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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九老) 아리랑
이 문 열
자꾸 공순이, 공순이, 캐 쌓지 말어예. 어디 뭐 대학생이 씨가 따로 있어예? 우리도 눈코 있고 귀 있고 입 있어예. 뭐시 굽었고 뭐시 바른동 분간할 줄 알고, 어디가 썩는지 어디가 뭉개지는지 냄새 맡고 소리 들어예. 그런데 있는 입 가지고 와 말 몬 하겠어예? 그런데 와 우리는 데모 몬 합니꺼? 데모는 뭐 대학생 전매 특허품입니꺼? 참말로 데모할 쪽은 우리라예. 대학생 가아들(그 아이들)이사 팔자 좋아 나라 생각하고 민족 앞세워 거창하게 나서지만, 답답할 거사 뭐 있겠어예? 다사(모두야) 안 글캤지만, 가아들이 뭐 먹는 거 입는 거 없어 하는 거는 아일 낍니더. 글치만 우리는 달라예. 바로 먹을 것, 입을 것, 살 집 가지고 이러는 깁니더. 맨날 테레비 보믄 선진국 선진국 하데예. 우리가 맨드는 냉장고, 자동차 모두 선진국 수준이라면서예? 그런데 와 우리 봉급은 그 사람들 반에 반에 반도 안 됩니꺼? 와 우리는 맨날 쌔 빠지게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지내라 캅니꺼? 와 어떤 사람들 한 끼 값으로 우리는 한 달을 묵어야 되고 또 그 사람들 블라우스 하나 값으로 우리는 몇 년 입을 외출복을 사야 됩니꺼? 뭣 때문에 그 사람들 호텔 하루 방값으로 한 달 빌릴 수 있는 방도 우리는 두셋이서 같이 얻어 자취해야 됩니꺼? 우리가 해 달라 칸 거 그리 큰 거 아이라예. 그런 우리 형편 쪼께만 낫게 해 달라꼬 사정사정하다 안 되이 이러는 거라예. 그런데 와 우리는 데모하믄 안 됩니꺼? 우째서 데모는 대학생만 해야 된단 말입니꺼? 뭐, 지가 뭔 대학생이라꼬 ― 예? 그카는 거 아닙니더. 공순이 씨가 따로 있는 게 아이라꼬예. 그라고…… 공순이, 공순이 캐 쌓지마는 우리가 뭐 공순이 되고 싶어 된 줄 압니꺼? 우리도 대학생 좋은 거 알아예. 우리도 똑똑하고 돈 많은 부모 만났으믄 공순이 하라 캐도 안 해예. 못 배우고 가난한 농사꾼을 부모로 만나 할 수 없이 공장으로 끌려 나온 거라예.
뭐라고예? 농촌도 살 만하다꼬예? 가만히 처박혀 있으믄 등 따숩고 배부릴 낀데 백지로(백지에) 헛바람 나 도시로 나온 거라꼬예? 지발 그런 베락 맞을 소리 하지 마이소. 테레비에 전원일긴가 뭔가, 이리 싸바르고 저리 처덮어 낭창낭창한 얘기 한 주일에 한 번 나와 쌓고, 무슨 증산왕에 무슨 고소득 마을 나와 싸이 그게 바로 농촌 전분 줄 압니꺼? 언덕에서 풀피리나 불고 해 지는 들녘에 소 멕이는 아아들 딩구는 그런 달작지근한 데가 농촌인 줄 압니꺼? 과
수원 전지나 슬슬 하다가 젖소 젖통이나 주무르믄 되는, 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만 모인 데가 농촌인 줄 압니꺼? 하기사 자가용 타고 스윽 지나가믄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믄 그래 비기도(보이기도) 하겠지예. 고속도로 타고 내리가다 보믄 비는 마을마다 참말로 그림 같잖습니꺼? 글치만 아이라예. 지 품 옇고(넣고) 갖은 머리 다 짜내 사시사철 헐떡거리도 품값은 내삘어 놓고 땅값 이자도 안 나오는 데가 농촌이라예. 말이사 천하지대본이라 캐 쌓지마는 그거 하다 어예 잘못돼도 산업재해 보상은커녕 의료보험도 안 되는 기 농사라예. 도회지는 구멍가게를 하믄서도 힘 안 들이고 시키는 고등학교, 거기서는 둘만 시켜도 집안 기둥뿌리가 휘청하는 기 농촌이라예. 사대육신 멀쩡하고 맘씨 고운 우리 오빠 서른이 돼도 장가 못 가는 데가 농촌이고, 여기서는 니야까 장사도 안 피우는 청자가 우리 아부지한테는 나들이 담배가 되는 데가 농촌이라예. 