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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로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아껴서 열심히 학문을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少 : 젊을 소(小/1)
年 : 해 년(干/3)
易 : 쉬울 이(日/4)
老 : 늙을 로(老/0)
學 : 배울 학(子/13)
難 : 어려울 난(隹/11)
成 : 이룰 성(戈/2)
출전 : 주자(朱子)의 주문공전집(朱文公文集)
송(宋)나라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 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詩)의 첫 구절이다.
少年易老 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一寸光陰 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未覺池塘 春草夢(미각지당 춘초몽)
階前梧葉 已秋聲(계전오엽 이추성)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학문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학문을 열심히 익히라는 권고의 시구로서 배움에도 때가 있으니 젊은 시절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시는 네 구(句)가 각각 독립된 명구(名句)로 되어 세월의 덧없음과 시간을 아껴 학문에 임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중국 남송시대(南宋時代)의 유학자 주희(朱熹: 朱子라고도 함)의 시(詩)이다.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앎(知)에 이를 수 있다는 성즉리설(性卽理說)를 확립하여 성리학을 집대성 하였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그런 학문을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역시 성리학자(性理學者) 다운 시로, 그 의미가 자못 철학적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이 시에서 그의 학문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촌음(寸陰)의 시간도 아끼지 말고 학문에 몰두해야 한다는, 그래서 사물의 이치를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 비로소 진정한 앎에 이르게 된다는 그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이론이 이 시에서도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푸른 산처럼 비치고 있다.
앞의 1·2구는 논리이고, 뒤의 3·4구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연의 이치를 갖다 붙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4구가 없다면 1·2구의 논리는 무덤덤한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그럴듯한 자연의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촌음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완벽성과 절묘함이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희(朱熹)는 학자이자 시인으로 우뚝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을 이 한 편의 시가 증명해 주고 있다.
짤막한 시 속에서 철학적 깊이(1·2구)와 서정적 아름다움(3·4구)을 마치 연역법적(演繹法的) 수사(修辭)로 엮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의 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과 함께 젊은이에게 면학을 권장하는 시로 너무도 유명하다.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원기 왕성한 젊은 시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하루에 아침은 두 번 있을 수 없다.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
인생의 좋은 시절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 시는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 가운데 한 수(首)이다. 12구 중 단장취의(斷章取義)한 마지막 4구이다.
12구로 구성된 전체로 볼 때에는 권학의 뜻과 어긋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끝부분 4구만을 잘라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우는 교훈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이 시는 늙기 전에 술을 실컷 마시자는 권주시(勸酒詩)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권학시(勸學詩)는 아니다. 목적이야 어디에 있던, 그 목적을 위하여 시간을 아껴 부지런히 노력하라는 뜻만은 좋은 말이다.
그리고 문장이 아주 평범하면서도 뜻이 절실하기 때문에 이 부분만을 떼어내어 학문을 권장하는 시로 인용하고 있는 데에 그 묘미가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 중에 지혜(智慧)와 지식(知識)이 있다. 지식은 복잡한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세상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유용한 도구라고 한다면, 지혜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혜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식과 지혜는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현명하게 삶을 살아가는 데 아주 유용한 생존 도구이자 인간의 지적활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모든 문화와 문명의 발전은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지식의 결과이며, 미래의 발전도 이 지식에 의해 더욱 촉진될 것이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지식은 더욱 늘어나며, 엄청난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고 있다.
오늘날 누구나 지식을 생산하며 소비한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식과 정보가 우리의 손끝에서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식이 늘어 나는데도 나의 정신은 더욱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텅빈 머리속에 하얀 백지장 처럼 느껴지는 그 느낌, 뭐 랄까 풍요속에 빈곤같은 허허로움이 진하게 배어나옴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적활동 때문이다. 본래 인간의 지적욕구는 성욕(性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만큼이나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런 지적욕구가 쇠퇴해져 갔다. 너무 많은 지식에 노출되어 있는 탓인지 지식 습득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너무 손쉽게 정보를 습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체화되지 않는 한 별로 쓸모가 없다. 인터넷이나 신문에 떠돌아 다니는 정보는 지식이 아니라 그냥 단순 정보일 뿐이어서 정신을 고양하거나 풍요롭게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요즘 사회는 복잡하고 급변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는 좋은 정보도 있지만,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나쁜 콘텐츠도 엄청나게 우리생활 속에 넘쳐 흐른다.
