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리승만에서 넘어옴)
이승만
李承晩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임기부통령총리임기국무총리임기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국적본관학력정당부모배우자종교별명서명웹사이트서훈
1948년 7월 24일~1960년 4월 27일 | |
이시영(1948년~1951년) 김성수(1951년~1952년) 함태영(1952년~1956년) 장면(1956년~1960년) | |
이범석(1948년~1950년) 장면(1950년~1952년) 장택상(1952년) 백두진(1953년~1954년) 변영태(1954년) | |
후임: 윤보선(제4대) |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대통령 | |
1919년 9월 11일~1925년 3월 23일(탄핵 후 면직) | |
이동녕 이동휘 이동녕(대리) 신규식 노백린 김구(대리) 이동녕 박은식 | |
후임: 박은식(제2대) |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1, 22대 주석 | |
1947년 3월 3일~1948년 8월 15일 | |
전임: 김구(제20대) | |
신상정보 | |
1875년 3월 26일 | |
조선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능안골(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 | |
1965년 7월 19일(1965-07-19)(90세) |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카운티 호놀룰루시카이무키 구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 |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조선 (대한민국) (일본) | |
전주(全州) | |
배재학당 조지워싱턴 대학교 철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 철학박사 |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자유당 | |
이경선(부), 김말란(모) | |
박승선(전처), 프란체스카 도너(재혼) |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감리회) | |
호는 우남(雩南), 아명은 승룡(承龍) | |
http://www.syngmanrhee.or.kr/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49년) |
이승만
개정 로마자 표기: | I(Ri) |
공식 표기: | Syngman Rhee |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서훈되었다. 본관은 전주이고,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계몽운동을 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특별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 귀국하여 계몽교육을 하다가 일제의 체포 위협을 피해 1912년 미국으로 망명,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며 실력양성운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졌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 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부터 1925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구미위원부 위원장,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 강점기 중후반에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의 패전을 확신하고 일제가 망하는 즉시 한국이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고,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으며, 임시 정부와 미군 OSS 간의 한미군사협력을 주선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공산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38선 이남에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정부를 단독 수립한 뒤 38선 이북의 비합법정부와 공산진영 일체를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그 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냉전시대에 발맞추어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안팎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였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방계 16대손이자, 양녕대군의 다섯 번째 서자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자,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14대손이자, 장평도정의 손자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의 13대손이다. 이승만은 신분상 왕족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이승만의 13대조인 이윤인에서 끝이 났다.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아갔다.
이승만에겐 두 명의 형들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태어나기 전 모두 홍역으로 죽어서 사실상 6대 독자로 자라며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승만은 "나는 6대 독자였다.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잡수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기 가슴에 뛰어드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된 태몽이었다. 내가 태어날 때 우리 집안이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 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는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해 있었는데, 이승만이 2세 때인 1877년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부로 이주하였다. 한성부에서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 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1]
이승만은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아버지 이경선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죽자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2] 그러나 이경선은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교육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4세 때인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한성부 용산)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1]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承龍)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3]:244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고 회고하였다.[4]
이승만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실에 비판적이었고 자신의 가계를 밝히기를 꺼려했지만, 정작 조선 왕실 족보라는 이유로 왕정복고를 꿈꾼다는 의혹에 종종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만일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은 고종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불명예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고 회고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로버트 T. 올리버 선교사에게 부칠 때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였다.[5]
1890년 이승만은 동갑내기인 박춘겸(朴春兼)의 딸 음죽박씨(박승선)와 결혼하여 (光武戊戌)1898년 6월 9일 외아들 이봉수를 가졌다.[6] 그러나 1906년 이봉수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자 이경선은 격노해 이승만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결국 1912년 박씨 부인과 이혼했다. 박씨 부인은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7]
청년기[편집]배재학당 수학 및 협성회 활동 (1895~1897)[편집]
이승만은 20세 때인 1895년 4월 2일 헨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8]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을 세웠다가(춘생문 사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8]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했다.
이상재는[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었다.
