 좀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월남전에 참전한다면 많은 부담을 안게 됩니다. 우선 우린 아직 해외 파병을 생각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게다가 북쪽엔 또 언제 다시 쳐내려올지 모르는 공산세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만일 휴전선의 군대를 빼내 월남으로 보낸다면 우린 심각한 경제적 부담과 군사적 위협을 한꺼번에 떠맡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로선 당연히 이를 보완할 협조를 미국에 요청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니오?」
무조건 참전하라는 브라운과 될수록 많은 조건을 달아 실리를 꾀하려는 난 사실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말을 이었다.
「더구나 만일…만일….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할 경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미국이야 워낙 대국이니 충격을 감당해 낼 테지만 약소국인 우린 사실 그 후유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담입니다.」
사실 그분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파병이 월남사태 수습에 얼마만큼 효과를 거둘지도 의문이었고. 외교적 득실 또한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진지해지면 해질수록 브라운의 얼굴은 점점 찌푸러드는 느낌이었다.
「이 장관, 정 그러시면 미국으로서는 주한미군 병력을 빼가는 방법밖엔 대안이 없습니다.」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자 브라운은 아예 협박조로 나왔다. 그래도 난 꿈적없는 돌부처. 이젠 그가 방향을 바꿔 청와대 귀에 직접 입을 들이댄다. 여전히 박 대통령의 대답은 시원시원하다. 난 한번 쯤 박 대통령의 순수함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꼈다.
「각하, 외무부 자료에 의하면 월남전의 전황은 현재 매우 불투명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은 불리하며 그만큼 패전 가능성도 짙다 합니다. 그러니 파병을 설사 확약했다손 치더라도 성급하게 추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급한 건 저쪽입니다.」
「이 장관 얘기 나도 알고 있지만…. 마냥 물리칠 수는 없지 않겠소.」
박 대통령은 내 말에 썩 수긍한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난 내 뜻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각하, 상황이야 어떻든 의리상 참전은 불가피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초점은 언제 참전하느냐가 아니라 참전을 조국근대화에 이용하는 것과 최악의 경우 패전의 후유증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박 대통령의 눈동자가 빛이 났다.
「조국 근대화에?」
「예, 각하, 전에 제가 비서실장 시절에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전쟁특수〉라고….」
「음, 그러고보니 기억이 나는구려.」
그는 골똘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각하, 사실 월남은 전쟁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장(市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 기회에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건 얻어내야 합니다. 어차피 국제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참전일 바에야 쓸데없이 젊은이들만 피를 흘리게 할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제가 자꾸 브라운에게 선행조건을 내세우는 건 바로 이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순수한 군인이었다.
「그런데, 이 장관…, 너무 이해타산적으로 따지면 우리가 야박한 게 아닌가. 먼저 군대를 보낸 다음 미국과 얘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각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이 머리를 숙이는 건 워낙 다급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최대한 실리를 채워야지, 일단 파병을 하고 나면 흥정이 어려울 겁니다. 또한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이왕이면 한국군의 배치문제, 즉 후방근무라든지 하는 생명과 직결된 문제까지도 처음부터 아예 협상테이블에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군」
「생명」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박 대통령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박대통령의 마음속엔 이미 약속한 대로 파병을 결행하고픈 욕망도 있었울 것이다. 그건 워싱턴의「점수」와도 상관있는 문제였으니…. 때문에 난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각하, 그래서인데…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각하께선 미국에 크게 인심을 쓰십시오.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겁니다. 대신 실무적인 절차만 제게 넘겨주십시오. 만일 브라운을 만나면〈난 전투병력 파월에 찬성했으니 나머지는 외무장관과 합의해서 하시오〉라고만 말씀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아예 브라운을 만나 주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결국 박 대통령은 내 의견에 찬성, 창구를 단일화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부터 다시 순화동 공관에 브라운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3개월간의 지리한 협상은 이렇게 막을 열었다.
「존슨 각하, 담뱃불 좀…」
「오산으로 얼룩진 전쟁」
내가 보기엔 그랬다. 정말 월남전은《뉴욕 타임스》의 지적대로「거짓과 오산의 역사」였다. 그러나 피를 부른 이 오산엔 미국의 지나친 우월감도 한몫 거든다. 월남전에 관여했던 미국 대통령의 면면을 살펴보자.
「아이젠하워」
2차대전 때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유럽에서 히틀러를 궤멸. 유럽 해방의 기수로 영 ․ 불에 대한 자부심 대단. 그는 자신의 해방구격인 프랑스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월남에서 형편없이 밀리자「그까짓 월맹이 뭔데…」하며 속으로 혀를 찬다. 그러다 1954년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건쟁에서 대패한 프랑스가「제발…」하며 손을 벌리자 아이젠하워는 호기 있게 소리친다.
「좋아, 우리가 도와 주지, 당장이라도…. 총으로 안 되면 돈으로라고….」
「존 F. 케네디」
젊고 패기만만한 야심가. 아이젠하워의 추종자 닉슨은「뉴 프런 티어」로 눌러 이긴 진보주의자.「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으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세우자 쿠바를 봉쇄해 버린 힘의 타협을 선호하는 행동파, 마침 공산주의에 약하다는 정적(政敵)들의 비난이 난무하자 그는 결연히 입을 연다.
「자유의 수호자, 미국이여 일어서라. 월남을 공산주의자로부터 지키자. 자자. 월남으로.」
「존슨」
존 웨인을 연상시키는 거구의 전형적인 미국인. 케네디가 암살되자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자리바꿈, 아이러니컬하게 상원의원 시절 아이젠하워의 월남 참전 의도를 꺾어 버린 장본인. 그러나 대통령에 오름과 동시에 미국 내 반전 무드로 여론의 질타를 받자 그는 힘으로 월남전을 종식시키려 서둔다.
「협상이 없다면 남은 건 힘뿐. 이제부턴 북베트남 폭격도 불사한다.」
원조와 참전과 확전을 결행한 이들 세 명에겐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미국 우월주의」와「아시아에 대한 무지」다. 이중 특히 우월감에서 비롯된 아시아에 대한 무지는 오판의 첫걸음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당시 아시아에서 한층 물오르기 시작한 민족주의 운동을 과소평가. 결국 패전의 굴레를 쓴다. 그러나 난 우리만큼은 오산에 의해 월남전에 뛰어들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들에 비하면 박 대통령의 월남 참전 결정은 얻을 것을 모두 챙긴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경제적 실리는 대단한 성과였다. 물론 처음부터 몇 번씩 거르고 거른 시나리오였다. 거르는 과정엔 자리가 따로 없었다. 청와대도 좋았고 술자리도 좋았다.
1964년 겨울, 눈이 펑펑 쏜아지던 어느날 한남동 국방부 장관 공관에서 난 박 대통령 ․ 장기영(張基榮) 부총리 ․ 김성은(金聖恩) 국방장관과 함께 위트를 곁들이며 거르는 작업을 했다. 말머리는 항상 박 대통령의 몫이었다.
「이 장관, 사실 나도 명분없는 참전이란 걸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이 장관은 실리를 챙기는 데 절대 소흘해선 안 되오. 그리고 파병 규모는 최대가 5만 명, 그 이상은 절대 안 되오. 이점 잊지 말고 협상에 임해 줬음 하오.」
술기운이 조금 오른 듯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래도 또박또박 내게 당부했다. 그날 따라 엉뚱하게도 옆의 김 장관이 말을 받는다.
「각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동원 이 친구 작은 일보단 큰일을 잘 해치우는 엉뚱한 친굽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이 친구를 통해 양키들 코를 꿰 돈이나 많이 받아내죠.」
걸죽한 농으로 소문난 김 장관은 거나한 얼굴로 특유의 익살을 내뿝는다. 그 표정이 어찌나 천진스러운지 박 대통령은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김 장관이 있으면 먹는 안주가 필요 없어. 귀 안주가 더 푸짐하거든…. 하하하.」
입 벌린 김이라고 표현하면 좀 저속할까. 박 대통령은 거푸 두어 잔을 더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김 장관 말이 맞아. 이유야 어떻든 월남전 통해 미국 돈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뭐든 해야지.」
분의기가 돈 쪽으로 흘러가자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각하, 그래서 저도 미국이 돈만 많이 준다면야 저 국방장관까지도 팔아먹을 작정입니다.」
통케한 한 방, 하나 질리 없는 김 장관이었다.
「그래 팔아먹어. 내가 팔려가 나라가 잘 된다면 이 한 몸 희생하지….」
아무튼 난 미국과의 파병 교섭에서 첫째도 실리, 둘째도 실리를 생각하며 임했다. 그러다 보니 파트너인 브라운 대사가 짜증내는 건 당연한 일.
벌써 해가 바뀌어 1965년이 됐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1월엔 2천 명이 다시 월남으로 향했으나 그들 역시 비전투요원. 브라운으로선 속이 탈 지경이었다.
「이 장관, 제발 군대부터 보내 놓고 얘기합시다. 난 정말 이러다간〈무능〉낙인이 찍혀 본국으로 송환당하겠소.」
브라운은 어떤 때는 두 손으로 비는 시늉까지 하며 내게 매달렸다. 그래도 난 요지부동이었다.
「브라운 대사, 당신 입장을 나도 이해 못하는 바 아니오. 하나 난〈선교섭 후파병〉원칙을 버릴 순 없소.」
서로의 입장이 워낙 평행선을 달리자 그해 2월 말 브라운 대사가 제안을 한다.
「이 장관, 그럼 아예 나 말고 미국 가서 고위층을 만나 보시죠. 마침 5월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니 사전협의차 들러 러스크 국무장관을 만나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렇다면 러스크 장관은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거야…, 그렇진 않지요. 최종 결정은 존슨 대통령이 할 겁니다.」
「그렇다면 난 직접 존슨 대통령을 만나겠소.」
난 정색을 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당돌한 내 말에 브라운은 당황한 밫이 역력했다.
「그건…, 그건…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외무장관과 대통령이 만나는 건…, 나중에 존슨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정상회담도 있을 텐데….」
그러나 나 역시 지지부진한 협상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때문에 물러서지 않고 일갈.
「브라운 대사, 난 실무책임자인 동시에 각하로부터 최종권한을 위임받은 결정권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양을 따질 때가 아니라 어떻게 타결할까를 궁리할 땝니다.」
아니꼬웠지만 아쉬운 쪽이 미국이었으니 어쩌랴. 결국 브라운은 본국에 연락, 난 미국 방문길에 오르게 되었다.