소 값 얘기는 하지 마입시더. 밭에서 얼어 빠지는 무우, 배추 얘기도 하지 말고, 일할 소는 자빠져 누웠는데 기름만 퍼마시고 댕기는 경운기, 트랙타 얘기도 하지 마입시더. 농협이 어쨌고 면 직원이 어쨌다는 얘기도 안 할께예. 계통 출하, 중간상 뭐 그런 얘기도 빼입시더. 글치만 암만 싸바르고 처덮어도 인자는 농촌이 등 따습고 배부린 데는 아이라예. 거 다 우리맨쿠로 지 땅은 손바닥만이도 안 되고 남의 땅 빌려 농사 지야 되믄 내 같은 둘째 딸, 셋째 딸은 집에 있으라 캐도 몬 있어예. 차돌 같은 막냉이 고등학교도 몬 가게 되는 거 보고 어예 엎드려 있겠어예? 이제 밥이사 굶는 사람 없다 카지마는 밥도 밥 나름 아이겠습니꺼? 내 말 몬 믿겠거든 지금이라도 펜대 놓고 한번 가 보이소. 그런데 뭐 헛바람이 나서 왔다꼬예? 앵두나무 우물가도 옛날 얘깁니더. 말하기 쉽다고 아무거나 막 말하는 거 아이라예.
김현식이예? 예, 잘 압니더. 그런데 현식이 오빠는 와예? 엄마야, 그라믄 지금까지 조서 받은 게 공장에서 데모 주동한 거 때무이 아인가배예? 그 오빠는 와 찾아예. 그 오빠가 뭔 일 냈어예? 뭐 벌써부터 찾고 있던 사람이라꼬예? 이번 일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걸 안다 카이 다행 이기는 합니더마는…….
그 오빠 우예 알게 됐나꼬 카는 거사 뭐 꼭 감출 것도 없지예. 작년이었임더. 구월인강 기계부 머스마들 중에 낯선 얼굴이 하나 눈에 띄데예. 사실 그 머스마들이사 하도 들락날락해 싸서 누가 가고 누가 새로 왔는지 잘 모르지마는 그 오빠는 대번 확 드러나데예. 암만 공돌이 차림을 해도 낯이 하얗고 어깨가 쭙질한 게 남다른 데가 있었어예. 아무래도 잉크 냄새가 나는 게 거 뭐시라, 위장 취업잔가 뭔가 하는 그 대학생들 같은 짐작이 갑디더. 그런데 내 친구 경숙이가 먼저 그 오빠하고 선이 닿았어예. 윤경숙이라꼬, 지금 아매 저쪽 유치장에 있을 끼라예. 가가 원래 쫌 겁이 없고 잘 나서서 그걸 우예 알았는지 그 오빠가 먼저 찾아왔던 갑대예. 그라고 가를 통해서 우리 구룹 모두 봤으믄 칸다 캐서 경숙이 자취방에 모예 현식이 오빠를 본 게 처음이었심더. 우리 구룹예? 뭐 별거는 아이고, 그저 고향이 비싯하고 형편이 비싯해 잘 모예 당기는 우리 대여섯을 그냥 불러 보는 소리라예. 우리 말고도 그렇게 잘 모예 댕기는 아들은 대강 그래 부릅니더. 꼭 그린 거는 아이지만 뭔 일이 있으믄 잘 뭉치고, 직장을 옮길 때도 같이 몰려가는 수가 많아예.
그 얘기도 해야 됩니꺼? 조사를 해서 다 안다매예? 하기사 내가 안 해도 누가 해도 할 낀데 마 내가 하지예. 현식이 오빠 우리한테는 처음부터 참 잘해 줬어예. 생판 첨 보는 우리를 믿어 주고 신분까지 밝히데예. 오빠가 다니던 대학이며 퇴학 맞은 이유에다 우리 회사를 맡아 위장 취업한 거며 자기는 여자부(部) 담당이라는 거까지 다 말입니더. 그리고 바로 우리를 동지라고 불러 주데예. 물론 감격했지예. 생각해 보이소. 그 꼴같잖은 대학생들 말입니더. 가 아
들 어데 저끼리 있으믄 우리를 사람택이나 여깁니꺼? 서로 잘 모를 때는 내낳고(그때까지 잘) 죽자 살자 따라댕기다가도 공순이라는 걸 알믄 천장만장 달라 뻬는 게 가아들이라예. 우예다 노동운동이 다 뭐다 캐 싸매 달라드는 아아들도 말하고 기분뿐입디더. 입으로사 한없이 겸손을 떨미 우리를 하늘같이 올라세워 쌓지마는, 뒤배(뒤집어) 들으믄 이 불쌍한 것들, 이 등신이들, 카는 거나 저 똑똑다 소리하고 크게 다를 거 없어예. 거다가 의식화다 뭐다 캐 싸미 사람 끌어모아 하품 나게 맹글거나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무식한 년 겁까지 주믄 아무리 우리를 위해 왔다 캐도 만정이 뚝 떨어져예.