1896년 5월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9]:295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주도 하에 협성회가 조직되었다. 협성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단체이며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제로서, 학생정치단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협성회의 창립발기회원은 양홍묵·이승만·신흥우·노병선(盧炳善)·주상호(周相鎬)·윤창렬(尹昌烈)·민찬호(閔賛鎬) 등 13인이었다. 협성회에서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을 맡았다. 협성회는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았다.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하여 창립 1년만에 회원수가 2백여 명으로 늘어났고, 1898년 2월에는 3백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지방에서도 협성회가 조직되었다.[10]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는 이완용의 아들이었는데,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한다며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버렸다.[11] 이승만은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방학예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12] 이어 이승만이 졸업생을 대표해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시작하였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참석한 청중들, 정부 고관들, 주한 외국 사절들을 사로잡았다.[13]
언론활동 및 독립협회 사건 (1898)[편집]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발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열강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실었다. 이 고목가(枯木歌)가 신체시의 효시라는 주장이 있다.[14]
1898년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15]
1898년 4월 9일 《협성회회보》를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키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13]
1898년 8월 10일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898년 11월경 독립협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11월 5일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17인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한다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 등 대중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1월 15일 고종은 내각을 개편하고 독립협회의 복설(復設)을 허락하는 동시에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을 약속하고 조병식 일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16] 11월 21일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던 중 수구파들이 보낸 보부상 2천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11월 28일 고종은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이승만·남궁억 등 50여명을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하였다.[17]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Harry Sherman)의 집으로 피신하였다.[8]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한성감옥 투옥 시절 (1899~1904)[편집]투옥, 탈옥미수, 고문 후유증[편집]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 왼쪽). 이 사진은 배재대학교 우남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899년 1월 17일 주미국공사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서상대, 최정식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18]
1899년 3월 27일 이승만의 처 박씨는 덕수궁 인화문 밖에서 상소문을 들고 이승만에 대한 선처를 빌었으나 책임관 외에는 직접 상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퇴송되었다.[19]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재판장 홍종우로부터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8][20]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9]:247
허정의 진술에 의하면 이승만은 투옥 당시 고문을 당했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에도 이박사는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를 상징하다시피하는 이 안면 경련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21]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편집]
그는 옥중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을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에서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1900년 8월 한성감옥서에서 청일 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1917년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1901년 2월부터 1904년 7월까지 옥중 생활 속에서도 가명으로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실었다.
1902년 12월 설립된 감옥 내 학교에서 이승만·양의종(양기탁)이 교사로 선발되어 죄수를 교육하였다.[22] 어린이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옥중도서실을 운영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04년 6월 29일 국민계몽서인 《독립정신》의 원고를 완성하였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서양의 선진문명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백성에게 호소한 책이었다.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23]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건의한 끝에 7월 8일 조칙(詔勅)이 내려졌고, 이승만은 8월 4일 특별 사면령을 받아 8월 9일 석방되었다.[24][25]
미국 유학 및 외교 활동 (1904~1910)[편집]
1905년 8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박사.
민영환은 이승만의 석방을 도왔고 그를 미국에 밀사로 보냈다.
1904년 8월 9일 석방된 이승만은 이후 민영환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하기로 하였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잠시 취임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승만은 고종을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이승만을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종이 왜 자신을 만나려 하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9]:247
1904년 11월 4일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이었다. 일본 고베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하였다.
1904년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하였다.[24]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24]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다.[24]
1905년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부 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존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제8조)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존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24]
1905년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버넌트 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24]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윌리엄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26][9]:297 8월 4일 뉴욕시 동부 루스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승만은 당시 공사인 김윤정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미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어 이승만의 요청을 외면하였다. 이승만은 김윤정의 어린 아들을 설득하여 공사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했다.[27]
1905년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하였다.[24]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을 예방하였는데, 고종은 미국이 조선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그냥 가버렸다.[28]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 총리 가쓰라와 식민지 분할에 합의한 뒤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9]: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모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Cleveland Tower.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원생 기숙사의 탑을 그린 유화. 이승만도 대학원생 시절 이 기숙사에서 묵었다고 전해진다.
1907년 6월 5일 조지 워싱턴 대학교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하고 학사(Bachelor of Arts) 학위를 받았다.
1907년 9월 하버드 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08년에 수료했으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전명운, 장인환의 더럼 W. 스티븐스 암살 사건으로 친일적인 미국인 교수들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어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고 1910년 2월에 가서야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ster of Arts) 학위를 받았다.
