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의 파병부대중 백마와 맹호에는 '백마공수특전대' 혹은 '공수지구대'라는 이름으로 특전사 요원들이 예속되어 작전에 참가했었고, 해군의 백구부대에도 함정경비 및 수로탐색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UDT/SEAL 대원들과 SSU 대원들이 파견되어 작전에 참가했다. 특히 백구부대의 UDT대원들은 메콩 델타 수색작전에도 참가했었다고 한다.
군가 - 맹호들은 간다. 가수 마야가 부른 버전도 있다.
군가 - 우리는 청룡이다(청룡은 간다)
군가 - 백구부대가. 군가만 나오는것이 아닌 당시 백구부대의 모습과 활동상도 같이 나온다.
중복으로 파병된 병력을 포함해 1964년 9월에서 1973년 3월 철수시까지 약 9년간에 걸쳐 비전투 병력까지 포함하여 한국군이 투입한 병력은 총 346,393 명이다. 이중에서 육군이 304,760명이다. 전쟁 기간동안 약 5만 명(육군이 4만명 가량) 정도의 군대 규모를 유지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 전사자 및 사망자(순직자, 변사자, 자살자 및 행방불명자 포함)는 공식전사에 따르면 5,099명이다. 이 중 일부가 실제로는 포로인데 전사자로 처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중 전사자가 4,663명이며 사망자 외에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의 추산에 따르면 주월한국군의 전사율은 참전한 총병력의 1.4%에 해당되며 미군의 경우에는 전사율은 2.3%에 달했다고 언급했다. [7]
인명손실 중 육군이 전사자 및 사망자 3,859명으로 손실률은 1.2% 정도인데 반해 해병대는 손실이 1,240명으로 3.4%에 달한다.[8] 육군 병력은 비전투병력(비둘기부대같은 전투근무지원부대) 비율이 높았던 것을 고려해야하지만 청룡부대의 병력손실률은 맹호, 백마 사단이나 미군보다도 높았다. 해병대는 중부지역으로 작전지역을 이동하며 작전 빈도가 잦았기 때문으로 연유된다.
파월 한국군은 적군 시체가 아닌 적군의 무기, 또는 보급품 노획을 통하여 전과를 확인하고 인정받았다. 이는 소수의 시체를 여러 번 돌려 사진 찍어서 실적을 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등에서 종종 있었던, 민간인이나 신원불명자 등의 시체를 끌고 와서는 전과로 보고하는 사태를 막으려 했던 의도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참전 용사들은 적군의 귀나 손가락 등을 잘라왔다고 증언하기도 하나, 공식적으로는 적군 사살 사진과 무기 두 가지로만 확인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암시장에서 무기를 돈 주고 사와서는 적군 사살로 얻은 것으로 보고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이며, 한국군이나 미군 헌병도 바보는 아닌지라 엄중히 조사했기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개망신이라 쉬쉬하면서 처벌했다고. 김형배의 베트남전 만화 '황색 탄환'에서도 이 소재를 다룬 바 있다. 사실 전과 기록은 기록으로서의 가치로도, 군전략 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느 지역의 어느 적군이 전투로 얼마만큼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는 자료는 훗날 군사전략을 짜는데 큰 정보가 될 뿐더러 작전 수행에 있어 문제점은 없었는지 등등을 남길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다 무기 노획으로 바뀌었는데 당시 참전 용사들의 수기집을 보면 떨어져 있는 총을 줍기 위해 "저기 훈장이 떨어져 있다!"라며 무모한 짓 하다가 다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즉 이 당시에는 적을 사살하는 게 아니라 총기를 노획해야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베트콩은 총기 부족으로 반드시 전사자의 총을 들고 갔기 때문에 총기 노획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베트콩들은 총기 부족으로 총 없이 예비로 따라 다니는 병력들도 있었고, 특히 베트콩 4~5명 마다 여자 베트콩 1명이 따라 붙어 빨래, 세탁 등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에겐 총이 없었다. 결국 노획 총기를 통한 전과 확인이 기존의 시신을 통한 확인보다 그 기준이 매우 엄격해졌다.