3월18일, 난 백악관에 들르기 전 오찬을 겸해 러스크 국무장관과 먼저 만나 의견을 개진했다. 난 솔직히 털어놓았다.
「러스크 장관, 월남전을 통해 경제를 일으키려는 우리 입장을 너무 추하다 생각마십시오. 어차피 미국으로서는 써야 할 돈 일부를 한국으로 돌린다고 줄어들진 않을 겁니다. 사실 우리의 월남 파병은 야당의 반대가 의외로 거세 심각한 국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강행하려는 건 미국과의 의리를 잊지 않으려는 박 대통령의 호의 때문입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듣던 그는 내가 정중히 말을 마치자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내가 오해할 뻔했군요. 난 이 장관이 우리의 파병 요구를 중간에서 훼방놓는 줄로만 알았지요. 듣고 보니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의외로 세 시간이 넘는 긴 만남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그는 나의 옥스퍼드 선배였기에 통하는 게 많았고 날 도와 주려 힘썼다.
그날 저녁 난 예정대로 백악관을 방문, 존슨 대통령과 만났다. 그 자리엔 미국측에선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번디 차관보가, 우리측에선 김현철(金顯哲) 주미 대사가 동석했다.
존슨의 첫인상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한마디로「카우보이 역의 존 웨인」을 연상시켰다. 게다가 길게 잡아끄는 남부 특유의 말투와 느슨한 행동은 은근히 상대를 압박하는 마력이 있었다. 하나 좋았던 그 느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인사를 마친 그가 곧 탁자에 그 긴 다리를 쭉 뻗어 올려 놓는 게 아닌가.
「이렇게 무례할 수가….」
난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큰일을 앞두곤 냉정해야 했다. 더구나 그는 미국의 대통령 아닌가. 그래서 난 꾀를 냈다.
마침 탁자 위엔 접대용「말보로」가 놓여 있었다. 난 담배를 한개비 빼 손가락에 낀 채 입을 열었다.
「각하, 실례지만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다리를 쭉 뻗은 자세로 내 담배에 불을 붙이긴 너무 먼 거리. 할수 없이 존슨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게 라이타를 내밀었다. 혹 내 행동이 존슨에게 너무 예민하게 느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난 그에게 비행기를 태워 줄 필요를 느꼈다.
「각하, 사진으로만 보다 막상 실물을 대하니 생각보단 훨씬 복잡한 수식어가 필요할 정도로 멋지시군요.」
「하하하, 고맙소, 사실 나도 그러려 노력하는데 기자들은 취미가 고약해 꼭 묘한 포즈의 사진만 찍어대니 난들 당하겠소.」
존슨은 의외로 털털하고 통이 큰 인물이었다. 언제 묘한 분위기가 있었냐 싶도록 농담을 받으며 즐거워한다. 얘기를 꺼내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각하, 전 월남에서 곤경에 빠진 우방 미국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미국은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요?」
갑자기 존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곤 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전투병력의 파월입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그러나 각하, 월남전은 전세계적으로 반대 여론이 높고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다 아직 한국은 미국을 도와 줄 만큼 경제 ․ 군사적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 ․ 미 양국은 필히 최선의 도움수를 찾아야 할 겁니다.」
「옳은 말이오. 동감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내가 말을 이었다.
「미국을 호랑이에 비유하면 월맹은 산고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원래부터 서로 가까이 하려 하질 않아 문젭니다. 더욱이 월맹은 미국을 요즘엔 종이호랑이로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미국은 하루 빨리 진짜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겁니다.」
「뼈아픈 지적이군요. 그러나 우리 미국은 말려든 전쟁이니 만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소. 지난달부터 북폭을 시작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지요. 또한 그렇기에 우린 한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한 겁니다.」
어느새 존슨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난 이때쯤 내 의도를 풀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각하, 그래서인데… 우린 몇 가지를 미국에 요청하는 바입니다. 우선 파병에 소요되는 비용은 미국이 부담하고 물품의 제조와 수송은 우리가 맡았으면 합니다. 또한 같이 피를 흘리는 입장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동등한 대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도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맥나마라의 얼굴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한마디로 말이 많다는 뜻일 게다. 하나 번디는 끝까지 날 도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가 거들었다.
「각하, 한국은〈월남전 특수〉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한국전을 통해 일본이 경제적으로 일어섰듯 말입니다.」
지원사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장관 말 충분히 알겠군요. 하긴 뒤짐지고 앉아 월남전을 비판이나 하는 일본에 이익이 돌아가선 안 되겠지요. 실무협상을 통해 한국측 요구사항을 최대한 들어드리겠소.」
난 기어이 존슨의 입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냈다. 후에 박 대통령과 공동성명에선 약간 바뀌었지만 그날 내가 얻어낸 조건은 대충 이러했다.
。한국군의 기한부 현대화와 휴전방위문제
。파월군의 처우개선 및 장비교체
。군원이관 중단
。「바이 아메리칸」정책의 완화와 주월연합군의 군수물자에 한국 상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하는「바이 코리안」정책 채택
。한 ․ 미 ․ 월 삼각경협의 보장
。이미 배정된 1억 5천만 달러의 AID 차관의 조기 사용
아무튼 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두 달 뒤인 5월17일 박 대통령은 완전 타결을 위해 미국을 공식방문했다. 그때 난 건강이 좋지 않아 수행하진 못했으나 박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예우는 파격적이었다.
10만 명을 헤아리는 환영인파 시이로 박 대통령은 리무진 방탄차를 타고 악대까지 앞세운 채 2마일의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한마디로 최고의 예우였다.
또한 뉴욕시 5번가의 번화가에서 벌어진 오색 꽃가루 행사는 미국 건국 이래 정치가에서 베푸는 것으로는 다섯번째라 했다. 2차대전의 영웅 맥아더, 아아젠하워, 그리고 처칠과 대만의 손미령여사에 이은 다섯번째.
사실 이는 당시 미국이 얼마나 우리의 파병을 학수고대했는가를 보여 준 단편에 불과했다.
그만큼 당시 교섭에서 유리한 쪽은 우리였다. 때문에 난 마음껏 큰소리치며 실속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우린 군의 현대화와 경제부흥을 위한 계획안을 만들 때도 모든 사업규모를 대폭 늘려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하다 싶을 정도였다. 일례로 국군현대화계획은 미국도 입을 벌릴 정도의 천문학적인 예산으로 꾸며졌고 거기엔 잠수함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실무작업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박정희 극본 차지철 주연「파병 반대」
며칠 전, 난 실없이 앉아 있다 갑자기 파안대소하는 통에 집사람으로부터 핀찬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난 월남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뜻 한 소설이 머리에 떠오른 탓이었다. 제목은 잊었지만 줄거리는 한 연극배우가 자신이 맡은 배역에 빠져들다 현실에서까지 자신을 연극 속 배역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그린 내용이었다.
내가 웃었던 건 바로 그 연극배우에 차지철(車智徹)의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대로 박 대통령과 난 월남전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얻기 위해 철저한 시나리오를 짰고 대부분 우리 의도대로 됐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시나리오의 백미(白眉)는 바로 차지철의 등장이었다.
제1막 제1장은 1965년 7월 초 각의에서 월남 파병을 의결한 며칠 뒤, 장마비가 창을 요란하게 때리던 청와대서 막이 오른다.
「차 의원, 내 임자를 부른 건 중요한 부탁이 있어서야, 요즘 이동원 장관이 미국과 교섭중인데 지지부진한 모양일세, 그래 임자가 도와 줘야겠어.」
밑도 끝도 없는 박 대통령의 말에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던 차지철의 고개가 갸우뚱하는 건 당연환 일. 이어 박 대통령이 폭탄을 던진다.
「임자가 월남 파병 반대 좀 하지.」
「예?」
차지철이 깜작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정부 ․ 야당서 파병을 결정한 걸 아는데 자기더러 항명을 하라니…. 그것도 박 대통령의 입에서 직접 터질 줄이야.
「엊그제 나와 이 장관이 결정한 걸세. 대미교섭을 우리쪽 의도대로 이끌려면 국내서도 어느 정도 반대파가 있어야 하는데…. 야당도 조용하고 …. 임자가 적임일 것 같아.」
아직도 얼떨떨해 하는 그에게 박 대통령의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 임자가 앞장서서 월남 파병에 반기를 들게.」
사실 박 대통령이 워싱턴서 존슨 대통령을 만나고 온 지 벌써 두 달이 다 돼가는데도 실무협상은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건 미국이 서둘면 서둘수록 내가 협상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 자꾸 뒤로 뺐기 때문이었다.
하나 내 뒷걸음질에도 한계가 있었다. 정황이 내 발목을 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언론 ․ 학생 ․ 야당 등 모든 눈이 한 ․ 일 국교정상화로 쏠려 있을 때라 월남 파병은 관심 밖이었다.
「이 장관, 보시오. 야당도 조용하고 언론이나 국민들도 파병에 반대하지 않는데 왜 이렇게 질질 끕니까? 그러니 군대 먼저 보내 놓고 얘기합시다.」
때문에 브라운 대사는 이처럼 날 몰아붙일 수 있었고 반박 근거가 없는 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실린는 커녕 우리것 지키기도 어렵겠어….」
난 난감했고 결국 고심 끝에 내민 카드가 차지철이었다.
차는 여러 모로 적격이었다. 박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네임벨류도 묵직했으며 민족주의자였고 더욱이 성격 또한 투쟁적이었다. 때문에 그가 설사「반미」로 비춰질 파병 반대에 나사더라도 미국으로선 연극이라고 의심조차 못할 것이었다. 그만큼 치밀한 의도하의 등장이었다.
이무튼 그후 차지철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키 위해 월남전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하며 국회에서 소장파 의원을 이끌고「월남 파병 불가」를 소리높혀 외친다. 여기까지가 1막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2막부터였다. 그의 충성스런「쇼」가 의외의 반향을 일으켜 나중에 정부의 통제권을 벗어날 정도로 커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걸작은 그런 와중에서 우리의 주인공 차지철이 연극무대서 물러나 아예 골수 월남 파병 반대론자로 돌아서 버린 일이다. 연극을 위해 뿌린 씨가 극장을 뒤덮을 정도의 큰 나무로 성큼 자란 꼴이 된 셈이다.