감각적인 비쥬얼이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온갖 유희(遊戱)들을 귀중한 정보인양 무차별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한다. 정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정보를 취사 선택하고 지혜롭게 활용할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런 안목을 기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체계적으로 공부하여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기르는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옛 선조들을 배움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꼽았다. 여기서 말하는 배움이란 제도권의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벌은 더더욱 아니다.
배움과 학벌은 별 상관이 없다. 단지 새로운 것을 배워 익혀 정신을 고양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는데 있다. 자신을 수양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았던가. 배움을 통한 자신의 수양이 결국은 자신과 가정 크게는 나라와 세상을 구하는 이치로 설파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결국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하는 원리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경쟁력은 개인의 창의적인 지적활동에 나온다. 창의성은 더이상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지식과 지혜가 어우려져 만들어내는 최고의 정신적인 산물이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면 저절로 세상을 이치와 도리를 체득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배움은 결국 삶을 변화시기키 위한 것이다. 평생 학습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며,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 자아경영 철학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닌듯 싶다.
자기 내부로부터 자기변화 경영의 주체로서의 배움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닌 인생이라는 긴 여정속에 꼭 보다듬고 가야할 인생의 생존과 번영의 비법이다.
이제는 학문을 권하는 선현들의 말씀에 귀기울이자. 거창한 학문이 아니더라도 좋다. 생활속에서 부진런히 익히고 배워 자신의 지적활동을 높여보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그 배움속에 고여있는 기쁨이 새록 새록 솓아 날 것이며 ,뻥뚫린 가슴과 머리가 충만함으로 가득차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학문에 힘쓰라고 권장하는 권학문이야 고금을 통하여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그 가운데서도 법운법사(法雲法師)가 일깨워 주는 무학십문(務學十門)은 깊은 감명을 주는 글이다.
무학십문(務學十門) / 법운법사(法雲法師)
불수학무이성(不修學 無以成)
학문은 갈고 닦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불절아무이학(不折我 無以學)
아만을 꺾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불택사무이법(不擇師 無以法)
스승을 잘 택하지 않으면 법을 얻을 수 없다.
부습송무이기(不習誦 無以記)
익히고 외우지 않으면 기억하기 어렵다.
불공서무이전(不工書 無以傳)
글을 쓸 줄 모르면, 후대에 전하지 못한다.
불학시무이언(不學詩 無以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비박람무이거(非博覽 無以據)
널리 알지 못하면 근거를 들 수 없다.
부력사 무이식(不歷事 無以識)
경험이 없으면 아는 것이 없다.
부구우 무이성(不求友 無以成)
좋은 벗이 없으면 이루지 못한다.
불관심 무이통(不觀心 無以通)
관하지 않으면 통할 수 없다.
이 글은 치문경훈(緇門警訓)에 있는 것으로, 후학들에게 두고두고 수행의 거울이 되며, 천추를 두고 모범이 될 것이기에 다시 한번 음미해 보고자 한다.
무학십문(務學十門)을 쓴 법운법사(法雲法師)는 중국 고소(姑蘇: 지금의 강소성)에 있는 경덕사(景德寺)에 주석(主席)하셨던 1,100년대의 스님이다. 종사(宗師)의 대를 이어 가르침을 펴고, 종풍(宗風)을 중흥 진작시킨 대덕(大德)이었다.
장주(長州)에서 태어났고 본래의 성은 재씨(才氏)였으며, 이름은 법운(法雲), 자는 천서(天瑞)라고 하고 자호(自號)를 무기자(無機子)라 하였다.
다섯살 때, 행공(行空)스님을 스승으로 정하여 출가, 다음 해에 법화경(法華經) 7권을 암송하였다고 전해지며, 열살에 수계(受戒)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8년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며 그 해석에 있어 뛰어난 논지를 천하에 드날리고, 불법을 사방에 두루 진흥시켰다. 그리하여 나라로부터 보륜대사(普潤大師)라는 호까지 하사 받을 정도의 거장이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법운법사의 무학십문은 학문을 연구하고 지견(知見)을 넓히는데 있어 요긴한 필수항목을 설명한 가르침이다. 그러면 무학십문의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여 보기로 하겠다.
