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일보》 1933년 10월 8일에 실린 채만식의 산문 〈모던 라이프(Modern Life)〉. |
◇…日曜
무릇 ‘모던’ 두 자(二字)와는 인연이 먼 내가 이것을 쓴다는 것이 적지 아니한 외도(外道)인 상싶다. 그러나 ‘여왕님의 명령’이니 거역해서는 아니 된다. 써야지.
◇
현대 도시의 ‘인텔리’ 등은 자극(刺戟)의 만성(慢性) 중독자(中毒者)들이다. 색채는 강렬한 것을 구(求)한다. 그 일례(一例)로 요즘 여자들의 의복의 빛깔과 무늬를 들면 그만이다. 음향(音響)은 소(騷)한 것을 구한다. ‘재즈’가 성행(盛行)하는 것은 그것이 가두(街頭)의 소음을 능(能)히 이겨내는 때문이다.
‘스포츠’에는 모험성(冒險性)이나 살벌성(殺伐性)을 띠운 것을 구한다. 그래서 등산과 ‘복싱’이 유행한다.
오락은 복잡하고도 아기자기한 것을 구한다. 그래서 ‘베이비 골프’가 ‘모던’ 가두(街頭)의 일경(一景)을 이루게 된 것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
‘베이비 골프’라고 누가 이름을 지었든지 왜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나더러 이름을 지으라고 했으면 ‘소꿉질 골프’라고 했을 것이다. 훤하니 넓은 잔디 벌판에서 딱 힘있게 ‘골프’를 치는 흉내로 손바닥 만한 마당에 열여덟 개의 다 다른 ‘코스’를 만들어 놓고 조그마한 공채로 조그마한 공을 쳐서 구멍으로도 넣는 이 얄망궂은 장난이 ‘소꿉질 골프’다.
◇
|
채만식의 산문 〈모던 라이프(Modern Life)〉에 실린 골프치는 사진. 골프를 ‘베이비(베비) 골프’라고 명명했다. |
18코스가 다 다르나 또 ‘베이비 골프’ 장마다 ‘코스’가 다 다르다. 그러나 근본의취(根本意趣)는 될 수 있으면 얄망궂게 만들어놓는 데 있다.
◇
일례를 들면 약 40도 가까운 경사진 ‘코스’가 있다면 이놈을 밑에서 딱 쳐올리면 공이 위로 올라가기는 하나 대개는 구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도루 다그르르 굴러 내려오곤 한다.
◇
어느 ‘코스’든지 구멍에 집어넣기까지 친 횟수를 세어 ‘메모’에 적어 가지고는 18 코스를 승해서 점수가 적어야만 성적이 승편(勝便)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베이비 골프’니 ‘소꿉질 골프’니 또 얄망궂은 장난이니 한 말을 듣고 그러면 정말 아동의 유희장인가 여겨서는 오해다.
천만에!
‘베이비 골프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누구라고! 적어도 조선 서울서는 1933년 식이라고 자랑하는 새로운 감으로 새로운 맵시로 지은 양복을 입고 얼굴이 해맑고 어제저녁에 ‘바’ ××에서 어찌어찌했다든가 쯤의 사교적 담화쯤은 척척 내어 놓을 만한 청년신사(靑年紳士)들이다. 개중에는 당당히 정식을 갖추어 ‘골프’바지를 입은 용사도 더러는 섞이어 있다. 또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은 몹시 익은 숙녀도 만록총중 수점홍(萬綠叢中 數點紅)으로 섞이어 있다. 또 무슨 꼬(××子)상과 동반해 온 이도 있고 ×홍(紅)이나 △월(月)이나 ○옥(玉)이를 데리고 온 이들도 있다.
일후(日後)에 내 친구가 경성부윤(京城府尹)이 된다면 나는 그에게 권고하여 ‘모던 보이, 모던 걸 사절-가족동반자 두뇌노동자 대환영’이라는 패(牌)를 써 붙인 ‘베이비 골프장’을 부영(府營)으로 많이 만들어 놓게 하겠다.
