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Viernes VII de Pascua
Habiéndose aparecido Jesús a sus discípulos y comiendo con ellos, dice Jesús a Simón Pedro: «Simón de Juan, ¿me amas más que éstos?» Le dice él: «Sí, Señor, tú sabes que te quiero». Le dice Jesús: «Apacienta mis corderos». Vuelve a decirle por segunda vez: «Simón de Juan, ¿me amas?». Le dice él: «Sí, Señor, tú sabes que te quiero». Le dice Jesús: «Apacienta mis ovejas». Le dice por tercera vez: «Simón de Juan, ¿me quieres?». Se entristeció Pedro de que le preguntase por tercera vez: «¿Me quieres?» y le dijo: «Señor, tú lo sabes todo; tú sabes que te quiero». Le dice Jesús: «Apacienta mis ovejas. En verdad, en verdad te digo: cuando eras joven, tú mismo te ceñías, e ibas a donde querías; pero cuando llegues a viejo, extenderás tus manos y otro te ceñirá y te llevará a donde tú no quieras».
«‘Señor, tú lo sabes todo; tú sabes que te quiero’. Le dice Jesús: ‘Apacienta mis ovejas’»
Rev. D. Joaquim MONRÓS i Guitart
(Tarragona, España)
Hoy hemos de agradecer a san Juan que nos deje constancia de la íntima conversación entre Jesús y Pedro: «‘Simón de Juan, ¿me amas más que éstos?’ Le dice él: ‘Sí, Señor, tú sabes que te quiero’. Le dice Jesús: ‘Apacienta mis corderos’» (Jn 21,15). —Desde los más pequeños, recién nacidos a la Vida de la Gracia... has de tener cuidado, como si fueras Yo mismo... Cuando por segunda vez... «le dice Jesús: ‘Apacienta mis ovejas’», Él le está diciendo a Simón Pedro: —A todos los que me sigan, tú los has de presidir en mi Amor, debes procurar que tengan la caridad ordenada. Así, todos conocerán por ti que me siguen a Mí; que mi voluntad es que pases por delante siempre, administrando los méritos que —para cada uno— Yo he ganado.
«Se entristeció Pedro de que le preguntase por tercera vez: ‘¿Me quieres?’ y le dijo: ‘Señor, tú lo sabes todo; tú sabes que te quiero’» (Jn 21,17). Le hace rectificar su triple negación y, solamente recordarla, le entristece. —Te amo totalmente, aunque te he negado..., ya sabes cómo he llorado mi traición, ya sabes cómo he encontrado consuelo solamente estando con tu Madre y con los hermanos.
Encontramos consuelo al recordar que el Señor estableció el poder de borrar el pecado que separa, mucho o poco, de su Amor y del amor a los hermanos. —Encuentro consuelo al admitir la verdad de mi alejamiento respecto de Ti y al sentir de tus labios sacerdotales el «Yo te absuelvo» “a modo de juicio”.
Encontramos consuelo en este poder de las llaves que Jesucristo otorga a todos sus sacerdotes-ministros, para volver a abrir las puertas de su amistad. —Señor, veo que un desamor se arregla con un acto de amor inmenso. Todo ello, nos conduce a valorar la joya inmensa del sacramento del perdón para confesar nuestros pecados, que realmente son “des-amor”.
+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랑’을 세 번씩이나 다짐받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님 앞에서 슬퍼하며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과 이에 대해 슬퍼하는 베드로의 모습.
이것을 제대로 묵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 예수님의 죽음 이전의 베드로의 발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6장 33-34절에서 이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실제로 이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을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잘못을 저질렀던 과거를, 베드로는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거부하고 모른척 한뒤 베드로는 슬피 웁니다.
즉,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이 상처로 남아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 베드로에게 정확히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로써 그의 ‘세 번의 배반’은 이제 ‘세 번의 사랑’으로 교체되고,
그의 슬픔과 상처는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과 우리 인간의 시선의 차이는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묻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싶어합니다.
“너 왜 그랬어?”,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거지?” 라고 묻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사회 안에는 시말서가 있고, 학교에서는 반성문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고 따지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으십니다.
과거는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잘못이 스스로 회복되도록 기회를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로 인해 베드로의 태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인하기 전에는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베드로의 어투가 이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라는 겸손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님의 사랑과 이해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당부가 이 사랑과 결합됨으로써 베드로는 새로운 사명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가 느낀 이 모든 예수님의 메시지를 재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했던 것을 새삼 이야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자책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목숨을 바쳐 아끼던 내 양떼를 잘 돌보아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베푼 이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거라. 나를, 따라라”.
사실 베드로가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과거의 사랑은,
자기만족과 개인의 구원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의 질문을 통해 이 자기 중심적 사랑은 예수님 중심적 사랑으로 교체되고,
베드로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이 사랑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은 모든 잘못을 초월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지난 과거를 용서해주시는 사랑,
그리고 그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랑을 실천해야하는 새로운 사명을 안겨줍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얼마나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는 사랑입니까, 나 자신을 중심으로 두는 사랑입니까?