그런데 현식이 오빠는 안 그랬어예. 자기 집도 엉간히 부잔갑습니더마는 공장 머스마들하고 똑같이 살았어예. 지 월급만 가지고 가아들 자는 곳에 자고 가아들 먹는 거 먹으미 함께 몰리 댕기는 거 보믄 참말로 영락없는 공돌이라예. 실제로 머스마들은 현식이 오빠가 떠나고 난 뒤에도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갑데예. 저들하고 똑같은 처지로 밥벌이하로 온 줄만 알고 있어예. 우리한테 하는 거도 그랬심더. 의식화다 학습이다 카는 요란스러운 소리 없이 깨치(깨우쳐) 주는데 그 흔한 꼬부랑 말 한마디 끼워 넣는 법 없었어예. 시간이나 장소도 따로 정하는 법 없고 그저 우리 자취방 빙빙 돌미 둘이믄 둘이고 서이믄 서인 대로 모아 우리가 뭘 뺏기고 뭘 뜯기는지, 우예믄 그걸 다부(도로) 찾고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낀지 얘기했어예. 그래다가 끼니 때 되믄 라면이든 된장국이든 주는 대로 얻어먹고, 밤 늦어 부뜰믄 방 한구석에 새우잠 자다 가기도 했어예. 그뿐이 아임더. 우리가 빌려다 놓은 만화 킥킥거리며 같이 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우리 데불고 디스코텍에 가 한바탕 놀고 오기도 했어예. 거기다가 더 미더운 거는 지나개나(아무렇게나) 우리를 끌어낼라꼬 안 하는 거라예. 그 전에 온 몇은 딱 질색이 사람을 깝쳐 대는 거였어예. 쪼매는(조그만) 일만 있어도 태업(怠業) 놔라, 농성해라, 사람이 솔버(스멀거려) 못 견디게 맹글었는데 현식이 오빠는 달랐심더. 우리가 참말로 성이 나 들고일날 일이 있어도 그 오빠는 쪼매만 참아라,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꼬 오히려 말렸어예. 일은 안 되고 너 목만 짤리는 거는 아무것도 아이따, 백지로 너들을 쑤석여 고생시킬라믄 내가 오지도 안 했다, 힘을 모다 놨다 꼭 필요할 때 그때 한꺼번에 쓰자. ― 그게 늘 그 오빠가 우리를 말리며 하는 소리랐어예. 우리하고 회사하고 싸움만 시키믄 되는 줄 알고 몰아대던 사람들하고는 유가 달랐단 말임더.
그래서 모도 그 오빠 밑에 몰렸어예. 그 오빠가 억지로 끌어모은 게 아니라 우리가 몰리간 거라 이 말입니더. 그라고 그 오빠는 뭐 조직인가 뭔가 하는 것도 안 했습니더. 무슨 거창한 감투 쓴 아아들도 없고, 의식화 교육이다 학습이다 카는 것도 자기 입으로. 정해 놓고 한 거는 없어예. 그 일 가지고는 현식이 오빠 우찌해 볼 수 없을 낍니더. 우리 모도 그게 아이라꼬 증인 설 수도 있어예.
그건 관심 없다꼬예? 그 사람은 에초에 그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꼬예? 그건 또 뭔 소립니꺼? 차차 알게 될 끼라이 더 궁금하네예. 그런데 뭐예? 그건 누가 캅디꺼? 그 가시나들 잘 알도 몬하고……. 하기사 그거는 사생활이니깐 죄 될 거야 없겠지예. 그저 부끄러바서……. 글치만 그기 글케도 중요하다믄 얘기 몬 할 것도 없심니더.
