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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 정(靜) |
동하여도 분별이 착(着)이 없고 | 정(靜)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다. |
‘동하여도 분별이 착이 없다’는 것은 ‘경계에 대해서 마음에 끌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다’는 말은 ‘좌선할 때 좌선하는 것’이고, ‘일기 써야할 때 일기 쓰는 것’이지요. 좌선할 때 졸고 있거나, 저녁에 일기를 쓰거나 경전 공부 안하고 TV만 보고 있다면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죠.
동정일여가 여래위 조항이라는 점을 이해하시겠지요? 중생들은 경계가 오면 바로 동해버리지요. 정할 때가 주어져도, 정하지 않고 미리 준비 하지 않은 채 다른 짓거리 해대고요. 일 당하면 정신없고, 일을 당하지 않으면 나태한 것이 중생입니다.
동(動) | 정(靜) |
맡은 일이나 직무를 이행하되 불의를 제거하고 선후 본말과 주종을 알아서 실천하는 것 |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고 안분하는 것으로 미리 준비하는 공부 |
‘동할 때 공부’는 자신의 직무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도인은 일을 당할 때 선후본말(先後本末)과 주종(主從)의 순서를 알아서 일을 처리하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이 ‘동할 때 일심공부’입니다. 반면, 일을 맡으려 하지 않고, 일을 맡게 되면 정신 없고 실수가 많아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정할 때 공부’는 주로 수양과 연구인데요. 중생들은 좌선한다고 하면서 딴 생각하고, 염불한다고 하면서 딴 생각하곤 하지요. 정할 때 번뇌와 잡념이 가득합니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잡념이 많고 안분(安分)이 안 됩니다.
동과 정은 서로 바탕이 됩니다. 낮에 일을 차분히 잘 처리해두지 않으면 저녁에 일기가 잘 써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으면 정하려고 해도 정해지지 않습니다. 동과 정이 함께 맞물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준비가 중요합니다. 정 공부의 70%는 미리준비입니다. 취사하면서 왜 이렇게 정신이 없을까요? 미리준비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회의가 미리준비입니다. 회의는 집단 지성으로 하는 연구과정입니다. 회의를 하면 많은 시행착오를 줄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시 공부를 잘 못하는 사람은 회의를 소홀이 합니다. 회의에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지요. 정시에 회의로 미리준비를 잘해두면, 실제 동시에서 일을 처리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동시에 일하면서도 다음 일을 준비할 수 있어요. 저는 겨울훈련하면서도 여름훈련을 준비하거든요.
동(動) | 정(靜) |
유사시(有事時) 부동심 공부 | 무사시(無事時) 불방심 공부 |
‘동(動)’은 ‘유사시 부동심 공부’입니다. ‘부동심(不動心)’은 ‘일을 당해서 끌리지 않는다’, 즉, 경계를 당했을 때 나의 온전한 마음이 그대로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정(靜)’은 ‘무사시 불방심 공부’입니다. ‘불방심(不放心)’은 ‘방심하지 않는다’, 즉,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놓아버리면 ‘무기’에 빠져 잠들게 되거나, ‘망상’에 빠지거든요. 그래서 좌선할 때도 눈을 뜨라 하신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대부분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거든요. 큰일을 하려는 사람은 정(靜)을 잘해야 합니다. 동만 잘하면 큰일을 하지 못합니다. ‘정’은 미리준비이고 계획이며, 동을 위한 기본 바탕이면서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정력이 없으면, 동할 때 에너지가 금방 소모됩니다.
동(動) | 정(靜) |
성성적적(惺惺寂寂) | 적적성성(寂寂惺惺) |
적적(寂寂)은 고요함을 의미합니다. 성성(惺惺)은 두렷함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고요함과 두렷함이 음과 양으로 어우러져있습니다. 그중 동할 때는 성성을 앞으로 내세우고, 정할 때는 적적을 앞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원불교 공부를 잘못한 사람은 ‘적적(寂寂)’을 위주로만 공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일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적적’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성성(惺惺)’하게 분별해야하는 것입니다. 좌선을 하더라도 ‘적적성성(寂寂惺惺)’으로 하면, 청지불문(들리지만 듣지 않음), 시지불견(보이지만 보지 않음)이 됩니다.