1, 불수학 무이성(不修學 無以成)
학문은 갈고 닦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학문의 목적은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삶의 지침을 찾아 그것을 수용하고 실천하여 인격을 완성하는데 있다. 따라서,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익히고 힘써 배워야 한다.
배움은 삶의 기반을 다지는 일로써, 어떤 일보다도 우선한다. 먼저 배움을 바탕으로 반듯한 초석이 마련되어야 그 위에 뜻을 세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뜻을 펼쳐 가는 과정에서도 배우는 자세로 일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무슨 일에 종사하든지 관계없이 책을 가까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학문의 중요성과 그 시급함을 일깨우는 글로써 유명한 구절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역노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己秋聲(계전오엽기추성)
소년은 늙기 쉽고 배우기 어려워라.
짧은 시간인들 어찌 가벼이 여기랴
봄날 새벽의 꿈조각이 깨기도 전에
뜰 앞의 오동잎에 가을소리 들리나니.
얼마나 절실한 구절인가? 무상을 어쩌면 이다지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무상하지 않는 것이 없고 더욱이 시간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빠르다.
불경(佛經)에도 조존석망(朝存夕亡)이라는 말이 있으며,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에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고 하여 덧없는 세월속에 지체할 수 없는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본능에 따라 사는 동물과 다를 바 없게 된다. 학문을 통하여 고금의 진리에 통달하고, 우주의 이치에 효달함이 사람으로써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2, 불절아 무이학(不折我 無以學)
아만을 꺾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교만과 위선, 간교한 언변으로는 설사 대중 위에 군림했다 하여도 일시적일 뿐이다. 결국 자기가 가진 바 뚜렷한 덕행과 수행이 없다면 그것은 모래위의 누각처럼 한 입 바람에도 쓰러지는 공허함에 불과하다.
내가 덕이 있고 배움이 튼튼하다면 남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을 위치에 서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인격이 원만하고 학행이 구비된 사람에게는 아만이 없다. 아만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버려야 할 쓰레기다.
아만이 가득한 채 학문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삼가고, 깨끗한 마음으로 참된 인격을 도야함에 있어, 아만의 독소부터 제거하는 현명한 학문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3, 불택사 무이법(不擇師 無以法)
스승을 잘 택하지 않으면 법을 얻을 수 없다.
스승이란 말은 학문을 전수하는 기능적인 의미로만 새겨서는 안 된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인격적인 참된 가르침이 없다면 그러한 사람을 어찌 스승으로 받들 수 있겠는가. 참된 스승에 의해 후천적인 덕성이 눈을 뜨고 인격이 정결하게 갖춰지는 것이다.
자경문(自警文)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스승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松裏之葛 直聳千尋(송리지갈 직용천심)
芽中之木 未免三尺(아중지목 미면삼척)
솔 속에 있는 칡은 천 길을 솟아 뻗어나지만, 띠 속에 있는 나무는 석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곁에 소나무가 있으면 그 소나무를 따라 칡은 한없이 올라갈 수 있지만, 억새풀 옆에 돋은 칡은 억새풀의 작은 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학덕이 그 폭을 넓히게 되겠지만, 스승을 잘못 선택하면 자기 발전이 그 만큼 제한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스승은 학문을 이룸에 있어 훌륭한 안내자이며 등불이다. 마땅히 덕 높고 행해(行解)가 출중한 스승을 찾아 참된 구도의 길을 걸어야 된다.
4, 부습송 무이기(不習誦 無以記)
익히고 외우지 않으면 기억하기 어렵다.
학문을 익힘에 있어 배운 바를 끊임없이 복습하고 암송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옛말에도 서자서(書自書) 아자아(我自我)라 했다. 글은 글이요, 나는 나라는 뜻이다. 글을 외워 머리속에 담아 두지 않으면 글과 내가 한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각각 따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학문을 익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배운 바를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배운 바를 기억함은 그 자체에 집착하려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의력과 응용을 위한 것이다.
배움이 나와 일체가 되었을 때, 그 속에서 참된 학문의 의미가 되살아나고 끝없는 진리의 샘이 솟아날 수 있다.
공자(孔子)도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할만큼 학문을 함에 반복을 요체로 삼았다 한다. 위편삼절이라는 말은, 공자가 주역(周易)을 공부할 때 그 책을 가죽끈이 세 차례나 끊어질 정도였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들이 학문을 하는 자세에 있어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배운 바를 복습하고 암송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학문이 막히고 말 것이다. 서양 속담에도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지능으로 되는 것이라 했다.