우리 사이가 연애 비싯하게 된 거는 ― 이 얘기하믄 현식이 오빠 성 안 낼란가 몰라. 아저씨만 알고 남한테는 말하지 마이소. ― 똑 부러지게 언제부턴동 말하기 어렵십니더. 우예믄 첫날 경숙이네 자취방에서부터 하마 좋았는지 몰라예. 글치만 그 오빠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고, 또 아는 거며 집안 형편도 우리 매이(같은 것) 하고는 달라 한동안은 감히 딴생각을 몬 했어예. 그저 먼빛으로 보기만 해도 좋고, 우예다 얼굴 맞대고 앉으믄 가슴이 쿵닥거려 누구 들을까 겁나도, 사적(私的)으로는 말 한마디 해 본 거 없이 몇 달 지냈심더. 그래다가 하루는 퇴근길에 우연히 만나 둘이만 걷게 됐어예.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며 걷다가 그 오빠가 난데없이 애인 있나꼬 묻십디더. 생전 안 하던 소리라 그 얘기 들으이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데예. 글치만 그런 걸로 그 오빠한테 못된 가시나로 비기 싫어 사실대로 없다 캤심더.
참말이라예. 서울 올라와 이 공장 저 공장 옮겨 댕기는 새에 고만고만한 머스마들이사 많이 따라댕깁디더마는 하나도 그거다 싶은 기 없었어예. 가아들이 뭐 이다바거나 운전수나 같은 공장내기라고 그런 건 아입니더. 우예다 못 이기서 한번 만나 줬다 카믄 판판이 우새(웃음거리 됨)라예. 영화 구경 한 번 하고 팔 끼자 카는 머스마가 없나, 생맥주 한 조끼 같이 마셔 놓고 날 델꼬 잤다고 소문내고 댕기는 머스마가 없나……. 거다가 수작도 모두 싹수가 노랬어예. 내일이사 우예 대든동 받은 대로 번 대로 퍼질러 쓸 생각이나 하고, 아이믄 한탕 쳐 벼락부자 될 꿈이라예. 우짜다가 좀 철들었다 싶으믄 이거는 또 콜록거리는 어무이예 어린 동생들하고 줄줄이 사탕이라예. 그래서 아이고마, 나중에 때 되믄 중매 서 달라 캐 마촘한 사람한테 시집가지 뭐, 싶어 아예 머스마들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심더.
그런데 이상한 거는 현식이 오빠라예. 그냥 지내가미 농담으로 물어본 줄 알았는데 그기 아이라예. 몇 번인동 그걸 자꼬 되물어 쌓디마는 그라믄 어떤 사람하고 연애할라 카노 묻대예. 나이 차믄 중매결혼이나 할라 칸다 캐도 안 믿고 자꾸 꼬치꼬치 묻는 거라예. 그래 우예 불쑥 튀나온 말이, 몰라 오빠 같은 사람이믄, 카는 거였심더. 그칼 때는 우스개 삼아 한 긴데, 막상 그캐 놓고 나이 고마 얼굴이 화끈하고 가슴이 쿵닥거리기 시작하대예. 그래서 그다음에는 몇 마디 더 해 보지도 몬하고 헤어졌어예.
우예 보믄 별거 아인 것도 같지마는 그기 무슨 계기가 된 거는 틀림없어예. 그 뒤로는 그 오빠도 내를 보는 눈이 다른 듯했고, 나도 그전하고 같지는 않데예. 공연히 얼굴 맞대기가 쑥스럽고 서먹해 나도 모르게 피하게 됩디더. 그래다가…… 우예……. 글치만 마, 이 얘기는 그만하입시더.
뭐라꼬예? 동거 생활이라꼬? 그기 무신 소립니꺼? 어느 가시나가 고따우 소릴 했어예? 가시나들, 입이 삼발 사발 째져 봐야 정신을 차리제……. 좋심더, 그라믄 마자 얘기하지예.
아매 지난 십 이월 중순이었을 낍니더. 선적(船積) 물량이 딸리서 공장이 이 교대 삼 교대로 밤낮없이 돌아가고도 하루 대여섯 시간씩 잔업이 붙을 때였어예. 그날도 잔업을 네 시간이나 하고 몸이 오실오실해 자취방으로 갔지예. 같이 있는 윤자는 야근조라 집에 없고 방도 썽그럴 끼라 싶어 방문을 여이 껌껌한데 그 오빠가 와 있데예. 내가 놀라이 조용하라 카미 나를 가만히 끌어들인다 아입니꺼. 윤자가 나갈 때 열쇠를 받아 혼자 있었다는 기라예. 까닭을 물으이 수배를 받고 있어 집에 들어가지 몬하고 우리한테 왔다 캅디더. 국신전자가 며칠 시끄러운 뒤였는데 거기서 일하던 동지들이 부뜰래 오빠까지 쫓기게 됐다는 기라예. 아무도 없는 방에 그것도 밤 깊어 단둘이 있을 걸 생각하이 겁나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믄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예. 거다가 연탄불을 빼놔 방을 뜨끈뜨끈하게 해 놓고 라면 삶을 물까지 얹어 놓은 게 여간 살갑게 느껴지는 기 아이라예. 글치만 잔업까지 모도 열두 시간을 넘게 일한 뒤라 라면 한 그릇 비우고 따끈한 방에 누우이 금방 잠이 옵디더. 전에도 두어 번 윤자하고 내하고 자는 방 한 모팅이에 그 오빠가 끼이 자고 간 적이 있어 쉽게 잠이 들 수 있었는지 모리지예. 그런데 자다 보이 몸이 답답한 기……. 그라고, 마 그래됐습니더. 그 뒤로도 남 모르게 몇 번·…….