1908년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을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은 미국 등에 의한 외교독립론이었는데 정작 미국인이 한국인에게 암살되었으니 난처한 입장이었다.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과 장인환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의 거액(당시 장인환 의사의 미국 변호사 선임비는 4000달러였다)을 요구해 사실상 변호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미주 본토, 하와이, 멕시코, 국내, 연해주, 만주, 중국 등지의 한인들이 기금을 마련해 7,390달러가 모았고, 미주 한인들은 3,000달러를 이승만에게 가져갔다. 이에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는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차 거절하고 같은날 8월 25일 동방으로 돌아갔다. 이후 신흥우가 변호 및 통역을 맡았다. 이승만의 전명운·장인환 변호 거절은 자신의 독립운동 방략과 당시 미일관계 등 세계정세를 고려한 판단이었다고는 해도 후대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29][30]
한편 더럼 스티븐슨의 시신은 워싱턴 D.C.로 운구되었다가 기독교식 장례를 치른 후 워싱턴 D.C.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조화(弔花)를 보냈으며 일본 정부는 메이지 천황의 조화와 조문 사절단을 워싱턴 D.C.에 파견하였으며 훈1등의 훈장을 추서하고 더럼 스티븐슨의 유족에게는 위로금 및 조의금을 지급하였다. 전명운·장인환 의거 직후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미 본토 안창호의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가 탄생하였다. 1909년 재판에서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과 더럼 W. 스티븐스에게 받은 역피해를 명목으로 무죄를 선고받아 선행(先行) 석방되었다.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으로 감형받고 1919년 가석방되었다.
1908년 7월 10~15일 이승만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 대표로 참석하였다. 《덴버 리퍼블리칸》지가 이 대회를 자세히 보도하였다.[24]
1908년 9월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지도교수인 우드로 윌슨 총장(나중의 대통령) 가족과 친밀한 관계 유지하였다.
1909년의 이승만
1909년 9월 8일 《신한민보》에 '戒髻상투를 없애야 되어'라는 사설을 실었다.[31]
애치슨 선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되었다). 이때 이승만은 다른 학교이지만 옆에 붙어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들었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독립운동기[편집]귀국 및 교육 활동 (1910~1912)[편집]
1910년의 이승만
1910년 9월 3일 국권을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1910년 10월 10일 한국에 귀국하였다.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이었다.[32][33]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4]
1910년 10월 10일부터 1912년 3월 26일까지 종로 기독교청년회(한국YMCA)의 총무 겸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였다.[9]:248 존 모트의 《신입학생 인도》를 번역해 출판하였다.
1911년 5월 16일부터 6월 21일까지 37일 동안의 전국순회전도 여행 중에 개성에서 윤치호가 세운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에 들러 제2회 전국기독학생 하령회(夏令會)에 참석하였다.[33]
1911년 105인 사건에 뒤이은 일제의 체포 위협이 있자,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 총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도록 선교사들이 주선함으로써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33]
도미 후 하와이 정착 (1912~1914)[편집]
1912년 3월 26일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1년 5개월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였다.[35][36][37]
망명길에 일본에 들러 1912년 4월 10일까지 도쿄 조선YMCA를 근거로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때에 도쿄 조선YMCA에 드나들던 유학생들은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안재홍, 신익희, 최린, 조용은(조소앙), 김병로, 현상윤, 이인, 전영택, 윤백남, 김필례(金弼禮) 등을 포함하여 50~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37]
1912년 4월 10일 요코하마를 출발, 4월 25일 캐나다, 4월 26일 시애틀을 거쳐 1912년 5월 1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기독교감리회총회'에 참석하였다.[38][37]
1912년 6월 19일 은사인 우드로 윌슨(당시 대통령 후보)을 뉴저지의 시거트 별장에서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 후 두 차례 더 만났다.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1912년 8월 14일 네브래스카주 헤스팅스에서 ‘소년병학교’를 운영하는 박용만을 만나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하였다. 한국인이 많은 하와이를 독립운동 기지로 삼기로 합의하였다.
1913년에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하였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하였다.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다.
1913년 8월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한인기숙학교를 곧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했다.[33] 그러나 후에 이승만과 미국 감리교 선교부(American Methodist Episcopal Mission) 사이에는 교육방침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즉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한인학생들을 하와이사회에 완전히 동화시켜 미국인화(americanization) 시키려고 했던 반면, 이승만은 한인 학생들에게 한국말, 한국역사, 한국관습을 가르쳐, 장차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기를 원했다.[39] 1914년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방침에 반발하여 한인중앙학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1913년 9월 20일 《태평양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1913년 12월 5일 이승만의 부친 이경선이 별세하였다.