이젠 문제가 심각했다. 벌써 8월에 접어들었고 일 주일 후면 임시국회를 열어 「한일협정 비준안」과 함께「전투병력 파월안」을 상정해야 하는데 그의 파월 반대는 이미 야당의 소장파 의원들에게까지 퍼져 있었기에 자칫하면 부결될 우려도 있었다. 때문에 박 대통령의 심기도 최악이었다. 결국 난 설득작업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단 난 순화동 공관으로 그를 불렀다.
「차 의원, 그만하면 의도대로 여론이 조성됐으니 이젠 그만 반대하시오. 잘못하면 국회 인준도 못 받겠소.」
하나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 장관이나 저나 모두 애국하는 마음에서 일하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실 역사상 처음 해외 파병을 하는 이 중요한 일에 꼭 소리가 일치돼야 합니까?」
강하면 돌아가야…. 난 슬거머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차 의원, 최근 각하께서 이 일로 걱정이 많소. 각하 심기도 생각해 주셔야죠….」
청와대 표정을 언급한 건 즉효였다. 역시 충복(?)답게 갑자기 표정이 무거워지며 내 눈치를 살핀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오물거거린다.
「저…, 제가…파병을 반대하는 거 결국은 각하께서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하의 정책…. 오늘보단…긴 안목으로 내다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귀를 한 쪽으로 몰아야 간신히 들릴 만큼 그의 목소리는 혀에 걸친 소리였다. 난 이때다 싶어 일부러 소리를 높혔다.
「그래도 반대하시겠소?」
하나 역시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사실 당시 친미 근성이 배어 있던 여야를 통해 차지철만큼 월남전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는 눈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다. 흔히 그를 머리는 없고 행동만 앞서는 저돌형으로 얘기하지만 그는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자유공론》(1966년 4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파병불가론을 이렇게 주장했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 파병을 요청하면서 일관성있는 정책이 없다. 전쟁이란 이겨야 하는데 미국은 월맹을 제압하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상태라면 월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하는데 그들은 나올 리 없고 나와야 협상이 되지도 않는다. 둘째,월남 정부의 부패와 무능이 문제다. 월맹과의 싸움 이전에 장악 지역의 치안은 유지돼야 하지 않는가. 셋째, 미군과 한국군의 목숨값(월급)이 다른데 한국군이 무슨 사기로 적과 싸우겠는가. 이런 인종차별적 태도는〈월남전이 백인의 또다른 식민지 정책〉이란 월맹의 전선을 그대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때문에 월남 파병은 불가하다.」
이만큼 그의 눈에는 날카로움이 있었고 나름의 소신으로 일관했다. 때문에 난 비록 그를 설득하는 덴 실폐했으나 밉지가 않았기에 이 일로 짜증내는 박 대통령에게 오히려 그를 옹호해 주기도 했다.
「각하, 심려마십시오. 차 의원의 행동이 요즘 대미교섭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차지철이야 포기했지만 나머지 소장파 의원들은 좀 수그러들었기에 난 다음 수순을 밟았다. 즉 야당 설득에 나선 것이다.
당시 제1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당수는 박순천(朴順天) 여사였다. 박 여사는 우리 어머니와 여성운동을 같이 했기에 날 친 자식처럼 대했었다. 그러나 월남 파병의 불은 여기까지 번져 있었다.
「이군, 요즘 공화당은 정치를 어떻게 하는 건가. 난 처음 애국하는 마음에서 파병을 찬성했고 그래서 우리 당원들까지도 모두 찬성으로 만들어놨는데 차 의원이 저렇게 나서는 바람에 우리당 소장파까지 이젠 덩달아 반대를 하잖나. 미국은 우방이고 우리 안보의 안전핀이니 도와 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이제 와서 야당에게 협조를 하라니 나로선 할 말이 없네.
박 여사는 무척 섭섭한 표정으로 날 나무랐다. 난 그때 차지철의 파병 반대는 사실 이러이러하게 시작된 겁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야당에 또다른 총알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물러나온 난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야당에 빌미를 주는 악재가 터졌다.
「미국은 우리에게 월남 파병을 요청한 바 없다. 우리가 월남의 요청에 의해 파병을 결심했다.」
모(某) 신문에 김성은 국방장관의 말이 보도되자 야당이 진위 파악에 나선 것이다.
정국은 벌집 쑤신 듯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정도였는냐 하면 여당서 무슨 일을 추진할 때「미국의 요청에 의해…」란 단서만 붙이면 국민까지도 납득할 때였다. 그러니 국민들도 월남 파병엔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미국의 요청이라 생각했기에 그간 가만히 있었고 그 덕에 야당도 조용했던 것이다.
그러나「우리가 결심했다」는 건 문제가 달랐다.
「그렇다면 구태여 우리가 남의 전쟁에 끼여들 필요 없다. 그러므로 파병을 반대하겠다.」
야당은 한목소리로 떠들어 댔고 난 입장이 난처해졌다.
김 장관의 거짓말은 사실 어쩔 수 없었다. 한 국가의 국방장관으로서「미국의 요청에 의해…」라 한다면 국제적으로「미국의 용병(傭兵)」이란 비난과 함께 국가 위신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공인으로서 말할 수 있는 한계는「월남의 요청에 의해…」까지였다. 김 장관은 이미 자신의 발언이 말썽거리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야당과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국내 문제니까 수습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김 장관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야당의 반대는 의외로 거세 며칠 뒤로 다가온「파병안」의 국회 상정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결국 그해 8월13일 53회 국회는 야당 불참리에「전투사단 파병안」을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여당 의견조차 일치되지 않은 진통 끝의 통과였다. 사실 애초부터 차지철을 등장시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파월안」의 국회 통과엔 생각하기 싫은 구석도 있었다. 바로 브라운 대사의 비신사적 행동이었다.
김 장관의 발언을 문제삼아 야당이 파병을 적극 반대하고 나서자 가장 급하게 된 건 브라운이었다. 그때만 해도 매일 미 대사관엔 백악관으로부터「한국군 파병」에 대해 진행상황을 체크하는 전화가 걸려 올 때였다. 때문에 물론 나도 브라운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급할수록 천천히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서두르다 악수를 두었던 것이었다.
「김 장관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한국 정부에 파병을 공식 요청한 겁니다.」그는 박순천 ․ 윤보선 등 야당지도자를 만나 이렇게 얘기하며 국회 통과를 구걸했다.결국 그는 우리 입장은 눈꼽만큼도 생각지 않은 채 백악관의 채근에 못 이겨 자기 생각만 한 것이었다.
분한 마음에 난 그후 그에게 일침을 주었다.
「그때 난 굉장히 실망했소. 외교관으로서 당신의 자질이 이 정돈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소. 나도〈국제외교〉를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난 결코 그렇게 배우지 않았소. 도대체 상대 정부를 몰아 세우는 외교가 어딨소. 당신은 우리 정부의 얼굴에 먹칠을 했소.」
2막부터 억망이 돼버린 시나리오였지만 그 중 가장 안타까웠던 건 후배들의 귀감이었던 정구영(鄭求瑛)을 잃은 일이다.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그는 처음부터 파병을 탐탁찮게 여겼었다. 그러나 점차 반대물결이 거세지자 목소리를 높혔는데 그만 그일로 박 대통령의 눈밖에 나게 됐던 것이었다.
사실 야당 불참 하의 국회 통과였지만「한일협정」과「전투병력 파병안」의 여진은 의외로 심해 당시 여당인 공화당도 저러다간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했다. 물론 항명 반발의 리더는 정구영이었다.
「아니, 여당의 의장이 결정된 사항에 반기를 들면 어떡하나. 심사과정이라면 또 몰라도….」
박 대통령은 자주 공공연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정을 비난했다. 평소 그를 존경했던 난 차지철의 경우처럼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각하, 사실 정 의장이 파병을 반대하는 건 오히려 각하 이미지에 도움이 됩니다. 요즘 외신을 보면 그들은 비둘기파를 선호하니 당연히 정 의장 얘기를 크게 취급해 주는데 그건 우리가 독재 아닌 민주정치를 한다는 징표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나 쇠귀에 경 읽기, 난 수습책을 찾으려 정 의장 집을 찾아야 했다.
북아현동 언덕배기에 있는 정 의장의 집은 한마디로 그의「청빈」함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난 그 작고 초라한 한옥의 사랑방으로 안내되었는데 우리 둘이 마주앉으니 숨쉴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리에 앉자마자 난 한가닥 희망을 접어둬야 했다
「이 장관, 엄밀히 따지면 호지명(胡志明)의 월맹은 민족주의운동을 하는 거요. 그런데 그들을 도와 주진 못할 망정 왜 우리가 그들과 총칼을 맞대야 하오. 내가 보기엔 그간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싸웠고, 지금 미국은 제국주의의 위세를 떨치려 월남서 군사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도와줘야 할 이유가 없잖소. 물론 이 장관 말대로 우리는 가난하고 월남전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난 더러운 전쟁에 나가 피를 팔아가며 돈을 벌기보단 차라리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유난히「피를 판다는…」말에 힘을 주는 그에게 내 말이 통할리 없었다.
집을 나서는 내 마음은 무겁고 침울했다.
「저런 선비 같은 애국자자 정치판에 더 눌러있어야 하는데 이젠 국정 참여 기회를 잃게 됐으니 큰 손실이야….」
난 그를 설득 못한 것보단 앞으로 그가 정치를 떠날 걸 생각하니 나라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는 53회 국회가 폐회한 지 9일만인 8월25일 결국 영영 정치세계에서 발을 땠다.
실리를 빼앗기 위한 전략엔 이토록 안타가운 순간도 숨어 있었다. 물론 장미빛으로 짰던 시나리오는 그후 휴지통으로 들어가야 했다.
「칼자루 쥐니 골리앗도 절하더라」
난 연극으로 첫 삽을 떠 파병 실리를 챙기는 데 한몫을 거든 차지철이 머리없는 투사로서만 비쳐진 데 대해 고개를 가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건 그가 군출신이고 친구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권력의 핵심 근처에서 맴돌았기에 나온 편견에 불과하다.
소문난 효자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내가 보기엔 검소하고 정이 많은 사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 놀라게 한 건 그의 날카로운 눈과 예리한 판단력이었다. 특히 그의 현실 감각은 지금도 내 입을 벌어지게 한다.