글치만 그런 식으로 자꾸 더럽고 칙칙하게 만들지는 말아예. 나도 참말로 싫은 것은 못된 기집아아들이 이 머스마 저 머스마하고 아무 따나 붙어 자는 거라예. 택도 없이 몸 막 구불리는 아아들 상종도 안 한 게 납니더. 우에다 그 오빠하고 그리되기는 했지만 참말로 공돌이, 공순이 동거 생활 짝 나는 거는 내도 피하고 싶었심더.
예, 결혼 같은 거는 약속한 적이 없어예. 나도 그런 걸로 누구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현식이 오˙빠도 그런 말은 통 않았어예. 지금 같은 세상에 그 사람이 걸을 길 험하고 거칠 거는 뻔한 거 아입니꺼? 그런 사람이 우예 결혼 같은 그런 자질구레한 거 생각하고 댕기겠습니꺼? 물론 오빠가 내한테 그런 소리 한 거는 없지마는, 그라고 내가 감히 내놓고 말하지는 몬했지마는 우리는 그저 동지라예. 외롭고 쓸쓸한 동지끼리 만나 우짜다 보이 그런 일이 생겼을 뿐이라예. 하기사 지가 하믄 로맨스고 남이 하믄 스캔달이라 카기도 하고, 또 남한테 안 들키믄 로맨스고 들키믄 스캔달이라 카는 말도 있습디더마는 참말로 우리는 달라예. 그 일은 그저 이념의 동지 간에 있는 작은 로맨스일 뿐이란 말입니더.
그런 동지 많더라꼬예? 그거는 또 뭔 소리니꺼? 뭐라꼬예? 경숙이, 윤자, 희분이, 말자 가 아들 전부 그런 동지라꼬예? 이 공장에 오기 전에 딴 공장에서 맨든 동지까지 다 치믄 수도 없다꼬예? 이번에 우리 공장을 그만둔 것도 희분이가 알라를 배 결혼 안 해 주믄 전부 다 얘기해 뿐다 카는 바람에 내뛴 거라꼬예? 보이소, 아저씨요. 현식이 오빠가 뭔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모르지만 빨리 잡아다가 벌주믄 그만이지, 와 그리 사람 더럽고 추접게 만듭니꺼? 개눈에는 똥밖에 안 빈다 카디 아저씨들한테는 머스마, 가시나 모이기만 하믄 그 짓밖에 할 게 없는 걸로 생각되는 모양이지예. 경숙이, 윤자, 희분이 또 누구라 캤어예? 그래 말자까지……. 가 아(그 아이)들이 바로 우리 구룹이라예. 그 오빠가 가장 힘들여 키우던 소조(小組)란 말입니더. 그래다 보이 밤낮으로 만날 일이 많았겠지예. 주인집 아주머니들 눈으로 보믄 공돌이, 공순이 모예 추저븐 짓이나 하는 줄 알 수도 있겠지예. 실은 그 오빠가 일부러 그렇게 보일
라꼬 애도 썼심더. 그래야 딴 의심 안 받고 아저씨 같은 사람들 미행이나 감시도 따돌리지예. 그런데 그결 그리 봤숩니꺼? 하기사 희분이 그 가시나 눈치가 좀 다르기는 했어예. 우예튼지 그 오빠를 혼자만 차지할라꼬 벨벨 짓 다 하디, 안 되이 우리하고까지 삐쳐 혼자 댕겼어예. 그래다가 불쑥 공장을 나갔뿌디 아저씨들한톄 그따우 소리로 일러바쳤는갑네예. 보이소, 아저씨예. 사실은 아저씨가 이래 까 놓는 게 오히려 그 오빠한테 죄 짓는 게 된다, 이거라예. 알겠심니꺼?
