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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로 이사를 하고서도 일 년이 넘도록 업소의 보증금이 빠지지 않았다. 아이도 태어났고, 이젠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수 없으니 어떻게 좀 돈을 빼줄 수 없겠느냐 업주에게 사정을 했다. 하지만 입만 아플 뿐이었다. 항상 듣는 대답이 자기로선 도저히 능력이 안 되니 스스로 알아 처리하라는 말 한 마디였다. 계속 머무를 밖엔 도리가 없었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청주터미널에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타고선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버스 안에 라디오 방송이 흐르고 있었다. 질병에 대한 것을 묻고 답하는 프로였는데 나는 별 관심 없이 버스가 움직이는 대로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흔들 서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흘려들을 내용이 아닌 것이었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니 대략 일 년 전쯤 된다, 그날도 변기위에 앉아 헛힘만 잔뜩 쓰다가 그냥 일어나 괴춤을 올렸다. 알게 모르게 생긴 변비 때문에 며칠째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방금 쓴 휴지에 이상한 것이 묻어 있었다. 담홍색으로 색이 좀 탁하긴 해도 분명 피였다.
설사를 며칠씩 하다가 갑자기 지독한 변비증세로 뒤바뀌고 도무지 종을 못 잡겠더니 이젠 하혈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땐 이미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스스로 끊은 것은 아니고 양주 두세 잔에도 설사하고 토하고 개갈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술을 입에 댈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매일 휴지에 피가 묻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엘 자주 갔으며 날이 갈수록 횟수가 더욱 늘었다. 그렇게 다녀와도 뒤가 늘 무거웠고 하혈의 양도 점점 많아졌다.
공교롭게도 청취자가 묻는 내용이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증세와 똑 같았다. 그리고 답변이, 화장실을 자주 가고 혈변이 나오며 소화 불량도 잦다면 우선은 치질을 의심해 보지만 ‘장암’도 의심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장암’ 이란 말이 계속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설마, 암이 뉘 집 강아지 이름인가?’ 뒷전으로 밀어버렸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흘렀다.
아이가 백일을 맞이할 즈음 서울에서의 일이 정리되었다. 어느 날 출근을 해보니 영업은 안 하고 빚쟁이만 수명이 들이닥쳐 있었다. 꼼짝없이 보증금을 뜯긴 것이고 도리 없이 보따리를 정리하여 청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시내 중심가에 있는 준 종합병원 규모의 한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아보았다. 담당 의사가 간단하게 몇 가지 검사를 했다. 항문 부위를 살피고 손가락으로 찔러도 보고 하더니 큰 이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게 대수롭잖게 말하며 내복약 삼 일분을 처방해주었다.
그러나 그땐 이미 화장실만 가면 항문에서 피가 철철 쏟아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별것 아닌 것 같다하니 우선은 그 말이 듣기 좋았다.
‘그럼 그렇지, 괜히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1997년 가을, 온 나라가 금융위기로 어지러웠다. 우리 집 살림도 진작부터 말이 아니었다. 건강이 나빠지고 아울러 돈 벌이가 시원찮아 그동안 많이 허덕였는데도 서울 일을 정리하고부턴 그나마 있던 쥐꼬리만한 수입마저 뚝 끊겼다. 나도 아직 일자리를 못 잡았고 아내 역시 몸 푼 지 겨우 몇 달이니 생활전선으로 뛰어들 입장이 아니었다. 집 안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래도 서울과 청주에 각기 떨어져 있을 땐 어서 주말이 되었으면 하고 애틋하게 그리는 맘이 서로에게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합친 후로는 하루하루 그 맘이 가뭄에 개울물 줄 듯 말라갔다. 밤이고 낮이고 집안에 들어 앉아 서로 얼굴만 보게 되었고, 게다가 우유 살돈이나 걱정하려니, 견디다 못한 아내가 답답함을 터트렸다.