1914년 7월 29일 '한인여자(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한인사회 장악 (1914~1918)[편집]
1914년~1918년은 대한인국민회에 커다란 혼란이 있던 시기였다. 1915년 중순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 부회장은 박용만이었는데, 동아시아정세의 변화화와 더불어 연해주와 만주의 대한인국민회가 쇠약해졌으며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갔으며 안창호의 영도역량에도 문제가 있어 3·1 운동 이전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실질적인 기반은 미국 서해안과 멕시코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은 하와이 오아후섬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한인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피만 흘릴 뿐 실질적 소득이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갈리게 됐고 교회까지 분열하게 되었다.[40]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
1915년 초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재정 비리 의혹이 터졌다. 이에 이승만은 하와이지방총회를 혁신하겠다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에 임시의회 소집을 건의했고, 와히아와지방회 의원 3인이 이에 응답해 임시의회소집청원서를 총회장에게 보냈다.[41]
1915년 5월 1일부터 수 차례의 임시의회가 열리고 회계장부도 조사되었다. 그 결과 김규섭, 이동근, 안영칠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재무 홍인표가 1544원 67전을 횡령하고, 양흥엽, 홍진표의 보고서에 따르면 하와이지방총회장 김종학이 1345원 64전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과 지도부 일동이 파면되었다.
한편 1915년 6월 이승만은 교육방침의 차이로 미국 감리교 선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감리교 선교부에서 독립시켰다.
1915년 6월 10일경 신규 하와이지방총회장 선거에 홍한식과 고석주가 후보로 출마하여 홍한식이 당선됐다. 이날 이홍기, 김규섭, 김윤배, 이정건은 대의원과 참의원 등에 당선됐다.[41]
1915년 6월 17일경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온 공소장을 본 즉시 의회에서 김종학을 사회법률로 처단하기로 작정하고서 의회 의원들을 한인중앙학원에 불러다 놓고 "어찌하여 죄인 김종학을 징역시키지 않고 공회재판으로 처치한다 하는가? 그와 같이들 하려면 다 본디 방식으로 돌아가라"라고 호통쳤다.[41] 1915년 6월 25일경 김종학 등은 홍한식 등에게 선거무효 소송을 걸었다가 3개월만인 9월 29일 소송을 취하하였다.[42]
1915년 6월 17일 이승만은 호놀루루 스타 불레틴 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중략)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어느 특정 인종 혹은 민족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기에는 너무나 세계 시민적인 사람, 철저한 코스모폴리탄이다. (중략) 만약 본토에 사는 일본인, 혹은 해외에 사는 일본인들이 진정으로 한국인과 친근하게 지내길 원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생명, 자유, 행복에 관한 원천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43]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소약국민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33]
1918년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제10차 대의회에서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 지도부에 재정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다. 2년반 전에 박용만파가 받았던 혐의를 이번에는 이승만파가 받았다. 박용만파 대의원들이 이승만에게 따지자, 이승만은 2월 6일과 2월 13일 《국민보》에 두 차례에 걸쳐 “소약국동맹회의와 재정”, “선동”이라는 표제로 박용만파가 제기한 사안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기고했다.[43] 해명을 했음에도 2월 11일 재정문제를 토의하던 중 난투가 벌어졌다. 안현경은 호놀룰루 경무청에 신고해서 박용만파 유동면, 김성렬, 이찬숙, 김한경 4명을 지목, 체포케 했다. 1918년 2월 15일 폭동(riot) 혐의로 유동면 등 4명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44] 2월 27일 고등재판소에서 배심재판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당시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고발인 신분으로만 재판정에 출석하였다.[45] 3월 8일 재판결과 박용만파의 무죄가 판결되었다.[46]
그 직후에도 다툼은 계속됐다. 1918년 3월 11일 이승만파 안현경은 박용만파 유동면 등을 경찰에 체포시켰고, 3월 15일 안현경은 유동면 등을 고발하였다. 같은 날 안현경은 김순기를 경찰에 체포시켰다.[47] 이에 3월 23일 김순기는 자신이 안현경에게 누명을 쓰고 체포를 당해서 5000달러의 손해를 봤다며 안현경을 고소했는데, 안현경은 "I am going to kill you"라는 살해협박을 받아서 경찰에 신고한 거라고 반박했다.[48] 1919년 2월 28일 재판결과 원고측 김순기가 오히려 협박(threatening language) 혐의로 체포 영장(warrant of arrest)을 발부 받았고 피고측 안현경에게 재판비용까지 물어줬다.[49]
이후 박용만파는 1918년 7월 1일 하와이지방총회에 대항하기 위해 '임시중앙연합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를 흔히 '갈리히연합회'로 불렀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되어 중앙총회의 위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중앙총회장 안창호까지 나서서 갈리히연합회의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갈리히연합회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이승만의 《태평양잡지》와 여론전을 펼쳤다. 1920년 초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승만파 이종관 등과 박용만파손창희 등의 선거 불복에 관한 법정다툼도 이승만파가 승리하였다.[50]
이후로도 박용만파와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승만파는 언론을 통해 비폭력 저항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는 태도로 한인사회의 평판을 얻기 시작했고, 점차 한인사회를 장악하였다. 한인사회로부터 YMCA 한인지부를 위한 대규모의 기부금을 성공적으로 모금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의 갈등도 해소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보낼 특사로서 이승만을 신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하와이로 귀환했을 땐 한인사회의 광범위한 축복을 받았다. 중립적인 인사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반이승만파 중 일부조차 이승만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인국민회는 분쟁이 야기되는 속에서도 독립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달러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도에는 3,775달러를 기록했다.[51]