동(動) | 정(靜) |
동중선(動中禪) | 정중선(靜中禪) |
‘동중선(動中禪)’은 ‘동하는 가운데 선’이라는 뜻인데, ‘동하는 가운데 정을 여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동중적(動中寂)’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동(動) | 정(靜) |
일행삼매(一行三昧) | 일상삼매(一相三昧) |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끌리지 않고 오롯하게 그 일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럽니까? 게임할 때 그렇고, 영화볼 때 그러죠. 2-3시간 푹 빠져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푹 빠져서 일을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일을 오롯하게 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수양력이 쌓입니다. ‘동시(動時) 수양력’이 쌓이는 것입니다. 정할 때만 수양력이 쌓이는 것이 아니에요. 동시에 일을 오롯이 하다보면, 시공간을 넘어서면서 삼매(三昧)가 되고 수양력 쌓입니다.
일상삼매는 ‘하나 된 마음으로 삼매(三昧)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저절로 삼매가 되는 것이죠. 대종사님께서 장에 가는 길에 서서 입정(入定)에 들었다가, 장이 파하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때까지 그대로 입정에 드셨다는 일화가 있지요. 시공간을 넘어선 자성(自性)자리에 들어가셨던 것이지요. 성품은 단련할 게 없지만 단련해야 합니다. 정 자리를 단련하면 힘이 쌓입니다. 힘이 쌓이면 좌선을 해도 금방 정 자리에 들어갑니다. 초입자는 좌선이 힘들지만, 좌선을 해서 힘이 쌓이다보면 ‘이런 맛에 하는구나’ 알게 됩니다.
동(動) | 정(靜) |
무불경(無不敬) | 사무사(思無邪) |
동할 때는 ‘무불경(공경하지 않음이 없음)’이 동시 공부입니다. 정할 때는 ‘사무사(마음에 삿됨이 없음)’가 정시 공부입니다.
동(動) | 정(靜) |
묘유(妙有) | 진공(眞空) |
진공으로 체(體)를 삼고, 묘유로 용(用)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동할 때는 때때로 묘유가 체가 될 수도 있음도 아셔야합니다. 진공과 묘유에는 본래 문이 없거든요. 적적이 성성이고, 성성이 적적입니다. 그 자리에 가는 것이 무문관(無門關)입니다.
동(動) | 정(靜) |
양(陽) | 음(陰) |
정은 주로 음이고, 동은 주로 양입니다.
동(動) | 정(靜) |
고요한 가운데 동하고 동하는 가운데 고요해서 항상 동정(動靜)이 둘이 아닌 삶 | |
항상 챙기는 마음, 간단없는 일심공부 | |
기뻐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피 우는 중정의 도 | |
나가대정(那伽大定) = 용상대정(龍象大定)을 말함이니 크고 큰 정(定)이라는 뜻으로 동정간(動靜間)에 끊임 없는 대정(大定)을 말하는 것이다 = 전일(專一) |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
대종사님의 동정일여(動靜一如) 훈련법은 모든 성현이 못 밝히신 위대한 점이시다. | |
정시 상시훈련으로 묶고 풀며 풀고 묶어서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
재가들은 ‘어떻게 하면 정(靜)을 더 확보할 것인가’, ‘동(動)할 때 어떻게 끌리지 않을 것인가’ 공부하셔야합니다. 특히, 정시 공부가 중요합니다. ‘경계 따라 마음만 잘 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정시 공부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만, 동시에 마음을 잘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선후를 따지자면, 정시 공부가 먼저입니다.