이러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의 권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예수님과 베드로>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교훈을 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에게는 몹시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아픈 일이어서
어쩌면 그는 그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복음서 저자들이 그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의 회개와 솔직함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0-62).”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셨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시선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은, 또 베드로 사도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장면은 복음서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비록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한 일이지만,
또 예수님께서 이미 예고하신 대로 된 일이지만,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예수님께 큰 상처를 드렸음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의 통회를 나타내는데,
여기서 ‘밖으로 나가’ 라는 말은,
겉으로는 자기를 추궁하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나간 것을 뜻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갔음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눈빛으로 베드로 사도를 바라보셨을까?
분노나 미움의 눈빛은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고, 안타까움, 연민, 사랑, 위로,
당신의 제자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 그런 슬픈 눈빛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눈빛을 기억할 때마다 몹시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얼굴에 깊은 고랑이 생길 정도로 평생 날마다 울면서 통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사도들 중에는, 또는 신자들 중에는 베드로 사도가 한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 여전히 유효한가?, 그가 자격을 잃은 것은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이나 물으신 일은,
베드로 사도의 잘못을 추궁하려고 그러신 것은 아니고,
당신이 이미 그를 용서하셨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교회 공동체에 확인시켜 주심으로써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한 일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음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의 소명을 다시 깨우쳐 주기 위한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은, “나는 너를 이미 용서했고,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당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시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회개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고,
죄를 지음으로써 손상된 사랑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다시 처음처럼 사랑하는 단계까지 가야 회개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고 계시지만,
그 사랑이 당신만을 향하기를 바라시지 않고,
당신의 양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실행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은
잘못한 일에 대한 보속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하면,
‘이웃 사랑 실천’은 ‘회개와 보속을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회개한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이 말은, “사랑은 신앙생활의 완성이고, 회개의 완성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를 덮어 준다.’는 말은, 죄를 감추어 준다는 뜻이 아니고,
죄를 씻어 준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회개하고, 또 진정한 ‘사랑으로’ 보속하면,
누구든지 용서받고, 죄에서 벗어나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고, 사랑 없는 보속은 보속이 아닙니다.)
또 베드로 사도는 편지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은
악의적인 배반은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일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를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나는 이미 맛보았습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사랑을 세 번이나 확인하신 일은,
실제로는 당신의 ‘큰 사랑’을 다시 확인해 주심으로써
그의 ‘다친 영혼’을 치료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상처를 드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성사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무사유(無思惟)는 위신적 신앙으로 인도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제1,2차세계대전과 세계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악과 폭력을 사상적으로 분석하고 통렬히 비판한 인물이다.
그는 1960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히틀러 치하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유다인 학살을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사람이다.
당시 법정에 선 아이히만한테서 사람들이 보려 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는 그저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충격적인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의 문제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의 사람이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무사유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평범한 악'이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슬펐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슬프게 했을까?
예수님이 당신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의심해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예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30)라고 고백했지만
곧이어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했을 때 그분을 꼭 붙들며 반박했기 때문에
사탄이라고까지 비난받은 적이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삶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던 경험이 있기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을 향한 사랑이 구체화되도록 세 번의 말미를 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삶 안에서 얼마나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
생각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사유의 신앙, 무사유의 사랑은 위선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서울대교구 김민수 신부
너 나를 사랑하느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주연의 짐 카비젤의 간증이 SNS나 유투브를 통해 많이 시청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삶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예수님의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화를 찍으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수님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그대로 맛보았습니다.
며칠 동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살이 많이 빠졌고,
채찍을 맞을 때는 실제로 30센티 정도가 찢어졌으며,
십자가 위에서는 심장이 멎고, 번개까지 맞아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자신이 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탈혼이든 죽음이었든 간에 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처럼 죽음에 다다랐고,
함께 있었던 많은 이들이 그의 머리에서 빛이 솟아나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가 채찍을 맞을 때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해야 했던 예수님을 떠올리며
죄를 뉘우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에서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고통이 있었는데,
의사는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라 생각하여 쉬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으로라도 영혼을 더 구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직접 느껴봄으로써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당신을 사랑하거든 당신 양떼를 잘 보살피라고 하십니다.
양떼는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교회는 그 양떼를 맡아서 돌보는 일꾼들입니다.
그 일꾼들이 주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양떼를 잘 돌볼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주인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대한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분이 맡겨주신 것도 소중하기에
열심한 마음으로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떼가 항상 말을 잘 듣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힘든 일을 해나가야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제게도 유학생활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유학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일을 시키는 하느님도 교구도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이 긴 유학생활을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언어공부, 학과공부 등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저의 결정은 ‘매일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한 무엇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조금 더 가볍게 질 수 있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이태리어 버전 10권을 구입하였습니다.
저를 신학교에 오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태리어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어들이 어려워서 한 페이지를 읽는데 일주일은 족히 걸린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너무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을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됨에 따라,
그분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의 무게가 더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니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해 무언가를 해 드린다고 생각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됨에 따라
그분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이 훨씬 더 큰 사랑임을 깨달을 때는
그분을 위해 하는 나의 모든 행위들은 아주 작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들을 맡기려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할 것을 먼저 요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어려움에도 힘들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힘이 든 것은 그것을 맡겨주신 그분을 그만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차피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면,
그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나머지는 덤으로 얻고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