1918년 7월 29일 호놀룰루에 신립교회(新立敎會)를 설립하였다.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으로 바꾸었다.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에 이승만이 이끄는 새로운 민족교회가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한인기독교회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한국어 교육과 민족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동지회로 발전하게 되었다.[33][52]
파리 강화회담 및 3.1 운동 당시 (1918~1919)[편집]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강화회담(파리 평화회의)이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세계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었다.
1918년 12월 1일 이승만은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강화회담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33]
1918년 12월경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갔다.[53] 이승만이 보냈다는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53]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뜻이 있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반송, 되돌려보냈다.
1919년 1월 6일 이승만은 파리 강화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장택상, 민규식 등을 만나 독립 추진 방략을 논의하였다.[33]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2월 중순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일본인에게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54]
1919년 3월 3일 미국 국무성이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고 파리 강화회담에 기대할 것이 없어보이자, 이승만과 정한경은 안창호의 협조를 미리 받고 대한인국민회의 명의로 작성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드로 윌슨과 미국 신문사에 송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9년 4월경 김규식은 상해 임시 정부 대표 명의로 된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담에 제출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당국은 '정부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 대표단을 문전박대했다.[55]
1919년 3월 5일 미 국무부로부터 파리 행 여권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33]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미국 국무부의 해명이었다.[56]
위임통치 청원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얼마 후 이 일이 임시 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외교독립론자들을 두고두고 비난하게 되었다.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비난도 컸지만 청원을 실시한 시점, 즉 3.1 운동 이후에 실시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이 컸다.[57] 그러나 사실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은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3월 10일이 되어서야 서재필로부터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걸 전해 들었다. 오늘날 이승만 등의 위임통치 청원은 민족의 독립을 외세의 손에 맡겼다는 평가와 1910년대 말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는 평가가 상존한다.[55]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한인자유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1919년 3월 10일 미국 현지에서 3·1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1919년 3월 21일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 정부)에서 국무경(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이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 D.C.에서 통보받았다. 4월 7일 이승만은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33]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었고, 이승만은 이 사실을 4월 15일에 알게 되었다.
1919년 4월 14일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등은 만세 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대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4월 16일 이승만은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하여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58]
1919년 4월 23일 경성에서 한성정부(한성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이 사실을 5월말에 알게 되었다.[33] 이렇게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자칭 대통령) (1919~1925)[편집]임시 정부 대통령 당선 (1919)[편집]
1919년 4월 23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가 설치되었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까지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강화회담 의장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59] 7월 4일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6월 이후 미국 언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한국의 임시 대통령(provisional president of Korea)’, ‘임시정부의 대통령(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등으로 불렸다.