“당신 정말 이러고만 있을 거야?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앉아만 있는 거야! 차라리 이혼 하자! 어휴! 정말 속 터져!“
이제까지 큰소리 한 번 낸 적이 없던 아내가 아이를 안고 앉아 내게 이렇게 해 부쳤다,
아내의 폭언에 나도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애써 참고 못 들은 체했다. 아니 참았다기보다도 마음이 다른 데에 있어서 대응을 못한 것이다. 얼마 전 의사가 내 증세를 별 것이 아니라 했고 그래서 한시름을 놓았었다. 그러나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몸이 더욱 불편해져, 그에 긴장하고 시름이 깊어 아내가 그처럼 호되게 퍼 부어도 반응할 힘이 없었다.
결국엔 고민하던 아내가 붓기도 아직 덜 내린 몸을 이끌고 생활 전선에 뛰어 들었다. 더 이상 나에게 기대기는 어렵다 판단하고 친구와 함께 시내에서 조그맣게 음식 장사를 시작했다. 돌이 채 안된 젖먹이는 내가 돌보게 되었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 서로의 패턴이 뒤 바뀌었는데 그래도 그것이 집안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각자 할 일을 찾게 되자 아내와 나의 사이가 원래대로 완만해진 것이다.
냉기가 걷히는가 싶더니 이어서 더욱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그동안 이상증세를 보여 오던 내 몸 상태가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악화 되었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항문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화장실을 하루에 스무 차례는 다녔던 듯싶다. 의사는 분명 대수롭잖다 말했는데, 그 말만 염두에 두면서 미련스럽게 믿다가, 아니 믿고 싶어 하다가 최악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먼저 그 곳이었다. 예의 그 의사와 다시 마주했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먼저 번과 동일한 방식으로 검사를 하더니 지난번 왔을 땐 아무것도 안 잡혔는데 정말 이상하다며 장 내시경을 해보자 하였다. 이틀 후 장 내시경검사를 하고 며칠 뒤 결과를 들으러 갔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가 약간 머뭇거렸다. 그러다 하는 말이 직장에서 종양이 발견 되었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목이 잠겼다. 떨리는 목소리로 ‘악성 입니까?’ 물었는데 의사는 대답대신 누구 함께 오지 않았느냐 반문하였다.
그리고 이내, 젊은 분이니 본인이 알아도 되겠지 하면서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직장암입니다. 그런데 진행이 좀 된 상태군요,”
“얼마나요?”
“대략 3기 정도로 보입니다,”
“예? 3기요?”
하늘이 노래졌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물었다.
“치료 가능성은 있겠습니까?”
“그럼요, 의술이 많이 발달된 요즘입니다. 일단 수술부터 하시고 상황에 따라 항암 치료를 받으면 완치될 확률이 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 졌습니다,”
그리고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입니다. 희망을 가지셔야 합니다, 용기를 가시셔야 합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뒤 몸을 일으켜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 의사도 따라 나왔다. “절대 희망을 버리시면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 합니다.” 그 말을 자꾸 했다. 그러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설마 했었는데
비척비척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섰다. 수화기를 들었지만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알려야 놀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기를 계속 반복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번호를 꽉꽉 눌렀다. 신호가 갔다. 그리고 아내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결과 나왔어? 뭐래, 괜찮대?”
“으응, 직장에 조그만 종양이 생겼다네, 수술을 받아야 된대.”
순간 아내의 말문이 막혔다. 한 동안 아무소리도 없더니
“종양 이라니? 그럼...암? ”하고 되묻는데 반쯤 우는 목소리였다.
“응,”
아내가 흑, 울음을 터트렸다.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대, 아직 초기라서 빨리 수술 하면 완치 될 수도 있대.“
나는 그렇게 외쳐대었다. 아내의 흐느낌 소리가 계속 들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잠시 뒤 아내의 가게에 도착했다. 그 사이 아내는 눈이 퉁 퉁 부어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서면서 표정을 급히 바꾸었다. 나도 아내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가 아내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이제 어찌 해야 되는 거야?”