한국군은 이 전쟁에서 5천 99명이 전사하였는데 베트남 전쟁이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는 점과 베트남으로 파병된 한국군의 총인원이 32만 명 정도임을 감안해볼 때 한국군이 입은 피해는 아주 크지는 않지만 6.25 전쟁 때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했던 연합군들이 그랬듯이 5천여명의 청년들이 타국에서 남베트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미 일어난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된 만큼 파월 한국군을 올바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전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려는 베트남 민족과 외세(프랑스, 미국 등)의 대결로 보는 구도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대한민국의 좌파 인사들'이 제기한 관점이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가 변화된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로 유지하려다가 시작된 것이고, 남베트남은 사실상 프랑스가 만든 괴뢰국가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로 베트남을 포기하고 떠난 뒤 남북 간에 합의된 1956년 남북통일총선거를 남베트남 정권이 차일피일 거부한다. UN이 주최한 총선거를 남베트남이 거부했기때문에 유엔의 개입 명분이 없어졌고 결국 베트남전쟁에선 유엔군을 파병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베트남의 입지가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내전이며, 미국의 개입은 당연히 명분이 없다.
베트남처럼 식민지였다가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수많은 제3세계 신생국들은 당연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들을 포기한 서유럽 국가들에도 이런 관점에 동조하는 정치세력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때문에 UN의 승인과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따라 참전한 한국전쟁과는 달리 미국은 베트남전에는 자신들의 서유럽 동맹국들을 참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둘째는 공산 북베트남과 자유 남베트남의 대결로 보는 것으로, 당연히 남베트남과 미국, 프랑스, '대한민국의 우파 인사들'이 강력하게 제기한 관점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은 반공을 외치면서 전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무조건 적대시 하였다.이 때문에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고 베트남을 포기하자,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북베트남은 같은 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침략국이고, 미국의 개입은 자유 진영을 수호하고 아시아 공산화를 막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다.
실제 베트남 전역이 북베트남으로 통일된 이후, 인접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공산화되었기에 도미노 이론이 맞아 떨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물론 미국의 개입에 대해 잘못된 방향으로 도미노 현상을 부채질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베트남전 자체가 워낙에 복잡한 전쟁이기에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방증하듯 베트남전에서는 그 어떤 국가도 일방적으로 침략국으로 규정받지 않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이 베트남의 혼란한 상황에 충분한 지정학적, 역사적 검토 없이 이념논리로 개입을 결정한 것은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중국과 프랑스를 경계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북베트남을 포섭하기보다 배척하기만 하였다. 또한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맹목적으로 믿고 갈등의 외교적 해결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였다. 미행정부가 어떤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는지는 데이비드 헬버스템 저 '최고의 인재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기에 베트남전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는 '냉전 체제의 대리전으로 빚어진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남북 베트남 국민, 미군, 한국군을 포함한 동맹군이 사망했으며 그 후유증은 부분적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월남 파병에 대한 평가 또한 가해자는 당연히 아니지만 불합리했던 국제정치사의 한 장, 그 중에서 최고조로 모순이 넘쳐났던 냉전시대에 일어난 일이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군의 대우는 보급과 수당 면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다른 참전 연합국에 비해서도 좋지 않았다.#미국 정부가 당시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파병 수당을 책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9대 1을 쌈싸먹는 25대 1의 사상자 교환 비율을 비롯하여 파병 한국군의 전과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참전 정글전 베테랑들로 이루어진 파월 호주군의 전과에 근접한 수준이다.[9]
실제로 베트콩 및 북베트남 내부에서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 경우 절대로 한국군과 싸우지 말고 피하라'는 식의 명령을 내린 정황도 꽤 되며 한국군의 용맹함은 동맹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편이었다. 장비나 신체조건 상으로 보면 미군보다 활약이 떨어져야 정상인데, 도리어 정반대 결과가 나왔기 때문.
한국군보다 높은 교환비를 보인 이들은 최정예 중 최정예만 엄선해서 보낸 ANZAC이나 미군 특수부대인 그린베레와 네이비 씰, 그리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블랙옵스인 MACV-SOG 같은 최고급병력 뿐이다. 네이비 씰의 경우, 베트남 전쟁에서 제 1중대와 제 2중대의 경우, 평균 1대 200이라는 교환비를 냈다.출처.
