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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 그리운 가족들의 얼굴을 눈에 그리고 가슴에 많이 많이 담아 오셨습니까? 저는 이번에 아내와 함께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42년전에 사셨던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 자락에 위치한 당산마을이라는 곳인데 신라 충신 박제상의 유적지가 바로 근처에 있고, 언양봉계한우(고기맛이일품)로 더 유명해진 곳이랍니다. 지금 그곳에는 부모님의 형제분이나 친족은 한분도 안계시지만 장인장모님도 아내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하셔서 다녀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박명숙)가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살았던 곳이지요. 부모님이 사셨던 집터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텃밭으로 변해 진한 아쉬움과 적막감마져 들었고, 집으로 나있던 골목길과 골목길 옆에 있었다던 작은 연못은 매워져 아이들 키보다 더 큰 풀들만 무성했습니다. 동네 한 가운데를 흐르던 개울도 복개공사를 해서 아스팔트길로 변해있었고, 동네 어귀 방앗간이 있었던 자리는 아담한 2층 건물로 지어져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경로당 옆 호박넝쿨이 무성한 밭은 40여년전 교회사택이 있던 자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방앗간 맞은편에 있었던 당산교회(현,두동성산교회)는 근처 나지막한 언덕으로 옮겨져 현대식목조건물로 예쁘게 지어져 유일하게 당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 마치 지나버린 시간들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을 골목길에서 아내와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던 종옥이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옛 친정집을 사서 고향에 돌아와 산다는 분이였습니다. “혹시~너 며..명숙이? 나야 종옥이 이종옥...너랑 같은 학년이였다아이가~!” “아~그래...맞다. 이제 기억난다” 서로 얼싸안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내일처럼 기쁘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명숙이 너 학교 다닐 때 쪼매했는데...?!” 비오는 날 아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 불어난 개울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가까스로 풀포기를 잡고 나왔던 일... 친구들과 함께 해지는 줄 모르고 뛰어 놀았다던 방앗간자리... 이렇게 40여년전의 일들을 회상하노라 땅거미가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버님의 친구분도 딱 한분 생존해 계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요. 생존해 계시는 또 한분....팔순을 훌쩍 넘으신 두동성산교회 우영혜권사님은 교회의 산 역사였습니다. 부모님과 권사님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많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두동성산교회” 월성이(아버님의외가)씨 집성촌인 당산마을로 시집을 오신 ‘서윤자’라는 분이 계셨는데 22살에 홀로되어 50여가구가 살던 당산마을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과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0리나 떨어진 월평이라는 곳까지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서 교회에 나가셨다고 합니다. 토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교회갈 준비를 마치고 주일이면 일찍 집을 나섰던것입니다. 서윤자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마을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것이 계기가 되어 큰아들(이주대안수집사가 됨)이 주님을 영접하고 방앗간 맞은 편에있는 자신의 밭에 교회를 건축(1947년)했고, 그때부터 한사람 두사람 전도되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당산교회에 믿음의 1세대들이 세워져 간 것입니다. 제 아내의 할머니인 이분출어른께서도 그렇게 해서 주님을 영접하셨습니다. 교회에 못 가시도록 할아버지께서 성경과 찬송가를 불에 태우는 일은 다반사였고, 심지어 교회를 갔다오시면 죽인다고 도끼를 휘둘러대는 모진 어려움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켜내셨던것이지요. 평범한 농사꾼으로 사셨던 장인어른께서도 이 무렵 장로회신학대학(서울)에 진학 목회자의 길을 걷게되십니다. 당산교회에 초대 목화자로 부임하셨던‘조성련전도사님’은 미혼으로 조카 한 명(조미자)만을 데리고 월남하셔서 결혼도 하지 않고 목회에 열정적으로 헌신하셨는데 특히 청년 박성식(장인어른)에게 하나님나라의 꿈을 꾸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산교회 믿음의 1세대들의 자녀손들을 통해 축복하셨습니다. 50가구남짓한 마을에 서윤자할머니 자손들을 비롯해서 믿음의 1세대들의 자손들 중에 20명남짓한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셨습니다. 언더우드선교사님의 조선을 향한 기도문을 떠 올려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줄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중략.....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중략....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끝을 맺는 언더우드선교사님의 기도처럼 당산교회의 믿음의 1세대들께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임할 것임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22살 청상과부 서윤자어른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고즈넉한 작은 시골 마을을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주의 종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신/앙/의 고/향/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땅을 밟고 있는 나는 아쉬움에 선뜻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남몰래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부모님 생전에 반드시 다시 찾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축복의 땅에서 나를 돌아 볼 수 있게 하셔서 나의 욕망, 나의 게획, 내가 섬기는 교회의 꿈, 공동체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꿈과 비전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축복의 땅에서 참좋은교회를 통해 열어가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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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옆에서 보노라면 참~~좋은 사위인거 같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줄 아는.. 고생많으셨어요.^^
집사님의 글을 대할때 마다 많은 감동과 여운을 갖게 됩니다.
무엇보다 집사님께서 글을 참 잘 쓰시는것 같아요>>
상문동 67번지 땅에도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수 있도록 집사님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조집사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