월남 파병 건 이외에 그의 날카로움을 나타내 주는 일화 두 쪽.「YH 사건」의 비명이 채 귓전서 사라지지 않은 1979년 9월 말. 도시산업선교회와 김영삼(金泳三)신민당 총재의《뉴욕 타임스》회견 내용으로 정국이 시쓸시끌할 때였다.
그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난 박 대통령 ․ 차지철 ․ 김계원 등과 함께 뉴코리아 C.C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며 국정의 흐름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 의원, 바깥 분위기가 어떻소?」
8번홀 근처였다. 박 대통령이 공을 때리며 날 돌아보았다.
「…사실 좋지 않습니다. 각하, 뭔가…수습책이 있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난 조심스레 입을 열곤 슬거머니 숨을 죽였다. 이런 예민한 얘긴 천천히 뜸을 들여가며 꺼내야 효과를 보는 법인지라…. 그러나 옆의 차지철은 그 새를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각하, 심상찮으니 국민 무마용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당내 몇몇 거물을 아예 집어넣어야 합니다. 아니면 일이 더 커지면 커지지 수그러들진 않을 겁니다.」
내 목소리, 표정과는 정반대였다. 조심스런 나완 달리 그의 목소리는 소신과 확신에 차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박 대통령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좀 심한 거 아닌가….」
박 대통령의 얼굴에 씌여 있는 이 말은 내 가슴속 표정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지철의 말이 떨어진 지 채 일 주일도 안 돼 김영삼의 국회제명, 김형욱(金炯旭)의 실종, 카터의 비난성명이 이어졌고 끝내 부마(釜馬)사태로 번져 비극의「10 ․ 26」을 부른다.
또 다른 하나는 1972년 7월 초「7 ․ 4공동성명」발표 이틀 후인가 평소처럼 차지철이 우리집을 놀러 왔을 때였다.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던 중 그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툴툴댔다.
「아무래도 이후락이 김일성한테 끌려다니는 것 같습니다.〈7 ․ 4공동성명〉에 있는〈민족대동단결〉이니〈외세 배제〉란 말 결국 북이 주장하는〈연방제〉나〈미군 철수와 같은 말 아닌가요. 물론 이후락은 주한미군은 유엔군이라 외세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 우리 생각이지 북쪽 애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개들은 당연히 주한미군까지 연결시켜 생각할 텐데…. 미군철수하면 다시 비극이 올 수 있는데 큰일입니다.」
「나도 차 의원과 같은 느낌이오.」
사실 나 역시 속으론「7 ․ 4공동성명」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요즘 장안은 온통 곧 통일이라도 될 것처럼 들떠 있는데 그것도 문젭니다. 북쪽 애들 어떻게 믿습니까. 그깟〈공동성명〉하나로 통일된다면 벌써 됐게요. 제 생각엔 이북에 큰 변화가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경제 ․ 군사 ․ 사회 등에서 월등히 앞서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주로 들던 백포도주 한 병은 어느새 바닥나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병을 거꾸로 뒤집어 잔에 들이댄 그의 얼굴은 섭섭한 표정이 역력했다.
「형님,그래 제가 어제 각하께 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각하도 끄더그덕하며 내 말이 맞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북하고 얘기해 본 게 중요한 거지…하며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습니다. 근데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분명 북의 페이스에 끌려다녀야 할 텐데 뭔가 국면전환이 필요하게 될 것 같단 말입니다.」
「형님」으로까지 취기를 올린 그는 그날 불그스레한 얼글로 돌아갔으나 결국 그의 예상대로「7 ․ 4공동성명」은 불과 3개월 후「10월유신」을 낳는 빌미가 되었다.
그의 현실감각은 이토록 컴퓨터 같았다. 하나 아무리 좋은 컴퓨터라도 운명까지 맞추진 못하는 법. 그가「골프장 진언」을 한 뒤 한 달 후 그도 박 대통령과 함께 역사의 피안으로 사라졌다.
차지철의 연극 등 몇 가지 시나리오를 꾸밀 만큼 대미교섭의 주춧돌은 단단히 박아놨지만 실상 교섭은 여전히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여기엔 미국 내의 한국 비판도 만만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이것까지도 철저히 실리로 연결시켰다.
한국 비판엔 특히 언론보단 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입「口」펀치가 의외의 복병이었다.
「미국은 지금 월남전이란 어려운 시련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 장관은 이 약점을 교묘히 이용해 미국의 돈을 강탈해가려 한다. 우리는 이런 한국의〈용병전략〉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이른바「용병론」을 그가 들고 나오자 미 행정부도 조금 주춤할 수밖에. 월남의 총책임자라 할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를 빌미삼아 돈 들어가는 문제에 일일이 제동을 걸었다.
「이 장관, 나도 한국군 현대화는 명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군 처우문제와〈바이 코리안〉정책은 북한의 위협이나 공산세력 억제완 하등 상관없는 일입니다. 괜히 이런 것에 너무 매달리니 한국 이미지 흐려지고〈용병론〉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나도 지지 않았다.
「이것 보시오.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한국군이 용병입니까. 한가지 물어봅시다. 월남전은 미국의 전쟁입니까. 아니면 국제전입니까?」
「그야 국제전이지요.」
당연하단 표정으로 퉁명스레 뱉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용병〉이란 말조차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2차대전도 연합군을 만들어 싸웠고 이번 월남전도 비록 미국과 한국 이외엔 참전한 등 만 등 하지만 어쨌든 연합군이 구성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2차대전 땐 영국 ․ 프랑스 심지어는 소련에까지 미국이 장비, 물자, 돈 등을 대주었는데 그럼 그들도 미국의 용병으로 싸운 겁니까. 말이 되질 않찮소. 난 이걸 인종차별로밖에 이해할 수 없군요.」
난 요란한 제스처와 함께 몰아붙였지만 그는 여전했다.
「그건 억지요.」
「내가 보기엔 당신이 억지요.」
맞받아친 난 그를 쏘아보았다.
결국 난 사병에 한해 근무수당을 50% 까지 올리고 작전권 확보란 대어도 건졌지만 속엔 여전히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우린 애초 미국이 요청한 대로 2개 사단 병력을 파견하려던 계획을 잠시 보류 1개 사단만 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엔 미국에 대한 섭섭함과 함께 남은 1개 사단 병력을 또 다른 실리 취득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이 단 미국은 3차 파병이 완료된 1965년 10월 말부터 4차 파병을 종용했다. 하지만 아쉬울 게 없는 난 느긋하게 여유를 부렸다. 결국 참지 못한 미국은 험프리 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하나 전문을 대한 난 씁쓸함을 감출 길 없었다. 그의 방한일이 1966년 1월1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외교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만큼 미국이 다급하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거 별난 사람들이구먼. 미국은 설도 없나….」
내 말을 들은 박 대통령은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반드시 기분 나쁜 표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국 미국이 굽히려 오는 게 흐뭇하단 얼굴이었다.
험프리가 도착하던 날은 어찌나 호되게 추웠던지 공항에 마중나간 난「이대로 얼음 동상이 되는 게 아닌가…」하는 내 생각조차 얼어붙을 정도였다.
처음보는 그는 꼭「무당」같은 자유분망함이 있었다. 투툼한 목도리로 단단히 무장한 그는 얼굴에 마치 연극배우처럼 분장까지 하고 있었다. 대중과 사진기자를 의식하는 미국 정치인의 단면이겠지만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큰 몸집에 말 많고 제스처도 컸으며 악수하려는 날 아량곳 않고 끌어안는 등 그의 자유분망함은 광기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사람이 존슨의 후계자요. 차기 대통령 후보라니 참 미국은 재미있는 나라구나….」
그러나 그는 역시 능숙한 정치인이었다. 천진스럽고 소탈하며 꾸밈없는 그의 행동은 상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었다.
「각하는 본래 차분한 대화를 좋아하는 편이니 나하고 얘기할 때처럼 다소 소란스런 것보단 말수를 조금 줄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청와대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난 그에게 주의를 준 일이 있는데 과연 그는 훌륭한 정치가답게 막상 박 대통령을 만나서는 시종 차분함과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그때 존슨의 친서까지 휴대한 그는 미국의 체면도 아량곳없이 파병을 구걸했고 박 대통령이 흔쾌히 오케이를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박 대통령과 험프리와의 얘기지 실무를 맡고 있는 난 주판을 굴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험프리가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행정적으론 답보상태였다.
그런 중 미국엔 악재. 그리고 우리에겐 호재가 터졌다. 1966년 2월7일. 하외이호놀룰루에서 미국과 월남이 정상회담을 연 것이었다.
이미 실질적인 월남전의 주역이던 한국과 미국은 월남에 관한 모든 문제는 서로 협조키로 돼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엔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덜컥「미(美」 ․ 월(越)정상회담」을 연 것이었다.
「이런 모욕이 있을 수 있나…. 어떻게 자기들끼리….」
존슨과의 약속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은 노발대발 펄펄 뛰었다.
난 속으로 또 하나 건졌구나 하며 입을 열었다.
「각하, 이번 기회에 이걸 트집잡아 한 건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험프리가 다녀간 후로도 협상이 지지부진한데 아마 미 행정부가 뒤에서 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조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글쎄….그럼 어떻게 조이지….」
「예, 이번〈미 ․ 월 정상회담〉에서 한국을 소외시킨 건 반드시 월남전이나 우리의 장래를 생각했을 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도 일부러 브라운 대사를 불러 얘기하면 효과가 클 것입니다.」
이 방법은 확실히 즉효였다. 다음날 바로 브라운 대사가 내게 쫓아왔다.
「이 장관, 박 대통령께서 지금까지의 약속을 없었던 걸로 하자는데 웬일입니까? 이건 오해입니다. 이번 하와이회담은 어디까지나 미국과 월남 얘기지 월남전쟁 얘기가 아닙니다.」
브라운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말려들 내가 아니었다.
「아니 브라운 대사. 지금 미국과 월남 사이에 월남전 얘기 빼면 뭐가 있겠습니까. 이유없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약속을 깼으니 4차 파병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브라운으로선 죽을 맛이었으리라.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미국으로선 비상이 걸릴 수밖에… .
마침 시운(時運)은 우리 쪽에 있었는지 박 대통령은 2월 초 태국 ․ 말레이시아 ․ 중화민국을 순방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맨발도 아쉬울 정도로 급하게 된 미국은 태국방문중인 박 대통령에게 험프리를 방콕으로 급파하겠다는게 아닌가.