돈예? 점점 더 희한한 소리 다 듣겠네예? 거다가 뭐라꼬예? 자금이라꼬예? 무슨 자금 말입니꺼? 엄마야, 인자 보이 벨소리 다 하네. 도대체 내 같은 공순이한테 무슨 돈이 있어 그런 자금까지 대겠어예? 내 봉급이 얼만지나 알아예? 본봉이라 캤자 간당 십삼만 원에 눈이 아리도록 잔업해 보태도 이십만 원 차기 숨 가빠예. 거기다 십만 원 띠서 고향에 보내고 나믄 내 살기도 바빠예. 방세 둘이서 분빠이해도 하나이 앞에 이만 원, 연탄, 전기, 수도가 또 마찬가지로 한 만 원, 거기다가 쪼매는 적금 얼매 빼고 나믄 벌이 좋은 달도 삼사만 원으로 먹고 입고 찹비까지 써야 되예. 그런데 뭔 돈이 남아줄 끼 있겠습니꺼?
지난 석 달 집에 돈 안 보낸 거예? 그거사 그동안 억지로 살다 보이 알게 모르게 쌓인 빚 갚았지예. 막냉이 졸업해 집안 살림도 쪼매 피였다 카고……. 뭐예? 적금 통장 우옛나꼬예? 엄마야, 그건 우예 알았습니꺼? 참말로 귀신이네. 좋아예, 다 말하지예. 글치만 자금 어쩌고 카지 마이소, 너무 어마어마시러버예. 그 돈 다 현식이 오빠 가주간 거 맞심더. 그 오빠 지난 석 달 내내 쫓기댕긴 거 아저씨네가 더 잘 알지예? 인제는 얼굴이 팔려 딴 공장에도 몬 가고, 집에는 형사들이 아침저녁 교대로 와서 기다리이 오빠가 어디 가겠습니꺼? 그래서 나중에 받기로 하고 쫌 돌려(빌려)줬심더. 적금도 해약해 가지고……. 그런데 뭐 그거 가지고 난리라도 꾸몄습니꺼? 우리끼리 돈 얼마 빌리주고 꾼 거 가주고 뭘 그래 꼬치꼬치 캐묻십니꺼? 더군다나 무신 자금이라니요.
안됐다구예? 딱하고 불쌍타구예? 아무것도 모르미 그 오빠 그래 마구다지로 욕하지 마이소. 사기꾼이라니예? 선구자나 혁명가로는 못 불러 줄망정 사기꾼이라니예? 그 오빠 대학생 아인 거 우리도 벌써 다 알아예. 데모하다 퇴학당했는데 우예 대학생이겠습니꺼? 대학생이믄 우예 맨날 공장에 나와 일할 수 있겠습니꺼? 그리고 우리는 그 오빠가 꼭 대학생이라꼬 그래 믿고 따른 거 아이라예. 하는 일이 옳고 하는 말이 바르이 그랬을 뿐이라예. 새삼시리 대학생이고 아이고가 무슨 상관 있겠어예?
또 뭔 소리 할라꼬예? 뭔 소리든동 해 보이소. 뭐라예? 현식이 오빠가 대학 문전에도 몬 가 본 사람이라꼬예? 재수, 삼수하다가 자꾸 미역국 먹어 싸이 집에 낯도 없고, 또 콧구멍만 한 구멍가게 해 여섯 식구가 겨우 먹고사는 집안 형편 더 외면할 수도 없어 공장에 나온 거라꼬예? 그런데 모양이 해말끔하고, 재수, 삼수도 공부라꼬 몸에 배인 틀이 있어 그 사람을 대학생 위장 취업한 거로 잘못 보고 자꾸 쑤석거려 싸이, 거기서 힌트를 얻어 그 길로 나서게 됐다꾜
예? 그쪽 책 몇 권 수박 겉핥기로 훑고 그쪽 사람들 말 몇 마디 주워들어 참말로 위장 취업한 대학생 행세해 가미, 벌써 두 군데 공장 돌아 우리 같은 가시나들 여나믄은 회 쳐 먹고 이쪽으로 온 거라꼬 예? 노동운동이다 의식화다가 다 꼬임수라꼬예? 참말로 해도 너무 합니더. 사람을 잡아도 정도껏 잡으이소. 교복 입고 대학 앞에서 찍은 사진도 여럿 봤심더. 대학생 친구들도 많이 봤구예. 사장인 아부지 비서라 카는 사람이 찾아와 가주고 돌아가자꼬 사정사정하는 것도 봤심더.
뭐예? 교복이사 사 입으믄 되고 사진도 아무 대학이나 가서 찍으믄 된다꼬예? 친구라 카는 대학생들 참말로 대학생 맞는지 안 맞는지 조사해 봤다꼬예? 아부지 비서라 카는 사람이 참말이라 카믄 우예 자식이 일곱 달이 넘도록 구멍가게 같은 중소기업 공장에 댕기는 걸 가마이 놔두었겠나꼬예? 마 좋은 대로 생각하이소. 그런 식으로 의심할라 카믄 세상에 성한 사람 얼마나 되겠어예?