첫째 익히고, 둘째 반복하여 복습하며, 셋째 그것을 자기체화하여 재창조하는 세 가지 요건을 모두 갖추는 것이 올바른 학문의 자세다.
5, 불공서 무이전(不工書 無以傳)
글을 쓸 줄 모르면, 후대에 전하지 못한다.
옛부터 신언서판(身諺書判)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유교(儒敎)에서 사용하는 말로써, 인격을 갖춤에 있어 구비되어야 할 네 가지 조건으로 위의 신언서판을 들었다.
⑴ 건강하고 튼튼한 신체다.
건전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고 하지 않던가. 한 가지 이론을 가지고도 그 해석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바라보는 이의 시각과 이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자의 건전한 정신이 필수요건이라 하겠다.
⑵, 말을 잘 해야 한다.
아무리 학식과 덕망이 출중하다 해도 말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말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은 간교하거나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갖고 있는 학덕을 적절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을 이른다.
정확한 지식과 높은 덕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말은 사회를 정화하고 후세들에게 바른 식견을 열어줄 수 있다. 학문을 스스로의 자족을 위해서 보다는 그 쓰임새가 인류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치가 발휘된다.
⑶, 글씨다.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 한다. 자기 의사 표현의 수단이며, 영원히 기록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할 수 있는 도구이다.
말은 언제나 일회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들을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이다. 말의 그러한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글이다. 훨씬 폭넓은 대상에게 잊혀져서는 안될 소중한 사상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 된다.
⑷, 판단이다.
사리를 분명히, 그리고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야 한다는 뜻이다. 정세분석에 어둡고, 상황 인식에 명철하지 못하면, 시의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학문의 체계를 어지럽히게 된다. 종교에 있어서도 그릇된 판단이 불러 일으킨 엄청난 피해상을 도처에서 보게 되지 않던가.
6, 불학시 무이언(不學詩 無以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말이란 품위가 있어야 하고, 적당한 형식을 갖추어야 전달받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식은 다양한 어휘력과 표현력을 부여한다.
시를 익히지 않으면 문화에 대해 무지하며, 이해력이 부족하게 되고 말에 법도가 없다. 따라서 깊은 이치가 담겨 있을 여지도 없을 뿐 아니라, 대화의 자료가 빈곤하게 된다.
7, 비박람 무이거(非博覽 無以據)
널리 알지 못하면 근거를 들 수 없다.
많이 읽고 많이 보아 그 지식의 폭을 넓히지 않으면 증거를 들 수 없다. 고증이 불가능한 지식은 반쪽 지식에 불과하다. 우리가 어떤 책을 대하던지 쉽사리 발견하는 것으로써 주석(註釋)을 들 수 있다.
책속에 인용 문구가 있을 경우, 그 인용한 글이 실려 있는 책의 저자와 이름, 심지어 몇 페이지에 적혀있다는 것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것이다.
독자가 믿고 확인할 수 있으며, 이로써 책의 저자를 신뢰하게 된다. 박람박식(博覽博識)하지 않으면 안다고 행세할 수 없으며 후생들이 어떤 질문을 하였을 때 그 출처를 명쾌하게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8, 부력사 무이식(不歷事 無以識)
경험이 없으면 아는 것이 없다.
공자(孔子)도 자신에 대하여, ‘내가 선천적으로 성인됨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많은 경험에 의해 성인의 인격을 얻은 것이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경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있는 지식이 있을까! 아무리 학문과 이론에 정통하여도 실질적인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칼집속에 들어 있는 칼일 뿐이다.
참선(參禪)을 논리에 의해 통하고, 그 자세와 방법을 학문으로 체계화하였다 하여 그로써 견성(見性)과 성불(成佛)이 이루어질리가 없다.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원력이 없이 궁극의 수행목적이 달성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경험이라는 과정에 의해 알찬 자기의 양식으로 화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역사가 과거의 역사 위해 서는 것처럼 경험은 보다 나은 오늘과 보다 앞서는 미래를 형성하는 틀이라 할 것이다.
9, 부구우 무이성(不求友 無以成)
좋은 벗이 없으면 이루지 못한다.
치문(緇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요, 인불학(人不學)이면, 부지도(不知道)니라.