“글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부쩍 수척해진 아내의 얼굴, 거기에 겹치는 젖먹이 딸,
‘정녕 내가 이들을 떠나야 된단 말인가? 부모의 그늘이 얼마나 중한지 내 알건만, 내 일찍부터 겪은 그 설움과 한이 아직도 남아 있건만, 그런데 저 핏덩이도 에게도......
어깨가 들썩들썩 움직였다. 안 그러려 해도 멈춰지지 않았다. 아내도 울음을 터트렸다. 애써 참고 있다가 봇둑 무너지듯 터져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수술 상담을 위해 그 병원의 외과 과장과 마주앉았다. 암이 꽤 진행된 상태라 했다. 게다가 종양이 항문에 너무 가까이 있어 부득불 항문은 봉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인조 항문을 달아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명을 마치더니 듣기에 썩 좋지 않은 말을 했다. 병원을 너무 늦게 찾았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 하는 것이었다.
재차 절망에 빠졌다. 나는 물론 연락받고 내려온 동생들 그리고 처가식구 모두 마찬가지였다.
힘없이 병원 문을 나섰다. 저세상에 계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아홉, 아홉수, 어머니 아버지 둘 다 아홉수에 세상 뜨셨다. 어머니는 서른아홉, 아버지는 마흔 아홉, 공교롭게도 내 나이 이제 서른아홉,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가족 간에 의견이 분분 했었다한다. 희망 없는 수술을 괜히 해서 환자에게 고생만 더 시키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예전 어머니나 아버지가 수술실에 들어갔다 나오고선 더욱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것을 똑똑히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아내도 그런 맘을 먹었었다 한다.
세 식구 함께 어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자연 요법에 매달려 보려 마음먹었었다한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전에 다른 병원을 한 번 더 가 보기로 했다. 청주에 있는 한 대학 병원으로 거기 입원을 하여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딘가 다녀온 아내가 환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대장외과의 의료진들이 C.T. 필름을 놓고 회의를 한 결과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가능성을 30퍼센트쯤으로 본다는데 그래도 절망 속에 내린 한줄기 빛이었다.
수술 전 날, 초등학교 적 친구 여럿이 문병을 왔다. 어릴 적, 벌거숭이로 함께 뛰놀던, 그야말로 흉허물 없는 친구들이 왔다가고 다음날이 밝았는데 이른 시간에 병실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귀에다 대자 굵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필수인가? 나, 정택연 목사일세.”
“오 택연이! 반갑구먼, 자네가 목사라는 말을 듣기는 했네만, 근데 어찌 알고.”
“어제 친구들한테 자세한 소식 들었어. 오늘 수술 들어간다고? 몇 시인가? 수술 시간이,”
“열한시야!”
“음, 그렇구먼, 걱정하지 말란다고 해서 그 말이 귀에 들어올까만, 그래도 맘을 단단히 먹고 초조해 하지 말게, 내 밤새워서 기도 했다네, 그리고 친구들 역시 자넬 위해 두 손을 모으고 있어. 모두가 약속했다네, 예수를 믿는 친구건 안 믿는 친구건 오늘 아침에 단 오 분이라도 각지에서 힘 모아 기도하자고, 그러니 힘내, 그냥 한숨 푹 자고 일어난다. 여기면 편할 거야.
“그리들 했는가?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래! 힘내고 자 나와 함께 기도 하세,”
그 친구가 하라는 대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기도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주여! 우리의 친구가 수술대위에 눕게 되었습니다. 아직 할일이 많은 젊은이이옵니다. 부디 방관치 마시고 의료진들의 손길을 주관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친구의 육신을 깨끗이 씻으시고 그렇게 치유시켜 쓰시옵소서. 주의 일에, 또 세상을 위해 기꺼이 쓰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
나도 ‘아멘’하였다.