1919년 8월 15일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8월 25일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승만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해 임시 정부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 8월 25일 상해 임시 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는 워싱턴 D.C.에 있는 이승만에게 "상해 임시 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중략)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라고 전보를 발송하였다. 이에 8월 26일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라고 답신하였다.[60] 또한 이승만은 한성, 상해, 연해주 중 한성정부만이 국내 대표자들의 헌법절차를 거친 정통 정부이자 이미 전세계에 통보된 대통령 정부이며, 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표현하면 '프레지던트' 밖에 없다는 자세를 고수하였다. 문제의 호칭 갈등은 임시 정부 헌법 개정으로 일단락되었다.
1919년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 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61][62][63][64]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은 기존의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대폭 개정하여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60] 임시 헌법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 내에서 임시 대통령에게 전임한다고 명시하였고, 제3장에서 임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정무를 총감하며 법률을 공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기존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이 1919년 9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 정부는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까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 활동을 하고 다녔다.[65]
상하이 현지 취임 및 김구와의 만남 (1920~1921)[편집]
1920년 상하이로 밀입국 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변장을 한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임시 정부에서는 이승만의 현지 취임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 D.C.에 발송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1920년 6월 12일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배를 타고 12월 5일 상하이 동부 푸둥에 밀입국 하였다.[66]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가면서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일본제국이 자신의 목에 건 현상금 30만 달러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이승만, 맨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1920년 12월 28일 열린 이승만 임시 대통령 환영회. 단상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
1920년 12월 13일 임시정부 인사들을 처음 접견했고, 김구와 첫 대면을 하였다. 김구는 이승만이 참석한 행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이승만과 김구'를 쓴 손세일은 "이승만은 경무국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김구에 대해 신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지속됐다"고 했다.[66]
1921년 4월 21일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에 '한국인들은 스스로 통치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은 우리 한반도에서 결코 독립운동을 꺾지 못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분쇄시켰다면, 왜 이미 많은 수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한국에 다시 새로운 부대를 보내 병력을 증강하겠는가? 그러나 그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도 일본은 아직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지 못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경고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위험천만한 프러시아의 군국주의적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원칙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67]
1921년 5월 29일 이승만은 워싱턴 회담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상하이를 떠나 다시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66]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 논란 (1919~1921)[편집]
이승만은 1919년 9월 6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나, 상하이에 와서 자신의 직책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 임시정부 각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외교독립론자들이 독단적으로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이 임시정부 각료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68]
1919년 4월경, 3~4월에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 외교독립론자들이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을 했던 일이 상해 임시 정부 내에 알려지자 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 무장독립론자들은 이승만 등을 맹비난하였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다. 1920년경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인사들을 접견했을 때,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라고 건의하였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69] 국제 연맹 위임통치안은 3.1 운동이 일어난 줄 모른 채 구상하고 실천했던 것인데다가 이미 실패로 끝난 일이니 굳이 철회할 의사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깔끔하게 해명하지 않자 무장독립론자들은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던가 국제 연맹이 아닌 미국에 청원한 것 등으로 오해하여 이승만을 끝까지 비난하였다.[57] 오늘날 이승만 등의 위임통치 청원은 민족의 독립을 외세의 손에 맡겼다는 평가와 1910년대 말 국내외 정세를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다는 평가가 상존한다.[55]
국민대표회의 당시 (1921~1923)[편집]
1921년 이후 임시 정부는 상하이와 국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던 연통제·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 조직망이 파괴되고,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내부 계파 갈등(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거의 활동 불능 상태로 접어들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러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거나(창조론) 개조하자(개조론)는 논의가 등장했다. 이 때 이승만과 김구 등은 창조파, 개조파에 모두 반대하고 임정고수파 입장에 섰다.