(출처=《조선일보》 1933년 10월 8일)
〈用紙節約〉
|
《중앙신문》 1945년 11월 20일, 21일에 실린 수필 〈용지절약〉. |
해방 이후 우리 생활이 여러 방면으로 풍부하여진 것이 많거니와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뜨이고 마음 흐뭇하기는 출판물이 풍성하여진 것일 것이다. 지방은 그만두고라도 서울 시내에서만 간행되는 일간신문이 열 종(種)이 넘는다. 주간 순간(週刊 旬間) 역시 열 종이 넘는다. 월간잡지사와 출판사는 실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리하여 서울 거리는 완연히 신문과 주간 순간이며 대소(大小)의 ‘팸플릿’ 등으로 덮이다시피 한 느낌이 없지 아니하다.
다시 그 부지기수한 월간잡지와 출판사의 간행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보면 과연 비난을 이루게 될 모양이다. 열 종이 넘는 일간신문과 열 종이 넘는 주간 순간과 그리고 부지 기수한 월간잡지며 단행서들! 일찍이 우리 문화계에 이런 성사가 있었을까 보냐.
해방이 새삼스럽게 기쁘고 고마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한 번 생각하여 본다. 이 성대한 난제가 과연 오래오래 계속될 것인가 하고.
관계자들에게 들으면 대개가 용지의 재고가 넉넉지 못함을 근심한다. 많이 준비되었다는 곳이 한 1년 지탱할까 하다고 한다. 그러면 앞으로 1년 후에는?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하여 보아 조선의 제지공업이 앞으로 1년 후면 용지를 여의히 생산하리라고 낙관할 재료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있는 용지를 다 쓰고 나면 1년 후에는 우리의 출판문화는 다시금 쇠잔하고 말 것이 아닌가? 시방 그 많은 신문과 주간 순간이며 ‘팸플릿’과 잡지와 도서들이 죄다가 존재할 객관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주관적으로는 제마다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충분히 설명이 된다고도 하리라. 그러나 민중은 내용이 대동소이한 것 아니면 빈약무익한 것이 태반인 그것들로 인하여 차라리 정신이나 어지러울지언정 그 죄다가 요긴하고 고마울 리는 없을 것이다.
겸손하여 물러섬으로써 새로이 용지가 나오도록까지 용지를 아끼자. 그리하여 1년 쓸 것을 2~3년으로 늘려 쓰자. 출판은 자유라고 하지만 전체의 이익 즉 전체의 명일(明日)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유는 정말 자유가 아니다. 진심으로 국가를 민족을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날 것이거든 오히려 군소 출판을 용지를 아낌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로 삼을지어다.
(출처 =《중앙신문》 1945년 11월 20일, 21일)
〈X孃과 ‘하이힐’과 걸음 맵씨와 - 窓 -〉
|
《女性》 1939년 8월호에 실린 산문 〈X孃과 ‘하이힐’과 걸음 맵씨와〉. |
X양!
내 부디 한턱 쓸게시니 제발 그 걸음걸이를 좀 고칠 수 없으시우? 일건 맵씨(맵시)가 나라고 오이씨 같은 그놈 굽 높은 구두를 신고서도 대체 방금 공사가 생겨서 후부가 잔뜩 불안했던 말씀이요? 금시로 길바닥이 꺼진단 말씀이요?
설마 잠자리를 잡으러 가는 건 아닐 것이고 혹시 귀양(貴孃)의 오금이 불행하여 본시 그렇게 삼십도만큼 오그린 채 펴지질 않는지요.
허다면 모르거니와 귀양이 내 앞에서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오금을 꺾은 채 영영 펼 줄을 모르고서 그대로 깐죽깐죽 발을 떼어놓는 맵시라니 참말이지 약간 망측 따위가 아니라 사뭇 눈물이 나올 만큼 참담합디다.
