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69:29~36)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실 것이요,
유다의 성들을 다시 지으시리라. 그러고 나면
백성들이 거기 정착해 그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35절)
오늘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지쳤고 슬픔에 가득찼음을 먼저 호소한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한 감사의 찬송을 드리겠다고 결단한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의 말을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의지한다.
그런 확신과 의지는 가난한 공동체를 떠올리게 하고
자신의 처지와 같은 사람에게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이윽고 백성들에게 돌아갈 축복을 믿으며 간구한다.
자신의 고난이 원망과 증오, 복수로 이어지지 않고
공동체와 나라 전체에게 부여되는 축복으로 확장되는 믿음이
참 인상적이다.
내가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타자도 나와 같이 소중한 존재인 것을 실제로 인식하고
삶에 투영하는 것.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우리들의 과업이다.
그것이 복음적 사랑의 거의 전부이다.
나처럼 귀한 다른 모든 영혼들.
죄성이 있어 존재들로부터 나오는 많은 지저분하고
다루기 힘든 사안들이 우리를 방해하지만
존재와 사안을 구분해서 다룰 수 있는 인식과 성품이
우리 안에 성숙하게 자리 잡기를 기도해야겠다.
오늘 묵상 에세이에서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을
언급한다.
어제 강의 준비를 하면서
코칭의 원리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내 지식을 그대로 전수하는 것은 낮은 수준의 이끔이다.
각자의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잠재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도록
‘고무시키는 작용’이 작용이 중요하다.
구속, 강제하거나 인격을 손상시키지 않고
다만 열심히 자신에게 심겨진 능력을 발굴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뾰로통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의문 부호를 가지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이미 주신 판단과 분별력을
동원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에 한 발짝 접근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명언>
‘주님을 찾고 부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옛사람을 제거하고
새사람을 창조하는 역사를 이루신다.’ -프랑수아 페늘롱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젯밤 편안하고 충분한 쉼을 주셨습니다.
지금 날이 맑고 밝습니다.
며칠 전 밤 하늘에 놓여 있는 반달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절묘할까?
하나님, 당신은 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합니다. 눈물겹도록 감사합니다.
때때로 형편없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세상에서의 삶을 살지만
그래도 기다리고, 또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면목이 없고 송구스럽습니다.
제게 변화가 있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의 조건들, 물리적 조건들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감사하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