1921년 4월 27일 박용만·신채호·신숙 등의 북경군사통일회의(北京軍事統一會議)가 '상해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일체를 불승인하고 1919년 4월 23일 발포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한성정부)를 계승한다'는 통첩을 보내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본격화되었다. 북경군사통일회의 결의문에는 한성정부를 계승한다 하였으나 국제 연맹 위임통치 건을 이유로 이승만과 안창호를 배제한다는 단서를 달았다.[70]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개막되었다.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71] 회의엔 200여 명의 지역 대표들이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존립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크게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의 부진은 임시정부 조직 내 혁명 대중과의 연계장치가 조악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라면서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했으나,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체제보다도 개별적 인사들의 문제이니 인적 쇄신만 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또한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체하면서 그 대중적 권위도 함께 무너질 것을 우려하였다. 양쪽은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72][73]
1923년 4월 28일 창조파 조덕률(趙德律 또는 조덕진趙德津)·김두만(金斗萬) 등 12명의 임시 의정원 의원은 대국쇄신안으로서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74][75][76]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에 의하면 이승만 탄핵안은 가결이 되었으나 그 실행은 일시 보류되었다.[77]
1923년 6월 6일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선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이른바 국민대표회의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달리 정한 것은 국민에 대한 모반이기에 한두 차례 만나 타일러 귀순을 간곡히 권유했는데도 도무지 고집만 부려 방자하게 헌법을 제정한 것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했음이니라.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으로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遺業의 神器를 保衛해야 하는 직권에 의거 소수인이 집회한 6월 2일 이래 모든 不軌행사의 繳銷를 명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각적인 해산을 명한다."[78]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 (1925)[편집]
1919년~1921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1923년 국민대표회의 등을 거치면서 임시정부 내 공산진영이 대부분 이탈하고, 비슷한 시기에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제 임시 정부 제2기(1922년 9월~1924년 4월), 제3기(1924년 4월~1924년 12월), 제4기(1924년 12월~1925년 3월 23일)까지 유임되었다.[79] 그러나 임시 정부의 고질적인 재정난과 임시정부 내 개조파·임정고수파 간의 갈등 등 내부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으며 더 나아가 임시정부 외부의 3부(대한통의부, 의군부, 참의부) 갈등에도 휘말려 민심마저 흉흉하였다. 그러더니 임시정부 내 기호파와 서북파의 갈등이 폭발하여, 서북파 및 흥사단 계열이 이승만의 탄핵안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서 직접 영도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자금난이 해결되지 않는 한 가봤자 소용없다며 거절하였다. 1924년 9월 29일 이승만이 이시영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형(이시영)께서는 여러 번 나더러 동쪽으로 오라고 권하셨습니다. (중략) 만일 몇 만원이 있어 허리에 차고 간다면 모두가 나를 환영하고 감싸 줄 것입니다. 허나 돈이 다하고 주머니가 비면 뿔뿔이 헤어져 별안간 길을 가는 사람 보듯이 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누구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겠습니까?"[80]
1925년 2월 25일 이시영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정국이 처음에는 백성들의 촉망을 많이 받았으나 이제는 박은식을 교사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불과 5, 6인이 논의를 주도하여 분열된 가운데 개헌을 주장하나 정신이 위원제에는 있지 아니하므로 재차 사표를 내게 되었고 혹자는 사직하고 떠난 자도 있습니다. 그런즉 순전히 서북인, 즉 흥사단의 내각이 된 셈입니다. 의회가 개원된 지는 이미 오래이나 의원은 자못 영성하여 모이는 것은 5, 6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기도에서는 최창식(崔昌植)과 여운형만이 출석하고 충청도에서는 오직 하나 郭憲(즉 島山의 숭배자)뿐이며,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희망이 없다 하여 관망하고 나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것이 대략의 실정입니다."[81]
1925년 3월 23일 임시 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의결해 대통령직에서 면직시키고,[82] 곧바로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68] 당시 이승만의 탄핵에 결의한 임시 의정원 의원은 곽헌(郭憲 또는 곽중규郭重奎), 최석순(崔錫淳), 문일민(文一民 또는 文逸民, 文熙錫), 고준택(高俊澤), 강창제(姜昌濟), 강경선(康景善), 나창헌(羅昌憲), 김현구(金玄九), 임득산(林得山), 채원개(蔡元凱) 등 10명이었고, 탄핵심판위원장은 나창헌(羅昌憲)이었고, 위원은 곽헌(郭憲), 채원개(蔡元凱), 김현구(金玄九), 최석순(崔錫淳)이었다.[82]
1925년 4월 1일 박은식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번에 정국이 변경된 것은 태좌(이승만)께서 상해를 떠나 멀리 있으면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몸소 정무를 주간하고 친히 민정을 살피지 못하여 온갖 조치가 그 타당성을
첫댓글 잘읽었습니다.