난 전문을 가져온 윤호근 의전국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윤 국장, 주 태국 미 대사에게 점잖게 거절하시오. 각하는 지금 태국을 공식방문중이고, 또한 이런 일은 오히려 태국 정부에 결례가 된다고 말이오….」
난 박 대통령의 의향도 묻지 않은 채 지시를 했는데 다음날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거 잘했소. 그 친구들… 미국은 세계의 지도국인데 더구나 부통령이란 사람이 정월이 오질 않나. 태국까지 날아오겠다고 하질 않나 참….」
급한 쪽은 우리가 아니었으니 어떠랴. 박 대통령과 내가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니나다를까 순화동 공관 내 책상 위엔 다시 험프리가 방한하겠다는 전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씩 거절할 수는 없는 일. 험프리는 2월 22일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번엔 동행이 있었다. 미국 명문 가문의 후손으로 소련 대사를 지낸 원로 외교관, 또한 존슨의 문제해결사로 명망있는 해리맨이란 사람이었다.
박 대톨령을 만난 험프리는 미국을 대표해 정식사과를 함으로써 일단「미 ․ 월 정상회담」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난 기회다 싶어 험프리에게 한 ․ 미 방위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노, 현재 행정부의 능력으론 수정이 불가능하오. 이 문젠 결코 섣불리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못 되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물론 나도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 미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출병이 가능한 한 ․ 미 방위조약은 당시 미국의 반전 무드로 봐선 휴지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래도 그걸「미 의회의 동의없이」로 바꾸려 했던 건 밑져야 본전이었고 이로써 미 행정부에 자극을 주자는 심산이었다.
결국 방위조약을 바꾸진 못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한국의 휴전선에 대한 침공은 미 본토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한다. 미국은 한국 땅에 단 한 사람의 미군이 거주하더라도 1억9천만 전 미국인이 한국에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비록 미사여구의 사탕발림일지라도 험프리는 한국을 떠나며 신문에 크게 떠벌리고 감으로써 국내의 분위기를 고무시켰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미교섭엔 해리맨의 공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후 험프리와 다시 한국에 온 그는 우리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고 험프리에게 결론을 내려 줬던 것이다.
「내 판단엔 우선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게 빨리 파병하게 하는 지름길이오. 이 장관 말을 들어보면 지금까지 한국의 정책은 명분을 찾고 있는 중이었소. 때문에 한국의 노력은 군대를 보내지 않으려 함이 아니라 보내기 위한 몸짓인 것이오. 그러니 미국으로선 우선 한국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겠소. 그리고 이 장관 말 믿어도 될 게요.」
숙명의 뱀띠 라이벌, 박정희와 마르코스
해마다 신문의 해외토픽에 한두 번 오르는 메뉴로「마릴린 먼로」나「마이클 잭슨」「레이건」등과 닮은 사람을 뽑는 컨테스트가 있다.
난 그걸 볼 때마다 세상엔 정말 비슷한 사람들도 많구나 하며 새삼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유명인을 닮았다는 건 이유야 어떻든 우리의 눈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며 세인의 입을 바쁘게 만든다.
그런데 만일「닮은 꼴」들이 모두 유명인이라면 어떨까. 이 겨우 일반인의 관심폭은 지구상의 자로는 잴 수 없을 만큼이리라. 「마돈나」와「먼로」의 예에서 보듯 말이다.
그러나 여기 쌍둥이 아닌 쌍둥이처럼 살다간 두 정치인이 있다. 닮은 꼴로 따지면 근 30년이나 세월을 달리한「마돈나」와「먼로」보다도 더 극적이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과 마르코스 전(前 )필리핀 대통령이다.
1966년 10월, 월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 때 마닐라에서 처음 마르코스를 대하는 순간 난 내 눈을 비벼야 했다.
「저렇게 닮을 수가….」
물론 이목구비 하나하나까지 복사판은 아니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영락없는 박 대통령이었다.
까무잡잡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키, 아담한 체구, 게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까지 내겐 분간 못할 혼란이었다. 특히 도도하고 당당하게 걷는 걸음걸이는, 뒷모습아라면 누구든 쌍둥이라 할 정도였다.
그런데 닮은 꼴은 비단 외모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우선 둘다 17년생 뱀띠라는 운명적 탄생부터 일본 육사와 필리핀 법대를 수석 졸업할 만큼 모두 머리가 우수했던 점, 또 숨이 막힐 듯한 센 고집과 자기보다 키 큰 여인을 아내로 맞은 점에 이르기까지 생각할수록 툭툭 떠오른다.
이들의 정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더욱 입이 벌어진다. 18년과 20년의 장기집권. 그리고 비극적 종말. 그것도 정치꾼답게 정직과의 한판 싸움에서 져 물러난 게 아니라 서로 믿는다고 호언하고 감싸던 부하와 국민의 배신에 의해서 한 사람은 총탄을 맞고 피를 흘리다가, 또 한 사람은 악명높은 하와이 모기에 피를 헌납하며 울화통을 터뜨리다 끝내 숨을 거둔다.
더욱 재미있는 건 장지집권의 시발점이라 할「10월유신」이나「계엄 선포」도 약속이나 한 듯 1972년 10월과 9월, 불과 한 달 사이로 해치운 점이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마르코스가 법대 출신처럼 말 많고 쇼에 능숙한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면, 박대통령은 말수가 적고 순진한 애국 군인이었다. 또한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면학의 자세를 지킨 데 비해 마르코스는 빈둥빈둥 논 점이 다르다.
그러나 천재는 천재를 시기하는가. 아인슈타인과 뉴턴이 동시대에 살았어도 그랬을 까. 묘하게도 둘은 평생 숙명처럼 라이벌로 마주보며 살아간다. 불씨는 마르코스의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당시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보다 여러 모로 나았다. 국민소득은 물론, 특히 외교무대에서 필리핀의 위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로물로 UN의장이 필리핀 사람이었으며, 1950년 서울에 설치된 UNCURK(한국통일부흥단)에도 필리핀 대표가 끼어 있었다. 거기다 6 ․ 25땐 군대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이렇게 보면 그들의 우월감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억지로 형 ․ 아우를 나누자면 형은 당연히 마르코스였던 것이다.
이 둘의 신경전의 발단은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된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2월 초 마르코스가 대통령 자리에 앉은 지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동남아 순시를 계획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말레이시아 ․ 태국 ․ 대만과 함께 필리핀도 내심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차질을 빚게 된다. 필리핀으로부터 방문 불가를 통고받은 것이었다. 이유는「마르코스가 시간이 없어서…」였다.」
박 대통령이 대노했음은 물론이다.
「건방진 놈, 두고보라지, 앞으로 우리가 몇 년 내 필리핀을 앞설테니…. 그리고 10년 후 우린 선진국이 되고 필리핀은 영원히 후진국으로 남을 테니 두고봐.」
보고하러 들어간 내가 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는 펄펄 뛰었다. 사실 국가간에 있어서 국가원수의 방문 거절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던 마르코스의 콧대 때문에 둘 사이엔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9개월 후인가, 월남 참전 7개국 마닐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마르코스로부터 일본 방문차 가는 도중에 한국을 들르겠다는 연락이 왔다.
「흥! 여길 오겠다고…. 그 친구한테 당장 전보치게…나 시간 없다고….」
박 대통령은 어이없고 불쾌한 기분으로 내뱉듯 말했다. 결국 서로 자존심 펀치를 한 방씩 교환한 셈이었다. 둘은 이토록 맞질 않았다. 그리고 우습게 여기며 서로 깔보았다.
「건방진 놈, 지까짓 게 대통령 된 지 이제 일 년도 안 된 게 마치 아시아 문제의 해결사라도 된 양 까불고 있어. 지가 큰소리치고 싶으면 우선 필리핀이나 발전시켜놓고 봐야지, 하여튼 그 친구 입만 까진 인간이야.」
「우습지도 않아. 한국이 언제적 한국이야.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아니었나. 그런데 이젠 월남에 군대 좀 보냈다고 아시아에서 군림하려고 해. 난 그 박정희인가 하는 친구에게 힘주는 거 꼴 사나워 못 보겠어.」
이들의 신경전이 불꽃을 티긴 곳은 바로 마닐라에서였다. 물론 남의 집인지라 박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눈싸움이었지만….
사실 월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우리가 계획해 밥상까지 완전히 차려놓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것부터 아시아에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해 보려는 마르코스의 농간에 의해 개최 장소를 서울에서 마닐라로 빼앗겼던 것이다.
이때부터 박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했음은 말할 나위없다. 4만5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우리에 비해 들러리라 할 필리핀에 주도권을 빼앗긴 건 억울하다 못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당시 파병 규모는 필리핀 2천명, 호주 4천 500명, 뉴질렌드 150명, 태국 1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개최 전부터 시작된 마르코스의「한국 무시」는 박대통령이 마닐라에 도착하자 도를 더해 갔다.
우선 방 배정부터가 엄청난 차별대우였다. 각국 정상은 모두 마닐라호텔에 묵었는데 그중 박대통령의 방은 첫눈에도 애개개소리가 나올 정도로 손바닥보다 조금 넓었다. 물론 다른 나라 원수들의 방도 같은 크기였으면 문제가 다르다. 하나 너무 뚜렷이 차이가 나 나까지도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어떻게 미국의 러스크 국무장관 방보다도 작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역시 박 대통령은 스케일이 컸다.
「괜찮소, 방이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떤가. 난 오히려 작은 방에 정이 더 붙네. 그러니 신경쓰지 말게.」
박 대통령은 오히려 얼굴이 사색이 되어 목덜미로 땀을 줄줄 흘리는 유양수(柳陽洙) 주 필리핀 대사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마르코스의 고약함은 여기서 그치칠 않았다.
회의 도중에도 두어 번 내 눈에 불을 당기는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회의 사회자는 당연 마르코스였는데 그는 박 대통령이 좀 발언하려 하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끈다던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먼저 발언권을 주는 등 극도로 박 대통령을 무시하고 경계했다.
리셉션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코스는 존슨 등 다른 나라 원수들 앞에서는 큰 제스처와 함께 입에 침을 튀기면서도 박 대통령앞에만 오면 입을 다물곤 가벼운 목례나 악수 정도로 예우의 목을 축인 뒤 지나쳤다.
특히 언론을 이용한 헐뜯기는 절정이었다. 물론 그가 언론에 지시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으나 사실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데려다 놓고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언론 태도는 문제가 많았다.