옥(玉)을 본래 생긴 모양대로 둔다면,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보물이라 하여도 그 가치가 살지 못한다. 갈고 다듬어서 옥다운 모양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기물이 되듯이, 사람도 배움에 의해 부단히 갈고 닦여지지 않는다면 마땅히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갈고 다듬는데 있어 근본이 되는 것이 곧, 벗의 덕이라는 이야기다. 오종대은(五種大恩)가운데, 탁마상성붕우지은(琢磨相成朋友之恩)이라고도 하였다.
벗은 나의 미흡한 점을 깨우쳐 주는 거울이며, 나의 좋은 점을 신장시켜 주는 솔직한 스승이다. 서로의 장단(長短)을 보완하는 절장보단(折長補短)의 관계이며, 상호충고(相互忠告)의 관계요, 인격을 갈고 닦아 장점을 고양시켜 주는 연마장양(鍊磨長養)의 관계다.
벗에는 모름지기 이익되는 벗이 있으며, 해를 끼치는 벗이 있다. 이익되는 세 종류 벗이란, 정직한 벗, 성실한 벗, 견문이 넓은 벗이요, 해를 끼치는 세 종류 벗이란 편벽한 벗, 과단성이 없는 벗, 성실하지 않은 벗이다.
벗은 사귀기 힘들다. 안개가 뽀얀 새벽 산길을 걷다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옷이 젖어버리듯이, 벗을 사귀다 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그 벗과 동화되어 간다.
평생을 살아도 좋은 벗 하나 얻지 못하는 수가 허다하다. 마땅히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훌륭한 벗을 가까이 하며, 서로를 일깨워주고 격려하고 보완해주는 선인(善因)을 쌓을 일이다.
10, 불관심 무이통(不觀心 無以通)
마음을 관하지 않으면 통할 수 없다.
여기서 관(觀)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어렵다.
육안이란 지극히 편협한 것이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먼거리의 사물도 분별하지 못하며, 겨우 가시상에 국한하여 식별하는 매우 한정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도 정확한 것인지 부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육안이란 일종의 신기루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그 사람의 업보에 의해 다르다. 사람마다 사물을 대하여 그 사물로부터 받아들이는 인식작용이 누구나 동일하지는 않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삼독심(三毒心 탐진치) 즉 불교에서 말하는 탐(탐욕), 진(화냄), 치(어리석음)의 장벽에 막혀 진리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없으며, 고금의 사리에 형통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좁은 마음, 산란한 마음을 잠재워, 항상 마음을 조용히 반성하고 더러운 때를 벗기며 돌이켜 마음을 바로 세움에 부족함이 없어야 될 것이다.
[참고 1] 주자십회(朱子十悔)
①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해도 이미 늦으니,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풍수지탄(風樹之歎)과 같다.
② 불친가족소후회(不親家族疏後悔)
가족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 뉘우친다.
가까이 있을 때 가족에게 잘해야지, 멀어진 뒤에는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③ 소불근학노후회(少不勤學老後悔)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젊음은 오래 가지 않고 배우기는 어려우니, 젊을 때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는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과 같은 말이다.
④ 안불사난패후회(安不思難敗後悔)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뉘우친다.
편안할 때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거안사위(居安思危)와 같은 뜻이다.
⑤ 부불검용빈후회(富不儉用貧後悔)
재산이 풍족할 때 아껴쓰지 않으면 가난해진 뒤에 뉘우친다.
쓰기는 쉽고 모으기는 어려우니, 근검 절약해야 한다는 말이다.
⑥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뉘우친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다는 뜻이다.
⑦ 불치원장도후회(不治垣墻盜後悔)
담장을 제대로 고치지 않으면 도둑맞은 뒤에 뉘우친다.
도둑을 맞고 난 뒤에는 고쳐도 소용없다는 속담 ‘도둑맞고 사립 고친다’와 같은 말이다.
⑧ 색불근신병후회(色不謹愼病後悔)
색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뒤에 뉘우친다.
여색을 밝히다 건강을 잃으면 회복할 수 없으니 뉘우쳐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⑨ 취중망언성후회(醉中妄言醒後悔)
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하고 술 깬 뒤에 뉘우친다.