한국군이 잘 싸운 이유로는 첫째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라 교대할 병력을 보낼 때 전투력 최우수자를 우선적으로 뽑는 식으로 철저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사령관 채명신 장군부터 해방 이후 6.25전쟁, 그리고 전쟁후에도 오랜 기간 이어온 공산군 잔당인 빨치산 토벌 등의 전훈으로 당시 미군은 거의 경험이 없던 정글, 산악지형의 게릴라를 상대하는 법을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미군이 화력은 대신 해줄순 있어도 베트콩들과 직접 맞닥뜨려 전략적 승리를 하기 위해선 게릴라전 대응이 필요했는데 당시 한국군은 그 실전경험이 충분했던 것.
게릴라는 민심을 얻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만큼 대게릴라전에서도 민심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것도 한국은 6.25의 경험을 통해 선례로 배운것이다. 한국군은 민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대민작전과 지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한국군은 참전기간 중 대민진료 352만 3,364명, 식량 1만 9,640톤, 의류 46만 1,764점, 농기구 6,406대, 가옥 및 교실 3,319동, 교량 132개, 도로 394㎞, 태권도 보급 90만 2,060명, 경로잔치 및 어린이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등 대민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한국군이 전투력보다 민사작전능력이 더 널리 알려질 정도가 되었으니, 한국군이 베트콩을 상대로 전공이 높았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혹자는 한국이 베트남과 똑같이 벼농사문화권이라서 베트남의 농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한국군의 적지 않은 수가 농사짓던 청년이었다는 점도 대민작전 하기가 쉬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군은 지금도 해외 파병시에 현지주민 진료, 대민지원사업을 우선시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민사작전은 유엔에서도 인정받고 있고 현재 민사작전에서는 세계 최고로 평가받고있다.
한국군은 원래 구식 무기인 M1 개런드를 들고 있었으나 채명신 장군이 미군 지휘부를 설득한 끝에 미군이 막 보급받던 M16 소총을 약간 받아온 것을 시작으로 몇 년이 지나고 나서는 전군이 M16 등의 신예 미군 병기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화력에서도 미군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령관의 제대로 된 지휘 덕에 지구방위대 미군보다도 오히려 더 잘 싸우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초창기에는 미군의 헬리콥터나 포병지원을 잘 안 해준 데다 한국군에게 주둔지역을 넘기고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나와서 꽤 어려움을 겪은 면이 있다. 이는 채명신 장군과 미군이 한국군의 소속 문제와 작전권 문제로 크게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채명신 장군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한국군이 미군의 예하 병력으로 들어가버리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소속과 작전권 문제를 절대 미군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전쟁 초창기, 해병 청룡부대의 첫 대규모 작전 "청룡 1호" 작전이나 맹호부대의 "비호 6호" 작전은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이 었다. 물론 후반부 대규모 작전도 한국군의 단독 지휘와 한국군 위주 작전이었지만 미군 헬리콥터 지원은 기본이었다. "청룡 1호" 작전은 투이호아의 혼바산 등의 험난한 산악전을 벌여야 했고 고지나 산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 기지들을 산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의 대성공을 거두자 미군들이 대대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시작한다. 후반 작전들에서는 밑에서 치고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고지에 투입된 병력이 함께 앞뒤에서 적을 포위시켜 섬멸하면서 더욱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월 한국군은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 등의 임무가 많았다. 따라서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부수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게릴라 소탕이라고 하는 게 헬기로 공중강습하고, 미군의 빵빵한 화력지원에다가 포위망도 갖춘 정교하고 대대적인 작전인 데다가 영내수비란 것도 따지고 보면 두코 전투나 짜빈동 전투처럼 스케일이 크기도 하다.
또한 본래 점령전이 아닌 베트남에서는 사방이 베트콩으로 둘러싸인 전장 환경(지상전 한정)상 게릴라 소탕, 대민지원, 영내수비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특수부대의 월경 작전도 따지고 보면 정규전을 치르려는 게 아니라 게릴라 활동을 차단하려고 하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구정 공세도 게릴라전의 스케일이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고, 케산 전투도 영내수비가 엄청나게 큰 판으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한국군은 베트콩 이외에도 두코 전투, 안케패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 등 월맹 정규군과 여러 차례 교전한 끝에 전과를 올림으로써 실제 정규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그 외에도 주월 한국군은 독수리 70-1호 작전, 독수리 71-1호 작전, 백호 9~12호 작전, 홍길동 작전 등 월맹 정규군과 주월 한국군이 전투를 치른 사례가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짜빈동 전투'는 국군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라 할 수 있다. # 안케패스 전투의 경우는 베트남군을 다시 쫓아내기는 했지만 짜빈동 전투의 승리 방식을 그대로 돌려받은 졸전의 사례에 가깝다.