휴휴암좌선문에 나오는 ‘나가대정(那伽大定)’은 ‘동정을 아우르는 정’입니다. 이를 ‘정시에서의 정’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말을 보겠습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는 ‘응하되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뜻입니다. 법상/비법상에도 끌림이 없고, 분별성/주착심에도, 욕심에도, 애착/탐착에도 끌림이 없이 그 마음 그대로 마음을 낸다는 의미입니다. 원불교 식으로 말하면 ‘응용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다’는 의미와 같지요.
유인물 16쪽 보겠습니다.
대산 법어 법위편 31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다.’는 말은 세상을 위해 일할 때는 착 없이 하고, 정할 때는 도를 품고 숨어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니라. 대종사께서도 대각하신 후 변산에 가시어 교법을 제정하신 것은 태평양의 많은 고기를 맨손으로 잡지 않고 뒤로 물러나 그물을 짜신 것과 같으니라.」 |
한가할 때는 도를 품고 숨어서 준비해야한다, 보림함축(保任含蓄)해야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종사님도 대각하신 뒤 바로 교화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산에서 방언공사 법인기도 마친 뒤, 변산으로 가셨습니다. 변산에서 사은사요 삼학팔조 교법을 짜면서 함축(含蓄)하셨습니다. 원기 9년도에야 익산으로 나오셨습니다. 요즘 조금 깨쳤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보림함축이 안되면 힘이 없습니다. 견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양성과 솔성이 진짜 공부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이를 먹이고 키워야 하듯, 우리가 한 마음 자리를 본 뒤에도 우리의 마음을 기르고 쓰면서 업력을 녹이고 힘을 갖추어야 합니다.
변의품 26장 보시지요.
변의품 26장 ··········또 여쭙기를 [상시 응용 주의 사항 각 조목을 동·정 두 사이로 나누어 보면 어떻게 되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삼조·사조·오조는 정할 때 공부로서 동할 때 공부의 자료를 준비하는 길이 되고, 3.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4. 경전·법규 연습하기를 대강 마친 사람은 의두 연마 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5. 석반 후 살림에 대한 일이 있으면 다 마치고 잠자기 전 남은 시간이나 또는 새벽에 정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일조·이조·육조는 동할 때 공부로서 정할 때 공부의 자료를 준비하는 길이 되나니, 1. 응용(應用)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2. 응용하기 전에 응용의 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6. 모든 일을 처리한 뒤에 그 처리건을 생각하여 보되,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에 실행이 되었는가 못 되었는가 대조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서로 서로 도움이 되는 길이며, 일분 일각도 공부를 놓지 않게 하는 길이니라.] ················ |
대종사님은 상시응용사항을 동정간의 공부로 나누셨습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 3조·4조·5조는 정시 공부입니다. 여기에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뭐하라고 적혀있죠? “잠자기 전 남은 시간이나 또는 새벽에” 뭐하라고 적혀있나요? TV 보다가 자라고 하지 않으셨죠? 노는 시간은 쉬는 시간과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노는 시간은 허송시간을 의미합니다. 대종사님께서 허송시간이 생기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하라 하셨고, 경전 법규 연습을 대강 마친 사람은 의두 연마하기를 주의하라 하셨습니다. 저녁이나 새벽에는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하라 하셨고요. 정시에는 주로 수양연구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2조·6조는 동시 공부입니다. 1조는 삼학의 종합이면서, 취사를 의미합니다. 2조는 동할 때의 연구 공부입니다. 머리 속에 정리가 안 되면, 일 당해서 정신 없지요. 3조는 취사를 대조하는 일기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2. 영육쌍전>
영육쌍전(靈肉雙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 영육쌍전(靈肉雙全)
* 대의 : 과거의 불교제도가 승려는 영혼만 위주하고 인도(人道)와 직업을 버리고 미래만 중요시하고, 세속인은 자신만 위주하여 인도와 직업을 가지고 현재만 중요시하여 양자가 다 결함되었기 때문에 영육쌍전으로 출가 재가 구별없이 원만한 생활을 하자는 것. |
대종사님께서 영육쌍전(靈肉雙全)을 제시한 이유는 ‘영에 치우친 자’, ‘육에 치우친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영(靈)과 육(肉)은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문제이지요.