남자도 젊은 친구가 양복을 입었건 조선 옷을 입었건 한편 발을 앞으로 내어 디딜 때 뒤에 있는 다른 한편 다리의 오금을 쭉 펴지 않고서 아까 디딜 때에 입은 채 그대로 들어서 앞으로 옮겨놓곤 하는 영감 걸음을 걸을 양이면 장히 궁상스러워 보이는 법인데 항차 다리가 통으로 다 내다보이는 그리고 맵시라면 밥을 덜 먹어가면서라도 내려 드는 귀양과 같은 소위 신식 여인이 번연히 그런 우스꽝스런 걸음걸이를 하고 있으니 왜 아니 내가 슬프겠다구요?
그러므로 귀양은 혹시 시골에 갔다가 삼베 적삼에 명지 고름을 달아 입은 여편네를 만나면 입을 삐쭉할테지요?
뭐 시골까지 갈 것도 없고 첩경(捷徑) 전차 속 같은 데서 가령 입이 비뚤어지고 시커먼 곰보딱지요 한 여편네가 처억 ‘코티’ 곽을 꺼내들고 들여다보면서 연신 화장을 다스리고 앉은 광경을 본다면 귀양은 내가 시방 귀양의 그 참담한 걸음 맵시를 통곡하듯이 응당 크게 울지 않고 견디겠습니까?
“누가 댁더러 보라기에 그따위 객쩍은 소리를 하느냐?”고요?
온 천만에!
이 세상의 젊은 남자들이 모조리 장님이라면 귀양은 절대로 호사를 하고 화장을 하고 맵시를 내고 할 재미를 잃어버린 커다란 비극의 ‘히로인’이 되리라는 것을 귀양 스스로가 더 잘 알면서도 괜히 그러지 마시오.
하고 내 부디 한 턱 쓸테니 제발 그 걸음걸일랑 응?
아, 이왕 모양을 내자는 노릇이겠다. 가뜩이나 요새 그 비싼 구두를 사 신겠다 하니 그 좀 오금을 쭉쭉 펴 가면서 척척 걸어다닐 양이면 인물이며 체격하며 고로 예쁘고 맵시가 있게 생긴 귀양이겠다. 글쎄 좀 돋뵈며 좀 활발스리?
그도 혹시 주릿대 치마에 일등 버선에 여덟팔자 발끝으로 아기작 아기작 걸어 다니던 기생 나부랭이가 분수 아닌 멋을 부린답시고 별안간 트레머리에 통치마에 개중에는 양장에 이러느라고 차리고 나선 그 괴상스런 ‘하이힐’ 맵시만 몰라도 말이지요?
(출처=《女性》 1939년 8월호)
〈그리운 바다 그리운 山岳〉
첨경(添景)으로 흰 구름이 두세 쪽 떠 있을 뿐 한결같이 푸르던 하늘과 겨루듯 바다도 푸르다. 여기는 통영 앞의 남해바다….
통 통 통 통 조그마한 발동기선이 잔잔한 물결 위로 미끄러져 나가는 앞을 조막만큼씩 한 섬들이-얼른 한 개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가 가지고 오고 싶게 재롱스런 섬들이-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듯 숨었다 보였다 하면서 좌우로 빗긴다.
바다 밑은 옛 임진역(壬辰役)에 쓰러진 장사(壯士)들의 넋과 그네가 쓰던 활촉이 응당 한 가지로 잠겨 있으리라.
이글이글 타는 불볕도 바닷물로 스러지고 시원할 뿐 꿈같이 옛 자취를 물 위로 밟으면서 하루를 보내던 이 남해 바다가 시방도 잊혀지지 않는다.
(출처=《女性》 1938년 7월호)
〈避暑地 巡禮〉
1. 지명- 통영 앞바다의 섬들, 가령 욕지도 같은- 위치는 경남 통영읍 부근 일대.