따라서 당시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자기 가치를 드러냈다고 보면 되겠다. 비록 주월 한국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실제로 그 지원을 토대로 승전을 거두었지만 어디까지나 전투를 치르는 주체는 한국군이었던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에서의 무용담은 군사정권하에서 과장 및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측에서는 주로 베트남전을 시찰한 미군 정치고문 제임스 맥이 주월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니콜라스 손에게 보낸 해병대 청룡부대(2여단)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그 근거로 드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특히 이 평가는 한국 해병대에서 같이 근무한 많은 미해병대원들이 반박했는데, 특히나 ANGLICO(미해병 항공함포 연락반)대원들은 한국 해병대 중대에 배속되어 같이 생활했으며 "처음에는 언어 장벽으로 대화가 힘들었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를 믿게 되었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친구들이다."라고 증언할 정도였다. Thomas Petri 나 Scott Leis 등 대원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청룡부대원들과의 생활을 책으로 출간했다.
다만, 당시 주월 한국군이 채택했던 중대전술기지의 교리 자체가 극단적으로 공세적 군사행위를 배척하는 특성을 보이므로 완전히 이해 못할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 제안자였던 채명신 장군 이외에는 아무도, 심지어 같은 한국군 장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 나온다.
보다시피 제임스 맥은 한국군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에 대해 채명신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다만, 암시장에서의 부정행위는 일부 인정했다.
또한 제임스 맥의 평가는 해병 2여단 중 꽝남 성 이남 지역의 해병대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한국군이 이렇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미국 자료들은 대체로 한국군의 군사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0]
또한 제임스 맥은 외교 고문관이자 민간인이지 군사 고문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군사 고문관들은 한국 해병대가 적극적이면 너무 적극적이지 절대로 소극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암시장과 비리에 관한 관한 문제는 무기를 팔아먹는 것보다는 빈약한 지원 때문에 더 사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군수부대에서 근무한 한국군과 미군 참전용사들에 따르면 초반에 M16 소총을 보급받지 않고 빈약한 M1 개런드나 카빈 소총을 받은 한국군은 암시장에서 몰래 무기를 사오는 경우도 있었고, 신형 소총을 더 보급받기 위해 다른 부대에 빼돌려 버리고 전부 손실했다고 거짓말을 한 뒤 보급을 더 받은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M113 장갑차도 비슷한 방법으로 보급을 더 받았으며 결국 국내로 밀수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쓰라고 미국이 공여한 무기들을 몰래 빼내 국내로 밀수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미군이 국군의 물자 이동을 감시했다는 말은 전형적인 인터넷 카더라고 M113 항목과 한국군 방산무기 수입사에서 언급되어 있다.
실제로는 그 400여 대는 본토의 국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측에서 정식 지원해 준 것이다. 더구다나 밀수했다는 장비들 역시 미국 측에서 대부분 수량을 파악하였으며, M113와 마찬가지로 국군에게 공여된 장비 물량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적었다고 한다.
어차피 한국군은 본 전쟁에서 베트콩을 주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무기를 팔아먹으면 바로 적의 손에 들어가는데 개인이 무기를 팔 이유도 없었고 부대단위로 신형 무기를 다 팔아버리는 막장스러운 사태도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가뜩이나 군기와 구타가 심한 1960년대 군대에 군인이 전쟁터에서 무기를 팔아버리면/잃어버리면 끝장인 걸 모를 수가 없다.