과거 불가에서 스님들은 영(靈)에만 치우쳤습니다. 직업이 없고, 가족이 오면 모른 체했어요. 과거에는 그런 스님들을 대단한 도인들로 여겼지만, 오늘날 보기에 원만한 도인은 아닌 것입니다. 일반 세속에 사는 사람은, 먹고 사는 것, 직업생활만 중요시하고, 영생길 천도길 내생길을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대종사께서 새 시대 후천개벽시대에는 탁 트인 시대기 때문에 영과 육이 하나로 되는 법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이제, 종교인들 또한 이 사회에 도움을 주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사회의 세속인들은 자기의 영생길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과거 세속인들은 스님들에게 기도비 드리고 천도를 부탁드렸다면, 이제는 누구나 “자기가 자기천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돌아가신 뒤, 천도재 지내는 것도 필요하고, 영가 이름으로 희사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전에 ‘자기가 자기천도’하는 것입니다. 복도 생전에 짓는 것이 좋아요. 생전 중에서도 언제가 가장 좋을까요?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나이를 놓고 보자면, 젊을수록 좋습니다. ‘나중에 마음공부해야지’, ‘나중에 복(福)지어야지’, ‘나중에 큰 사업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원리를 적용하되, 젊을 때 과감하게 도학(道學)과 과학(科學)을 병진하는 것이 좋습니다. 견성(見性)을 오십대에 하면 좋겠어요, 이십대에 하는 게 좋겠어요? 이왕이면 스무 살에 하는 게 좋겠지요. 가장 좋은 삶은 소시에 대각하고, 중년에 제도사업하고, 말년에 해탈천도 영생길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영육쌍전에서 영(靈)과 육(肉)을 분류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靈) | 육(肉) |
정신 | 육신 |
대령(大靈), 天 | 대기(大氣), 地 |
영은 정신, 육은 육신입니다. 영의 뿌리는 하늘에 있고, 육신은 죽으면 땅으로 갑니다.
영(靈) | 육(肉) |
계정혜(戒定慧) | 의식주(衣食住) |
혜(慧) | 복(福) |
도학 | 과학 |
불법(佛法), 수도(修道) | 생활(生活) |
무형(無形) | 유형(有形) |
육신을 위해 의식주가 필요하다면, 정신에는 ‘정신의 의식주’인 ‘계정혜(戒定慧)’가 필요합니다. 선후를 따지자면, 육신의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의식주를 진리와 삼학으로 구해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진리와 삼학을 적용해서 돈을 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의식주를 구한 뒤에는, 그 의식주를 활용하고 삼학을 적용해서 진리를 얻어야 합니다. 의식주와 진리와 삼학이 이런 식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과거에는 영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직장생활을 멀리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의식주가 없이는 진리를 얻는 것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교화를 하려해도 돈이 없으면 교화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설법을 위해 교당에 음향장비를 놓으려해도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새 시대 ‘산 종교’의 모습은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종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새 시대 종교는 ‘직업과 마음공부가 둘이 아닌 종교’라는 의미입니다.
영(靈) | 육(肉) |
修慧 不修福 (수혜불수복) 지혜만 닦고 복을 짓지 않음이여, 羅漢 應供薄 (나한응공박) 아라한의 바루가 늘 비어 있구나. | 修福 不修慧 (수복불수혜) 복만 짓고 지혜를 닦지 못함이여, 象身 掛瓔珞 (상신괘영락) 코끼리 몸에 영락을 걸쳤구나. |
“아라한의 바루(밥 그릇)가 늘 비어있다”는 말은 ‘지혜는 있는데 복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코끼리 몸에 영락(금은보화)을 걸쳤구나”라는 말은 ‘복은 있는데 지혜가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복과 혜의 쌍전(雙全)이 중요합니다. 혜가 있으면 복을 끌어들이고, 복이 있으면 지혜를 불러옵니다. 복이 없이 어떻게 진정한 지혜를 열 수 있으며, 진정한 지혜 없이 어떻게 무량복(無量福)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복이 있어야 지혜를 끌어들일 수 있고, 지혜가 있으면 무아를 알기 때문에 복을 짓지 않을 수 없거든요.