지나치게 술을 마시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니 항상 조심하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⑩ 부접빈객거후회(不接賓客去後悔)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
손님이 왔을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대접하지 않다가, 가고 난 뒤에 후회해 보았자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
위의 열 가지 일에는 항상 적당한 때가 있고, 그 시기를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음을 강조한 말들이다. 오늘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한번쯤 살펴보았으면 한다.
[참고 2] 권학문(勸學文)
▣ 진종황제권학문(眞倧皇帝勸學文) : 조항(趙恆)
富家不用買良田(부가불용매양전)
書中自有千種祿(서중자유천종녹)
부유해지기 위해 좋은 밭을 사지 말라, 책 속에 저절로 천종의 봉록이 있다.
安居不用架高堂(안거불용가고당)
書中自有黃金屋(서중자유황금옥)
편안히 살고자 큰 집을 짓지 마라, 책 속에 저절로 화려한 집이 있다.
出門莫恨無人隨(출문막한무인수)
書中車馬多如簇(서중거마다여족)
문을 나설 때 따르는 사람 없음을 한탄 마라, 책 속에 거마가 떨기처럼 많다.
取妻莫恨無良媒(취처막한무량매)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장가들 때 좋은 중매 없음을 한탄마라, 책 속에 얼굴이 옥 같은 미녀가 있다.
男兒欲逐平生志(남아욕축평생지)
六經勤向窓前讀(육경근향창전독)
사나이 평생의 뜻을 이루려면, 육경을 부지런히 창을 향해 읽어라.
▣ 인종황제권학문(仁宗皇帝勸學文) : 조정(趙禎)
朕觀無學人(짐관무학인)
無物堪比倫(무물감비륜)
짐이 배움 없는 사람을 보건대, 이와 같은 무리에 비교할 것이 없느니라.
若比於草木(약비어초목)
草有靈芝木有椿(초유영지목유춘)
풀과 나무에 견주어 보면, 풀에는 영지가 있고 나무에는 참죽나무가 있다.
若比於禽獸(약비어금수)
禽有鸞鳳獸有麟(금유란봉수유린)
새와 짐승에 견주어 보면, 새에는 난과 봉황이 있고 짐승에는 기린이 있다.
若比於糞土(약비어분토)
糞滋五穀土養民(분자오곡토양민)
똥과 흙에 견주어 보면, 똥은 오곡을 살찌우고 흙은 백성을 기른다.
世間無限物(세간무한물)
無比無學人(무비무학인)
세상의 수많은 사물 중에, 배움 없는 사람과 비교할 것은 없느니라.
▣ 사마온공권학문司馬溫公勸學文) : 사마광(司馬光)
養子不敎父之過(양자불교부지과)
訓導不嚴師之惰(훈도불엄사지타)
자식을 기르면서 가르치지 않음은 부모의 잘못이요, 훈도를 엄하게 하지 않음은 스승의 게으름이다.
父敎師嚴兩無外(부교사엄양무외)
學問無成子之罪(학문무성자지죄)
아버지는 가르치고 스승이 엄하여 모두 벗어남이 없는데, 학문을 이루지 못함은 자식의 죄니라.
暖衣飽食居人倫(난의포식거인륜)
視我笑談如土塊(시아소담여토괴)
의식이 풍족하고 인륜의 질서 속에 살면서도, 나 같은 이를 보고 비웃는다면 흙덩이 같은 인간이다
攀高不及下品流(반고불급하품유)
稍遇賢才無與對(초우현재무여대)
높이 오르다 오르지 못함은 낮은 품성의 사람들이니, 어진 인재를 만나면 상대할 수가 없다.
勉後生力求誨(면후생력구회)
投明師莫自昧(투명사막자매)
후생들이여 가르침을 구하는데 힘써라, 훌륭한 스승에게 배움을 맡겨 스스로 우매해지지 마라
一朝雲路果然登(일조운로과연등)
姓名亞等呼先輩(성명아등호선배)
하루아침에 출세의 길에 오르기만 하면, 성명은 후배인데 선배로 불려지리라.
室中若未結親姻(실중약미결친인)
自有佳人求配匹(자유가인구배필)
집안에서 만약 혼인을 하지 못했다면, 저절로 미인이 배필을 구할 것이다.