다만 씨레이션이나 텔레비전, 냉장고 등 남은 것들을 군사들이 빼돌리거나 암시장에서 구입하여 집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6.25 전쟁 이후에 한국에서 미군 생필 군수물품들이 암시장에서 팔린 것과 비슷하게 베트남 암시장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팔렸다. 엄밀히 말해서는 불법이 맞지만 베트콩들에게 무기를 팔아먹는 미친 짓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얼마나 한국이 가난했는지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사상자 비율이 1:24로 미국의 1:9보다 크게 앞선다는 것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제임스 맥이 그렇게 폄하하는 해병대가 바로 1:24 사상자 비율의 주인공이다. #
전쟁 후반기의 작전에는 100대의 1의 교환비를 보여주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제국군과 정글에서 싸운 호주의 베트남 파병병력의 전과에 근접한 수준이다. [11]
그리고 이런 평가들이 과장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 오히려 한국군 전투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특히 미군 전투부대원들과 같이 작전을 펼친 적이 많았다. 청룡부대 경우 여단 규모라 담당지역을 이동하는 편이었다.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서 베트콩을 소탕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싸웠다. '깜란, 투이호아, 추라이, 호이안'. 그리고 평정 후 맹호부대나 백마부대에게 인계되는 식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푸옌성과 칸호아성은 청룡부대가 이동 후 백마부대의 담당지역이 되었다. 때문에 지원이 많이 필요했고 그 지원을 미군에서 받았다. 그러므로 합동작전뿐만 아니라 개개인 전투병들과의 교류도 많았으며, 그들에게서 명성도 아주 높은 편이었다.
특히 미해병대 항공함포연락반(ANGLICO) 인원들이 청룡부대 전투부대 중대마다 배속되어 수많은 교전을 같이 겪었고 짜빈동 전투에도 ANGLICO 미해병들이 두 명이나 같이 있었다. 이들이 한국군 해병대와의 경험을 해외 베테랑 커뮤니티에 알렸고 대부분 월남전 당시 한국 해병대의 긍정적인 평가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제임스 맥이 평가한 청룡부대, 특히 꽝남 성에 주둔한 부대는 미군들과의 교류가 수없이 많았고 오히려 그들의 평가는 아주 긍정적이다. 물론 맥의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직접 같이 싸우고 작전을 펼친 전투병들과의 평가는 그와 정반대이다.
물론 무조건 승리한 것만은 아니다.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아있지만 한국군은 부대 규모상 미군이나 월남군처럼 정규 월맹군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실시한 적은 별로 없다. 있긴 있었으나 그렇다고 많지는 않았다는 것. 안케패스 전투 등. 또 연대-여단 규모 작전이 그나마 큰 편이었다.
오작교 작전이나 홍길동 작전, 황룡 작전등 스케일이 큰 작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소규모 교전과 매복이었다. 이 가운데 큰 성과를 얻었지만 매복이나 부비트랩으로 손실을 겪은 적도 꽤 있다.
이에 대해서 국방부는 승전보만 알리려고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은 사례에 대해서는 덮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오히려 파월용사들의 수기로 가슴 아픈 사례들이 밝혀진 바가 있다. 예를 들어 짜빈박 전투는 "투망 작전"의 한 부분으로 해병대가 손실을 겪은 전투였지만 국방부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럭저럭 성과를 얻은 작전이기 때문에 작전 기간에 모든 전과만 언급하고 "부분적 성공"이라 칭한 뒤 그 특정 전투는 넘기는 식이었다.
또한 오작교 작전에서 백마부대의 도깨비 11중대가 보초병이 조는 바람에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은 사건이나 맹호부대의 혜산진 1대대 2중대에 베트콩이 침투하여 막사에 수류탄을 다수 투척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작교 작전 자체가 큰 성공이라는 이유로 전과만 홍보하고 다른 건 싹 덮어버리는 면도 있었다.
안케패스 전투 경우도 한국군이 이기기는 하였으나 사령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점도 참전용사들의 수기에 의하여 밝혀졌다. 공식적으로는 북베트남군 700여명을 사살했고 한국군 전사자가 70여명에 부상자가 100여명이라고 하지만 일부 참전용사들은 그보다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사살한 북베트남군의 수도 다소 과장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일단 638고지 전투에서 436명을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의 진위여부가 상당히 의심스럽기 때문. 확인된 시체는 4구이며 나머지 시체는 어떻게 들고 탈출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해당 거점에 900여명은 있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게다가 공격해서 부상자 없이 사망자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들이 시체를 들고다니지는 못할테니 이것까지 고려하면 연대급 인원까지 들어가있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군 참전용사들이 한국군을 바라본 시선도 독특하다. 당시에 군기와 가혹행위가 심해서 옆에서 보던 미군 참전용사들이 "하드코어하다"라며 손을 저을 정도였던 반면, 우리도 저렇게 해보자 라는 싸이코들도 있었다는 것. 그러나 안그래도 사기도 낮고 사명감도 없던 미군 병사들이 그런꼴을 당하면 프래깅으로 갚아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당시 미군들은 징병되어 원치 않아도 끌려온 반면, 한국 파월장병들은 지원을 받아 선발해서 보낸 병사들이라 꽤 정예였다고 볼 수 있다.