눈물이 흘렀다. 보는 이들이 있어 애써 멈추려 해도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마구 흘러 내렸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병원 측에서 아내를 따로 불러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수술 중 일어날 수도 있는 불상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양부위를 떼어내고 퍼진 것까지 말끔히 제거해내려면, 성 불구자는 필연이니 배우자의 동의 없인 절대 수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한 가지를 더 말해줬다. 수술시간은 보통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은 수술이 완만하게 이루어질 때의 얘기이고, 혹 두 시간 정도에서 마치게 되면 이는 종양이 너무 번져 손을 못 대고 열었던 배를 그냥 봉합하는 것이니 이는 아주 좋지 않은 경우라 한다. 또 일고여덟 시간을 넘기기도 하는데 이도 제거할 부분이 많고 복잡해서 오래 걸리는 것이고 그도 좋지 않은 상태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수술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두 시간가량 흘렀을 쯤. 의사 한명이 수술실 밖으로 나와 보호자를 찾았다. 순간 아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술실 들어간 지가 겨우 두 시간인데 의사가 나와서 보호자를 찾고 있으니 이는 분명 상태가 절망적일 것이었다. 그리 짐작한 아내는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의사의 표정이 의외였다. 웃음을 띠면서 아내를 일으켰고 진정시켜가며 수술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호자를 찾은 것이 아닌 것이었다.
‘정말 극적입니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항문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환자분의 운이 정말 좋군요. 막상 열고 보니 상태도 양호한 편입니다. 의사가 장담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만, 이제는 한시름 놓으셔도 될 듯합니다. 워낙에 기쁜 소식이고 보니 초조하게 기다릴 가족에게 속히 알리고픈 마음에 수술도중 보호자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밖으로 나와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수술실 문 앞에 초조하게 서있던 숙부가 그런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울어라, 이젠 실컷 울어라, ” 숙부의 목소리도 젖어있었다.
퇴원을 하고 스무날쯤 지나 청주시에 인접한 우암산을 찾았다. 회복 상태도 시험해 볼 겸,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올랐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려 중턱까지 올랐는데 거기에 약수터가 있고 나무의자도 있었다. 의자에 걸터앉았다. 멀리 산 아래로 복작복작 움직이는 청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 농촌의 마을들도 보았다.
이때, 스물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청년이 아래에서 부지런히 올라왔다. 헉헉대며 오더니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땀을 식혔다,
나는 청년에게 미소를 보내었다. 그도 나에게 가벼운 목례로 답을 했다. 나는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키며 청년에게 말했다.
“저기 좀 보시지요?”
청년의 눈이 내 손끝을 따라 움직인다.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청년이 잠시 머뭇머뭇했다. 난데없이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하는 듯 머뭇머뭇 하다가 아, 예."대답하고는 슬그머니 일어나 가던 길을 다시 부지런히 갔다.
향락을 쫒고 술에 찌든 생활, 내가 택한 삶의 모습이었다. 그 결과로 찾아든 고난은 어쩌면 당연한 대가일 것이다. 미처 몰랐다. 험난하고 고된 삶을 원망만 했다. 이판사판 살아가면서 그러다 지쳤을 땐 차라리 생을 마감하고자 생각한 것도 꽤 여러 번이다.
그러나 이젠, 빛이 보인다. 구름 사이로 내리는 햇살, 파릇파릇 짙어가는 녹음, 사방팔방 눈에 들어오는 모두가 아름다웠다. 행복해 보였다.
첫댓글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실천하지 않은 저에게 글을 읽고 감명과 경종을 울리네요.
건강을 회복하셨으니, 앞으로 즐겁고 행복한 가정이 될것 같네요.
감동적 감동적이네요
건강할 때 건강 지키라고 누군가 말해도 우린 그냥 지나쳐 버리고 살고 있지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선생님댁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워낙에 기쁜 소식이고 보니 ...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정말 감명 깊게 읽었네요.. 새 삶을 행복하고 감사하게 사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