박 대통령은 마닐라에서 졸지에「매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마닐라의 신문들은 연일 박 대통령의 월남 파병을 비난하며 월남전을 부추기는 전쟁광으로 묘사하며 보도했다. 물론 제가 언론이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닐라의 신문은 조금은 다소곳해야 예의가 아닐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회의 도중 엉뚱하게 의제와 관련없는 한반도문제를 거론하는 일이었다.
「우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때문에 월남전도 중요하지만 다음엔 한반도가 위험하니 우리 이 문제도 함께 다뤄 봅시다.」
유창한 영어에 쇼맨십이 다분한 몸짓으로 마르코스는 1천여 명의 세계 각국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마치 평화의 사도인 양 소리높혀 외쳤다.
그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리셉션 때면 각국 원수들이 검은색 예복차림이었는 데 비해 필리핀 전통의상인 흰 남방셔츠 차림의 그는 존슨 앞에서까지 미국을 비난하며 평화론을 역설하는 등 입의 크기가 가히 지구 만할 정도였다.
「저 새끼, 입만 살아서 입만 점점 커지니….」
오죽 약올랐으면 김형욱이 벌레씹은 얼굴로 마르코스를 노려보기까지 했을까. 그러나 박 대통령은 여전히 담배만 피워대며 무표정. 역시「큰 그릇」이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마닐라에서 박 대통령과 마르코스의 한판 싸움은 박 대통령의 승리였다. 언뜻 보면 마르코스에 끌려다닌 것 같으나 박 대통령은 묵묵히 후일을 대비했던 것이다.
「내게 절실한 건 너와의 싸움이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야….」
박 대통령은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마닐라에 있는 동안 끝내 박 대통령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이 장관, 저 친구 얼굴 보니 알차게 생겼어. 분명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마르코스가 박 대통령의 방을 예방했을 때 그의 행동거지를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 박 대통령이 그가 나간 후 내게 귀띔해 준 말이다. 결국 마르코스가 과시욕에 들떠 세계 언론을 상대할 때 박 대통령은 말없이 그의 손짓 하나하나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쌍둥이처럼 살다간 그들이지만 지금 둘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더러난다.
박 대통령의 말대로 한국은 중진국으로 올라섰으나 필리핀은 아직도 후진국으로 남아 있다. 겉을 중시하는 마르코스와 속을 더 탐내는 박 대통령의 종착역 모습인 셈이다.
월남전을 떠올리면 난 또한「브라운 각서」를 잊을 수 없다.
경제 발전과 해외진출의 관문이 된 브라운 각서는 사실 진통 끝에 어렵사리 태어났다.
그간 질질 끌던 한 ․ 미 교섭은 해리맨의 중재로 급속히 빨라졌다. 브라운 대사가 너무 선뜻「오케이」를 연발해 난 혹시 국민이 오해하지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너무 쉽게 타결되면 미국의 압력 때문이란 오해를 부를 수도 있지 않은가.
때문에 난 일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 브라운 대사에게 합의사항을 각서로 남기자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펄쩍 뛴다.
「난 미국 대표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신사 국가이니 약속은 꼭 지킵니다. 무슨 각서를 ….」
그러나 난 물러서지 않았다.
「브라운 대사, 물론 이해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가지 합의된 게 실천되지 않는 이유는 귀측 대사가 바뀔 때마다 문구를 엉뚱하게 해석했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번엔 반드시 문서로 남깁시다.」
결국 브라운은 존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내락을 받은 후에야 각서를 써 주었다. 그날은 나나 브라운 모두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긴장이 풀린 우리는 거피를 마시며 그간 어려웠던 대목을 떠올리며 얘길 나눴다. 그런데 워낙 어렵게 타결돼서인지 브라운은 조심성이 날아간 모양이었다. 마주앉은 그가 다리를 꼬고 앉기 위해 한쪽 다리를 들다 그만 탁자 위의 커피잔을 차버린 것이었다.
탁자 위의 서류에까지 커피가 스며들 때쯤 퍼뜩 아이디어가 떠 오른 난 당황해 하는 브라운을 슬며시 찔러보았다.
「브라운 대사, 우리 연극 한 번 해볼까요….」
「예? 어떤….」
「당신이나 나나 어려운 협상 이제 끝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협상이 너무 쉽게 타결됐다면 우리 국민이 혹 의심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선데 ….내가 후에 러스크 국무장관에겐 사실대로 얘기 할 테니 당신이 연극 좀 하시오. 지금 밖엔 기자도 많이 와 있는데… 마치 우리가 싸운 것처럼 말이오.」
처음엔 눈이 휘둥그래졌던 그도 내 제안에 장난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좋소.」
이때부터 우린 약 10분간 괜히 소리를 높이며 탁자를 걷어차고 커피잔을 깨트리며 법석을 떨었다.
잠시 뒤 서로 눈짓을 끝낸 후 내가 끄덕하자, 브라운이 더디어 방문을 열고 밖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수십 명의 기자 눈이 일시에 어지러운 방의 풍경과 당황해 하는 내 얼굴로 쏠렸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예닐곱 개나 되는 기자들의 마이크가 브라운의 입가로 들이닥치자 화난 표정의 브라운이 입을 열었다.
「노 코멘트.」
차지철이 등장하는 연극으로 시작된 협상은 결국 나와 브라운의 연극으로 마감했던 것이다.
푸대접받은 닉슨의 오뉴월 서리 복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비운의 정치자가 독을 삼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정월에 태풍을 몰고 온다든지 장마철에 눈을 내리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피를 부를까 아니면 자존심 말리는 보복이 있을 것인가.
전체주의국가가 아닌 민주국가라면 단연 후자(後者)의 경우가 많을 것이다. 더구나 비운이 행운으로 바뀌어 힘을 가지고 독을 뿜는다면 당하는 자의 얼굴은 창백을 넘어 투명해질 것이고 그의 자존심은 아예 땅 밑으로 사라져 보이기조차 않을 것이다. 때문에 닉슨의 한과 고집이 지금 이렇게 내게 서늘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닉슨은 정말 무서운 성격과 짐념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우린 사소한 실수로 닉슨에 한(恨)을 제공해 끝내 그의 집권 6년간 숱한 굴욕을 감당해야 했다.
닉슨과 한국과의 관계는 6 ․ 25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이젠하워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그는 한국전의 휴전을 바라보며 아시아에 눈을 뜨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후 1960년 케네디에게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하고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시자 세계의 언론은 성급히 결론을 내린다.
「이제 닉슨은 끝났다.」
그러나 결코 닉슨은 녹녹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 자신 존슨의 월남정책을 바라보며 차기 대권을 위해 히든 카드로 월남전을 연구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 근처라도 살펴야 하는 법. 1966년 홀연히 일어선 그는 월남을 이해하기 위해 아시아로 달려왔다. 닉슨은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돌아보며 뼈저리게 깨우친다.
「미국이 이해하기에 아시아는 너무 복잡하고 미묘하다. 때문에 앞으로 미국의 대(對)아시아정책은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이른바 후일「닉슨 독트린」이라 불리는 보검의 담금질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당시 닉슨의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작은 이런 움직임을 감지 못한 점이다.
동남아와 일본을 돌아본 닉슨은 월남에 병력을 파견한 한국의 표정을 살피려 1966년 9월 마닐라정상회담을 한 달 정도 앞둔 때 1박 2일의 짧은 여정으로 서울땅을 밟았다.
하나 그때만 해도 닉슨의 짧은 걸름걸이가 후일 우리의 목에 들이댈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정말로 정말로 나 이외엔 전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첫 걸음이었다
아무리 주지사 선거에서까지 패했다지만 닉슨은 그래도 거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때문에 브라운 대사는 청와대 문을 두드려 박 대통령과의 만찬을 타진했다. 그러나 국제감각이 무딘 박 대통령은 별로 탐탁찮게 여기곤 청와대 빗장을 좀처럼 열려 하질 않았다.
「협상의 귀재」라 불리며 불과 두 달 전 나와 함께「브라운 각서」를 만들며 월남 파병협상을 끝낸 브라운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급기야는 내게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각하, 지금 닉슨이 온 모양인데 사람팔자 알 수 없습니다. 그를 비록 언론에선 끝났다고 냉대하지만 그래도 그는 아직 거물이고 차기 대통령후보로 다시 나설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침 그가 불우할 때니 지금 그를 후대한다면 후일 결코 우리를 잊지 못할 겁니다.」
브라운 대사에게 떠밀리다시피 청와대로 들어왔지만 사실 나도 속으론 박 대통령이 닉슨을 꼭 만나 주었으면 싶었기에 강력히 닉슨과의 만찬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달갑잖은 표정이었다.
「그 사람 이미 끝난 사람인데 구테여….」
「그래도 각하….」
속이 탄 내가 재차 건의했으나 여전히 박 대통령의 얼굴엔 찬기운이 감돈다. 결국 닉슨은 박 대통령과 점심도 못하고 그저 커피 한 잔 마시는 걸로 끝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 될려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예상 외의 예우에 몸이 단 브라운이 그날 저녁 급히 장관들과 함께하는 만찬을 추진했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같은 시간에 박 대통령이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 입에선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니나다를까 내가 미 대사관 만찬장에 들어서니 미군 장성들과 함께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불과 두서너 명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 느낌으로도 시종 식사 내내 닉슨의 표정은 텅빈 좌석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 아무래도 그대로 두면 우리나라에 득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난 식사가 끝난 후 닉슨을 넌지시 찔러 보았다.
「어떻습니까, 피곤하지 않으면 아직 시간도 초저녁인데 제가 기생집으로 모실까요?」
「좋소.」
워낙 지루했던지 의외로 그는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후 브라운 대사와 함께 셋이서 가도록 하죠.」
그러나 그날 하늘은 끝내 우리편이 아니었다.
「참, 저는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 가야 할 데가 있어서 좀 곤란 한데요….」
닉슨을 보좌해 줘야 할 브라운이 난색을 표하는 게 아닌가. 닉슨 혼자 간다면 사실 예우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내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자 닉슨은 할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여기서 얘기나 합시다.」
결국 난 기생집 가는 걸 포기하곤 미 대사관에서 그와 장시간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닉슨은 언뜻 보면 첫인상이 과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얼굴에서 케네디에게 졌다는 평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나도 들 정도였다.
뭐「범죄형」얼굴이라던가….