미국측 장교단이 한국측 진지를 방문했을때, 병영을 안내하는 한국군 장교들이 지나갈 때마다 쉬고 있던 한국군 병사들이 큰 목소리로 충성! 하고 외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그다음부턴 "우리도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부러워 했다. 그런데 정작 전투 지역에 있던 미군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경례하지 말라고 지시하는데, 베트콩 저격수에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도 이와 관련된 장면이 있다. 자세한 항목은 경례구호 항목 참조. 당시 미군 1기병사단 중위였던 리처드 머레이는 사소하게 한국군 초소나 진지를 지나가면 병사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자로 잰 듯한 경례와 떠나갈듯한 경례 구호를 외쳤고 본인도 경도되어 군인다운 자세로 답례했다고 한다. 머레이는 맹호부대 연락장교였고 2009년 타계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군은 뜀걸음시에 힘차게 군가를 부르는 전통이 있고 생활화 되어 있을적으로 일반적이다. 당시 미군은 기상과 동시에 일사불란하게 집결하여 군가를 부르며 뛰는 한국군을 보며 스페셜포스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훗날 이라크 주둔 자이툰 부대에도 이어진다. 당시나 현재나 미군은 아침조회식으로 끝내기 때문. 보통 미군도 케이던스라 불리우는 완보시 군가를 부르긴 하지만 한국군 식으로 속보에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아이를 구해내고 있는 육군 백마부대 장병들. 아이를 안고 달려오는 병사는 M16A1을 소지하고 있다. 연출된 사진이다. 기관총에는 아예 탄약도 장전되어 있지가 않다.[12]
해병대 청룡 2여단 1대대 의 통신병 이명수 하사. 이 사진은 관통당한 철모를 어루만지는 아래 부분이 잘려나간 사진이다.(당시 사진기사가 특이하다며 찍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해당 사진의 철모에는 정조준금지구역이라고 적혀있다. 사실 웃을 수만은 없는 게, 통신병은 저격수의 우선 목표 중 하나다. 사진의 주인공은 청룡 2여단 1대대의 이명수 하사로, 철모 외피의 저 글씨들은 당시 한국군의 복장 군기로 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사진인데, 실제로 저격당하여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이후 부대장이 특별히 허가해 준 것이라고 한다. 다만 '보고 싶은 울산 큰애기 순이'는 귀국했더니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결국 이명수 하사도 다른 사람과 결혼하였다는 슬픈 뒷이야기가 있다. 2016년에도 사진의 철모를 보관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여담으로 이명수 하사는 전역 후 목사로 살아가다 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베트남 전쟁이 끝난지도 48년이나 흐른지라, 이제는 철모 외피도 낡고 글씨도 거의 탈색되어 흔적만이 있다.
출항을 준비하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장병들이다. 파월 청룡부대는 육군부대와 달리 덕헌터 얼룩무늬 군복을 착용했다.
