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선 金道善 (1883~1934)】 "양세봉 장군과 의형제를 맺은 농민 김도선"
김도선(金道善, 1883~1934)은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부지런하여 다른 일꾼들에 비해 두 몫의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17년 중국 요녕성 흥경현(興京縣) 홍묘자(紅廟子) 오도구(五道溝)로 이주했다. 이곳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땅은 드넓고 비옥했다. 그러나 무상기(無霜期)가 짧아 농사가 여의치 않았다.
다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1931년 신빈현(新賓縣) 향수하자(响水河子)에 정착했다. 이곳에는 고구려 때 축조한 고려산성(高麗山城, 공식 명칭은 黑溝山城)이 있었다. 산성 인근의 울창한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화전을 일궜다. 외부와 거의 단절한 채 농사만 지었건만 수확 때가 되면 일제의 수탈이 따랐다. 나라 잃은 설움과 일제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즈음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이 김도선의 집을 찾아 왔다. 첫 만남이었지만 허물없이 속마음을 터놓았다.
양세봉은 김도선에게 그의 집을 조선혁명군의 비밀접선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도선의 집이 마을과 한참 떨어진 산비탈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 지점이 서쪽으로는 환인현(桓仁縣)을 너머 관전현(寬甸縣)으로, 서북쪽으로는 신빈현(新賓縣)으로, 동북쪽으로는 유하현(柳河縣)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경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김도선은 흔쾌히 허락했다. 총을 메고 직접 싸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닐 뿐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독립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그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김도선은 장남 김효길을 조선혁명군 청년단에 가입시켰다. 청년단은 독립군 지휘관들로부터 항일의지를 다지는 역사교육과 군사교육을 받았다. 독립군으로 활동하기 위한 전초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장남 김효길과 더불어 장녀 김금산, 차녀 김효순도 조선혁명군의 지하통신원으로 활동케 했다. 지하통신원은 독립군의 각종 문서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주로 ‘밤통신(야밤에 문서를 전달하는 행위)’을 했다. 또한 자신은 초근목피로 연명할지언정, 독립군들이 찾아오면 옥수수죽을 끓여 된장에 풋고추나 마늘을 대접했다. 푸성귀였지만 그 맛이 오죽했으랴?
1934년 9월 20일, 밀정에 의해 양세봉이 순국했다. 군신(軍神)으로 숭앙받던 그로서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조선혁명군 간부 50여 명이 양세봉의 시신을 고려산성 인근에 안장하고, 김도선의 집에서 며칠간 추모제를 지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1934년 9월 26일, 이튿날이 추석이라 촌민들이 한창 들떠 있었다. 그때 통화시의 일본영사관이 군경을 이끌고 향수하자로 들이닥쳤다. 양세봉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하여 보복할 작정이었다.
일제는 향수하자의 촌민 70여 명을 강변으로 몰아넣었다. 촌장 로계봉(卢桂奉)에게 총을 겨누며 양세봉의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 촌민들 중에서 누가 양세봉과 접선했는지 고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촌민들을 모조리 총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촌장은 양세봉의 시신을 안장한 곳은 물론 김도선의 그간 행적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곧바로 양세봉의 시신을 땅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시신을 김도선의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김도선을 대들보에 묶고 고문했다.
일제는 김도선에게 조선혁명군의 정보를 얻고자 했다. 온 몸에 몽둥이질을 해댔다. 콧속으로는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뿌려댔다. 김도선은 “나는 모른다”라며 완강히 버텼다. 그러자 일제가 김도선에게 작두를 건넸다. 양세봉의 목을 자르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다. 김도선은 “죽어서도 사령이고 살아서도 사령인데 내가 어찌 그 목을 자를 수 있는가?”라며 항변했다. 그러자 일제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도선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촌장 로계봉에게도 총을 쏘았다.
김도선은 자녀들에게 “원수 놈들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숨을 골랐다. 일제는 이렇게 양세봉의 머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통화현으로 가져가 대로 한복판에 효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1940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이끌다가 전사한 양정우 사령관의 시신을 땅에서 끄집어내어 그의 배를 가른 행위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