勉旃汝等各早脩(면전여등각조수)
莫待老來徒自悔(막대노내도자회)
그대들은 각자 일찍 수양하기에 힘써, 늙어서 공연히 후회하게 됨을 기다리지 말라
▣ 유둔전권학문(柳屯田勸學文) : 유영(柳永)
父母養其子而不敎不愛其子也
(부모양기자이불교불애기자야)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雖敎而不嚴是亦不愛其子也
(수교이불엄시역불애기자야)
비록 가르쳐도 엄하지 않으면, 이것 또한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父母敎而不學是子不愛其身也
(부모교이불학시자불애기신야)
부모가 가르치는 데도 자식이 배우지 않는다면, 이는 곳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雖學而不勤是亦不愛其身也
(수학이불근시역불애기신야)
비록 배운다고 하더라도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는 또 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是故養子必敎敎則必嚴嚴則必勤勤則必成
(시고양자필교교즉필엄엄즉필근근즉필성)
그러므로 자식을 기르면 반드시 가르쳐야 하고, 가르치면 반드시 엄해야 하며, 엄하면 반드시 부지런해지고, 부지런하면 반드시 이루리라.
爲公卿不學則公卿之子爲庶人
(위공경불학즉공경지자위서인)
공경으로 배우지 아니하면, 공경의 자식이라도 서민이 되니라.
▣ 왕형공권학문(王荊公勸學文) : 왕안석(王安石)
讀書不破費(독서불파비)
讀書萬倍利(독서만배이)
독서에는 비용이 들지 않고, 독서는 만 배의 이익이다.
書顯官人才(서현관인재)
書添君子智(서첨군자지)
책은 관리의 재주를 드러내고, 책은 군자의 지혜를 더해준다.
有卽起書樓(유즉기서루)
無卽致書櫃(무즉치서궤)
돈이 생기면 곧 서재를 짓고, 돈이 없으면 곧 책궤를 갖춰라.
窓前看古書(창전간고서)
燈下尋書意(등하심서의)
창 앞에서 고서를 보고, 등 아래에서 글의 뜻을 찾아라.
貧者因書富(빈자인서부)
富者因書貴(부자인서귀)
가난한 사람은 글을 통해서 부유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글을 통해서 귀하게 될 것이다.
愚者得書賢(우자득서현)
賢者因書利(현자인서리)
어리석은 사람은 글을 통해서 어질게 되고, 어진 사람은 글을 통해서 이롭게 될 것이다.
只見讀書榮(지견독서영)
不見讀書墜(불견독서추)
다만 글을 읽어서 영화를 누리는 것을 보았어도, 글을 읽어서 추락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賣金賣買讀(매금매매독)
讀書賣金易(독서매금이)
금을 팔아 책을 사서 읽어라, 책을 읽어 금을 사기는 쉽다.
好書眞難致(호서진난치)
奉勸讀書人(봉권독서인)
好書在心記(호서재심기)
좋은 책은 정말 얻기 어려운 것이니, 글 읽는 사람에게 받들어 권하건대, 좋은 글은 마음에 기억하도록 하라.
▣ 백낙천권학문(白樂天勸學文) : 백거이(白居易)
有田不耕倉廩虛(유전불경창름허)
有書不敎子孫愚(유서불교자손우)
밭이 있어도 갈지 않으면 곳간이 비고, 책이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자손이 어리석어진다
倉廩虛兮歲月乏(창름허혜세월핍)
子孫愚兮禮義疎(자손우혜예의소)
곳간이 비면 세월나기 궁핍하고, 자손이 어리석으면 예의가 소홀해진다
若惟不耕與不敎(약유불경여불교)
是乃父兄之過歟(시내부형지과여)
만약 경작하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면, 이는 곧 아비와 형의 허물이로다.
▣ 주문공권학문(朱文公勸學文) : 주희(朱憙)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물위금일불학이유내일)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물위금년불학이유내년)
오늘에 배우지 않고 내일 있다 이르지 말고,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 있다 이르지 마라.
日月逝矣不我延(일월서의불아연)
嗚呼老矣是誰之愆(오호노의시수지건)
세월은 흘러가고 시간은 나와 함께 늙지 않으니, 슬프다, 늙어서 후회한들 이것이 뉘 허물이겠는가.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일초의 시간인들 가벼이 여기지 말아라.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 깨기 전에, 뜰 앞 오동잎이 이미 가을 소리를 전하도다.