베트남 정부나 국민들이 한국에 별 감정 없다는 서술들이 많은데, 피해주장자 등에서는 강한 비판 의식을 지닌 경우가 많으며 한국의 진보 단체나 한겨레, 오마이뉴스 같은 진보쪽 언론들이 연계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현 베트남 정권은 오히려 이들을 탄압하는 형편인데 왜냐하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에 의해서 민간인 학살이 정말로 있었는지 아닌지를 파다보면 결국 자신들(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한 학살들(후에 대학살 등)이 만천하에 드러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베트남 공산당 입장에서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 정부가 학살이나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전쟁 특성상 전방과 후방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베트남 내에 베트콩들의 전쟁범죄에 당한 민간인 피해자들이 남베트남 북베트남 할 것 없이 너무 많고 이런 것들이 다 드러나면 공산당 정권 존립 자체에 위험이 될 뿐만 아니라 이 피해자들을 전부 보상해준다면 베트남 정부가 파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월남전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협조하는 민간인들을 가차없이 살육하기로 유명했다. 그때문에 한국의 중대전술기지나 미국의 전략촌에는 남베트남 원주민뿐 아니라 베트콩을 피해 도망온 북베트남쪽 난민도 적지 않았고, 이들이 기지 밖으로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훨씬 안전했기 때문에 철군 이전까진 신변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75년 이후에 이들이 어떻게 됐을지는 뻔하다. 이들의 사례가 발굴되면 정치적 피해를 보는건 베트콩의 후신인 베트남 공산당이다.
남베트남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당시 북베트남이 우리를 점령했을 때 우리한테 한 짓은 말하지 않고 한국이나 미국의 학살만 들먹이냐?"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 적화통일 당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그들의 후손들. 게다가 이 논란을 낳은 글은 베트남의 어떤 기자가 "만일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본군을 관련한 드라마가 방영되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위에 서술했듯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 글을 쓴 쩐꽝티 기자는 하노이 출신, 즉 북베트남 출신이라 남베트남 출신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나왔다.
보통 영미권 국가들과 조금이라도 관계된 항목들은 당사국보다 영어로 작성된 항목이 가장 상세한 경우가 많으며 위키백과에서 해당 문서들은 일본어버전이 제일 자세하고, 역시나 내용도 과장되거나 한국군의 잔혹성을 부각하는 것이 많다. 물론 난징 대학살 같은 구 일본군의 전쟁범죄 관련 문서와는 완전한 정반대 태도. 개막장 극우들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정신줄을 놓은 일본 위키백과의 슬픈 현실이다. 인터넷 인구수 기준 한국에서는 위키백과에 관심이 적은 반면, 일본 위키백과는 특히 근현대역사나 정치 관련 항목은 굉장히 우익적이고 자세하다.
사특정 사건에 직접 연관되어 있는 국가들은 위키백과에서 중립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다면 특정 사건이 왜곡된다고 해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중립적인 국가의 위키에 들어가서 구글번역기를 정성들여 돌리는게 좋다. 더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다면 위키보다는 여러 책이나 심도있는 기사를 비교 대조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좋다.
베트남전이 끝난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제정된 법이 그 유명한 군인에 대한 이중보상 금지 조항이다. 정확히는 군무원과 경찰도 해당되며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고 법정보상금만 받을 수 있다는 제도.
이 조항이 만들어진 경위는 박정희 정권이 당시 보상을 전혀 받지 못했던 한국전쟁 상이용사에 대한 보상 제도를 정비하면서 보상금을 지급하는 대신 국가에 대한 민사소송이나 이중배상을 막아 정해진 액수만 받게하려는 취지였다.
당시 유공자나 상이군인(특히 한국전쟁 상이용사와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2,000만원 가량의 돈을 연금형태로 지급하도록 제정했는데, 당시 서울의 아파트 1채의 가격이 1,000 ~ 2,000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엔 악법이 아니었으나 40년간 물가가 백배가까이 오를동안 보상금 액수가 동결되어 있었다.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 때에는 이미 물가가 50배가량 오른 시점이라 보상금의 액수가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렇기에 헌법이 개정되는 중에서 끊임없이 폐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지금까지 존치되어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회에서 이 법을 우회해서 보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전쟁 이후 사회적으로 유행어가 한국군을 중심으로 한동안 돌았는데, 바로 '짜웅'이라는 말로 아부하는 행위를 일컫는 속어다. 원래는 '짜오 옹'이라고 하는 직역하면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쯤 되는 베트남어가 변형된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가 심해서 로비할 때 로비하는 사람이 고관에게 예의갖춰 인사한 것이 와전되어서 한국에서의 '짜웅'에 이른것.#
한국 드라마 등을 통한 한류 열풍이 강한 곳 중 하나인 곳이 베트남이다. 그런데 2016년 인기 드라마인 태양의 후예 방영을 앞두고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다행히 <태양의 후예>는 베트남 국영방송국인 HTV2채널에서 Hậu duệ mặt trời(태양의 후예)라는 이름으로 별 문제 없이 방영되었으며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국내 마지막 방송이 4월 14일이었는데 베트남에서는 겨우 1주일 뒤인 2016년 4월 21일 첫 방송을 시작했고, 이는 30개국 이상 수출된 이 드라마가 해외 방송국에서 가장 먼저 방송된 것이다. 다만, 외국의 방송국에서 정식 수입 방영을 하기 전에 이미 해외 스트리밍 서비스 뷰(VIU)와 KBS WORLD, 유튜브등을 통해서 본 외국 사람들도 많았다.
