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
어제 오후, 천수에서 난주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운전기사가 아주 열심히 달려와 호텔에 짐을 풀자 난주의 거리 구경에 나섰다. 전통시장과 먹자거리를 돌아본 뒤 해가 진 후에는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옆 방 커플께서 호텔 바로 옆 큰 호수가 있어서 야경이 참 좋았노라는 뒤늦은 정보에 속이 쓰렸다.
황하를 막은 유가협 댐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50여분 즘 걸려 병령사 입구에 닿았다. 유가협 댐은 별로 볼 것이 없었으나 자연이 빚은 황하 석림은 정말로 대단했다. 자연 앞에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 워낙 중국 땅이 넓다보니 별별 이상하고 혹은 아름답고 웅장함에 입이 딱 벌어지는 곳이 많다. 그럴 때는 넓고 큰 나라가 부럽다.
병령사 입구 선착장에는 얼룩소 가족이 마중을 나와 우리를 에스코트해 주었고 심심한 야크 가족은 제 머리통을 들이대며 자기네끼리 힘자랑을 했다. 따가운 햇볕아래서도 참 한가롭고 정이 가는 풍경이었다.
병령사 석굴은 그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오아시스를 오가는 이들이 품었을 기도와 그 갈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듯 했다. 가끔씩 티벳불교 양식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입장권에 실려 있는 다섯 분의 미소 짓는 보살상 앞은 유리와 나무 문틀에 가려져 있어 좀 아쉽다. 지금까지 보살 다섯 분이 함께 미소진 모습으로 조성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던데.
일행 중 부산 모 대학 교수님은 이후 염화시중의 미소란 바로 저런 것이라며 당신의 정신세계를 피력했다. 결국 그 분의 사랑론은 어느 누구와도 편차를 좁히지 못하고 말았다.
난간이나 계단 위 석굴은 특별한 사전 허가를 받고 꽤 많은 입장료를 따로 내야 개방한다고 했다.
황하는 중국인들에게 어머니의 젓줄로 불리며 고대 4대 문명발상지 중 하나다. 해질녘에는 황하강변으로 나와 운동, 오락 등을 즐기는 현지인들의 숫자가 엄청나다. 특히 난주의 황하모친상 근처는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다. 누구의 사진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행히 하나 건졌지만 그 작품의 예술성은 나와 코드가 맞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어쨌든 여류작가인 주인공은 황하를 모티브로 한 조각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주최측이 박물관인지 미술관에 보관하려했을 때 황하는 중국인들의 것이니 그 작품도 중국인 모두를 위해 황하강변에 설치해서 모두가 공짜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우겨서 바로 그 자리에 있게되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저녁식사 후에는 난주역으로 이동해 야간열차를 타고 가욕관으로 가야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에스컬레이터 사고가 소개되었지만 여기 중국 당국의 대처방식은 완전 간단했다. 모든 공공시설 특히나 역 같은 곳의 에스컬레이터는 완전 운행정지를 시켜놓았다. 기간이란 것은 아예 없다. 돌덩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똥 싸게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이리저리 긴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했다. 이쯤 되니 저주가 절로 나왔다. 게다가 4인실의 위 칸 침대로 오르려면 다리가 짧은 나로서는 몇 차례 버둥거려야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炳灵寺 (병령사)
요약중국 간쑤성[甘肅省] 린샤[临夏]에 위치한 사찰.
약 1600여 년 전인 서진(西秦)시대에 창건되어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 원(元), 명(明), 청(淸) 등 각 시대에 걸쳐 규모가 확장되었다. 초기에는 '탕수쿠[唐述窟]'라고 불렀는데, 이는 창[羌]족 언어로 도깨비굴(鬼窟)을 뜻한다. 당대(唐代)에는 룽싱사[龙兴寺], 송대(宋代)에는 링옌사[灵岩寺]로 불렀으며, 명대(明代)에 비로소 티베트어의 '스완포저우[十万佛洲, 십 만의 미륵불(弥勒佛)이 모습을 드러냄을 의미]'를 음역한 현재의 명칭을 정하였다.
병령사 석굴
오아시스로 상의 융합적 초기 불교 석굴 유적. 현 간쑤성 영정현(永靖縣) 서남 35km의 황허 북안 산중에 위치한 이 석굴은 길이 350m에 높이 30여m의 암벽에 위치하는데 상사(上寺) · 하사(下寺) · 불야태(佛爺台) · 동구(洞溝)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석굴 183개, 석조상 694기, 이소상(泥塑像) 82기, 석조이소상불탑 5기, 벽화 900m2가 안치되어 있다.
중국의 다른 초기의 석굴들과는 달리 병령사 석굴에는 묵서명(墨書銘)이 뚜렷이 남아 있어 개굴 연대를 알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천연동굴인 169굴의 북벽감 측면에 서진(西秦) 건홍(建弘) 원년(420)이란 명문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석굴은 대체로 5호16국시대(5세기)의 서진대에 개굴되어 원대까지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지만, 168굴처럼 명대에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이 석굴의 조형양식은 서역의 소상(塑像) 양식을 많이 본받았지만 여기에 중국 석굴 양식이 가미되었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 석굴의 소재지가 황허의 수운(水運) 요로에 자리하고 있어서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통해 들어온 문물들이 이곳을 거쳐 운반된 결과 석굴미술에서 이러한 융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정말간단하고 확실한조치입니다 ㅋㅋ
피보는 사람도 많네요
현지 저녁 문화에 대한정보는 어딜가나 필수인듯합니다
이리 열심히 후기 올리시니
상도 드리죠 ㅋㅋ
감사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