영(靈) | 육(肉) |
과거 종교의 치우친 점, 빈곤 | 생존경쟁 |
과거의 종교는 영(靈)에 치우쳐졌습니다. 그래서 가난했지요. 특히 동양의 종교가 그러했습니다. 과거 동양 학자들은 비가 와서 벼가 떠내려가도 경전만 읽고 있었으니, 갑갑한 노릇이지요. 대종사님은 “공부를 왜 하느냐,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불교가 지향하는 도인은 ‘깨끗하고 맑고 조용한 도인’이 아니라, ‘실제로 경계마다 일을 잘해서 유익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불교에서 보기에, 가장 큰 도인은 이 세상에 가장 큰 이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영(靈) | 육(肉) |
육대강령 병행 실천 | |
정신의 의식주로써 육신을 돕고 육신의 의식주로써 정신을 돕자 |
육대강령은 육신의 의식주, 정신의 의식주(계정혜)를 의미합니다. 주(主)와 종(從)을 논하자면, 정신의 의식주(계정혜)가 주입니다. 계정혜가 들어서서 육신의 의식주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사람’과 ‘진리와 삼학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사람’은 천지차이가 납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고객이 퉁명스레 이것저것 요구한다 칩시다. ‘욕심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사람’은 기분만 나쁘지요. 그러나 ‘진리와 삼학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사람’은 ‘처처불상(處處佛像)’과 ‘사사불공(事事佛供)’을 생각하게 됩니다.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이라 칩시다. 욕심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손님이 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와 삼학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손님이 부처님으로 보이고, 손님의 상황에 맞게 불공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엇이 더 낫겠습니까? 진리와 삼학으로 의식주를 구하면, 의식주는 자동으로 구해지는 것입니다.
영(靈) | 육(肉) |
개인 · 가정 · 사회 · 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자 |
“개인 · 가정 · 사회 · 국가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것이 영육쌍전의 목적입니다.
교단품 39장 대종사 연도(年度) 말에는 조 갑종(趙甲鍾)등을 부르시어 당년도 결산과 신년 예산을 정확히 하여 오라 하시고 세밀히 친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한 가정이나 단체나 국가가 수입과 지출이 맞지 못하면 그 가정 그 단체 그 국가는 흥왕하지 못하나니, 과거 도가에서는 재물을 논하면 도인이 아니라 하였지마는 새 세상의 도가에서는 영육을 쌍전해야 하겠으므로 우리 회상에서는 총·지부를 막론하고 회계 문서를 정비시켜 수입과 지출을 대조하게 함으로써 영과 육 두 방면에 결함됨이 없게 하였으며, 교단 조직에 공부와 사업의 등위를 같이 정하였나니라.] |
대종경 교단품 39장 중 “과거 도가에서는 재물을 논하면 도인이 아니라 하였지마는 새 세상의 도가에서는 영육을 쌍전해야 하겠으므로”이라는 구절을 보시지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생각한다면 원불교 교도 아니에요. 황금은 황금 같이 봐야지요. 다만, 황금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황금을 불사에 잘 쓰면 되는 것입니다.
“수입 지출을 대조하게 함으로써”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제가 다른 종교다니시는 분들게 이 내용을 말씀드리니까, 참으로 투명한 종교라며 좋아하시더라고요. “무상보시(無想報施)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희사(喜捨)하는 사람은 무상으로 희사하되, 사업성적을 내는 사람은 철저하게 기록해야하는 법입니다.