이 드라마의 OST는 베트남에서 250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특히 태양의 후예를 패러디한 코미디 프로도 방송되는 등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베트남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부정적이었을지 의문이다.
1998년 11월 23일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파월했던 백마부대와 십자성부대편이 방송탔었다. # 오프닝에서 MC들은 충성을 외친걸 봐서 경례 구호가 충성이었다.
15. 매체에서 등장[편집]15.1. 게임[편집]15.1.1. 도미네이션즈[편집]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주의 병력의 공격에 있어서 미국 다음으로 한국의 기여가 가장 컸습니다. 남한의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에서 총 30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으며, 이곳에서 이들은 북베트남군으로부터 매우 무서운 적이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1973년 철수 전까지 한국은 4만1천명의 적군을 사살하며, 단 3천8백 명의 병력만 잃어서 11:1이라는 비율을 기록했습니다.' 라는 추가 정보를 가진 한국의 냉전 시대 원거리 보병인 중장갑 공화국 소총수가 등장한다.
[1] 이상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을 참고해 서술[2] 송재경,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 추진과 국회의 대응: 의용군 파병논의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vol.116, 2020-06)[3] 민유기, 프랑스의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베트남 파병에 대한 인식(프랑스사 연구 vol.32, 2011)[4] 동남아판 나토로 기획된 동맹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및 타이, 필리핀, 파키스탄의 8개국으로 구성되었다. 베트남은 가맹국은 아니었지만 조약기구의 관할범위에 해당되었다.[5] 송재경,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한국군 베트남 파병 추진과 국회의 대응:의용군 파병논의를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vol.116, 85pp)[6] 이신재,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주둔군 지위와 민간인 피해보상(국방정책연구 vol.121, 2018)[7] 이상호, 베트남전쟁 파병 국군 전사자 현황과 국내 언론 보도, (역사와 현실 vol.116, 2020)[8] 오홍국, 베트남전쟁시 다국적군으로서 한국군의 역할 및 향후 과제, 군사연구 vol.130[9]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10]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Department of the Army(1985), 저자(Larsen, Stanley). # 이 책은 미군의 공식 평가로 제임스 맥이나 다른 고문관의 평가까지 합쳐서 낸 종합 평가다.[11] (Stanley Robert Larsen and James Lawton Collins, Jr., 이주만 역, 『베트남 참 동맹군』,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군사참고 제24호,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8)[12] 당시 기자들은 전선에 나오는걸 극력 거부 하였으며, 찍은 사진들도 대부분 연출 사진이다.
출처 ==나무위키
첫댓글 잠깐의 시간이...
주민등록 2년 늦게 신고되었나요?
실제 춘추가 83세
1961년즈음 내가 사환으로 봉직하던 면사무소 상황....
목노주점에서 마을 이장들과 면직원들 근무시간에 막걸리 한잔 (마을 이장들으 ㄴ먼거리귀가해야 되니 시간촉박)
해롱거리면서 수십건 출생신고서 호적계에 제출하는데 ..
그게 제대로 될까요..?
승규야 이거 바르게 서사(書事) 해다오..ㅋㅋㅋ
나야 바르게 보고 이서해서 접수 직인 찍어 서류함에 넣지만....
그게 않되는 이장들...
말씀 않 드려도 알겠지요...?
일제 잔재 남아 있던 시절 이야기 였읍니다
추곡 생산 결과 소득세 부과 세무행정은 더 말할것도 없었지만 ...
재무계 세금 량곡 산출 공식 부터
밤새원 고지서 발행하던 16살 내 오른팔이 견딘게 지금생각해도 장하다...
언젠가 올린 주민증으로
올 해 팔순이시구나
그렇게 생각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