▣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 한유(韓愈)
木之就規矩(목지취규구)
在梓匠輪輿(재재장륜여)
나무가 둥글고 모나게 깎임은, 목수에게 달려 있고,
人之能爲人(인지능위인)
由腹有詩書(유복유시서)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뱃속에 있는 시와 글들에 달린 것이네.
詩書勤乃有(시서근내유)
不勤腹空虛(불근복공허)
시와 글은 부지런하면 곧 갖게 되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속이 비게 된다.
欲知學之力(욕지학지력)
賢愚同一初(현우동일초)
배움의 힘을 알고 싶으면,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처음은 같았음을 알면 된다네
由其不能學(유기불능학)
所入遂異閭(소입수이려)
그가 배우지 못해, 들어가는 문이 마침내는 달라지는 것이라네.
兩家各生子(양가각생자)
提孩巧相如(제해교상여)
두 집에서 각기 아들을 낳았어도, 두세 살 어린 아이는 재주가 서로 비슷하고
少長取嬉戱(소장취희희)
不殊同隊魚(불수동대어)
조금 성장하여 모여 놀 때도, 같은 무리의 고기와 다르지 않다네.
年至十二三(연지십이삼)
頭角秒相疎(두각초상소)
나이가 열두세 살이 되면, 머리 골격이 약간 달라진다네.
二十漸乖張(이십점괴장)
淸溝映迂渠(청구영우거)
스무 살이 되면 점점 더 벌어지니, 맑은 냇물이 도량 물에 비치는 듯
三十骨觡成(삼십골격성)
乃一龍一豬(내일룡일저)
서른 살에 골격이 굵게 형성되면, 하나는 용, 하나는 돼지처럼 된다네.
飛黃騰踏去(비황등답거)
不能顧蟾蜍(불능고섬서)
학문을 이룬 비황은 뛰어 달리는데, 학문을 못 이룬 두꺼비는 돌아 볼 수조차 없다네
一爲馬前卒(일위마전졸)
鞭背生蟲蛆(편배생충저)
한쪽은 말 앞의 졸개가 되어, 채찍 맞은 등에는 구더기가 생기고
一爲公與相(일위공여상)
潭潭府中居(담담부중거)
한쪽은 삼공이나 재상이 되어서, 고래 등 같은 집에 산다네.
金壁雖重寶(금벽수중보)
費用難貯儲(비용난저저)
금이나 구슬이 비록 귀중한 보배이나, 쓰이기 때문에 간직하기 어렵고
學問藏之身(학문장지신)
身在則有餘(신재즉유여)
학문은 몽에 간직하여, 몸에만 있으면 사용하고도 남음이 있다네.
君子與小人(군자여소인)
不繫父母且(불계부모차)
군자와 소인은, 부모에게 매인 것이 아니라네.
不見公與相(불견공여상)
起身自犁鋤(기신자리서)
보지 못했는가 삼공과 재상이, 농민으로 부터 나온 것을.
不見三公後(불견삼공후)
寒饑出無驢(한기출무려)
보지 못했는가 삼공의 후손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나귀도 없이 다니는 것을.
文章豈不貴(문장기불귀)
經訓乃菑畬(경훈내치여)
문장이 어찌 귀하지 않은가, 경서의 가르침은 곧 마음 속의 땅 같은 것.
潢潦無根源(황료무근원)
朝滿夕已除(조만석이제)
고인 빗물은 근원이 없나니, 아침에 찼다가 저녁엔 이미 없어진다네.
人不通古今(인불통고금)
牛馬而襟裾(우마이금거)
사람이 고금의 일에 통하지 않으면, 소나 말에 옷을 입혀 놓은 것.
行身陷不義(행신함불의)
況望多名譽(황망다명예)
자신의 행동이 불의함에 빠지고도, 하물며 많은 명예를 바라는가.
時秋積雨霽(시추적우제)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철은 가을이라 장마 그치고, 산뜻한 기운 들판 마을에 드니
燈火秒可親(등화초가친)
簡編可卷舒(간편가권서)
등불 점점 가까이 할만하고, 책 펼칠 만하게 됐으니
豈不旦夕念(기불단석염)
爲爾惜居諸(위이석거제)
어찌 아침저녁으로 생각하지 않으리, 그대들 위해 세월을 아껴야하리.
恩義有相奪(은의유상탈)
作詩勸躊躇(작시권주저)
사랑과 의리는 서로 어긋남이 있는 것, 시를 지어 망설이는 자들을 권면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