대산 회상편 50장 「우리는 큰 교화와 큰 활동과 큰 인격의 문호를 열어놓아야 하나니, 그러기로 하면 진리에 바탕한 큰 조직으로 교화하고, 정정(定靜)에 바탕한 넓은 활동으로 보은하고, 산업에 바탕한 탄탄한 실력으로 큰 인격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참다운 실력이란 영육을 쌍전하고 이사(理事)를 병행하는 것이니, 우리 모두는 정신·육신·물질 세 방면으로 두루 실력을 갖추어야 하느니라.」 |
영육은 다른 말로 이사(이치와 일)입니다.
유물사상(唯物思想)으로 인한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물질생활에 편락(偏落)하던 사상과 유심사상(唯心思想)으로 인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마음의 세계, 영혼의 세계에 편락하던 사상을 합치중도사상(合致中道思想)으로 유물과 유심사상을 고르셨고,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균형있게 고르시어 영과 육의 쌍전으로 중도있는 생활을 하게 하시었다. - 대산 3집 - |
대종사님 당대 제자인 훈타원 양도신 님께 제가 자주 인사드렸어요. 훈타원님이 하시는 말씀이 “대종사님 당대에 어떤 사람이 공부 잘한 사람이냐 하면, 일 잘 하는 사람이 가장 공부 잘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원불교에서는 강연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 여겨지지만, 대종사님 당대에는 안 그랬대요. 대종사님께서 공동출역시간에 일 안 하고 숨어서 선하는 사람이나, 일 안 하고 책 보는 사람을 아주 심하게 혼내셨대요. 대종사님께서 새 시대에 필요한 종교를 내놓으신 것이지요.
과거 묵은 세상에서는, 출가는 영에만 치우치고 재가는 직업생활 열심히 하다가 때로 희사하기만 해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새 시대에서는 다릅니다. 새 시대에는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습니다. 출가(出家)도 생산활동 해야 하고요, 재가(在家)도 출가만큼 수행해야합니다.
<3.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
원불교를 한마디로 말하라하면 ‘생활종교’라 할 수 있는데, 이때 ‘생활’은 ‘불법시생활’입니다.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은 ‘불법으로 생활한다’는 뜻입니다.
3. 불법시 생활(佛法是 生活) 생활시 불법 * 대의 : 불법의 주체가 출세간 승려를 위주로 하여 생활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불법과 생활이 둘이 아닌 교법을 밝힌 것이다. |
생활을 너무 잘하면 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성직자가 결혼을 하지 않아야 도인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잘못된 생각입니다. ‘도(道)’는 ‘지금 이 자리’에 있거든요. ‘변/불변이 함께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도’입니다.
* 불법(佛法=眞理)을 생활화 시대화 대중화하여 불은(佛恩)속에서 영생을 잘 살도록 하는 법이다. |
법당에서 부처님 법 잘 모신 다음, 법당 나와서 성질내고 다니면 되겠습니까? 일요일 아침에 교당 와서 법회 본 다음 집에 가니까, 아들이 그때까지 자고 있네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고 저 화상은 왜 이리 잠만 잘까” 말하면서 아들한테 성질내면 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가족교화에 도움 안 되지요. 교당에서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 가르쳤는데요.
* 실생활에 부합되는 산 종교 |
불법을 공부하는 것이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생활에서 써먹기 위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 불법이란 = 부처님의 깨달으신 진리요 법(覺法), 설하신 법(說法), 행하신 법(行法). 작게는 삼학이요, 크게는 우주만유가 다 불법 아님이 없다(一圓의 진리=불생불멸, 인과보응). * 생활이란 = 생존 활동하는 것, 육신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있으나 완전한 생활이란 정신의 안정과 육신의 안정이 함께 하는 것이다. 작게는 사농공상의 직업, 크게는 우주만유가 생활 아님이 없어서 사은에 보은하는 삶(一圓의 공덕) |
일원의 진리를 배우서 사은에 보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보은은 ‘내 가까이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가족, 내 친척에게, 내 교당, 내 직장에서, 내가 만나는 대상을 대할 때 불법을 적용해야합니다.