그러나 난 그때까지 닉슨만큼 박식하고 설득력있는 혀를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었다. 그만큼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때 그는 내게 차기 대통령 경선에 나설 것임을 단호히 밝혔다.
「그때 내가 케네디에게 지고나서 주지사 선거에 나간 건 사실 정계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소. 존슨의 월남정책 정말 촌스럽고 바보스러워 내가 꼭 나서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생각엔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것 자체부터 잘못이오. 월남은 아시아문제니 어디까지나 아시아인들이 해결해야 하잖소. 그러나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면 미국은 대국답게 싸워야지 저게 무슨 꼴이오. 만일 내가 다음에 대통령이 되면 난 과감히 싸워 단시일 내에 끝장내 버릴 것이오.」
난 그날 그와 대화하며 닉슨의 집념과 고집이 대단함을 눈치챘다. 또한 후일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분명 한국에 불리할 거라 짐작했다.
사실 닉슨을 박대한 건 우리의 외교 관행에도 문제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사람 대접은 어제와 내일이 없는 오늘뿐인 단견으로 점철되어 왔었다. 아무리 그가 한물 갔다는 평을 듣는 정치인이라 해도 일국의 부통령까지 지낸 인물을 그렇게 소흘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일 얘길 들었지만 닉슨은 동남아와 일본에선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다 한다. 운명은 모르는 법이라 하여 모두들 닉슨을 최대한 예우해 주며 미래 투자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자존심 세기로 소문난 닉슨이 한국의 겨우와 비교 안할 리 없을 테고, 아마 잠을 자면서 이를 갈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 내 우려는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다.
2년 뒤 1968년, 제3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닉슨은 월남전으로 수세에 몰린 험프리를 누르고 백악관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만일 월남전만 아니었다면 험프리의 승리는 명약관화했다. 닉슨이 당선되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박 대통령이었다.
「그때 잘 대해 줄걸….」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예상대로 닉슨은 취임식이 끝나기 무섭게「닉슨 독트린」을 제창한다. 아울러 주한미군의 철수까지 거론한다.
「그까짓 한국 힘 없으면 망하라고 해. 무슨 상관이야. 일본만 자유민주국가로 남아도 충분한데….」
갑자기 청와대에 비상벨이 울리는 건 당연한 일. 당시 한국의 안보 기둥인 주한미군의 철수는 곧 국가와 정국의 혼란을 부를 건 뻔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박 대통룡의 정권 유지 차원이 아닌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게 될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모든 루트를 다 동원해서 박 대통령과 닉슨의 면담을 주선하라.」
한국의 정계는 발칵 뒤집혀졌고 워싱턴행 비행기엔 우리 쪽의 밀사가 줄을 이어.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던 최규하는 물론 나까지도 워싱턴 정가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닉슨의 정책성도 좀 가미된 보복은 이때부터였다. 백악관 빗장은 커녕 근처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허용치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끌기를 무려 번년. 그 사이 박 대통령은《워싱턴 포스트》외의 회견에서 미국에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내주겠다는 등 추파를 던졌고 끝내 닉슨은 못이기는 척 입을 연다.
「그럼 좋소. 그러나 워싱턴에선 안 되고 8월, 내 여름휴가 때 내 고향 근처 센프란시스코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휴가 때 별장으로 놀러가는데 그쪽으로 오라니…. 그것도 그의 고향인 샌클레맨티 집엔 그나마 헬리콥터 이착륙장까지 갖춰져 있어 박 대통령의 체면을 살려 줄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시설이라도 있었으나 닉슨은 그것마저도 아갑게 여겨 센프란시스코의 센프란시스코호텔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무릎끊고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이 차라리 더 나을 듯싶었으나 이쪽이 잘못한 것도 있으니 어쩌랴. 박대통령은 자존심의 눈물을 머금고 1969년 8월21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당시 난 이미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던지라 후에 박 대통령으로부터 그때의 심정을 전해 들었다.
「내 약소국의 비애를 옛날 케네디 친서건으로 버거 대사에게 당한 것 이상으로 비참하게 맛보았소. 난 그날 비통함의 연속이었소. 약속시간에 맞춰 자동차로 호텔에 가면서도 난 최소한 호텔 로비에선 닉슨이 맞아 주리라 기대했었소. 그러나 호텔로비에서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내릴 때도,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닉슨은 나타나지 않았소. 내가 방에 들러선 후 왼쪽의 큰 문이 다시 열리길래 보니 그쪽 방 저끝 구석에 닉선이 선 채 날 맞이하는 게 아니겠소. 물론 걸어오지도 않았고. 마치 속국(屬國)의 제왕을 맞이하듯 했단 말이오. 그뿐만이 아니오. 저녁식사 땐 시시껄렁한 자기 고향 친구들 불러다 앉혀놓곤 같이 식사하라는 게 아이겠소. 내 아무리 1966년 닉슨이 방문했을 때 섭섭하게 대했기로서니 너무한게 아니오.」
이만큼 닉슨의 보복은 집요하다 못해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월남전을 끝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마닐라 정상회담에 의해 믹국과 한국은 종전시에도 함께 협의하게 돼 있었다. 하나 닉슨은 이 약속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키신저를 시켜 월남전을 끝냈다.
물론 미국 나름의 정책도 있었겠지만 결국 박 대통령의 사소한 실수 하나가 후일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돌이켜보면「닉슨의 1박 2일」은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그「1박 2일」이 주한미군의 첫 철수를 낳았고 그건 박 대통령에게 위기의식을 안겨 줘 그는 이후「10월 유신」「핵(核)개발」등 자신의 불안을 보전해 줄 악수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후 카터 행정부와도 사이가 안 좋았으며 미국과의 불화는 정국의 불안을 불러 결국「10 ․ 26」까지 이어진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엔 분명 닉슨의「1박 2일」도 불씨의 하나였던 것이다.
또한 워낙 닉슨의 심기가 칼날 같았기에 우린 월남 종전(終戰)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미국에 눈치조차 한 번 못 주고 그내로 당해야 했다. 키신저가 북경과 파리를 오가며 레둑토 월맹 대표와 노벨 평화상 문안을 작성할 때도 우린 그저 쓴맛 다시며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우린 월남전을 통해 경제적 실리 이상으로 정치 ․ 외교적 성과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격이었다.
지도자의 사소한 판단. 특히 인간관계의 실수가 가져온 파장치고는 당시 크기 위해 몸부림치던 약소국 한국에「닉슨의 입김」은 피하지 못할 태풍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씨가 좋다」 존슨의 한국사랑
백악관(白堊館)은 이름 그대로 아시아(亞)의 지배자(王)가 사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시아에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길 게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름에 색깔이 들어있어서인지 청와대(靑瓦臺)가 백악관 바람을 유달리 탄다. 때문에 각기 주인이 바뀔 때마다 건물의 얼굴도 흐렸다 개였다 수시로 바뀐다.
「운명의 1박 2일」탓에 닉슨 시절 청와대 얼굴이「잔뜩 찌푸림」이었다면 그 이전 존슨 시절은「파안대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박 대통령과 존슨은 찰떡궁합이었고 그 덕에 한국은 그의 재임기간(1963~1969년)중 백악관의 전폭적인 지지로 경제 기반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박 대통령과 존슨의「사랑 나누기」는 정말 남달랐다. 물론 우리의 월남 파병이 결정적 불씨가 되었지만 이 둘은 서로 손을 맞잡고 최대한 베푼다.
박 대통령은 아홉 살이나 많은 존슨을 형님처럼 대하며 따뜻한 정을 느꼈고 존슨 또한 작고 패기에 찬 박 대통령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데 감동을 받았다. 아무튼 당시 청와대의 표정은 건국 이래 가장 화평하지 않았나 기억된다.
물론 당시는 미국이 재채기 시늉만 해도 우린 감기약을 삼켜야 했던 때이긴 하지만 워낙 박 대통령과 존슨이 가깝게 지내자 외교가에선「서울은 워싱턴의 뒷골목」이란 소리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 둘의 관계가 극적으로 표출된 게 바로 1966년 10월 말 존슨의 방한 때다. 이때 둘은 마치「사랑 베풀기」경쟁이라도 하는 듯 했다.
「이합집산을 밥 먹듯 하는 세계사에서 한 ․ 미 두 나라는 첫발부터 지금까지 우의로 일관되었고…. 나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놀랄만큼 새롭게 일어선 한국민의 성공을 미국민도 함께 기쁘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백만 명을 헤아리는 환영 인파에 입이 귀밑까지 벌어진 존슨은 그간 국내외에서 월남전으로 인해 얻어터진 분풀이라도 하듯 초장부터 찬사를 내뿜는다.
하나 존슨을 맞는 박 대통령의 충성(?)도 결코 지지 않았다. 평소 근검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이라 할 1억5천만원을 투입, 연도에 늘어선 환영 인파들에게 나눠 줄 양국 국기 100만 개를 준비했고, 존슨을 맞이할 중앙청엔 카핏과 네온싸인가지, 거기다 5만여 송이의 국화까지 분위기 연출을 위해 동원했다.
뿐만 아니라 워낙 거구인 존슨을 위해 홍콩에서 특제 대형 침대를 긴급 공수했으며 한양대에서 존슨이 묵을 워커힐 뒤편 빌라까지 이틀밤을 새워 자갈길을 포장도로로 바꿔놓기까지 했다.
실로 도깨비방망이만이 가능한 일을 존슨을 위해 뚝딱 해치운 셈이다.
그러니 존슨의 입에선 계속 달콤한 밀어가 쏟아질 수밖에….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오. 사실 난 한국민들이 이토록 뜨겁게 날 사랑할 줄 미처 몰랐소. 만일 이런 경험도 없이 후일 은퇴를 했다면 난 무척 초라하고 슬펐을 것이오.」
자리도 따로 없었고 상대방도 가리지 않았다.
「한국은 아직 가난하오. 그러나 국민들 좀 보시오. 이렇게 질서 있고 틀 잡혀 있는 국민 정말 드문 것이오. 여러분은 결코 가난하게 살 민족 아니오. 멀지 않아 분명 한국은 선진국 될 것이오.」
듣기만 해도 시원한 말이었다. 하나 이건 결코 우리의 환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존슨은 한국에 대해 무조건적이라 할만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엔 월남전의 쓰라림과 마닐라정상회담 당시 마르코스의 방자함에 실망한 탓도 있었다.