웃지 마이소. 기분 나쁩니더. 사람 허패 뒤집는 기 뭐 취미라도 됩니꺼? 기술 좋더냐꼬예? 무슨 기술예? 내 참, 아저씨는 여동생도 없어예? 딸도 안 키아예? 우예 그런 소리를 다 입에 담으십니꺼? 하기사 뭐 그러이 부천(富川)서 그러매이 일이 다 터졌지예. 벌건 대낮에 인자 겨우 스물 난 가시나한테 이따우 수작하는 거 보이 권 양 우쨌다는 말도 참말로 헛소문 아인갑네예. 만판 그런 짓 하고도 남겠네 예 .
와 때려예? 내가 뭐 그른 소리 했습니꺼? 그거 가주고 뺨 때리는 거 보이 참말로 죄 졌으믄 사람 안 패 죽이겠나? 박 머시긴가 하는 대학생도 그래 가주고 그리 때리 죽있십니꺼? 뭐예? 아직도 정신을 몬 채리이 답답해 글타꼬예? 정신을 몬 채리다이 내가 뭔 정신을 몬 채립니꺼? 내 아직 정신이 말똥말똥해예. 아저씨 하는 말 다 알아듣고 내 한 말도 뭐시든 다 기억해예. 혹시 정신이 우째 된 거는 아저씨 아입니꺼? 아까부터 사람 불러 놓고 엉뚱한 소리만 실실 해대는 게 내 보기에는 아저씨가 오회려 돌았기나 우째 된 거 같심더. 쓸데없는 소리 해 쌓지 말고 요점만 물어예. 현식이 오빠 얘기, 아무리 나쁘게 꾸며 대도 말짱 헛일이라예. 뭐라 캐도 아저씨 말은 안 믿어예.
그건 뭐시라예? 경찰 서류 내 같은 기 읽어 봐서 뭐 하겠어예? 고소장이라꼬예? 내 같은 어리하게 당한 가시나들이 낸 고소장이니 꼭 한번 읽어 보라꼬예? 그걸 내가 와 읽습니꺼? 몸 뺏기고 돈 뺏기고 걷어채있다는 얘기겠지예? 그런 거라믄 내하고는 상관없심더. 나는 아무것도 뺏긴 거 없어예. 자청해서 줬고 또 그마이 받았어예.
내 안 읽는다는데 화는 와 내예? 등신이 쇠고집이라꼬예? 마 등신이라도 좋고 쇠고집이라도 좋심더. 글치만 거기는 안 넘어가예. 나도 다 들은 거 있어예. 그기 바로 반동(反動)들의 책략이라 카는 거 아입니꺼? 막바지가 되믄 반동들의 책략이 변화무쌍해진다꼬 오빠가 말한 적이 있었어예. 그래서 우리를 이간질시키고, 서로 몬 믿게, 서로 얕보고 비웃게 만든다미요? 까짓거 고소장 몇 장 맨들어 내는 거사 뭐 어렵겠어예? 종이하고 볼펜만 있으믄 이따우 엉터
리 고소장이사 백 장도 안 맨들겠어예?
대질시켜 준다 캐도 마찬가지라예. 여경(女警) 몇 명 옷 갈아입해서 현식이 오빠한테 몸 바치고 사기당한 거맨치로 펴들어 쌓게 하믄 누가 알겠어예? 신원 조회, 학적부 아무리 내놔 봐도 소용없어예. 그거 다 마찬가지 아입니꺼? 나는 그 오빠 말 아이믄 안 믿어예. 아무리 몬 배운 공순이지만 그만 신의는 있어예.
그래도 뭘 자꾸 가주고 읍니꺼? 가장 최근에 들어온 고소장이라꼬예? 그 때문에 이번 수사가 시작된 거라꼬예? 그건 또 무슨 죄목입니꺼? 혼인 빙자 간음 및 사기와 폭행이라고예? 골고루 꺼다 붙여 놨네예. 그래도 반국가 음모나 간첩으로 안 모는 거는 다행입니더. 그쪽으로 몰아지면 사람 잡기 훨씬 쉬울 낀대예.
아이고 깜짝이야, 괌은 왜 그래 질러 쌌습니꺼? 내 안 보겠다는데 아저씨가 그래 속 탈 끼 뭐 있어예? 그라믄 뭐, 좋아예, 그거 읽는 게 글케 소원이라믄 읽어 보지예. 이리 주이소, 함 보입시더.