불법시 생활(佛法是 生活) | 생활시 불법 |
불법으로 생활을 빛내고 | 생활 속에서 불법을 닦는다. |
일심보은(一心報恩) | 보은일심(報恩一心) |
혜(慧) | 복(福) |
도학 | 과학 |
내(內) 수행 | 외(外) 신앙 |
불지(佛地)를 단련해 가는 길 | 인과의 원리를 따라 감사생활, 보은봉공 |
수도자는 생활을 떠나서는 아니되고, 수도를 함으로써 사회에 유익 주는 사람이 되자 세속인은 불법을 떠나서는 아니되고, 불법으로써 가치있는 생활을 하자(시간·경제 절약) |
‘불법은 일심’이고 ‘생활은 보은’입니다. 어떤 생활이 가장 행복한 생활일까요? TV 보고 놀러 다니는 삶이 행복생활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은하는 생활이 행복한 생활이며, 그 보은을 일심으로 하는 생활이 가장 행복한 생활입니다. ‘일심으로 보은’하면 그 자체로 무시선(無時禪)이 됩니다. ‘일심으로 보은’하면 그 보은이 그대로 다시 일심으로 됩니다. 그러면 복과 혜가 쌍전하고,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고, 내적 수행 외적 신앙이 동시에 됩니다.
* 봉불(奉佛)의 의의 (심불봉안 心佛奉安) 봉불은 곧 시불(侍佛)이니 시불을 하는 것은 생불(生佛)이 되자는 것이며, 생불은 다시 활불(活佛)이 되자는 것이다. |
과거에는 ‘부처님’이라 하면, ‘서가모니 부처님’이나 ‘금불상’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부처’입니다. 내 안에 무궁한 삼학이 갖추어져 있고, 내 안에 무궁한 위력이 있습니다.
대산종사 개벽편 7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후천 시대는 해원 상생·영육 쌍전·이사 병행·동정 일여·원형 이정의 도수요 과학과 도학이 병진하는 도수요 물질과 정신이 개벽되는 도수요 양심과 도덕이 살아나는 도수요 전체불의 도수이자 진급의 도수이니, 이러한 원리에 맞추어 대비를 한다면 한량없는 은혜와 진급이 있을 것이요 만약 그렇지 못하고 선천의 기운만 붙들고 헤어나지 못한다면 재앙과 강급이 뒤따를 것이니라.」 |
여러분, 시대를 보셔야 합니다.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바뀐 시대에 맞게 미리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제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온다고하는데, 택시기사하겠다고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시대에는 영육쌍전이 되는 종교가 환영받을 것입니다.
<4. 표어 결론>
혜불이복(慧不離福) : 복을 떠난 혜는 지혜가 아니고 복불이혜(福不離慧) : 혜를 떠난 복은 참 복이 아니다.
* 큰 복은 짖지 않으면 대각(大覺)을 못하며 대각을 못하면 대복(大福)을 못 짓는다. |
표어를 결론으로 제가 ‘혜/복’으로 풀어보았습니다. 표어 전체를 혜·복 두문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혜문(慧門) | 복문(福門) |
정각 | 정행 |
지은 | 보은 |
불법활용 | 무아봉공 |
원동태허(圓同太虛) | 무흠무여(無欠無餘) |
불일증휘(佛日增輝) | 법륜상전(法輪常轉) |
일상삼매(一相三昧) | 일행삼매(一行三昧) |
불법시 생활 | 생활시 불법 |
정(靜) | 동(動) |
영(靈) | 육(肉) |
무시선 무처선 | 처처불상 사사불공 |
공부의 요도 | 인생의 요도 |
의술 | 약재 |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은 지혜가 있어야 옵니다. 우리가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이지만, 지혜를 얻으려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영육쌍전, 동정일여, 이사병행인데, 과거에는 대중의 인지가 어두웠기 때문에 성자들이 당시 상황에 맞게 한쪽만 강조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영육쌍전, 동정일여, 이사병행해야 환영받는 시대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 이 세상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주셔서 정말 편하게 다시 보고 있어요~ 지원, 성해, 밀운 교우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