그때는 존슨에게 최악의 시기였다. 월남전으로 인해 세계와 미국은 존슨에게 차가운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었으며 게다가 정작 월남에서도 계속 밀리기만 할 때였다.
그때 히든 카드로 생각한 것이 마닐라정상회담. 그러나 거기서도 능구렁이 같은 마르코스의 잔꾀에 놀아나다 한숨만 쉰다.
「박 대통령, 당신도 봤죠. 도대체 필리핀은 월남전에 몇 명이나 보냈소. 마르코스 저 친구 입만 살았소. 도대체 필리핀도 엉망이면서 아시아의 맹주 노릇 하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오. 당신을 보시오. 월남전에 5만여 명이나 보냈고 ASPAC을 만드는 등 공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엄숙하고 겸손하오…. 지도자라면 이런 멋도 있어야지 저 친구는 ….」
게다가 미국이 피흘리며 싸우는 월남의 분열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은 각각 다른 비행기로 와 따로따로 연설을 하는 등 마치 존슨의 심기 건더리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했다.
「설사 국내서는 정적이라 해도 밖에 나오면 손을 잡아야지 저꼴좀 보시오. 저렇게 따로 놀면서 어떻게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가오. 저 탓에 우리 미국과 한국이 고생하는 거 아니겠소.」
존슨은 차라리 동정한다 싶은 눈동자였다. 속으론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니 울화만 치밀 수밖에…. 게다가 존슨의 눈에 불을 켜게 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존슨과 박 대통령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마치 소풍 오듯 마닐라정상회담 자체를 대수롭잖게 여겨 마르코스가 쇼를 하던 존슨이 역정을 내든 말든 눈 귀 입 모두 닫곤 천하태평이었다.
퍼스트 레이디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모델 빰치는 이멜다의 현란함에 자극 받았는지 모두들 옷과 화장에만 정신이 팔려 차마 눈뜨곤 못 볼 지경이었다.
「이 장관, 알다시피 내 월남에 들렀다 마닐라로 가잖소. 그런데 마치 유람하듯 동부인하면 이역땅에서 피땀 흘리는 우리 장병 무슨 낯으로 보오. 그러니 남들이야 어떻든 난 혼자 가겠소.」
때문에 굳이「싱글」을 고집한 박 대통령의 마음과 정성까지도 무색할 밖에….
물론 그는 군인 출신이었기에「전쟁」에 관한 한 진지함을 잃지 않았고 마치 이등병의 눈초리 같은 기분으로 마닐라로 왔으나 그런 엉터리 같은 분위기에선 뭘 더 바라겠는가.
5만 명을 보낸 박 대통령이 이러했거늘 45만 명을 투입한 존슨의 속쓰림은 말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존슨의 몰락의 조짐은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다 본래부터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던 그였으니 박 대통령의 절대적이라 할 환영에 가슴이 뭉클하는 건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사실 존슨의 호감 때문에 우리 어찌면 캘리포니아 전체를 한인타운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치욕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일꾼 수출 이후 공식적인 미국 이민의 첫발도 물론 이때였으나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사람들이 당시 LA로 몰려갔다. 그것도 우리가 맘만 먹어면 얼마든지 무한정 더 보낼 수 있었으나 박 대통령이 탐탁찮게 여긴 탓도 있다.
「한국 사람은 우선 씨가 좋다. 그러니 이왕이면 우수한 민족을 받는 게 미국에도 득이다.」
존슨의 이런 한인 선호 덕에 사실 난 좋은 기회라 하여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적이 있었다.
「각하, 이번 기회에 아예 캘리포니아 전체를 우리 민족으로 물들여 버립시다.」
그러나 그는 역시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
「이 장관 말 일리 있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에게도 여러면에서 도움 될 거요. 하나 내 생각엔 아직 우리나라는 해야 할일 많소. 그런데 미국 이민 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그나마 몇 안 되는 쓸 만한 친구들 재산 챙겨 다 바져나갈 게 아니오. 그렇다고 쓸모없는 친구들만 보내면 나라 망신시킬 테고…. 그래 아직은 시기상조 같소.」
지금 생각하면 박 대톨령의 판단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1962년 겨우 200여 명에 불과했던 미국 이민이 이후 1965년까지 거의 매년 2천여 명. 그후 1969년까진 4천여 명씩 빠져나갔으니 이민을 방치할 순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린 그때 존슨의 비호 아래 경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한국비료․전주공단․구로수출공단 등 초창기 경제 기반은 모두 존슨 재임시 시작했거나 완성했다.
또한 한국 과학의 요람 KIST 도 역시 존슨의 선물이었다.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가 월남에 쏟아붓는 돈 모두 허공에 날릴게 뻔하오. 그러니 한국을 돕는 건 분명 미래엔 미국에도 영광으로 남을 것이오. 그러니 우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해주겟소. 자, 우리가 무슨 기념품을 주는 게 좋겠소?」
당시 로스토 대통령 특별보좌관은 존슨의 명에 따라 정부 각 부처를 돌며「프로젝트」 찾기에 나섰다. 그때 내가 건의한 게 바로 KIST 설립이었다.
「우리가 부족한 건 기술뿐입니다. 다른 건 뭐든 몸으로 때울 수 있지만 기술은 안 되잖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기술입국을 도와 주십시오. 전에 MIT 갔더니 정말 부럽더군요. 그런 MIT 하나 세워 주시오.」
분명 무리한 요구였으나 존슨과 의기투합한 로스토였기에 당연하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끄덕.
「좋소, 하나 아직은 MIT 같은 거 세워도 운용 못할 테니 그건 힘들고 MIT 내에 있는 기술연구소 정도는 우리가 지원해 주겠소.」
무려 그때 돈으로 1천만 달러였던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걸 존슨은 베풀었다.
존슨은 방한을 떠올리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바로「기생파티」건이다. 당시 장안에서 화제가 됐던 기생파티는 중앙청 만찬장의 국화 내음과 함께 다가왔다.「박 대통령, 옆의 이 장관 큰 일꾼입니다. 한일회담 성사시켰죠. 또 ASPAC창설했죠…. 정말 내 밑에 이 장관 같은 인물 있었으면 오늘의 미국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자신의 말대로「생애 최고의 날」이라선지 존슨은 괜히 박 대통령에게 내 칭찬까지 늘어놓는다.
「하하, 존슨 대통령이 정말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이 이 장관, 사실은 낮의 외교도 잘하지만 밤의 외교는 더욱 능숙합니다.」
이미 볼이 불그스레한 박 대통령까지 날 걸고 넘어진다. 평소 멋쟁이신사로 소문난 존슨의 눈이 동그래지자 박 대통령은 존슨의 귀 쪽으로 몸을 굽히곤 날 힐긋 보며 입을 열었다.
「난 마누라 한테 꽉 잡혀 있는데 이 장관은 밤만 되면 무법자지요.」
갑자기 존슨의 표정이 묘해지며 장난스런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사실 존슨 각하. 제가 가끔 대접차 기생집을 더러 가는데 그걸 박 대통령께선 질투하시는 겁니다.」
내가 해명하며 칵테일 잔을 기울이자 존슨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거, 기생들이 무척 매력적이라 들었는데….」
은근히 존슨이 말꼬리를 올린다. 언뜻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 박 대통령의 얼굴엔「그깐, 기생파티 쯤이야…」하는 끄덕거림이 숨어 있었다. 난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존슨 각하, 그럼 기생집에 한 번 갈까요?」
내 말에 존슨은 주위를 둘러 버드 여사가 저쪽에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곤 조용히 외쳤다.
「두말하면 잔소리.」
얘기 나온 김에 아예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의견을 모아 요정보다는 방한 마지막날 숙소에서 가까운 워커힐 별체에서 파티를 열기로 손가락을 걸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소련과의 핵전쟁보다도 더 비밀리에 진행된 이 특급비밀을 버드 여사가 어떻게 눈치챘는지 막상 당일이 되자 종일 존슨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숙소에서 있는 만찬이 끝난 후 존슨의 엉덩이는 의자와 입맞추느라 정신없었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는 나까지도 덩달아 안절부절 될 정도였다.
벌써 예정된 시간보다도 한 시간이나 흘렀으니 아마 기다리며 목청을 가다듬던 기생들의 솜씨도 좀 삭아졌을 것이었다.
갑자기 참다 못한 존슨은 내 손목을 잡아 이끌며 능청을 떤다.
「참 이 장관, 아까 비밀 얘기 있다고 하지 않았소. 자, 나가서 얘기합시다.」
하나 기다렸다는 듯 옆의 버드 여사가 입을 삐죽 내민다.
「꼭 밖으로 나가야 하나요. 제가 자릴 비켜 줄 테니 여기서 말씀 나누시죠.」
동시에「쾅」하는 소리와 함께 버드 여사는 옆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애처가로 소문났던 존슨의 얼굴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지는 걸 난 느꼈다.
잠시후 풀죽은 말 한마디.
「이 장관, …우리…내일 얘기합시다.」
결국 존슨은 기생 얼굴조차 한 번 못 본 채 아쉽게 한국을 떠났으나 그후 그가 떠난 자리엔 온갖 무수한 소문의 꽃이 피어올랐던 것이었다.
박 대통령과 존슨의 밀착에서부터 시작된「한미 최대 밀월시대」의 뒤안길엔 이런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세월이 흘러 며칠 전 난 우연히 워커힐을 찾았었다. 그리고 산중턱에 올라 존슨을 떠올리며 한강으로 눈을 돌리니 뿌연 매연으로 뒤덮힌 강 저쪽 강남에선 사반 세기 전 존슨이 아침산책을 하며 내게 던진 말 한마디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듯했다.
「이 장관, 저길 보시오. 저 갈대밭… 내 고향 택사스를 보는 듯 하구려. 정말 서울은 살기 좋은 곳이오. 사실 워싱턴은 공포의 밤을 지새야 하오. 그러나 서울은 너무 평화스럽고 질서있소. 난 진정 사람이 살 만한 곳인 이곳 서울. 특히 저 강너머 갈대밭을 여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
한국의 모든 것. 서울의 모든 것. 그리고 강남의 갈대밭에 무작정 미쳐 있던 노정치가 존슨은 그후 1973년 고향 택사스주 길레스피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후 그가 사랑했던 강남의 갈대밭도 날카로운 문명의 낫에 야금 야금 베어져 버렸다.
2005. 0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