이번에는 아이구, 우리 같은 공순이가 아이네예. 동방무역 총무과라 대학까지 나왔으니 급사는 아이겠고 여사무원인갑네예. 보자, 수배 중인 운동권 학생을 가장하여, 뭐 똑같은 소리 아입니꺼? 호기심과 동정심을 일으킨 뒤 접근, 이것도 뭐 비싯하고. 대학까지 나온 여자가 그것도 나이 스물일곱씩이나 되면서 그만 일에 호기심과 동정심을 일으켰다믄 그 여자도 어지간히 골 빈 여자지예. 결혼을 약속하고 농락한 뒤, 뭐 이게 참말이라 캐도 한쪽 말만 듣고 알 수 있겠어예? 마음을 돌려 복교하겠다는 핑계로 세 차례에 걸쳐 백육십만 원을 뜯어 가고, 엄마야, 대학 등록금이 이리 비쌉니꺼? 확실히 우리 같은 공순이 상대하고는 액수가 다르네예. 또 보입시더. 다시 방을 얻어 동거를 시작하여, 퇴직을 강요한 뒤, 퇴직금 삼백오십만 원 받아 오자 그걸 챙겨 자취를 감췄다. 참 거짓말 같은 일도 있네예. 현식이 오빠 몇 살인 줄 알기나 합니꺼? 인자 스물넷이라예. 그런데 스물일곱 ㅡ 아니, 여게 스물일곱으로 적 혔으믄 집에 나이는 스물여덟이겠지예. ― 이나 되는 여자가 그것도 직장생활을 오 년씩이나 했다믄서, 현식이 오빠 같은 사람한테 넘어간단 말이라예? 아저씨 말대로라믄 대학 문전에 몬 가 본 날건달한테 대학까지 나온 여자가 그렇코름 정신 못 채리고 당했단 말이라예? 마자 보입시더. 일주일 뒤에 다시 들어와 사업을 시작했다며 친정에 가서 오백만 원을 더 가져올 것을 요구 이를 거절하자 주먹을 휘둘러……. 참말로 현식이 오빠한테는 안 어울리네예. 나는 아직 어디서 그 오빠가 괌 한번 크게 지르는 거 몬 봤는데……. 그거는 글코, 자 그래서 우쨌단 말입니꺼? 내도 몬 본 지 한 달이나 되는 사람 내놓으란 말입니꺼? 아이믄 나도 몸 뺏기고 돈 뺏깃다고 고소장 하나 더 써 보태란 말입니꺼?
이캐도 알고 저캐도 압니더. 우리 그카지 말고 인자 솔직히 얘기하입시더. 애매한 현식이 오빠 이만틈 잡아 놨으면 됐심더. 인자 우리 공장 얘기나 하입시더. 저쪽에서 뭐라 캅니꺼? 쪼매도 양보 몬하고 우리만 조져 달라꼬 약 씁디꺼? 아이고, 또 괌 지르네. 그건 우리끼리 알아 할 일이고 아저씨가 궁금한 거는 이 사기 사건뿐이라꼬예? 참 이상하네예. 현식이 오빠가 위장 취업한 거는 사실이지만 이번 일하고는 아무 상관 없다는 거 아저씨도 잘 안다매예? 그런데 뭐 아저씨가 개인적으로 그 오빠하고 원수진 거라도 있어예? 왜 더럽고 추저븐 사기꾼 몬 맹글어 그렇코름 안달입니꺼?
혹 이걸로 노동운동하는 대학생들 몽조리 도맷금우로 우째 볼 생각이믄 그건 틀렸어예. 우리가 아무리 몬 배우고 덜 떨어졌다 캐도 그만 일로 흔들리지는 않아예. 논에는 피가 나기 마련이고, 나락한 말이믄 쭉데기도 한 줌 섞이는 법이라예. 이 고소장 모두 참말이고 아저씨 말도 모두 사실이믄 뭐 어때예? 그래도 그 오빠는 우리한테 우리 권리하고 노동의 존엄을 깨치 준 사람이라예. 우리가 어떻게 억압받고 무엇을 착취당했는지를 알려 준 사람이고, 무엇으로 우리 스스로를 회복시켜야 되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이라예. 그 사람의 동기야 우쨌건 인자 우리는 한번 출발한 이 길을 갈 꺼라예.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 글치만, 아이고, 참말로 그기 아이믄 우짜꼬? 내는 인자 우짜꼬?
(1987년)
2016년 12월 5일 읽음
구로(九老) 아리 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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