1. 노선- 부산에서 내려서 정기항로를 이용하든지 삼랑진에서 마산으로 들어가서 정기버스나 배 편을 이용하든지.
1. 비용(一朔)- 한 50, 60원.
1. 바다가 있고 섬이 있고 성한 생선이 있고 그리고 더위와 먼지가 없고.
(출처=《女性》 1939년 8월호)
〈眼鏡과…〉
|
《새한민보》 1948년 11월 26일자에 실린 채만식의 산문 〈안경과…〉. |
바로 지나간 토요일이었다.
오후. 사(社)에서 사처(私處)로 돌아가 일을 하려고 차부를 차리고 앉아 안경을 찾으니, 역시 나오지 않았다.
눈에 맞는 알이요, 안경이 없이는 아무 것도 못 보는 터라 잃어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걱정을 하면서 곰곰 생각하니 생각이 나기는 났다. 사(社)에서 나오기 조금 전에 상의할 일이 있어 같은 건물 아래에 있는 딴 방으로 X씨를 찾아가 이야기를 하느라고 그 옆 금고 위에다 벗어서 놓고는 그대로 나온 것이 분명하였다.
벗었던 출입옷을 도로 걷어 입고 허둥지둥 태평로의 사무소 건물로 달려 나왔으나 안경은 찾지 못하고 말았다.
건물의 수직원(守直員)과 소제인(掃除人)에게서 X씨가 안경을 보관하였던 것까지는 들어서 알았다. 그러나 X씨의 사택은 알 길이 없었다. 우환 중에 다음 날이 일요일이니 X씨는 월요일에나 만나게 될 터이었다,
어둔 태평로를 사처로 향해 돌아가면서 이 하룻밤과 다음 날 하루 종일과 그리고 또 하룻밤과 이렇게를 독서도 못하고 원고도 못 쓰고 신문도 못 읽고 눈 뜬 장님으로 지날 일을 생각하니 막막하기 이로 비길 데가 없었다.
그런 막막한 푼수로 하면, 곧 거리의 안경방에를 들러 하나 사기라도 하였으나, 맞춤으로 눈에 맞는 것이 있을 리 없는 노릇. 진작 여벌을 장만해 두지 못한 한탄함이 두루 뉘우쳐질 따름이었다.
“돋보기-노경(老鏡)을 쓰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미 노폐물이 되고…. 어허 불사(不似), 나도 이제는 허릴없구나.”
뒤미처 이런 차탄(嗟歎) 또한 일지 아니치 못하였다.
1945년 4월부터 금년(1948년-편집자주) 3월까지 꼬박 3년을 촌에서 살았고. 그러면서 어둔 석유등잔불 밑에서 독서를 하고 혹 집필도 하곤 하였다. 그런 중에도 금년 정 이월에는 한 달 남짓한 시간에 800매나 되는 장편을 급히 몰아쳐 쓰느라고, 그 침침한 석유등불 밑에서 지나치게 눈을 혹사하였다. 이때부터 눈의 초점은 알아보게 멀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하기는 심화(心火)였다.
금년 초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몹시 심화를 한 것이 있었다. 사람이 심화를 끓이면 눈이 어둡다고-시력이 쇠한다고 일렀는데 막상 그러하였다.
6호 활자로 된 인쇄물-그러니까 요새 신문은 안경이 없이는 단 한 줄도 읽을 생심을 못한다. 9포인트나 5호는 멀찍이 대하고 읽으면 읽기는 하나 조금 읽노라면 이내 신경이 피로한다.
이리하여 이제는 안경-돋보기가 나에게는 수족이나 오관(五官)과 같아서 불구(不俱) 노릇을 하여야 할 절대 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무자(戊子) 10월 20일.
첫댓글 채만식 선생의 자기 葬儀는 상여는 리어카로 하고
조문은 山野꽃으로 하라는 것이고
절약과 검소한 정신을 이야기하였으며 지나친 유행을
삼가라는 곧은 정신을 보게 하네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